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리훙쯔(李洪志) 사존께서 광저우에서 5차례 공을 전하고 법을 전하신 것을 회상(1)

[밍후이왕]

글/ 중국 대법제자

[밍후이왕] 광저우(廣州)는 화하신주(华夏神州)의 남대문이다. 남쪽에는 맑고 투명한 아름다운 주강(珠江)이 있고 북에는 아득하고 요원하며 장려한 바이윈산(白雲山)이 있으며 천년신화의 전설과 유구한 문명역사가 있는 빼어나고 화려한 남국의 고대 도시다. 상고 이래 ‘오양함곡 췌우초정(五羊銜穀,萃于楚庭: 다섯 양이 곡식을 물고 초정에 모였네)’이란 상서로운 신화가 줄곧 민간에서 널리 전해지고 있다. 주이(周夷)왕 시대 다섯 신선이 오색 옷을 입고 오색의 양을 타고 손에는 각각 곡식을 들고 초정(楚庭: 오늘날 광저우)에 날아왔다. 신선은 곡식을 사람들에게 나눠주었으며 “이 땅이 영원히 황폐하지 말기를 기원한다”고 말했다. 신선은 말을 마치고 유유히 하늘로 날아 올라갔고 양은 돌로 변했다. 광저우는 이로 인해 ‘양청(羊城: 양의 도시)’과 ‘쑤이청(穗城: 이삭 도시)’이란 명칭이 있다.

중화민족의 찬란한 신전(神傳)문화는 비와 이슬처럼 줄곧 링난(岭南) 열도를 촉촉하게 적시고 사람들의 도덕을 유지했다. 그러나 서쪽에서 온 공산주의 유령은 중국을 얕보고 공산사당(共産邪黨)은 국가 정권을 찬탈하면서 아름다운 남국은 전국과 마찬가지로 유사 이래 가장 큰 동란, 제일 어두운 재난에 휩싸였다. 한 차례, 한 차례 광풍폭우처럼 사람을 괴롭히는 운동은 위협과 살육으로 링난 민중에게 끝없는 고통을 가져왔다. 전통문화가 참혹하게 파괴되고 약탈당해 사람들의 사상이 극도로 혼란에 빠지고 선천적인 선량한 본성은 심각하게 소실됐다.

1992년 리훙쯔(李洪志) 사부님께서 ‘진선인(眞善忍)’ 대법을 널리 전하기 시작하며 사람들의 깊이 잠든 기억을 일깨워주고 사람들의 생명의 승화와 회귀(回歸)를 지도하셨다. 1993년 4월부터 1994년 12월까지 리훙쯔 사부님은 차례로 광저우에서 5기 파룬궁 학습반을 개최하셨고 모두 8천여 명이 현장에서 사부님의 설법을 들었다. 이외, 1994년 12월 27일 사존께서는 광저우에서 마지막 학습반을 개최해 전국 각지 보도소의 보도원에게 설법을 하셨다.

파룬따파(法輪大法)는 난웨(南粵) 대지에 널지 전해졌다. 1993년부터 1999년까지, 이 짧은 6년 사이에 수련인은 수천 명에서 수십 만 명에 이르렀고 대법 ‘진선인(眞善忍)’의 우주의 지고(至高)한 법리가 수련자의 마음을 밝게 비추었다. 수련자는 신심의 건강과 즐거움을 다시 얻었을 뿐만 아니라 가장 중요한 것은 수련자의 도덕표준을 향상시키고 반본귀진(返本歸眞)의 길을 걷게 하며 무사무아(無私無我)의 숭고한 사상경지로 승화하게 한 것이다. 파룬따파는 진수자(眞修者)의 마음에, 인간 세상에 깊은 뿌리를 내렸다.

