글/대륙대법제자
[밍후이왕] 나의 엄마는 병원에서 근무를 한다. 엄마는 임신초기 자신도 모르는 사이에 수차례 방사선(x-ray)에 노출됐었다. 의학적으로 방사선에 많이 노출된 태아는 유산되거나 아니면 생존율이 낮다고 한다. 하지만 엄마는 사부님과 대법을 견정히 믿었기 때문에 기적처럼 나를 순산 했다고 한다. 태어나서도 목숨을 잃을 것 같은 큰 병에 걸려 여러 차례 생명의 위험을 겪었지만, 그래도 엄마는 역시 사부님과 대법을 견정히 믿었기 때문에 한 번도 병원에 가거나 약을 먹인 적이 없었고, 매번 기적처럼 살아났다고 했다. 엄마가 연공을 하거나 발정념을 하면 나는 열이 내리면서 바로 기적적으로 병이 나았던 것이다. 현재 나는 170cm의 키(나는 여자)에 신체는 매우 건강하다.
내가 태어난 후 10개월이 지나 99년 ‘7·20’파룬궁(法輪功) 박해가 시작됐다. 부모님은 진실을 밝히려고 유모차를 밀며 시 정부로 갔지만 경찰들에게 납치되어 어떤 학교에 감금됐다. 엄마는 하루 종일 아무것도 먹지 못해 젖이 안 나왔다. 그날 밤 11시 엄마가 강력하게 요구한 뒤에야 겨우 풀려났다. 그 다음날 부모님은 다시 북경으로 진실을 밝히러 떠났지만 바로 연행되어 구치소에 감금됐다. 나는 결국 어쩔 수없이 엄마와 떨어지게 되었고, 그래서 엄마의 젖을 며칠 동안 먹지 못해 크게 울었다고 한다. 그 후부터 나는 엄마와의 이별에 적응해야 했다. 내가 2살 때 부모님은 불법적인 노동교양처분(이하 노교소)을 당했는데, 나 역시 다른 공간의 사악들의 박해를 받아 지능장애처럼 말을 못 하고 대소변을 가리지 못 했다. 아빠는 노교소에서 당한 박해로 불구가 된 몸으로 엄마와 함께 집으로 돌아왔다. 엄마는 힘들었지만 나를 데려다 보살펴야했다. 신기하게도 며칠이 지나자 나는 모든 것이 정상으로 돌아왔다. 예를 들면, 대소변이 정상적으로 되었을 뿐만 아니라, 1개월 만에 ‘홍음(洪吟)’ 중 여러 수의 시를 외웠는데, 엄마가 ‘전법륜(轉法輪)’을 읽다가 멈추면 나는 놀면서 바로 한 구절을 틀리지 않게 외웠다. 나는 엄마가 법 공부를 하는 목소리와 사존의 녹음설법 중에서 자랐다. 어릴 때는 연공은 못 했지만, 저녁에 엄마가 연공을 할 때면 나는 바로 깼다. 그 순간 그 공간은 모두 온통 보라색이었으며, 가끔씩 녹색으로 변해 가득 채워지는 광경을 볼 수 있었다. 색상은 단조로웠지만 매우 아름다웠다.
나는 유치원에서 공연을 할 때는 매번 ‘홍음(洪吟)’을 외웠다. 엄마는 선생님과 다른 학부형들에게 “이해할 수 있나요?”라고 묻자, 선생님은 “할 수 있어요.”라고 답했다. 또 한 번은 아파트 동네에서 공연이 열렸을 때 나는 바이쉐(白雪)가 불렀던 ‘축복’과 ‘파룬따파하오(法輪大法好-파룬따파는 좋습니다)의 노래를 불렀다. 그러자 지역 서기를 포함한 현장사람들의 얼굴이 하얗게 질려 놀라고 있었다. 그러나 나의 노래를 중단 시키지는 않았다. 공연이 끝나자 나는 작은 선물을 들고 집으로 돌아왔다. 삼일 뒤 그들은 엄마를 찾아왔다. 그러나 엄마는 “이것은어린아이의 순수한 소원이니 그냥 받아 달라.”고 말했다.
