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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4년의 반(反)박해, 사악을 제거하다(중)

[밍후이왕] (전편에 이어)

2009년

2009년 정사(正邪) 대결이 다시 한 번 정의 방향으로 명확히 기울었다.

그해 11월 스페인 국가법원에서 집단학살죄와 고문죄에 대해 장쩌민(江澤民), 뤄간(羅幹), 보시라이(薄熙來), 자칭린(賈慶林), 우관정(吳官正) 등 5명 등의 중국공산당사당 고위관리에게 4~6주 내에 대응하라고 명령했다.

12월 17일 아르헨티나 연방법원 제9번째 판사 옥타비오 라마드리드(Octavio Araozde Lamadrid)는 역사적 심판을 했다. 장쩌민, 뤄간 등은 파룬궁을 박해해 반인류 범죄를 범했으므로 아르헨티나 연방 경찰국 국제형사에게 중국공산당사당 관리 두 사람을 체포하라고 명령했다.

그해 광둥성 노동교양소 국장 당위 서기 스훙후이(施紅輝)는 미국에서 고소를 당했고 전 허난성 서기 쉬광춘(徐光春)은 대만에서 고소됐다.

2009년 대량의 중국 민중이 공개적으로 박해 반대를 지지했다. 아래는 일부 사례다.

▼2009년, 중국대륙 11명 변호사와 127명 파룬궁수련생 가족이 연대서명해 허베이성 스자좡시 중급법원이 파룬궁수련생 사건에 개입한데 대해 항의했다.

▼2009년 2월, 랴오닝성 푸순(撫順)시에서 민중이 파룬궁수련생을 위해 공정함을 요구한 연대서명 사건은 저우융캉(周永康), 뤄간 등 두목들에게 충격을 주었다. 당초 집이 랴오닝성 푸순시 칭위안(淸原)현 잉거먼진(英額門鎭)에 거주하고 있는 쉬다웨이(徐大爲)가 감옥에서 8년 박해를 받다가 출옥했다. 가족이 병원에 13일 입원시킨 후 억울하게 사망했는데 겨우 36세였다. 지방의 순박한 마을사람은 의분에 차서 우선 두 대의 차에 탈만한 사람을 조직해 둥링(東陵) 감옥에 가서 공정함을 호소했다. 감옥에서 어떤 회답도 없는 상황에서 5명 마을 사람과 376명은 감옥의 박해를 폭로하는 호소 편지에 서명했다. 이번 연대서명 사건이 발생한 후 저우융캉, 뤄간 등 중국공산당 고위층은 큰 충격을 받았다. 지방 공안과 사법기관에게 많은 사람을 동원해 마을에 가서 협박, 조사하게 하고 연대서명 발기인을 찾으라고 했으며 쉬다웨이 동생에게 수갑을 채우고 쉬다웨이 아내의 행방을 조사했다. 이로 인해 쉬다웨이의 장모 일가족이 괴롭힘을 당해 불안에 떨었다. 하지만 정의로운 마을사람들은 후회하지 않았다.

 

376명 마을 사람이 서명한 호소 편지(서명 사진)

2009년 6월 다롄(大連) 좡허(莊河)시 광밍산(光明山) 파룬궁수련생 정더차이(鄭德才)가 지방 공안에 납치됐다. 다음 해 3월에 마을 80여 가구가 연대서명 편지를 써서 공안국에 즉시 정더차이를 석방할 것을 요구했다.

▼2009년 7월 21일, 쓰촨(四川)성 피(郫)현 신민창진(新民場鎭) 파룬궁수련생 구화이빙(谷懷兵)의 60여명 친척과 친구가 연합해 공개편지를 쓰고 박해한 구화이빙을 구출했다.

▼2009년 8월, 56명이 연대서명해 해외에서 ‘헤이룽장 파룬궁 가족단체가 중국공산당이 파룬궁을 박해하는 고소장을 발표’하고 함께 고소장을 UN인권조직, 파룬궁 박해진상연합조사단(CIPFG), 파룬궁박해 국제조직조사단, 중국인민대표대회, 사법부, 공안부, 최고법원, 헤이룽장성 등 관련조직에 보내고 정의의 힘이 파룬궁을 성원하기를 호소했다.

