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리훙쯔(李洪志) 사존께서 광저우에서 5차례 공을 전하고 법을 전하신 것을 회상(5)

글/ 중국 대법제자

[밍후이왕] (전편에 이어서)

제5절: 사존의 제5차 광저우 설법

사존의 제4회 광저우 학습반 이후, 광저우 지역에서는 갈수록 많은 사람이 파룬궁을 수련하기 시작했다. 연말에 성(省) 기공협회에서는 이미 제5회 학습반 표를 팔았다. 원래 그들이 임대하려 한 강당은 1천여 명 좌석의 일반적인 강당이었다. 하지만 신청 인원이 이미 4천 명을 넘었다. 성 기공협회는 사존의 조언을 바랐다. 사존께서는 ‘높은 기준’을 요구하셨다. ‘높은 기준’이란 접대 수준이 높고, 장소 수준이 높으며, 수용 인원이 많으며, 공법 전파 기술 수준이 높은 등이다. 기공협회는 원래 돈벌이를 강조하고 밑지는 일을 하지 않으므로 ‘높은 기준’으로 제5회 파룬궁 학습반을 개최하는데 대해 생각해보지 않았다. 사업의 위험도를 평가하기 위해 성 기공협회는 1994년 9월에 광저우 보도소 수련생을 요청해 그들의 회의에 참가시켰다. 광저우 보도소에서는 당시 7명 보도원이 회의에 참석했다, 회의에서 기공협회의 토론 분위기는 아주 암울했고 누구도 감히 결정을 내리지 못했다. 이때 광저우 보도소의 한 책임자가 대표 발언을 해서 유리한 조건을 열거했고 광저우 보도소에서 2천장을 대리구매 하겠다고 밝혔다. 광저우 보도소의 낙관적 태도와 지지에 근거해 성 기공협회는 사존의 제5회 광저우 학습반을 ‘높은 기준’으로 개최하기로 결정했다. 결과적으로 제5회 광저우 학습반은 거대한 성공을 거뒀다.

1994년 12월 21일부터 29일까지 광저우 체육관(6천 명 수용)에서 광저우 지역 제5회 파룬궁 학습반이 열렸다. 국내외로부터 5천여 명이 왔는데 그 중 많게는 외지에서 온 노수련생이었다. 장내에 다 들어갈 수 없어 분회장을 열었고 수백 명 수련생이 체육관 밖에서 강의를 들었다. 이는 사존께서 하신 국내에서의 마지막 학습반이었다. 이번 차례를 마치시고 사존께서는 해외로 법을 전하러 가실 예정이었다.

1994年12月李洪志师父在广州讲法

1994년 12월 리훙쯔 사부님의 광저우 설법

한 수련생이 회상했다. “우리는 사존께서 설법하시기 전에 공원에서 수련생을 만나신다는 소식을 들은 후 즉시 그리로 달려갔습니다. 공원에 이르자 사부님의 용모는 젊었고 깨끗한 옷차림에 웃음 띤 얼굴은 상냥하고 친절해서 뭇사람과는 다르다는 것이 한 눈에 알 수 있었습니다. 사존께서는 여러 사람에게 명함을 나눠주셨습니다. 저는 나이가 많고 굼떠서 받지 못해 말씀드렸다. ‘우리는 후난에서 왔는데 아직 명함을 받지 못했습니다.’ 사존께서는 즉시 몇 장을 저에게 주셨습니다. 광저우에 가서 법을 얻은 우리 모두는 사존과의 만남에서 유쾌함을 느꼈고 시간이 나는 듯 지나는 것을 느꼈습니다.”

뭇신이 현장에 있다

제5회 학습반이 열린 첫날, 시작 전에 한 수련생이 일찍 사존의 방에 가보니 사존께서 눈을 감고 가부좌하고 계시기에 감히 말씀을 드리지 못하고 한쪽에서 기다렸다. 얼마 후에 사존께서 화장실에 들어가시더니 거의 반시간이 돼도 나오지 않으셨다. 수련생은 곁에 있는 사존의 딸에게 물었다. 모두들 다 사부님께서 화장실에 들어가신 줄로 알았는데 화장실에 가보니 문은 열려 있었지만 안에는 아무도 없었다. 모두들 무척 의아해 하고 있는데 사존께서 다시 화장실에서 나오시는 것이었다.