내가 처음 입학했을 때, 엄마는 선생님에게 “우리는 대법제자”라는 것을 공개 하면서 “믿음 때문에 오해 하거나, 공부에 지장을 주는 일은 없었으면 좋겠습니다.”고 말했다. 학교 측에서는 걱정 안 해도 된다고 말했다. 2005년 소학교에서 강제로 입대를 시킬 때였다. 마침 ‘구평(九評)’이 나온 지 반년 뒤라서 사악의 요소가 많을 때였다. 그러나 나는 입대를 거부했다. 그러자 교장선생님은 이해를 못 했다. 그래서 엄마가 담임선생님과 교장선생님을 찾아가서 진상을 알렸다. 출처를 공개한 편지로 선생님들과 교장선생님에게 우리가 박해를 받은 실제상황과 대법을 연마하여 우리가 얻은 혜택 그리고 왜 독한 맹세를 하면 안 되는지를 설명했다. 사부님 도움과 정념으로 학교 측은 더 이상 입대를 강요하지 않았다.
한번은 선생님이 나에게 물었다. “파룬궁이 좋아요?” 나는 “파룬궁은 좋지만, 공산당은 나빠요.”라고 했다. 그러자 선생님은 당황해하면서 나에게 자리에 앉으라고 했다. 이때 일부 학생들은 나를 향해 엄지손가락을 치켜세웠다. 친구들은 이런 나의 상황을 접하며 나를 이해하고 지지했다. 나는 전교에서 유일하게 입대를 안 한 학생이었다. 하지만 사악한 요소들로 인하여 등교할 때 고학년 규칙위원담당자들(기율부)이 “붉은 넥타이를 안 하면 교문 안으로 들어가지 못하게 하면서 감점을 줬다. 그때마다 나는 ”소선대에 가입하지 않았다.“고 설명을 해도 그들은 내가 거짓말을 한다며 나의 등교를 막았다. 그럴 때마다 선생님이 나오셔서 나에 대해 ”특별한 사정이 있다.”는 설명을 하고나서야 학교 안으로 들어갈 수 있었다. 그 후부터 “입대를 안 한 학생이 있는데, 파룬궁의 아이다.”라는 소문이 학교에 퍼졌다. 그러자 붉은 넥타이 매는 걸 잊고 온 다른 애들이 바로 나인 척 하면서 “입대를 안했다.”며 거짓말을 하고 등교를 하곤 했다. 학교 측은 어쩔 수없이 붉은 넥타이착용을 강요하지 않게 되었다. 그렇게 되어 학생들이 점차 너도나도 할 것 없이 모두 그 넥타이 착용을 안 하기 시작했다. 이처럼 붉은 넥타이 사건으로 재미있는 일들이 많이 발생했는데, 한번은 국기게양식을 할 때 대부분의 학생들이 붉은 넥타이를 착용하지 않았다. 그러자 선생님이 “대열의 동일성을 위해 붉은 넥타이를 착용한 학생들이 붉은 넥타이를 풀라.”고 지시했다. 매번 우리 반이 국기게양담당을 할 때면 사건이 터졌다. 어느 금요일 우리 반이 국기게양훈련을 하면서 국기를 올렸는데, 다 올리고 보니 국기를 거꾸로 올렸던 것이다. 그런데도 누구도 그걸 발견하지 못하여 한참이나 그대로 거꾸로 인 채 게양돼 있었다. 또 한 번은 월요일 오전 규칙대로 국기를 게양했는데, 갑자기 거센 바람이 불면서 두 끈이 휘둘려 국기를 올릴 수가 없었다. 그 모습에 전교생이 모두 깔깔거리며 웃었으며, 선생님들도 웃음을 참느라 애쓰는 모습이 역력했다. 내가 다닌 소학교는 운동대회든 소풍을 가든 영화를 보든 군사훈련을 하든, 그 어떤 활동을 할 때나 모두 붉은 넥타이를 착용하지 않았다. 그러므로 다행스럽게도 수많은 단체기념사진에서 붉은 넥타이라는 악의 물건은 볼 수가 없게 되었다.