▼2009년 9월부터 11월 사이 랴오닝 선양(沈陽)시 선허(沈河)구 파룬궁수련생 황샤오제(黃曉傑), 마궈치(馬國啟), 궈훙옌(郭鴻雁), 왕위춘(王玉春), 펑다푸(馮達夫) 등이 불법 납치되고 불법판결에 직면했다. 왕위춘 가족은 정의로운 변호사를 청해 변호했고 왕위촌의 직장 상사와 100명 동료는 왕위춘이 불법적으로 붙잡힌 소식을 얻고 연대서명해 선허구 공안국에서 무조건 사람을 석방할 것을 요구하고 자체적으로 500위안을 지원해 선허구 구치소에 보냈다. 정의의 힘의 지지 하에 왕위춘은 ‘보증인을 세우고 조사를 기다릴 것’이 허용됐고 선허구 법원은 변호사에게 안건이 취소했다고 통지했다. 이것은 중국공산당이 법정에 대한 통제력이 이미 이전보다 못한 것을 말하는데 ‘진선인(眞善忍)’의 정기는 점차 드높아졌다.

2010년

2010년 반박해의 정기(正氣)는 한층 더 상승했다. 중국공산당의 악의 힘은 더욱 쇠퇴했다.

2010년 중국공산당이 홍콩 정부를 조종해 션윈 홍콩 공연을 방해한 사건에 대해 파룬궁 측이 고소하자 법원에서는 홍콩 정부측에 위법 판결을 내렸다.

2010년 국내 반박해 형세는 한층 호전됐다. 아래는 몇 가지 사례다.

▼2010년 5월 24일 윈난쿤밍(雲南昆明) 중급법원 형사심판 제1심판에서 둥촨(東川)구 3명의 파룬궁수련생 장메이란(張美蘭), 펑쑤펀(彭素芬), 류룽(劉容)을 불법 심문을 했다. 심문과정에서 3명의 파룬궁수련생의 정기는 전체 법정, 검사를 놀라게 했고 판사도 말문이 막혀 마지막에 전부 ‘보증인을 세우고 조사를 기다리라’는 허가를 받고 가족과 함께 돌아갔다.

▼2010년 4월에 톈진(天津) 파룬궁수련생 황리차오(黃禮喬)의 불법 노동기간, 그의 직장인 톈진강철그룹은 불법적으로 노동계약을 해제해 기소됐다. 톈진 둥리(東麗)법원은 2010년 6월 21일 이 안건을 접수하고 2011년 6월 13일 개정해 처리했다. 이것은 큰 돌파이며 중국공산당 사악의 기세가 허약해진 것을 설명한다.

▼2010년 12월 헤이룽장(黑龍江)성 푸진(富錦)시 상제지(上街基)향 중성(忠勝)촌 파룬궁수련생 위안위룽(袁玉龍)과 아들 위안서우장(袁守江), 며느리 궁진펀(龔金芬) 등 세 사람은 중국공산당 경찰에게 불법 납치됐다. 마을 간부를 포함해 마을의 95% 주민이 연대서명해 세 사람이 고상한 좋은 사람이라고 보증했고 공안국에서 즉시 사람을 석방할 것을 요구했다. 마을 주민은 용감히 공정한 말을 했을 뿐만 아니라 연대서신에 서명하고 정중하게 그 위에다 지장도 찍었다.

2011년

2011년 국내에서 고소하는 현상이 많아지고 여러 정도의 성과가 있었다. 같은 시기 진상을 알고 있는 민중이 잇달아 파룬궁을 성원했고 서명, 지장, 파룬궁수련생을 구출하는 사건이 나타났다. 아래는 일부 사례다.