얼마 후에 사존께서는 광저우 보도소 보도원에게 말씀하셨다. “오늘은 누가 와서 법을 듣겠는 지는 다른 공간에서 모두 배치가 있습니다. 좌석이 얼마나 되고 어느 자리에 어느 신이 앉으며 어느 보살이 오며 어느 위치에 앉는지 모두 배치가 있습니다.”

사존께서 첫 날 강의를 마치자 수련생들은 사존께서 법을 전하심이 몹시 힘들고 고생하신다는 것을 느꼈다. 사존께서는 저녁밥을 아주 적게 드셨는데 왜냐하면 너무 바쁘셨기 때문이었다. 그래서 수련생은 이후에는 좀 늦게 가서 사부님을 맞이해 식사를 대접했다.

한 수련생은 회상하며 말했다. “광저우 제5회 학습반 기간, 설법 전에 사존께서는 아무것도 드시지 않다가 설법을 끝마친 후에라야 밤참을 드셨습니다.”

어떤 노수련생은 말했다. “사존께서는 매번 파룬궁 학습반을 여실 때면 사전에 모두 많고 많은 공을 내보내며 또 큰 파룬을 회의장에 쳐내십니다. 사존께서는 또 많고 많은 작은 파룬을 쳐내 수련생의 몸을 청리하고 조정해주십니다. 또 사존의 법신은 수련생에게 많은 일을 해줍니다. 그런 공(功)이 돌아올 때는 모두 수련생 몸의 업력에 오염되어 또 공을 씻어야 했습니다. 사존께서는 당시에 말씀하셨습니다. ‘그런 공이 몸으로 돌아올 때면 아주 고달픔을 느낍니다.’ 매번 이런 말씀을 들을 때면 수련생들의 마음은 몹시 괴로웠습니다.”

법을 얻으러 천리 길

사존께서 거행하신 광저우 제5회 학습반은 국내에서의 마지막 한 차례였기 때문에 전국에서 대량의 수련생이 광주로 몰려들었다. 광저우 보도소는 여러 개의 접대팀을 조직해 매표와 학습반 개최 일을 협조했다. 기차역 부근의 한 여관은 거의 모두 수련생들이 도맡았다. 사존께서 광저우에 오신 이튿날, 여관에 가셔서 업무자를 만나보셨고 표를 사지 못한 수련생도 모두 왔다. 당시에는 그야말로 한 장 표 얻기가 어려웠다. 소식이 전해지자 표는 진작 다 팔렸고 아직도 수백 명이 회의장 밖에서 떠나지 않고 있었다. 각지 보도소 노수련생은 잇달아 솔선해서 표를 양보하면서 소중한 자리를 학습반에 처음 참가하는 사람에게 양보하고 자신은 무술관에 가서 중계방송 설법을 보았다.

학습반을 연 첫 날, 체육관 경기장 바닥까지 모두 만원이 돼 5천 명이 넘었다. 표가 없는 근 1백 명 수련생이 회의장 밖에서 서서 들었다. 이후에 책임진 수련생이 체육관과 협상했고 체육관에서는 무술관을 우리에게 빌려줘 사부님 설법을 우리에게 중계방송하기로 했다. 수련생들이 모두 사존의 설법을 똑똑히 들을 수 있도록 하기 위해 한 노수련생은 녹음기를 안고 사부님 설법이 끝날 때까지 의자에 꼬박 서서 수시로 움직이면서 좋은 신호를 찾았다.

사부님께서는 또 회의장 밖에 나오셔서 수련생을 만나 말씀하셨다. “주최측의 문제 때문에 저도 방법이 없습니다, 아직도 이 문제를 해결하고 있습니다. 밖에서 아직 들어오지 못한 수련생은 안의 수련생과 마찬가지로 여러분은 여러분이 얻어야 할 것은 얻을 수 있을 겁니다.” 수련생들은 말없이 눈물만 흘렸다. 주 회의장, 분 회의장은 모두 사존의 공에 감싸였다.

이번 학습반의 절반 이상은 외지 수련생으로서 사면팔방에서 왔다. 어떤 농촌 수련생은 다빙(大餅: 밀가루로 반죽한 떡)을 메고 왔다. 헤이룽장에서 온 노인 수련생은 격동돼 말했다. “나는 가장 북쪽인 자무쓰에서 전전하면서 가장 남쪽인 광저우로 8천리 길을 달려 왔어요. 이곳에 와서 선생님 설법을 듣고 법을 얻었는데 가치가 있어요! 행운입니다!”

