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밍후이 편집부 문장 ‘출발점’을 배운 약간의 깨달음 –
글/ 대륙 대법제자
[밍후이왕] 나는 처음에 ‘출발점’이란 문장을 보았을 때 깜짝 놀랐다. 이렇게 오래되었는데 아직도 정법수련과 법을 실증하는 자신의 생명을 가지고 노는 사람이 있다니! 나중에 마음을 가라앉히고 생각해보니 이상하지도 않았다.
몇 년 전에 한 수련생을 만났는데, 그가 교도소에서, 특무역할을 하는 것에 동의하여 앞당겨 석방되었다고 했다. 그가 동의한 이유라고 했던 ‘교도소 안에 있으면 가치가 없고 나오면 법을 실증할 수 있다’는 말을 듣고는 ‘정수유심(靜水流深-부드러운 물이 깊이 흐른다)’에 관한 토론이 생각났다. 그를 잘 아는 한 수련생의 말에 의하면, 그는 교도소에서 나온 후, 그의 아내(연마하는 둥 마는 둥 하는)가 다른 한 사오(邪悟)자와 남녀관계가 있다는 것을 발견하고 그 사오자를 때렸다고 한다. 이상한 것은 내게 이 일을 알려준 수련생(당시 국내외에서 이름깨나 있는 것 같았고, 지금은 온 가족이 미국에 있다)은 이런 행위를 이해해준 것 같았으며, 그들 주변 수련생들도 이 일에 무슨 잘못이 있다고 생각하지 않았다는 점이다.
‘출발점’이란 문장에는 서두에서부터 ‘단계마다 같지 않은 지역에서 서로 다른 사람의 일부 정황이 표현된다. 이런 정황이 표현되는 것은 수련생과 대법제자가 식별할 수 있게 하고, 법 중에서의 수련을 배우게 하려는 데 있으며, 일에 봉착하면 언제나 수련을 출발점으로 삼아 배우게 하여 대법에 동화해 사람을 많이 구도하게 하는 데 있는 것이지, 사람 마음을 끊지 않고 늘 사람 마음에 좌우됨에 있는 것이 아니다.’, ‘그러나 대륙의 특정된 환경 속에서 언제나 일부 사람의 출발점은 수련을 첫 자리에 놓지 않으며, 착실하고도 착실하게 마땅히 해야 하는, 사람을 구하는 일을 하지 않으며 오히려 사람 마음을 출발점으로 삼는다.’라고 썼다.
내가 이해하기에는, 사부님의 정법시기 대법제자의 수련이 마지막 단계에 이른 오늘날까지도 사람 마음과 수련인이 문제를 보는 기점을 아직도 똑똑하게 분별할 수 없다면 정말 매우 엄중하고 극히 엄숙한 일이며, 잘하지 못했고 해내지 못했다면 고험과 번거로움이 끊임없이 나타난다는 것이다.
법 중에서 우리는, 수련은 하나의 군체일 뿐만 아니라 억만 인이 수련하고 있으며, 수련인과 세인은 모두 적당한 미혹 속에 있는데, 이것은 수련인이 수련할 수 있고 세인이 구도될 수 있는 조건이라는 것을 알고 있다. 사악도 대법제자의 사람 마음을 이용해 문제를 일으키는 기회를 놓치려 하지 않는다. 리쉬펑(李旭鵬) 및 그와 비슷한 사람이 어떻다고 말하는 것이 아니라, 만약 그들 주변 수련생이 모두 법을 스승으로 삼고 수련인으로서 일하는 기점에서 문제를 보고 자신을 연마했다면 리쉬펑 같은 사람에게 시장이 있을 수 있겠는가? 사악은 주변 수련생에게 사람 마음이 나오지 않고 고험이 수련생에게 영향을 미치지 못한다고 생각하면 끊임없이 그들의 집착과 사악한 생각을 확대하고 가중함으로써 그들의 만고의 기연을 훼멸하려고 하는 것이 아닌가? 그들 자신도 잘 연마하려고 하지 않는 것이 아니므로, 대법제자의 아주 족한 정념의 에너지장 중에서 그들은 좋게 변할 수 있지 않았겠는가?