▼파룬궁수련생이 고소, 법원이 입안

2011년 12월 란저우(蘭州)시 파룬궁수련생 진이쥔(金怡均, 여)은 불법적으로 1년형을 선고 받았다. 진이쥔은 가족을 위탁해 간쑤(甘肅)성 노동교양원위원회에 재심을 제기했는데 원심의 불법 판결을 유지한다고 회답했다. 진이쥔과 가족은 란저우시 청관(城關) 법원에 행정기소장을 올려 법에 따라 불법 노동교양 선고 취소를 요구했다. 법원은 진이쥔의 기소에 입안 심사를 결정했다.

▼파룬궁수련생이 고소해 흉악한 경찰이 처분 당해

2011년 9월에 허베이(河北)성 지둥(冀東) 감옥에서 소식이 전해 왔는데 억울하게 감옥살이를 한 파룬궁수련생이 류융왕(劉永旺)이 불법 경찰을 고소했다. 감옥 경찰 정야쥔(鄭亞軍)이 자신을 학대하고 기타 죄수를 학대하는 위법행위를 폭로했다. 지둥감옥 검찰부서에서 류융왕에게 통지했다. 감옥에서 흉악한 경찰 정야쥔에게 처분을 주기로 결정했다는 것이다. 류융왕의 대리 변호사는 지둥감옥에 전화를 걸어 묻자 상대방은 같은 답변을 했다. 듣는 말에 의하면 흉악한 경찰 정야쥔은 직책에서 전임됐다. 비록 정야쥔의 처분은 아직 많이 부족하지만 사악한 자는 필경 고소의 두려움에 떨게 됐다.

▼쑤단(蘇丹)이 베이징 여자 노동교양소에 학대당하자 가족이 고소해 입안

베이징 순이(順義)구 파룬궁수련생 쑤단은 2011년 3월 29일 불법 노동교양을 당하고 또 베이징 여자노동교양소로 이전됐다. 두 번이나 야만적인 학대로 10여일 입원 치료하게 된 상황에서 쑤단은 노동교양소에서 4번이나 혹형에 시달림을 받았다. 가족이 끊임없이 노력으로 쑤단을 박해한 흉악한 경찰이 기소돼 재판을 받았다.

▼런쥐링(任菊玲)의 남편은 불법 경찰의 납치를 고소하고 법원이 입안

2011년 12월 9일 라이양(萊陽)시 파룬궁수련생 런쥐링은 룽청(榮成)시 백화점 입구에서 지방의 파출소 사복 경찰에게 납치되고 집을 수색 당했다. 런쥐링은 1년 반 불법노동교양을 선고받았는데 최후에 신체 불합격으로 노동교양이 거부됐다. 런쥐링의 남편은 런보쉐는 기분이 상해 얼마 되지 않는 적금을 가지고 베이징에 가서 정의로운 변호사를 청해 룽청시 610 악인 싱젠핑(邢建萍)과 몇몇 악한 일을 한 자를 법정에 고발했다. 며칠 후 법원에서 입안했다.

▼후난(湖南) 류팡핑(劉仿平)은 세뇌반에 납치되자 직장 상사가 610 비난

2011년 10월 10일 후난 샹탄(湘潭)현 스탄진 610과 파출소 흉악한 경찰은 파룬궁수련생 류팡핑의 직장에 뛰어들어 회사에게 사람을 데려가겠다고 했다. 직장 상사는 엄하게 비난했다. “그녀는 우리 여기에서 가장 표현이 좋은 직원이고 우리 여기는 한 사람도 없으면 안 됩니다. 당신들은 그녀를 데려갈 수 없습니다.” 악인은 마지못해 돌아갔다. 이튿날, 악인은 정법위원회 문서를 가져와 회사에 압력을 가하며 강제로 류팡핑을 데려갔다. 그리고 15일 후 석방한다고 했다. 직장 상사는 가족에게 유감스럽다고 말하며 “15일 후 돌아온 후 계속 일하면 봉급을 계속 주기로 했습니다”라고 했다.