소학교 5, 6학년이 되자 소위 사상품덕(정치과목)이라는 수업과목이 생겼는데, 전문적으로 대법을 공격하는 글들이 실려 있었다. 애들은 내가 수련생인 것을 알기에 나의 반응을 기대했다. 나 역시 ‘선생님의 말에 꺾기면 안 좋은 영향을 미칠지도 모른다.’는 생각에 정말 겁이 났다. 하지만 엄마는 “대법제자로서 반드시 법을 실증해야 하며, 선생님과 중생들이 대법에 죄를 짓지 않도록 막아야 한다.”고 말해주셨다. 수업 전 한달 전부터 나는 엄마와 함께 매일 발정념을 중요시 하며, ‘선생님과 학교의 사악한 요소들을 깨끗이 없애고, 선생님을 조종하여 어린아이들의 마음을 더럽히지 못 하게 하라’는 정념을 발했다. 나는 진상자료들을 준비했다. 수업당일 엄마는 학교 주위에서 발정념을 하고, 나는 교실에서 정념을 발했다. 선생님께서 교실에 들어오자, 애들의 시선이 나에게로 집중됐다. 나는 진상자료를 들고 선생님을 바라보면서 ‘강의가 시작되면 일어나서 발언하겠다.’고 마음먹었다. 하지만 선생님은 나를 한번 힐끔 쳐다보고는 아무 말도 안한 채 강의를 시작했다. 나는 진상자료를 돌렸다. 4~5명이 하나를 함께 돌아가며 볼 수 있도록 나누어준 후 또 하나는 선생님 몫으로 남겨뒀다.
선생님께서 ‘분신자살사건’에 대해 강의를 시작하자, 나는 바로 일어나서 “거짓말”이라고 했다. 그러자 선생님이 나에게 계속 말하지 못 하게 하였다. 나는 앉아서 발정념을 했다. 애들의 분위기를 살펴보니, 다들 열심히 진상자료를 보고 있었으며, ‘분신자살사건‘의 이미지를 보고는 웃으면서 “장x는 나쁘다.”고 욕을 했다. 선생님은 나쁜 내용의 강의를 별로 길게 하지 않고, “연습문제를 풀어서 제출하라.”고 했다. 그리고 선생님은 학생들에게 “파룬궁이 진상자료를 나누어 주는 것을 보면 어떻게 해야 하냐?”는 내용의 문제를 내주었다. 대부분의 학생들은 “상관하지 않겠다.”고 했고, 또 일부는 “읽어 보겠다.”고 했다. 다들 진상을 알고 있었으므로 “신고하겠다.”고 답한 애들은 없었던 것 같다. 선생님은 답안지를 거두면서 내가 준 진상자료도 가져갔다. 수업을 일찍 끝냈으므로 남은 시간은 자습시간이었다. 수업이 끝나자 애들은 내게로 몰려와서 대법진상을 물었다. 나는 많은 애들을 상대로 ’(천안문)분신자살사건‘의 진실, 장기적출, 우리가 받은 박해의 진실과 대법이 전 세계에서 알려지고 전해진 것에 대해 말해줬다. 다들 열심히 듣고 있었다. 또 한 번은 어문과 선생님이 사자성어로 대법을 공격하는 구절을 지었다. 그러나 수업이 끝난 후 그 선생님은 “일부러 말한 것이 아니다”라며 나에게 사과를 했다. “나에게 상처를 준 것 같아 후회된다.”는 말까지 했다. 그러나 진정으로 상처를 받은 자는 내가 아니라, 바로 가여운 중생들 자신들이라는 것을 모른다.
나는 초중학교(중학교)에 입학한 후, 중점 고중학교(고등학교-대학진학 고교) 진학을 목표로 전문적인 특별반에 들어갔다. 그러므로 각 과목 담당선생님들은 학생들의 성적을 매우 중요시 했다. 심지어 정치적으로 세뇌시키는 그런 작은 과목까지도 예외는 아니었다. 정치담당학과 선생님은 매 수업 때마다 모든 학생들에게 질문하고 답하게 했다. 당문화 내용을 세뇌하는 것이기 때문에 여러 차례 불러대며 질문에 답하게 했다. 나는 더는 참지 못하고 수업이 끝난 후 선생님을 찾아가서 “정치과목은 배우기 싫다.”고 내 뜻을 밝혔다. 선생님은 놀라면서 “왜 그러느냐?”고 물었다. “저는 파룬따파(法輪大法) 수련생입니다. 대법은 저에게 ‘진선인(眞善忍)’으로 좋은 사람이 되라고 가르쳤고, 저도 정말 많은 혜택을 받았습니다. 그런데 이렇게 좋은 공법이 중국공산당(이하 중공)으로부터 탄압과 박해를 받고 있습니다. 저의 아버지는 착한 사람이지만 2001년 중공의 박해를 받아 반신불수가 되어 여태껏 누워 있을 수밖에 없습니다. 이런 당을 교과서에서는 애호하도록 가르치니, 저는 받아드릴 수가 없습니다. 그러므로 저는 정치학과를 배우지 않겠습니다.”라고 말했다.
