글/ 중국 대법제자
[밍후이왕] 최근에 밍후이왕에서 ‘한 신선의 눈으로 본 대법제자’란 문장을 봤는데 단 한 문제에 대해 자신의 견해를 말해보려 한다.
우선 작가 수련생이 문장의 서문 중 “본문은 수련생이 참고하기만 바라고 법을 스승으로 하는 것이 근본이다. 다른 사람이 법을 실증하고 좋은 일을 하는 것은 우리도 거절하지 않는다. 다른 사람이 대법제자의 부족함을 지적했으니 우리는 마땅히 곳곳에서 법을 대조하고 안을 향해 찾고 자신을 바르게 연마하고 아울러 ‘신사신법하지 않는’ 근원을 깊이 파야 한다”라고 매우 명확하게 말했다.
이 점에 대해 매우 찬성한다. 사부님께서는 “문장을 누가 쓴 것이든지 나는 중하게 보지 않으며, 반영한 것이 오직 수련생이 법을 실증하는 데에 유력하기만 하면 나는 고무 격려해 주는데, 심지어 반대자의 문장일지라도 관계없다.”[1]라고 말씀하셨기 때문이다. 그러므로 속인이든, 지상의 신선이든, 천목으로 본 것이든 다른 공간에서 접촉한 생명이든 그들의 말에 대해 모두 이지적으로 대법으로 옳고 그름을 가늠해야 한다고 생각한다.
이 도인의 말은 사부님의 한 단락 법을 생각하게 했다.
“대법제자인 당신은 법에서 깨달아야 한다. 당신은 정정당당한 대법제자이므로 이지적으로 법에 부합하는지 부합하지 않는지 사고해야 한다. 또 어떤 수련생은 늘 공능에 대해 관심이 있다. 내가 일부 수련생들에게 일부 부동한 공간의 정법정황을 보게 했는데, 목적은 수련생들의 법을 실증하는 신심을 강화하고자 한 것이었다. 그러나 어떤 수련생은 아직도 정확하게 대하지 못하고 법에서 수련하지 못하며, 심지어 일이 있으면 공능이 있는 수련생을 찾아가 봐 달라 하고, 본 것으로 어떻게 대법 일을 하고 어떻게 수련할 것인가 하는 지도(指導)로 삼는다. 이것은 매우 위험한 것이다. 누가 정법의 근본을 볼 수 있겠는가? 누가 대법을 수련하는 것을 똑똑히 말할 수 있겠는가? 층차가 극히 낮은 표현은 진상(眞相)의 본질이 아니다. 법에서 수련하지 않고 법에 따라 하지 않는데 그래도 당신이 대법제자인가? 일만 생기면 그에게 어찌된 일인가를 봐 달라고 하는데 무엇을 본단 말인가? 누가 당신의 근본을 보아 낼 수 있는가? 당신의 아이도 그렇게는 안 할 것이다. 나는 말한 적이 있는데, 대법제자 내부적으로도 보지 못하게 할 것이라고. 만약 당신들의 진실한 수련 정황을 볼 수 있다면 그럼 또 무엇을 더 수련하겠는가? 당신에게 알려준다면 무엇이든 다 풀려버린다. 볼 수 없다! 왜냐하면 부동한 층차 중에는 부동한 표현형식이 있기 때문에 어느 한 층차의 표현이든지 그 층차 중의 생명에게는 모두 진리이며, 층층이 모두 진리이다. 그러나 그것은 같은 일이 각각 다른 층차에서 표현된 것일 뿐이고, 가장 근본적인 것은 위에서 드러나는데, 최고 층차에 이르러서야 비로소 최종적인 근본이 드러난다. 당신이 어느 한 층차 중에서 볼 수 있는 것이 대법제자의 근본적인 진상이고 정법의 진상이며 사부의 진상인가? 만일 당신이 오늘 대법제자와 사부의 근본적 진상, 대법의 진상을 볼 수 있다면 당신은 오늘 바로 이 무량한 우주의 주(主)이다! 당신이 모두 다 보았는가? 일체를 모두 한눈에 다 보았는가? 당신은 어찌 그렇게 얼떨떨할 수 있는가? 나는 여러 번 법에서 말한 적이 있는데, 당신들은 어찌하여 꼭 교란을 받으려하는가?”[2]
도인의 말 혹은 문장을 쓴 수련생이 잘못이 있다고 생각하지 않지만 독자로서 마땅히 이 도인이 말한 말을 이지적으로 법에 서서 인식해야 한다고 생각한다. 그가 본 대법제자의 일부 상황은 대법이 일부러 그에게 보여준 것이고 목적은 그의 입을 빌어 대법제자를 점화해주기 위한 것일지도 모른다. 그가 본 것은 대법제자의 진상이 아니고 다만 일부 아직 연마해 없애지 못한 사람의 표현(표면현상)일지도 모른다. 사부님께서 자주 속인의 입을 빌어 대법제자를 점화해주는 것과 같은데 이 속인은 대법제자의 수련은 어떻게 된 일인지를 진짜로 알지 못할 것이고 심지어 했던 말을 자신도 기억하지 못할지도 모른다.
예를 들어 개인 현 단계 층차에서 인식한 것인데 ‘세인의 안일을 추구하는 마음에 끌리는 것’은 표현이고 근본적인 원인은 ‘정법 제자가 무엇이라는 것을 똑똑하게 잘 모르기 때문이다.’ 마찬가지로 ‘신사신법하지 않는 것’은 도인이 대법제자 중 일부 수련생의 표현을 본 것이지만 이 표현들 배후에 큰 원인과 진상은 그는 볼 수 없다.
영화 ‘반지의 제왕(The Lord of the Rings)’을 봤던 사람은 주인공 프로도가 아주 선량한 아이라는 것을 누구나 다 안다. 많은 경우 그가 사념이 생기는 원인은 ‘반지를 운반하는 자’의 역할에 의해 가져다준 방해 때문이다. 다시 말해서 절대반지를 끼면 절대반지를 소멸하는 큰 사명과 이 사명과 같은 크기의 방해 요소를 짊어진 것과 같다는 것이다. 법 중 우리는 다 알고 있다. 대법제자가 짊어진 것은 무량의 중생을 구도하는 사명을 짊어짐에 따라 짊어진 업력과 우주 변이의 요소도 매우 크다는 것이다. 이 상황들은 지상의 신선은 알 수 없을 지도 모른다.
다른 각도에서 본다면 대법제자의 마음은 주변 사람과 환경에 매우 큰 영향을 미친다. 예를 들어 작자 수련생이 말하는 것처럼 ‘절대 호기심, 환희심을 일으키지 말고 꼭 대법의 요구대로 하고 절대 응대하지 말라.’ 만약 대법제자가 법에서 인식하거나 이성적으로 이 도인의 말을 대하지 못한다면 자신의 수련을 교란할 수 있을 뿐만 아니라 이 도인에게도 교란이 될 수 있으며 심지어 그를 위험한 처지에 빠지게 할 수도 있다.
주)[1] 리훙쯔(李洪志) 사부님의 저작: ‘정진요지3-수련생 문장에 대한 평어(評語)’[2] 리훙쯔 사부님의 저작: ‘2003년 정월대보름설법’
문장발표: 2015년 4월 12일
문장분류: 수련마당>정법수련마당>이성인식
원문위치: http://www.minghui.org/mh/articles/2015/4/12/307410.html