▼하얼빈(哈爾濱) 676명 민중이 서명해 당국에 석방 호소

2011년 9월 20일 하얼빈 아청(阿城)구 파룬궁수련생 조위안(趙玉安), 왕진위(王金玉), 장바오성(張寶盛), 청바오잉(程寶英) 등이 납치돼 불법 판결을 받았다. 가족들은 이들을 구하기 위해 도처에 돌아다니며 지방 군중에게 서명을 호소해 지방 군중이 정의로운 지지를 얻었는데 서명한 사람은 676명이다.

 

 


 

▼산둥성 수백 명 마을 사람이 서명해 류위징(劉玉晶) 석방 호소

2011년 5월 6일, 산둥(山東)성 지난(濟南)시 파룬궁수련생 류위징은 지난시 중구 법원에서 불법 판결을 받았다. 류위징의 남편 톈펑위(田鳳玉)는 5월 25일에 지난시 중구법원 입안정(立案庭)에 정식으로 ‘행정 고소장’을 제출했다. 지난시 공안국시 중구 경찰이 류위징을 납치하고 집을 수색하며 모함한 위법 범죄 행위를 고발했다. 하지만 검찰원은 ‘내부 문서’ 구실로 접수를 거절했다 수백 명 시골 사람은 좋은 사람 류위징을 보호하기 위해 서명했다.

수백 명 마을 주민이 류위징 좋은 사람을 보호하기 위해 서명

▼전체 마을 사람이 서명해 류지천(劉志臣) 석방을 호소

2011년 6월 20일, 지린(吉林)시 펑만(豐滿)구 왕치진 전체 마을 주민은 펑만 법원이 파룬궁수련생 류지천을 불법 재판하는 알고 연대서명해 ‘지린시 각급 정부와 관련부서’에 편지를 써 좋은 사람 류지천을 석방할 것을 요구했다.

▼랴오닝 차오양(朝陽)지역 마을 단체가 서명해 선량한 노동자 장궈샹(張國祥)을 구출

2011년 6월 29일 랴오닝 차오양 지역에서 다롄(大連) 진저우(金州) 지역에서 잡역부를 하던 파룬궁수련자 장궈샹은 신분이 분명하지 않는 사람에게 일하는 곳에서 파출소에 납치됐다. 장궈샹은 사람이 듬직하고 성실해 차오양 마을 사람들은 경찰이 그를 데려간 것을 알고 잇달아 서명해 그를 석방할 것을 요구했다. 이들은 장궈샹의 가정이 확실히 어려우며 그가 가정의 유일한 노동력과 보루라고 표시하며 파출소에게 즉시 사람을 석방하고 수색해 간 6천 위안을 반납하라고 했다.

▼랴오닝 푸순(撫順)시 백성은 글을 올려 정훙잉(鄭洪英)을 구출

2011년 9월 6일, 68세 랴오닝성 푸순시 칭위안(淸原)현 난커우첸(南口前)진 겅가바오(耿家堡) 사람 정훙잉이 다른 사람에게 파룬궁 진상을 알리다가 경찰에 붙잡혔다. 이후 불법 재판을 받았다. 정훙잉이 거주하는 마을 사람들은 연대서명해 “좋은 사람은 감옥 있으면 안 되고 우리 백성은 정의 양심을 호소한다. 우리 마을 사람 정훙잉이 돌아오게 해달라”라고 호소했다.

▼친웨밍(秦月明)이 박해로 사망하자 가족은 고소하고 많은 민중이 지지

헤이룽장(黑龍江)성 이춘(伊春)시 진산(金山)마을 파룬궁수련생 친웨밍이 2011년 2월 26일 자무쓰(佳木斯] 감옥에서 박해로 사망하자 친웨밍의 가족 10명, 아내를 포함해 부모, 자녀와 삼촌이 자무쓰 허장(合江) 검찰원에 고소했다. 자무쓰 감옥 합동 훈련대장 위이펑(于義楓), 부교도원 선칭신(申慶新), 중대장 창쉬량(長徐亮), 경찰 두염(杜岩), 지도원 류묘선(劉淼森) 등을 독직죄, 학대죄, 고의살인죄 등 범죄 행위로 고소했다. 고소인은 친웨밍의 사망 원인에 대해 강한 의문을 제기하고 자무쓰 허장 검찰원에서 입안 조사하고 모든 위법한 죄인과 범죄 부서는 법에 따라 징벌해 달라고 했다. 이 고소장을 복사돼 10여개 관련 부서에 여러 차례 제출됐다.