문장 중 어떤 수련생은 ‘출발점’에 대해 의견이 있다고 했다. 밍후이 편집부 수련생이 어떠하다고 말하지 않고, 사부님께서 설법 중에 우리에게 밍후이왕의 작용이 어떻다고 알려주셨는지도 말하지 않더라도, 한 수련인으로서 아직까지도 법을 스승으로 삼아 이 문장의 무게를 가늠할 수 없단 말인가? 사부님께서 법 중 우리에게 모든 것을 알려주시지 않았는가? 아직도 리쉬펑이 어떠어떠하다고 하는 데 깊이 빠져있단 말인가? 우리는 자신이 이 일에 참여한 것이 옳은지 그른지, 자신의 문제가 얼마나 엄중한지를 생각해보았는가? 우리는 법을 스승으로 삼고, 수련인의 기점으로 안을 향해 자신을 찾으며, 법으로 이 일을 가늠해보았는가? 우리가 가운데서 이 일을 가중시켜 사악이 틈을 타게 하지 않았는가? 우리는 오늘날까지 걸어왔음에도 아직도 안을 향해 찾을 수 없단 말인가?
‘출발점’이란 문장에서는 ‘기타 휘말려든 수련생은 왜 십여 년의 고험 앞에서 아직도 식별하는 법을 배우지 못했는가? 일에 봉착하면 출발점이 수련과 사람을 구하기 위함인가? 아니면 개인의 사사로운 욕망과 사람 마음을 위한 것인가? 매번 미혹 앞에서 자신은 과연 어떤 배역을 맡았는가?’라고 했다. 수련생이여, 설마 이 문장에서 말하는 것이 리쉬펑만이겠는가?
곱씹어 말하면 사실 바로 하나의 수련 문제다. 일에 부딪혔을 때 사부님께서 법 중 우리에게 알려주신 것을 생각하지 못하고 완전히 사람의 기점에 서서 문제를 보면 문제의 실질을 볼 수 없으며, 이래저래 논쟁하면서 수련인의 귀한 시간과 정력을 낭비하게 된다.
나는 줄곧 생각했다. 사부님께서는 여러 번 우리에게 법 중에 모든 것이 있다고 알려주셨는데, 어떤 수련생은 믿는가? 믿지 않는가? 설령 의심이 있더라도 마음먹고 열심히 법 공부하고 연마하여 없애고 실천해보면 사부님의 말씀에 틀린 것이 한 마디도 없다는 것을 알게 될 것이며, 자신이 보잘것없다는 것과 사부님의 제자로서 비할 바 없이 행운이며 행복하다는 것을 느낄 수 있을 것이다! 그렇지 않으면 집착심에 휘감기고 사악이 눈앞에 있는 방해를 일부러 이용하면 매우 힘들 것이며, 방향을 잃어버릴 수 있다.
수련하여 집착심을 제거하는 것은 정말로 매우 힘들지만 큰 행복도 수반된다. 집착을 찾아내지 못하고 수련의 방향을 찾지 못하면 그것은 진정으로 고통스러운 것이다. 마치 속인이 해결할 수 없는 부득이한 고통처럼 그것이야말로 진정으로 매우 고통스러운 것이다!
어떤 일이 나타나든, 설령 한때 어떻게 해야 할 줄 몰라도 사부님의 설법을 생각해야 하고 법 중에서 연마해야 하며, 법 중에서 문제를 보아야만 답안을 찾을 수 있고 문제의 실질을 볼 수 있다. 사부님께서 ‘전법륜’에서 “수련은 자신에게 달렸고, 공(功)은 사부에게 달렸다.”라고 하신 말씀을 반드시 기억해야 한다!
문장발표: 2015년 3월 16일
문장분류: 수련마당>정법수련마당>이성인식
원문위치: http://www.minghui.org/mh/articles/2015/3/16/306297.html