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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선의(善意)적인 지적’에 대한 얕은 인식

글/ 미국 대법제자

[밍후이왕] 나는 해외에 온 몇 년 동안 계속 언론매체 항목을 했다. 그런데 수련생들이 서로 모순이 발생하거나 의견이 다를 때 흔히 두 가지 방식으로 대처하는 것을 발견했다. 첫 번째 방식은 상대방이 기분 나빠할까 봐 두려워 문제점을 보고도 앞에서 직접 말하지 않는 방식이다. 하지만 이런 수련생들은 상대방의 문제로 인한 번거로움 혹은 상처 때문에 다른 사람에게 하소연하고 원망하는데 이 때문에 더욱 큰 간격이 조성되고 모순이 복잡해지게 된다. 두 번째 방식은 자신이 본 문제점을 직접 앞에서 지적하지만 선의(善意)가 아니고 질책과 원망을 갖고 지적하는 것이다.

앞에서 지적하여 미움을 살까 봐 걱정하는 것은 사실 자신을 보호해 상처받지 않으려고 하는 사심이다. 또 질책과 원망을 갖고 지적하는 것 역시 자신의 명리정(名利情)이 상처를 받아 생성된 증오심으로서 사심이 조성한 것이다.

사부님께서는 ‘싱가포르법회 설법’에서 이렇게 말씀하셨다. “나는 늘 이런 말을 하는데, 한 사람이 자신의 어떠한 관념도 가지지 않고 남과 말하면서 남에게 그의 결점을 지적하거나 혹은 그에게 무엇을 알려준다면, 그는 감동하여 눈물을 흘릴 것이다. 당신 자신의 어떠한 요소가 없이, 아무것도 바라지 않고, 심지어 당신 자신을 위해서 아무런 보호도 하려 하지 않으며, 당신이 정말로 선의로 남을 좋게 하려 한다면, 어떤 사람이든 그는 정말로 당신의 이 마음을 읽을 수 있을 것이다.”

나는 이렇게 인식했다. 수련생들이 잘 협력하게 하려면 오직 자신을 잘 수련해야 한다. 다른 사람이 번거로움을 조성하고 상처를 입혔다 해서 원망하지 말아야 할 뿐만 아니라 자신이 상처 받을까 봐 두려워 집착을 ‘포용’하지도 말아야 한다. 다른 사람의 문제점을 보았을 때, 상대방을 위하고 수련생들의 원활한 협력을 위하는 기점에 서서 선의로 부족한 점을 지적해야 하며 그(그녀)의 당시 태도에 연연하지 말아야 한다. 정직하고 서로 신임하는 좋은 환경이 형성되어야만 함께 일을 잘 할 수 있다.

사부님께서는 ‘로스앤젤레스시 법회 설법’에서 이렇게 말씀하셔다. “사람마다 모두 이렇게 할 수 있다면 그것이 가장 좋다. 인식하지 못한 것을 남이 지적해주는 것은 물론 잘못이 아니지만 지적할 때는 반드시 선의(善意)적이어야 한다.”

또 일부 문제가 있는데 수련생 사이의 오해 때문일 수 있다. 이런 경우에도 앞에서 지적하면 모순이 해결될 기회가 있지만 배후에서 의논하면 모순이 더욱 복잡해지기만 하고 자신에게도 마음의 매듭이 생겨나게 된다. 앞에서 지적할 때 우리는 사부님께서 말씀하신 것처럼 “지적할 때는 반드시 선의(善意)적이어야 한다.”

문장발표: 2015년 3월 18일
문장분류: 수련교류>정법수련마당>수련체험>심성제고
원문위치: http://www.minghui.org/mh/articles/2015/3/18/306378.html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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