선생님은 다 들은 후 “그럼 고등학교 입학시험은 어떻게 할 거냐? 매 학과의 점수가 얼마나 중요한지 너도 알겠지만 정치학과는 10점이나 차지한단다(정치과와 역사과를 합쳐서 10점 만점이고, 불합격이면 3점만 받는다).” 라고 말씀 하셨다. 나는 잠시 생각을 하다가 “그렇다고 점수 땜에 소중한 존엄성을 버릴 수는 없잖습니까!”라고 말했다. 선생님은 나를 보시더니 머리를 끄덕이면서 “알았어. 이것은 너의 선택이야.”라고 말했다. 그 후부터 나는 정치과수업을 들은 적도 없고, 또 선생님은 나에게 그것과 관련된 질문을 하지 않았다. 그런데 정치학과보다는 더욱 역사학과 선생님이 상대하기 어려웠다. 역사선생님은 당문화의 세뇌가 심해서 입만 열면 당문화였다. 한번은 그가 “파룬궁은 x교라”고 말할 때, 내가 바로 막았다. 나는 입학시험 3개월을 앞두고 “나는 역사를 배우지 않겠다.”고 말하자, 선생님은 크게 화를 내시면서 안 좋은 말을 했다(나의 믿음에 관한 것은 아니다). 분명한 것은 배후의 사악한 요소들이 역사선생님을 조종하는 것이다. 나는 바로 발정념을 하며 그녀 배후의 요소들을 없앴다. 그녀가 잠잠해졌다. 그래서 나는 그녀가 허락한 줄 알았는데 그게 아니었다. 모든 걸 나의 담임선생님에게 알렸던 것이다. 담임선생님은 나를 불러 설득하려고 했지만, 나의 주견은 굳건했으므로 결국 담임은 허락해 주셨다.
나의 성적은 보통이었으므로, 선생님은 내가 반드시 노력을 해야만 중점고등학교에 합격할 수 있을 것이라고 하셨다. 그런데 나는 이미 정치와 역사과목에서 이미 7점을 버린 셈이 된 것이다. 하지만 성적이 발표될 때 매우 놀라운 결과가 나타났다. 여러 과목들이 모두 한과목당 평소보다 10점 가까이 높게 나왔다. 나는 내가 원하던 중점고등학교에 입학할 수 있었다. 이 모든 것은 사부님께서 주셨다는 것을 나는 알고 있다. 선생님들에게도 “정치와 역사를 배우지 않아도 중점고등학교에 진학할 수 있다.”는 것을 실증한 것이다.
고등학교에 입학한 후 엄마는 소학교 때처럼 담임선생님에게 진상을 말해주고 “믿음문제로 나의 학교생활에 영향을 미치는 일은 없었으면 좋겠다.”는 뜻을 전했다. 선생님도 이해를 하셨다. 하지만 그동안 나는 법 공부를 소홀히 했다. 버스에서 고학년 학생들에게 션윈영상을 나누어주다가 신고를 당하게 되어 교내사이트에서 소문이 퍼졌다. 그 다음날 선생님이 상담을 하면서 엄마까지 나서게 되어 이 사건을 가라앉게 되었다. 사건이 있은 후 나는 곰곰이 나 자신을 살펴보았다. 쟁투심, 과시심, 일만 추구하는 집착심과 안전을 소홀히 하는 무신경이 있었으며, 내 뱉는 말에 들어있는 강제성 등 자신을 실증하고자 하였을 뿐, 정작 법 공부에는 소홀히 했던 점을 발견했다. 고등학교 선생님들은 대부분 진상을 안다. 한번은 정치과수업에서 종교·신앙에 관한 내용의 수업이 있었는데, 나는 ‘대법을 언급할 수도 있겠구나.’ 하는 생각을 했다. 그러나 수업 전, 담임선생님이 나를 빈교실로 불러 정치수업 대신 1:1로 화학과목을 강의해 주셨다. 수업이 끝나고 나서 같은 반 친구에게 물어보니, “대법얘기는 다들 안 했다.”고 말했다.