한 치치하얼 수련생은 광저우에서 밥을 먹지 못해 입이 다 헐었다. 어느 날 수업 여가에 구이저우 보도소장과 한담을 하는 중 무의식 중에 이 말이 나왔고 보도소장이 사존께 이 상황을 말씀드리자 사부님께서 눈물을 흘리셨다. 학습반이 끝날 때 사존께서 말씀하셨다. “여러분께서는 천리도 마다하고 외지로부터 달려온 사람만도 3천여 명이고 가장 먼 곳은 헤이룽장, 신장으로서 5천km, 8천여 리를 달려왔습니다. 길이 멀어 여러분은 많은 고생을 했습니다. 심지어 어떤 사람은 비용이 부족해 날마다 라면만 드시고 마른 과자를 드신 분들이 다 있습니다.”[1]

홍콩, 대만, 해외에서도 모두 와서 참가했고 백인도 참가했는데 국제학습반이라고 할 수 있었다. 회의장에는 키가 큰 백인 수련생 몇 명이 있었는데(한 가족 같았음) 가부좌를 하고 있었다. 중국어를 잘 알아듣는 것은 아니었지만 파룬궁이 좋은 것은 알고 회의장에 앉아서 줄곧 법을 듣고 있었다.

이번 학습반에는 수련생이 많았고 대부분 생활이 아주 어려운 수련생들이었다. 많은 대법제자는 이런 상황을 보고 돈이 없어 숙박, 식사가 곤란한 수련생을 자발적으로 도와주었는데 그들은 돈을 곤란한 수련생에게 나눠주었다.

신적(神跡)을 목격

한 수련생의 집에는 자리에서 일어나지 못하는 환자가 두 명이나 되어 돈을 다 써 버렸지만 그래도 그가 법을 얻는 것을 가로막지 못했다. 그는 길거리에서 잠을 자고 건조식품을 먹고 냉수를 마셨다. 이 일을 다른 수련생이 알게 됐고 재빨리 쪽지에 써서 사부님께 드렸다. 사존께서는 이 쪽지를 읽으시고 바로 말씀하셨다. “이 수련생 집의 두 환자 분은 병이 다 나았습니다.” 학습반을 마친 후 이 수련생이 집에 돌아와 보니 정말 나았다. 그들에게 어떻게 나았는지 물었더니 가족이 말하기를 어느 날 큰 파룬이 방안에서 돌더니 두 사람은 동시에 일어났는데 동시에 음식을 먹고 싶었고 걸을 수 있었으며 일을 할 수 있었다는 것이었다. 시간을 계산해 보니 바로 사부님께서 강단에서 그의 가족이 나았다고 말씀하시던 그 때였다. 그날 사존의 법신이 동시에 그들의 신체를 정화하고 나쁜 것들을 처리했던 것이다. 그러므로 어떤 사람은 사존을 보기만 하면 울었다. 사존께서는 당신이 알지 못하는 한 순간에 곧 평생 해결하지 못하던 대사를 해결해 주셨다. 업력의 고난을 사존께서 감당하셨지만 환자는 오히려 나았던 것이다.

사존께서 첫날 설법하시기 전, 앞자리 두 번째 줄 젊은이 4명이 다른 공간의 부체(附體)에게 통제당해 각종 모양의 기괴한 표정을 짓고 있었는데 울고불고 하는 것이 부체에게 시달리는 것 같았다. 한 보도원은 그들이 학습반을 방해할 것 같아 사존께서 장내에 오시자 즉시 알려드렸다. 사존께서는 환한 웃음을 지으시며 “알겠습니다”하시고는 성큼성큼 강단으로 걸어가셨다. 보도원은 그래도 시름이 놓이지 않아 연구회 수련생을 불러왔다. 그녀가 그들을 한참 바라보니 그 중의 한 청년이 조금 나아지는 것 같았다. 사부님의 설법 사흘째 되는 날 이 청년들 몸의 부체가 사부님에 의해 제거됐으며 정상 상태를 회복했고 다른 수련생과 마찬가지로 조용히 그곳에 앉아서 강의를 들었다.