친웨밍의 가족은 고소장을 올린 후 매일 허장 검찰원에 가서 언제 입안하는지 물었다. 하지만 자무쓰 검찰원은 고소장을 받고 시종 피고소인에 대해 조사하거나 입안하지 않았다.

4월 19일 친웨밍의 가족은 자무쓰 감옥에 ‘형사국제배상신청서’를 제출했다. 모든 접촉한 경찰은 자세히 ‘형사국제배상신청서를 보고 신청서 구절마다 따져 보았고 조심스럽게 보았다. 하지만 각종 이유로 거절하고 감히 ’형사국가배상신청서‘를 접수하지 못했다. 줄곧 친웨밍 가족이 여러 번 감옥장 창예펑과 전화 통화하자 감옥 정치과(政科)에서 할 수 없이 법률문서를 받았다. 하지만 자무쓰 감옥의 전용 도장과 날짜를 기록해 서면 증거로 남기지 못했다.

4월 20일 친웨밍의 가족은 자무쓰시 인민검찰원에 허장지역 검찰원이 관리들이 결탁한다는 소송 편지를 보냈다. 자무쓰시 검찰원 수이창칭(隋長靑)은 암암리에 허장 검찰원과 상의한 후 가족을 무지막지하게 대했으나 가족이 그를 고소하겠다고 하자 그의 태도는 좀 약해졌다. 마지막에 그는 고소장을 상부에 올리겠다고 동의했다. 하지만 서면 서명을 해주지는 않았다.

친웨밍 가족은 여러번 자무쓰시 검찰원 등 관련부서에 가서 입안을 요구했지만 결과가 없었고 여러 번 자무쓰 청원사무실[信訪辦], 인민대표대회, 정법위원회 등 부서에 호소해도 소용이 없었다. 친웨밍의 가족은 고소장을 헤이룽장성 일급 국가기관(검찰원, 인민대표대회 등)에 제출했고 줄곧 중앙일급(국무원, 인민대표대회 등을 포함)에도 제출했다.

친웨밍의 가족이 이런 정부 부서와 접촉하는 과정에서 많은 공무원들이 천웨밍 일가족의 처지를 알고 어느 정도 동정을 보냈다. 감옥에서 이런 인명피해가 난 것은 확실히 위법행위라고 말했다. 많은 사람은 가족에게 상부 주관부문에 소송하라고 건의했다.

가족이 힘들게 층층이 청원하자 헤이룽장성 고급법원은 9월 5일에 입안하고 가족에게 얼마 후 개정한다고 알려주었다. 친웨밍의 가족은 끝까지 고소하고 친웨밍에게 공정함을 찾아주겠다고 했다.

친웨밍의 억울한 사건은 민중의 분노를 일으켰다. 헤이룽장 이춘시 1만 5천여 명 민중이 안면이 없는 파룬궁수련생 친웨밍을 위해 걸어나와 아버지를 도와 억울함을 호소하는 큰딸 친룽첸(秦榮倩)을 지지하고 그녀의 ‘억울한 누명을 벗겨달라는 고소장’에 서명하고 지장을 찍었다.

 

                                   黑龙江伊春市有超过一万五千民众在秦荣倩的《喊冤昭雪书》上签名并按上大红手印

                                   黑龙江伊春市有超过一万五千民众在秦荣倩的《喊冤昭雪书》上签名并按上大红手印

헤이룽장시 이춘시 1만 5천여 명이 친룽쳰의 ‘억울한 누명을 벗겨달라는 고소장’에 서명하고 지장을 찍음

뒷이야기(2013년): 꽃다발, 박수소리, 폭죽으로 모녀를 환영

헤이룽장성 자무쓰(佳木斯) 감옥에서 박해로 사망한 파룬궁수련생 친웨밍의 아내 왕슈칭(王秀靑)과 딸 친하이룽(秦海龍)은 하얼빈 첸진(前進) 노동교양소에서 1년 반 노동교양을 당했다. 2013년 4월 13일에 불법 노동교양이 만기됐다. 그녀들을 맞이하러 간 사람은 친웨밍의 큰딸 친룽첸 외에도 또 수많은 파룬궁수련생과 세인들이었다. 파룬궁수련생을 지지하는 한 세인은 당시 상황을 이렇게 전했다.