초등학교 2학년 기말고시 전인 마지막 금요일(2012년 7월 6일), 나는 평소처럼 집에 돌아와, (난장판이 된 집안을) 보고 깜짝 놀랐다. 옆집에 물어보니 한 무리 경찰관들이 몰려와서 우리 집을 수색했다고 했다. 물건들이 여기저기 흩어져 있었으며, 사부님 법상과 (대법)책들은 온 데 간 데 없었다. 엄마는 납치 되었고, 아빠는 침대위에 누워서 아무 말도 안 했다. 이런 광경을 보고 나는 정말로 속이 상했다. 아빠를 보살펴 줄 사람도 없는데 어떻게 하면 좋을지 몰랐다. 나는 울면서 사부님께 청을 드렸다. 이때 갑자기 외할아버지가 떠올랐다. 나는 바로 외할아버지에게 전화를 걸어 함께 엄마가 납치당해 간 파출소로 갔다. 하지만 사악한 요소들이 너무 많았으므로 나도 두려운 마음이 올라왔다. 악인들의 태도는 거만하였으며, 엄마의 행방도 알려주지 않고 그대로 우리를 쫓아냈다.
다음날, 외할아버지는 나를 데리고 이른 아침부터 공안국 등 여기저기를 다니며 엄마의 소식을 알고자했다. 택시비만 2,~300위안이 들었지만 엄마의 행방을 찾을 수가 없었다. 당직이 근무교대를 할 때 외할아버지가 집안사정을 말했다. “엄마는 좋은 사람이고, 아빠는 엄마가 없으면 안 되는 실정이다.”라고 했다. 그러자 젊은 그 근무자는 마음이 흔들려 엄마의 행방을 알려줬는데, 다른 파출소에 갇혀있다고 했다. 그 파출소를 찾아갔으나, 그곳 사람들은 매우 냉정하게 “엄마는 국가정권과 관련된 사건이라, 풀어주지 못 한다.”고 말했다. 우리는 할 수 없이 그대로 집으로 돌아올 수밖에 없었다. 점심을 먹고 동료수련생을 찾아가서 사건개요를 알려주고, 다른 수련생들과 함께 발정념을 해줄 것을 청했다. 돌아오는 길에 ‘전법륜(轉法輪)’을 청해 모셔갔으며, 문구점에 들러서 다가오는 기말고사 준비도 했다. 그때 외할아버지에게서 전화가 왔는데 “오후에 파출소에 한 번 더 다녀오자”고 하셨다. ‘이번에는 반드시 엄마를 구출해야 한다.’ 우리는 목적지에 도착했다. 외할아버지는 동료수련생과 함께 오셨다. 우리는 가장 사악한 곳에서 발정념을 했다. 그리고 외할아버지는 경찰들과 단판을 지었다. 나는 수련생과 계속 밖에서 발정념을 했다. 한 시간 뒤 엄마는 파출소에서 무사히 나왔으며, 우리는 함께 집으로 돌아왔다. 엄마가 풀려나 파출소를 나왔을 때 나는 곧바로 엄마 품에 안겨 통곡했다. 다시는 엄마를 잃기 싫었다. 겨우 24시간이 안 됐는데도 마치 몇 년을 겪은 듯 싶었다. 다른 공간에서는 반드시 정의와 사악의 큰 싸움이 있었을 것이다.