전무후무

사존의 제5회 광저우 학습반에는 사존의 딸도 따라왔다. 먼저 사부님 가족 숙식을 백운산 부근 여관에 배치했다. 이튿날 사존께서는 설법 현장을 시찰하신 후 설법 장소와 가까운 지점인 웨슈산(越秀山) 체육관 부근으로 옮길 것을 요구하셨다. 광저우 수련생은 사부님의 요구대로 체육관 설법 장소에서 걸어서 5분 거리인 후톈(湖天) 호텔을 잡았다. 이리하여 후톈 호텔은 학습반 기간 사부님께서 전국 각지 보도소 소장 및 국내외 대법제자를 만나는 곳이 됐다. 날마다 점심이면 사존께서는 모두 각지 보도소 책임자의 보고를 들으셨고 아울러 각지 상황에 따라 설법하셨다. 사존께서는 날마다 거의 몇 무리 사람을 만나셨는데 그 바쁘신 정도는 말로 표현할 수 없었다.

학습반이 끝났을 때 전체 업무자들이 함께 식사했다. 당시 사람이 아주 많아 세 밥상에 나뉘어 앉았다. 어떤 수련생은 처음 이런 장면에 참가했고 사존과 가까운 위치는 오래된 수련생에게 양보했다. 사존께서는 매 한 사람의 마음을 꿰뚫어 보신 듯 특별히 좀 먼 곳 밥상으로 가셨고 모두들 박수로 환영했다. 사존께서는 모두들 앉으라고 하셨지만 모두 앉으려 하지 않았다. 그것은 사부님께서 서 계셨기 때문이었다. 광저우의 12월은 날씨가 비록 북방처럼 눈꽃이 날리진 않아도 그래도 쌀쌀했다. 모두들 사부님 신변에 서 있었는데 사부님께서 말씀하실 때면 내뿜는 에너지가 몹시 커서 뜨거운 기류가 정수리로부터 전신을 관통했는데 어떤 수련생은 감격해 눈물을 흘렸다.

한 홍콩 수련생은 사부님을 초청해 식사할 때 사존께서는 그가 데려온 한 홍콩 수련생이 아주 예쁘고 큰(비둘기 알만한) 옥불(玉佛)을 목에 걸고 온 것을 보시고 손에 쥐었다 놓으시면서 개광됐다고 하셨다. 곁에 앉은 한 퇴역군인 수련생도 자신의 작은 옥불을 사존께서 개광해 주시기를 바랐다. 사존께서도 쥐었다 놓으시며 말씀하셨다. “이 옥불은 좀 작습니다.” 이후에 이 수련생은 회상하면서 말했다. “제 동료가 이후 저에게 말했습니다. ‘당신이 건 이 옥불은 다른 사람이 건 것과는 달라 먼 곳에서도 금빛을 볼 수 있어 참으로 신기해요.’”

사존께서 마지막 시간에 문제 해답을 마치시자 전국 각지 수련생들은 사존께 아름다운 생화, 비단 깃발을 드렸는데 장면이 장관이었고 감동적이었으며 우레 같은 박수 소리가 울렸다. 그 중에 광저우 보도소 대표가 드린 깃발에는 “남대문에 뿌리박고, 5대주에 널리 알리네”라는 두 줄의 금빛 글자가 있었다. 사존께서 수인을 하시면서 안으로 걸어가실 때 수련생들은 전체 기립해 박수를 치면서 경의를 드렸다. 사존의 멀어져 가는 뒷모습을 보면서 많은 수련생들은 눈물을 흘리면서 헤어지기 아쉬워 오래오래 그 자리에 서 있었다.

사존께서는 광저우에서 총 다섯 차례 파룬궁 학습반을 개최하셨다. 사존께서는 말씀하셨다. “과거에 새로운 수련생들은 법을 인식할 때 모두 한 과정이 있었다. 그 당시 내가 광주(廣州)에 가서 법을 전할 때 앞의 두 반에서 설법할 때 수련생들은 내가 무엇을 말하는지도 모르면서 좋다고만 느꼈지 내가 무엇을 말하는지를 몰랐다. 바로 사람의 관념, 특히 개혁개방 이후 광저우(廣州) 사람들의 사상은 모두 돈을 버는 것이었다. 세 번째 반, 네 번째 반에 이르러서야 비로소 폭발하듯 열렸는데, 단번에 내가 무엇을 말하고 있는지 알게 됐던바 그제야 비로소 대량의 수련생들이 올라 왔다. 현재 뒤늦게 법을 얻은 사람들이 흔히 빠르게 제고하는데, 아마 이런 환경도 구비됐고 각 방면의 조건도 성숙됐기 때문일 것이다. 바로 외부조건(外因)이 형성된 것이다.”[2]

