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관념을 바꾸니 환경도 바뀌었다

글/ 광둥 시골 대법제자

[밍후이왕 2015년 3월 7일]

웃다

대법이 박해를 받은 후 나는 불법으로 감옥에 갇히면서 수련을 하지 않는 남편도 직장을 잃게 되었다. 우리는 거의 반년이나 수입이 끊겨서 불안정한 생활을 해야만 했고 남편도 어쩔 수 없이 고향으로 돌아가 작지만 의료센터를 열었으며, 세 딸아이를 돌보지 못했다.

내가 감옥에 있을 때 남편도 영업이 잘 되지 않았다. 남편은 주변 수련생들의 도움으로 돈을 빌려 보석금을 마련하여 나를 석방시켜 주었다. 하지만 여기서 끝이 아니었다. 조그마한 변고가 있어도 그들은 집으로 찾아와 나를 세뇌반으로 납치하곤 했다. 세뇌반에서 탈출한 뒤 나는 여기저기 떠돌아다니며 유랑을 시작했다.

2003년~2004년간 수많은 동수들이 납치 되었다. 나와 같은 ‘사건’으로 연관 된 동수도 명절날 가족들과 설을 보내려고 돌아갔다가 그날 밤 바로 들이닥친 경찰에게 납치되어 원통하게 4년 판결을 당해 극심한 고통을 받았다. 나는 지명 수배를 받은 데다 당국은 진상을 모르는 세인을 시켜 ‘집에만 가면 바로 보고하라’며 나를 감시하게 했다.

어떤 착한 세인이 우리 집으로 찾아가 소식을 전해 줬다. 공산당은 그 누구든 편히 사는 꼴을 못 봐서 짓밟고 박해하는 악한 본성을 남편은 잘 알기에 늘 나 때문에 안절부절 못했다. 2004년 설 전이라 다들 고향으로 돌아갈 때 남편은 내가 납치당할까 두려워 결국 나를 지인의 집으로 보냈다.

짐을 싸면서 남편은 긴 한숨을 내 쉬면서 “남들은 여자가 남자를 걱정하는데 나는 당신 때문에 언제나 걱정해야 하다니. 남들은 고향으로 돌아가는데 당신은 짐을 싸고 집을 나가야 하니 무슨 낙이 있겠나!” 그렇다! 세인은 이 고통을 견디기 어렵다. 하지만 나는 수련의 길에서 곤란에 부딪히든 모든 것을 잃든 흔들리지 않을 것이다. 왜냐하면 나의 마음속엔 대법이 있으니까.

현(县城)에 사는 수련생 갑은 나에게 전화를 걸어 을의 남편이 시골로 갔으니 을의 집으로 와서 설을 함께 보내자고 말했다. 현지에 도착하니 4~5시 였다. 나는 짐을 내려놓고 동수는 진상스티커를 제작하러 자료점으로 갔다. 설 전날 동수 을은 매년 친정에 가야한다고 하니 나는 그녀를 보냈다. 하지만 밥만 먹고 올 줄 알았던 그녀는 밤 8시, 9시가 되어도 보이질 않았다. 나는 그녀의 집 앞을 서성이며 들어갈 수가 없었다.

이때, 나는 동수 갑에게 남겨진 짐이 있다는 것을 문득 떠올렸다. 나는 전화를 걸어 갑에게 집 앞에 있으니 열쇠만 내어달라고 부탁했다. 그녀는 뛰어나오면서 나를 보더니 눈물을 흘리면서 “설날에 우리는 좋은 것을 먹고 따듯하게 보내는데 너는 갈 곳도 없다니!”라고 말했다.

그때 그녀는 울지만 나는 웃으니 그녀도 눈물을 닦으면서 웃음을 지었다.

