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다른 각도에서 수련인의 일념을 보다

글/ 징지(敬紙)

[밍후이왕] 불가 수련 방법이든 도가 수련 방법이든 수련인은 최종 득도한 후 모두 천국세계로 갈 수 있다. 천국세계는 도대체 어떤 모습인가? 직접 체험해 보지 못한 사람은 개념이 없을 것이다. 그러나 일부 비교적 잘 수련한 사람은 천국세계에 간 적이 있고 인간세상에 문자를 남겨 우리에게 천국세계에 대해 대체적인 개념을 만들어주었다.

불가 세계이든 신의 천국이든 도가의 신선이 사는 곳이든 모두 매우 아름답다. 거기에는 고통이 없고 즐거움뿐이며, 인간세상의 교활함이 없고 생명과 생명 사이에 솔직함뿐이며, 인간세상의 빈부 격차가 없고 생명마다 만족할 수 있으며, 인간 세상의 제왕이 없고 오직 자비로운 대각자(大覺者)가 모든 중생을 선하게 대할 뿐 등등. 한마디로 말해서 신의 세계는 매우 아름다워 인간세상과는 비할 수 없다. 그러므로 고대로부터 지금까지 그렇게 많은 사람이 부지런히 수련하고 고생스럽게 연마하는 것이다. 목적은 인간세상의 고통을 버리고 아름다운 미래를 찾기 위한 것이다.

천국 세계는 이처럼 아름다운만큼 그의 법칙이 존재한다. 이런 법칙은 불량한 마음이 없는 사람에 대해서는 아무런 단속을 하지 않아 그는 아무런 구애 없이 자유롭다. 그러나 나쁜 심보가 있는 사람에 대해서는 매우 엄격하고 사정을 봐주지 않는다. 동서양 신화 전설 중에 비슷한 소개가 있다. 서양의 사탄은 원래 천사였는데, 불량한 마음이 생겨 하느님을 반대해 지옥으로 집어넣어져 악마 사탄이 됐다. 동양의 전설에는 더욱 많다. 천봉원수(天蓬元帥)는 항아(嫦娥)를 희롱해 돼지 저팔계로 강등됐다. 금선자(金蟬子)는 불법을 가볍게 봐서 사람으로 강등됐고 ‘구구 팔십일’ 난을 겪어야 부처의 세계로 되돌아갈 수 있었다. 이 신들은 모두 자신의 일념이 자신이 있는 경지의 표준에 부합되지 않아 징벌을 받은 것이다. 만약 수련해 돌아갈 수 있다면 행운이지만, 더욱 많은 신은 수련할 기회가 없어 계속 타락되고 벗어날 수 없었다.

수련의 각도에서 보면 수련자는 수련의 최후 고비도 매우 관건적이다. 이전에 이런 이야기가 있었다. 한 수련인이 최후 원만할 시각, 곧 천국세계로 올라가려고 하는데 그녀 인간세상 어머니가 통곡하며 울부짖으며 그녀의 이름을 불렀다. 그 처량한 목소리는 듣기만 해도 참기 어려울 정도였지만 그녀는 마음을 움직이지 않았고 계속 하늘로 올라갔다. 이후에 그녀의 어머니는 슬퍼서 그녀보고 어머니를 한 번만 돌아보라고 애걸했다. 그녀가 참지 못하고 고개를 돌리자 하늘로 올라가는 길이 바로 끊어졌으며 그녀는 떨어졌다. 다시 보니 이 수련인의 어머니는 바로 그녀 전생의 원수로, 그녀의 어머니로 태어난 것은 바로 수련 최후의 시각에 그녀가 연마해 하늘로 올라가지 못하게 하려는 것이었다.

이 이야기로부터 수련인의 일사일념(一思一念)은 모두 평소 수행 중 잘 연마하고 착실하게 제고해야 한다는 것을 볼 수 있다. 이렇게 해야만 각종 유혹을 막아낼 수 있고 자신의 회귀의 길에 좋은 기초를 닦아놓을 수 있다. 대법 수련 중 우리는 각종 집착심을 제거해야 한다는 것을 알고 있다. 특히 법 중에서 중점적으로 제출한 일부 마음, 쟁투심, 질투심, 환희심, 과시심 등에 대해 마땅히 깨끗하게 제거해야 한다. 많은 경우 어려움에 부딪힐 때 우리가 어떻게 해야 할 줄 모를 때 자신이 부처라면 어떻게 할지 생각해보라, 혹시 답안이 나올지도 모른다.

수련 과정 중 수련인은 각종 유혹에 부딪힐 수 있고, 각종 초범적인 일에 부딪힐 수도 있으며, 어떤 때 마음에 각종 현상이 나타날 수 있는데 이때 가슴에 손을 얹고 자신에게 물어보라. 도대체 무엇을 추구하는가? 매번 대법제자 중 누가 특출하게 표현할 때면 주관 없이 그 사람 말에 맞장구치고 심지어 주와 부를 구분하지 못한다. 생각해보라, 만약 이런 일을 천국세계에 놔두면 어떻게 되겠는가? 이 천국세계에 갑자기 이런 특출한 인물이 나타나면 천국세계 민중은 모두 이 인물을 따라 다니고 자신 천국의 주(主)도 상관하지 않겠는가? 이런 환희심은 천국세계에는 없다. 천국세계의 부처는 모두 신통력이 무궁무진하고 무엇이든 다 할 수 있으나 그가 중생에게 보여주겠는가? 보여주지 않는다. 많은 경우 부처가 신통을 보여주는 목적은 중생이 불법(佛法)에 확고하게 하기 위한 것이지 중생이 부처에게 아첨하게 하기 위한 것이 아니다. 우리가 가부좌할 때 왜 입정(入靜)하고 아무런 생각을 하지 않아야 하는지 생각해보라. 만약 부처의 세계에서 부처의 사상도 우리 속인의 사상처럼 온종일 터무니없는 생각을 하고 확고하지 못하며 흔들리면 어떻게 되겠는가. 부처의 일념이면 물질을 만들어내고 법력(法力)은 커서 일념이면 한 층의 하늘, 일념이면 하나의 우주, 층차가 더욱 높으면 그의 일념으로 더욱 크고 광활한 세계가 만들어지는데 부처의 사상이 조용하지 않는다면 천국세계에게 천지를 뒤엎는 듯한 변화가 초래될 것이고 중생은 정말로 하루라도 조용할 날이 없을 것이다. 이런 일을 허락할 수 있겠는가? 허락할 수 없다! 그러므로 부처의 고요함은 중생이 생존하는 환경을 안정하게 하는데 매우 중요한 작용을 한다.

이상은 개인의 깨달음뿐이고 천국세계의 실제 상황을 대표하지는 않는다. 속인 중에서 우리는 방종해서는 안 되고 끊임없이 사람의 물건을 담담하게 보아야만 원만할 때까지 그것들을 최종적으로 없앨 수 있다.

이상은 오로지 개인체득이다. 정확하지 않는 곳은 지적해 주시기 바란다.

문장발표: 2015년 4월 26일
문장분류: 수련마당>정법수련마당>이성인식
원문위치: http://www.minghui.org/mh/articles/2015/4/26/307936.html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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