“첸진 노동교양소에 거의 도착할 무렵, 길에는 두세 사람씩 짝을 지어 많은 사람들이 노동교양소 쪽으로 가고 있었습니다. 저는 적당한 곳에 차를 세워놓고 보니 갈수록 많은 파룬궁수련생이 모두 길가에 서서 친웨밍 가족이 무사히 돌아오기를 기다리고 있었습니다. 8시 후 첸첸이 꽃다발 두 묶음을 들고 노동교양소 안으로 들어가는 것이 보였습니다. 이 광경을 보면서 저는 속으로 탄복하면서도 한편으로는 근심과 걱정이 들기도 했습니다.”

“바로 이때, 차 세 대가 꼬리를 물고 달려왔는데 그 중 한 대는 파출소 경찰차였고 먼저 와 있는 차까지 합치면 모두 다섯 대였습니다. 그들의 목적은 친웨밍의 가족을 데려다 계속 박해하려는 것임을 알 수 있었습니다. 9시 반이 됐을 때 친웨밍의 가족이 뜰안 건물 앞에 나타나자 경찰은 그녀들을 강제로 끌어가려 했습니다. 이 때 꽃을 든 파룬궁수련생이 노동교양소 안으로 들어가자 사람들도 따라서 함께 들어갔습니다. 사람들은 그녀들 세 사람의 팔을 잡고 함께 노동교양소 대문을 나섰습니다. 사람들이 나오기를 기다리던 그 순간, 모두들 열렬히 박수쳤고 또 그들에게 사진을 찍어주는 사람도 있었는데 역사로 하여금 이 한 시각을 목격하게 했습니다.”

“이 때 누군가 폭죽을 터뜨렸습니다. 이때 저는 이 장면에 감동해 흐르는 눈물을 걷잡을 수 없었습니다. 마음이 격동해 당시 말을 할 수 없었지요. 바로 이때 경찰차와 기타 차량도 뜰안에서 나왔어요. 이를 보고 나는 차를 직접 그들 앞까지 몰고 가서 가로 막고 있다가 친웨밍 가족이 안전하게 떠난 후에야 그들의 뒤를 따랐습니다. 이 때 그 경찰차는 줄곧 제 뒤를 따랐어요. 저는 조금도 두렵거나 긴장하지 않았어요. 얼마쯤 달린 후 경찰차도 더는 따라오지 않았지요.”

▼‘한 젊은 부부의 괴로운 경험’이 수천 명이 서명해 구출하는 것을 야기

본 톈진(天津) 제3탐지대에 있던 공정사 저우샹양(周向陽)는 파룬궁 수련을 견지하다 2011년 3월 5일에 다시 톈진 강베이(港北)에 납치당했다. 감옥 경찰은 전기충격, 지묘(地錨: 땅에 수갑을 채우는 고문의 일종) 등을 잔혹한 고문으로 박해했다.

저우샹양과 아내 리산산의 공개서신 ‘한 젊은 부부의 괴로운 경험: 7년 기다림, 9년 억울한 감옥살이’는 눈물을 흐르게 한다. 해외 다섯 언론매체가 이 사실을 보도했다. 공개서신에 대해 저우샹양의 고향에서도 반응이 크다. 리산산은 선량하고 강인하며 중화여성의 전통적인 미덕을 지니고 있어서 많은 고향 사람을 감동시켰다. 창리(昌黎)현 10여개 향과 진의 2천여 명이 연대서명해 지지했다.