실은 나는 진정으로 슬프지 않았다. 가족들이 음식 솜씨가 없어서 내가 없이 설을 어떻게 보낼까 혹은 내가 갈 곳도 없고 밥도 못 먹는 것에 대해 아무런 생각이 없었다. 나는 오로지 동수들과 함께 제작한 각종 아름다운 스티커만 떠올랐다. 그리고 동수들과 함께 수많은 중생을 구도할 것을 생각하니 나는 너무나 행복해서 크게 웃었다.

기분이 가라앉다

시골로 돌아간 후 동수들과 멀리 떨어지니 외로움을 느끼면서 기분이 가라앉았다. 집안 분위기도 좋지 않았고 남편의 진료실은 도박장이 돼버렸다. 처음에는 몇 명이서 점치기를 재미삼아 하더니 나중에는 로또도 팔면서 도박까지 하는 것이었다. 나는 남편을 말렸지만 남편은 그냥 놀음이니 걱정까지는 안 해도 된다면서 나는 수련에만 신경 쓰면 된다고 말했다.

이곳의 중생들은 대법을 알지만 구하기 참 어렵다. 특히 연해지구 세인들은 깊은 미혹 속에서 일깨우기 힘들었다. 최근 몇 년간 악당은 국민들의 피와 땀으로 번 돈을 부당하게 관리하여 배만 소유하고 있다하면 바다로 나가든 안 나가든 심지어 업종변환을 한 젊은이에게도 2,000위안(약 36만 원)에 상당하는 기름 값을 보태준다. 조그마한 이득을 받아도 우리가 아무리 노파심에서 거듭 타일러서 진상을 알리고 삼퇴를 권해도 그들은 듣지도 않을 뿐만 아니라 심지어 모여서 공격하는 말을 한다. 나는 그들한테 몹시 실망하고 교란도 많아 그들을 포기하고 싶었다. 하지만 자비로운 사부님께서는 나의 진심을 아셨다.

한번은 꿈을 꾸었는데 나는 아주 작은 골목길을 가고 있는데 뒤에서 체격이 우람한 대여섯 명의 남자들이 나를 죽이려고 쫓아왔다. 나는 죽을힘을 다해 뛰는데 언덕길이 보이더니 앞에는 일망무제한 깊디깊은 바다가 펼쳐졌다. 더는 갈 길이 없는데 그들은 줄곧 쫓아와서 나는 당황했다. 이때 갑자기 어떤 아저씨가 앞길을 가로 질렀다. 나는 “아저씨, 저 좀 살려 주세요. 뒤에서 저를 죽이려는 자들이 쫓아오고 있어요.”라고 큰소리로 애원했다. 쫓아오던 남자들이 갑자기 사라졌고 그 아저씨는 웃음을 지었다. 순간 그 분에게서 느껴지는 자비로움은 말로 표현할 수 없었고 따듯하고 큰 힘이 느껴졌는데 그 힘은 나의 두려움을 날려버렸다. 그분은 한 치의 원망도 없이 따뜻하게 “너만 잘 하면 돼.”라고 말씀하면서 옷자락에서 어떤 씨앗을 담은 종이덩이를 넘겨주면서 “이 씨앗을 이 토지에 뿌려다오.”라고 이어서 말씀하셨다. 나는 토지가 어디에 있을까 하며 생각할 때 아저씨가 손을 저으니 갑자기 크고 작은 논밭이 펼쳐졌다. 아저씨는 온데간데없이 사라지고 나는 논밭을 걷고 있었다.

깨어난 뒤 나는 자비로운 사부님께서 제자를 일깨워주신 것을 깨달았다. 내가 아저씨라고 부르던 분은 자비롭고 위대하신 나의 사부님이 아니신가? 나는 눈물을 흘렸다. 제자가 정진을 못하여 사부님께 걱정을 끼쳐드려 죄송하고 법에서 이탈한 것이 창피했다.