고등학교 입학시험 일주일 전 집에 돌아와 보니 엄마가 없었다. 나는 당연히 외출하셨을 것으로 여기고 별로 신경을 안 썼다. 하지만 밤 8시경 신비하게도 전화가 걸려왔는데 “엄마가 파출소에 또 납치됐다.”는 것이고, “외할아버지랑 함께 엄마를 구원하러 오라”는 것이었다. 나는 몹시 헷갈렸다. ‘현재 외할아버지는 외지에 있기 때문에 안 되고, 아빠네 가족들은 대법을 지지하는 편이 아니니 큰 영향을 미치지 못할 것 같다.’는 생각이었다. 그래서 ‘차라리 나 혼자라도 가야지.’ 이렇게 생각하며 나는 사부님께 도움을 청했다. 이때 머릿속에서 ‘세인들에게 기회를 줘야지’하는 일념이 떠올랐다. 나는 사부님의 자비 속에서 감격스러운 눈물을 흘렸다. ‘그래 맞아, 기회를 줘야지.’ 나는 눈물을 닦고 고모와 고모부에게 전화를 걸어 “엄마가 납치 됐다.”고 말했다. 의외로 그들은 순순히 나와 함께 가겠다고 했다. 우리 셋은 가장 빠른 시간에 파출소에 도착했다. “나는 누구의 딸인데 당신들이 우리 엄마를 풀어주기를 바라는 마음으로 왔습니다. 지난번에도 말씀드렸지만 우리 아빠가 반신불수이기 때문에 엄마의 보살핌이 필요합니다. 꼭 엄마를 풀어주세요!”라고 말했다. 그들은 나를 보더니 “잠깐만 기다려 봐!”라고 말했다. 우리 셋이 의자에 앉아 기다면서 나는 계속 발정념을 했다. 30분이 지난 후 벌떡 일어서며 ”30분이나 지났는데 언제까지 기다려야 됩니까?”라고 말했다. 하지만 그들은 계속 기다리라고만 했다. 나는 로비에서 시계만 보며 왔다갔다 발걸음을 반복 했다. 15분이 지났다. 나는 “몇 시지요? 우리 아빠에게 하루 종일 식사도 못해 드렸어요. 무슨 일이 생기면 당신들이 책임질 겁니까? 파출소에서 책임지나요?”라고 말했다. 그들은 아무 말도 못했다. 나는 “빨리 우리 엄마를 풀어 주세요!” 그들이 얼굴을 찌푸린 채 아무 말도 못 하는 것으로 보아 아마도 작은 단위인 파출소의 지시로 납치한 것은 아닌 듯했다. 나는 또 시계를 보며 왔다갔다 돌아다녔다. 발정념을 하면서 사부님께 가지를 부탁드렸다. 그 후 30분 뒤에 엄마는 풀려났으며, 나는 엄마의 손을 꽉 잡고 파출소에서 걸어 나왔다.
이 글을 쓰면서 십여 년간에 일어났던 일들을 생각해 쓰자니 시간도 너무 촉박하고 더욱 어려움이 있어서 좀 더 자세하게 묘사할 여유가 없었다. 다만 이 글을 통해 어린 대법제자도 정법에서 자신의 역할을 잘 하도록 하고, 모두들 자신이 수련의 길에서 겪은 일들을 썼으면 할 뿐이다. 예전에 이런 꿈을 꾸었다. 사부님께서는 나에게 이름이 가득 적힌 종이를 주시면서 “영원히 돌아갈 수 없는 어린 대법제자”라고 말씀하셨다. 그 중 내가 아는 이름도 있었다. 그런데 내 이름은 없었다. 그것은 나에 대한 사부님의 고무격려라고 생각한다. 그러므로 그 종이에 이름이 올라 있는 어린 대법제자들이 안타까울 뿐이다. 우리는 어린 대법제자이지만 똑같이 큰 소원을 품고 내려왔다. 그러므로 우리도 그 어떤 핑계를 대며 책임을 회피해서는 안 된다. 우리는 정진하며 사부님을 기쁘게 해드려야 한다.
처음 쓰는 글이라 부족한 점은 수련생들이 시정해주시기 바란다. 다시 한 번 사부님께 허스를 하며 인사를 올립니다!
문장발표: 2015년 4월 16일
문장분류: 수련마당>정법수련마당>어린이제자마당>청소년이 대법을 배우다
원문위치: http://www.minghui.org/mh/articles/2015/4/16/307232.html