한 중년 남자가 말했다. “샹양 새댁이 정말로 잘 썼어요. 나도 일을 마치고 집에 돌아가 쓰겠어요. 다 외울 수 있어요. 우리 온 가족은 서명해 샹양을 구하는데 서명했어요!”

마을의 50여세 되는 남자가 말했다. “나는 ‘한 젊은 부부의 괴로운 경험’을 보고 눈물을 흘렸어요. 이때까지 나는 눈물을 흘린 적이 없습니다. 정말인가? 정말이면 공산당은 맞지 않습니다. 살인범도 사형 집행을 기다려야 하는데 좋은 사람에게 이렇게 큰 형벌을 가하다니.” 많은 민중은 감동했고 온 가족이 서명을 했다.

중국공산당 당국은 민심이 두려워 탕산국가보안은 2011년 10월 29일 다시 천지마트에서 리산산을 강제로 데려갔다. 듣는 말에 이미 2년 노동교양을 선고 받았다고 한다. 많은 탕산민중은 리산산의 친척이 탕산 정부부서에 쓴 호소편지 ‘더는 우리 탕산의 딸을 박해하는데 참여하지 말자’를 보고 친황다오에서 연대서명해 리산산의 남편 저우샹양을 구명하는 것처럼 연대서명해 리산산을 구명했다. 또 일부 파룬궁 친구와 그의 친구들이 리산산의 이야기를 보고 감동해 대부분 연대서명에 참가했다. 528명 민중이 리산산을 석방할 것을 요구했다.

뒷이야기(2013년) “산산, 나와라!”

2013년 11월 8일은 ‘탕산의 딸’이라 불리는 리산산(李珊珊)의 불법 노동교양 만기일이다. 탕산시에서 온 경찰 4명이 원래 산산을 데려가려 했다. 하지만 산산을 맞으러 온 백여 명 친구와 파룬궁수련생을 마주한 그들의 얼굴은 저마다 당황한 기색이 역력했다. 중국공산당의 사악한 규정에 따르면 무릇 감옥이나 노동교양소에서 파룬궁 신앙이 확고해 중국공산당에 타협하지 않은 파룬궁수련생은 현지 정부에서 세뇌반으로 재차 납치해 박해를 연속 진행하도록 되어 있다. 하지만 2백여 명 친구와 파룬궁수련생은 아침 일찍부터 허베이성 여자 노동교양소 문 앞에 버티고 서서 산산이 나오면 맞이할 준비를 하고 있었다.

이런 상황은 파룬궁 박해 초기 몇 년 동안은 아예 불가능한 일이었다. 왜냐하면 중국공산당이 파룬궁을 박해하는데 아무런 근거도 없었으므로 파룬궁수련생을 보기만 하면 다 광적으로 체포했기 때문이다. 중국공산당에 세뇌되어 자아를 잃은 사람이라면 오늘날에 와서도 이런 상황은 여전히 믿기 어려울 것이다. 이것은 집회가 아닌가? 노동교양소 경찰은 여전히 사악한 수단을 써서 위협하면서 모임을 촬영했다. 하지만 흉금이 넓은 파룬궁수련생과 산산의 친구들은 그들을 두려워하지 않았고 물러서지 않았으며 사악과 마주했다.

오전 8시 55분, 리산산이 철문을 나서기 전에 여러 명 경찰이 그녀를 둘러싸고 시간을 지연시키려 시도했다. 이때 문밖에서 백여 명 사람이 함께 외치는 소리가 울려 퍼졌다. “산산, 나와라! 산산 나와라!” 한 친구는 아름다운 연꽃 한 묶음을 산산 앞에 내밀었다. 순간, 산산은 뜨거운 눈물을 흘렸다. 사람들에게 빽빽이 둘러싸인 산산은 가족과 함께 차를 타고 떠났다. 멍하니 서있던 경찰은 풀이 죽고 주눅이 들었으며 의기소침해 말없이 재빨리 자리를 떴다.

문장발표: 2013년 12월 23일
문장분류: 대륙소식>대륙조합소식
원문위치: http://www.minghui.org/mh/articles/2013/12/23/284335.html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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