안으로 찾으니 환경이 바뀌다

나는 안으로 찾아 집착을 내려놓는데 노력했다. 현지 동수들과 함께 그 곳의 중생들을 구도하는데 노력했다. 2013년 아들의 결혼식에 몇몇 동수들도 진상을 말하려고 참석했다. 동수 한명은 진상수첩과 영상비디오를 테이블 마다 배포하다 악인에게 고발당했다.

십여 일 후, 현지 시 ‘610’에서 내가 다니던 회사와 현시공안국 정법위, ‘610’, 고향 현 정법위에 지시해 십여 명 살기를 품은 납치범을 보내 나를 납치하려고 했다. 마침 나는 집에 없었고 남편은 문을 열어주지 않고 그들과 대치했다.

체격이 우람한 악인들은 본인이 현정법위에서 왔다며 흉악한 표정으로 달려들어 문을 열려고 했다. 남편은 문에서 물러선 후 큰소리로 “누가 감히 우리 집 문을 건들기만 해봐! 처음에는 하라고 그렇게 추천을 해대더니 이젠 뭐 몸이 좋아지니깐 또 못하게 하는 건 뭔가? 당신들이 파룬궁이 안 좋다면 안 좋아지나? 당신들이 안 좋다는 거지 나는 좋네. 내일이면 당장 고구마랑 챙겨서 베이징으로 가서 파룬따파하오라고 외칠 걸세! 당신들이 어쩌겠나?”

남편의 정의롭고 당당한 목소리는 그들을 놀라게 했다. 사악한 요소들은 해체되고 말았다. 그들 중 우두머리 한명이 “당신 아내를 학습하러 보내는 거예요.”라며 위선적으로 말했다. 그러자 남편은 “뭔 학습이요? 아내가 옳든 그르든 내가 알아서 할테니까 당신들은 필요 없어. 어디서 감히 학습이라는 말을 꺼내?!”라고 했다.

남편은 오히려 그들을 범죄인 심문하듯이 한명 한명에게 물었다. “당신은 어디서 왔소?” “나는 XX시 ‘610’”. “당신은 어디서?” “나는 XX현 정법위에서.”, “당신은?” “나는 XX현 ‘610’”, “나는X정법.”, “나는 ‘610’”, “나도” … “매년 십여 번이나 우리 집에 와서 살림에 지장을 주더니 앞으로 또 올 건가?” 라고 묻자 그들은 앞으로는 안 오겠다고 답했다.

그들 중 가장 흉악한자가 뒤로 물러서면서 “우리는 여기 사람에게 보고를 받았고 위에서 반드시 집을 조사하고 사람을 납치하라는 명을 받았소. 당신 아내에게 앞으로 조심하라고 전하시오.”라고 말하고는 무리째 코가 납작해져서 가버렸다. 나중에 ‘610’ 두목은 그들이 임무를 수행하지 못하고 돌아갔기 때문에 매우 화를 냈다고 들었다.

또 한 번은 진 정법서기 두명이 오후 1시쯤 우리 집에 몰래 들어와 내 뒤에 서 있었다. 나는 한쪽으로 법공부를 하면서 한쪽으로는 션윈 영상비디오를 굽고 표지를 프린트하는 등 여기저기 자료들이 널려있어서 들어오면 바로 한눈에 환히 보일 정도였다. 나는 바로 책을 내려놓고 마음으로 사부님께 그들의 눈을 가려달라고 간청을 드리면서 그들을 이끌고 문 문밖으로 나갔다. 그들은 진정으로 아무것도 보지 못했다.

우리 집 앞에는 늘 바람을 쏘이는 사람들, 오락을 하는 사람들로 가득했다. 남편은 의무실에서 쉬고 있었고 이때 큰언니 두 명이 나를 당기면서 데려가려고 하는걸 보고는 남편을 깨웠다. 남편은 정법서기를 본적이 있어서 잘 알지만 다른 한명은 초면이라 그에게 “당신은 뭐 하러 왔소?”라고 물은 후 “당신 죽고 싶은가?”라고 노기등등해서 말했다. 그러자 서기는 그 사람을 먼저 가라면서 보내고는 남편에게 “당신 아내를 빨리 보내시오, 현재 ‘610’ 두 차량 인원이 밖에서 대기하고 있으니 당신 아내에게 피하라고 하시오.”라고 말했다. 하지만 남편은 내가 집에 없다고 하니 그들은 어쩔 수 없이 갔다.