사부님 은혜 이루다 말할 수 없어

사부님께서는 광저우에서의 전국 최후 학습반 기간, 전국 일부 보도소 소장 회의를 열고 전국 각지 보도소에 대해 설법하셨다.

1998년 3월 30일, 사존의 제사(題詞: 기념이나 격려를 위해 쓴 간단한 글) ‘파룬따파 광동에서(法輪大法在廣東)’를 98년 4월에 미국에서 귀국한 대법제자가 광저우로 가지고 왔다. 함께 갖고 온 것은 또 다른 두 폭의 제사였는데 한 폭은 ‘파룬따파 광시에서(法輪大法在廣西)’, 한 폭은 ‘파룬따파 주하이에서(法輪大法在珠海)’였다. 이런 제사는 모두 함께 광저우 보도소의 업무자에게 전해졌다. 수련생의 회상에 따르면, 사존의 제사를 받은 후 많은 광저우 수련생은 모두 보고 싶어 했다. 이후에 이 수련생은 그 중의 ‘파룬따파 광동에서’ 제사를 인쇄공장에 보내 복사본 1천 부를 만들어 일부 보도원에게 나누어 주었다.

광저우 보도소의 한 책임자가 회상했다. “광저우 제5회 학습반이 끝난 후, 당시 광둥 기공연구회가 주최했으므로 대부분 수입은 모두 그들이 가졌고 사부님께서는 수강료만 약간 드렸습니다. 중국 기공연구회에서 책임자 두 분도 광저우에 와서 강의를 들었습니다. 바로 사존을 베이징으로 배웅할 때 이 두 분은 사존께 불만을 토로하면서 이번 학습반에서 자신들은 어떠한 보수도 받지 못했고 어떠한 이윤 배분도 받지 못했다고 했습니다. 사존께서는 두말없이 호주머니에서 광둥 주최측에서 받으신 수강료를 전부 꺼내 이 두 사람에게 나눠주셨습니다. 그러니 사부님께는 돈이 없게 된 것입니다. 당시 사부님을 배웅하러 간 광저우 보도소 책임자 몇 사람은 이런 상황을 보고 속으로 몹시 기분이 나빴습니다. 그래서 먹을 것을 사서 사존께 드렸습니다.”

사존께서 광저우를 떠나 베이징으로 돌아가실 때 많은 수련생이 공항에 가서 사부님을 배웅했다. 사존께서는 수련생에게 빽빽이 둘러싸여 대합실에 들어서셨다. 키가 크고 자비로운 독특한 사존의 형상에 보초를 서던 무장경찰마저 놀랍고 의아해 했으며, 이들은 광저우 군부의 고위관료도 와서 사존을 배웅하는 걸 보고 틀림없이 큰 인물이라고 여겼다.

대합실에서 탑승권을 기다리던 수련생은 사존을 보자마자 얼른 달려와 사존과 사진을 찍었는데 카메라 후레쉬가 족히 몇 분 동안이나 번쩍거렸다. 나중에 사존께서 찍을 수 없다고 말씀하셔서야 중지됐다. 사존께서는 또 어떤 수련생 앞에 가서 “수고하셨습니다”라고 했다. 사존의 말씀을 듣고 수련생들은 목이 메어 뭐라고 말씀드려야 할지 몰라 멍하니 서 있기만 하면서 그저 사존께서 탑승실로 들어가시는 것만 말없이 배웅했다. 사존께서는 계속 뒤를 돌아보시면서 손을 저으셨다.

(끝)

주)

[1] 리훙쯔(李洪志) 사부님 저작 ‘전법륜법해’

[2] 리훙쯔 사부님저작: ‘창춘보도원법회 설법’

문장발표: 2015년 3월 1일
문장분류: 온고명금(溫故明今)> 나의 사부님
원문위치: http://www.minghui.org/mh/articles/2015/3/1/305521.html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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