예전에 그들은 나의 친정까지 찾아 온 적이 있었다. 그때 마침 ‘페이뎬(非典)” 시기였다. 그들은 마을 촌장을 찾아가서 엄무집행 중이니 모모를 반드시 찾아야 한다고 말했다. 하지만 촌장은 “나는 허락하지 않소. 당신들이 굳이 마을로 쳐들어간다면 나는 방송으로 전 마을 사람을 모아서 도끼를 들고 나오라고 말할 것이오. 당신들은 차와 함께 사라져야만 하오.”라고 말하자 그들은 주눅이 들어서 가버렸다. ‘610’으로 돌아간 후 그들 중 한명이 “모모의 친정집 마을사람들은 너무나 사나워”라고 말했다.

사부님께서 보호해주신 결과 그들은 여러 차례 실패로 매듭을 지었다. “그들은 한 장의 종이 호랑이로군 너무 웃겨.”라고 말했다. 그 후부터 많은 사람은 남편에게 엄지를 세우며 “XX형님, 형님이 부르면 언제든지 한판 합시다. 기다리겠습니다.” 라고 말했다. 앞에서 말한 ‘한판’은 싸움을 가리킨다.

심성제고

2007년, 나는 현지 동수들이 보려는 밍후이 문장과 자료를 만들기 위해 동수와 함께 자료점을 시작했다. 나는 그나마 기초가 있어서 어렵지 않다고 생각했지만 다른 잘 되던 기기도 우리 집으로 오면 까다로워졌다. 잘 돌아가다가도 갑자기 멈추고 급할 때는 그냥 눈만 깜빡이며 꼼짝을 하지 않았다. 아주 작은 기술문제라도 나는 어쩔 수 없이 기기를 들고 동수들에게 부탁을 해야만 했다. 그 동수가 자기가 수리할 수 있는 한계를 벗어나면 컴퓨터 수리 업체로 가져가서 반나절이나 기다릴 때도 있었고 바로 수리가 안 되면 다음날에 가곤 했다. 하지만 그는 번거로움을 귀찮아하지 않고 원망하는 말을 단 한 번도 하지 않았다.

이런 횟수가 늘어나자 동수가 아무리 괜찮다고 하지만 나는 몹시 미안했다. 나는 그 원인을 한번 찾아보았다. 프린트기의 상태는 마침 나 같지 않은가? 동수들에게 활기차게 역할을 하다가 나에게로 오면 어쩐지 외롭고 쓸쓸해 하는 모습이었다. 매번 기기를 가져와서 포멧을 할 때마다 나는 늘 마음이 상했다. “법기야 너는 나랑 함께 일을 하는 게 동수들보다 못 하지? 시골은 먼지도 많고 쓸쓸하지?” 이게 어디 정념인가? 프린트기는 기어코 나를 따르겠다고 한 것도 아닌데 말이지. 나는 문뜩 뭔가를 깨달은 듯 했다. 맞다! 여태껏 동수와 나의 시간을 점용한 것은 바로 나의 그 사람의 마음 때문이 아닌가?

그 후부터 나는 더 열심히 법공부 하고 내 자신을 찾아 수련에서 부딪히는 모든 일을 정념으로 대할 것이다.

층차에 제한이 있기에 잘못된 부분은 수련생께서 자비로 지적해주시기 바란다.

문장발표: 2015년 03월 07일
문장분류: 수련마당>정법수련마당>수련체험>진상을 알려 세인을 구도
원문위치: http://www.minghui.org/mh/articles/2015/3/7/305967.html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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