20년이란 세월이 흘렀다. 대법 복음은 세계에 퍼지고 무한한 위덕은 환우(寰宇)를 뒤흔들어놓았다. 호탕한 사부님의 은혜는 사람마음에 새겨졌다. 모든 중생이 대법의 아름다움을 알고 공산사당의 사악을 똑똑히 인식하고 구도중생을 더욱 잘하기 위해 우리 광저우 대법제자는 파룬따파가 널리 전해진 광둥(廣東)의 역사를 다시 한 번 자세히 회상하고 공동으로 이 단락 찬란한 역사를 기재해 성실하고 진지하게 미래에 리훙쯔(李洪志) 사존께서는 자비롭고 위대하시며 파룬따파하오(法輪大法好: 파룬따파는 좋다)!를 알리려 한다.

제1절: 사존께서 처음으로 광저우에서 공(功)을 전하고 법(法)을 전하시다

20세기 80년대, 중화대지에 일찍이 전 국민적인 기공 열풍이 한바탕 일어나고 수십 만이 각종 기공을 연마했다. 비록 기공의 전파도 사악한 세력의 갖가지 저지를 당했지만 80년대 중기에는 일종 빠르고 맹렬한 추세를 형성해 전국 각 지역을 휩쓸었다. 짧디짧은 몇 년간 기공애호자는 이미 6천여 만 명에 도달했고 기공 간행물은 수십 가지가 있었다. 각종 기공 학술저작, 기공의료원, 기공 강연이 도처에서 꽃을 피웠다. 전국에는 2400여 종의 기공문파가 각지에서 유전하고 수 억에 달하는 사람이 기공단련에 참가했다. 기공 계 내부에도 아주 복잡하고 각종 뒤엉킨 국면이 나타났다. 일부 가짜 기공, 거짓 기공 역시 인간세상을 미혹시켰다.

단비가 내리다

기공 붐 중에서 리훙쯔 사부님께서 전하신 파룬궁은 마치 드넓은 창우 중 가장 밝은 거대한 별처럼 인간 세상에 내려왔고, 사부님께서는 1992년 5월 13일 지린시 창춘(長春)에서 처음으로 설법하셨다. 창춘에서 2기 학습반을 성공적으로 개최한 후 사부님께서는 1992년 6월 베이징에 오셨다. 베이징 기공계의 권위 있는 인사들은 사존의 초범적인 공법, 공능에 깊이 설복됐고 파룬궁은 각 항목의 테스트, 이론과 심사 평가를 통과하고 직속인 파룬궁 연구회를 즉시 중국 기공과학연구회의 분회로 설립해 전국에 널리 보급했다. 1994년 12월 21일 열린 광저우 설법은 각지 정부 측 기공연구회 등 부서의 초청으로 열린 것이다. 사부님께서는 차례로 중국 각지에서 학습반을 만들어 모두 56차례 설법하시고 공을 전하셨다. 매 기 학습반은 7일에서 10일 전후로 6만7천여 명이 인연이 있어 사존께서 친히 꾸리신 학습반에 참여했다. 사존께서는 어느 곳에서 학습반을 운영하시든지 모두 가장 낮은 비용(또 노수련생은 비용을 절반으로 줄였음)을 받았지만 주신 것은 오히려 가늠하기 어려울 정도다.

광둥성 기공협회의 한 책임자는 1992년 베이징 건강박람회에서 리훙쯔 사존을 만나보고 파룬궁이 수많은 기공애호자의 환영을 깊이 받는 것을 보고 당시 사존을 청했다. 그리해 1993년 4월 13일부터 22일까지 광저우 제1기 파룬궁 학습반이 광저우시 고무공장 공회 강당에서 성공적으로 개최됐다. 참가인원은 200명이고 주최는 광둥성 기공협회 관할인 광저우 바오린(寶林) 기공학교다. 사존을 수행해 광저우에 와서 학습반을 연 수련자는 베이징 파룬궁 연구회 업무자와 우한(武漢) 일부 노수련생이었다.

제1기 학습반 수강생은 노인이 비교적 많았고 젊은 사람도 있었지만 비교적 적었다. 첫날은 광저우시 미술중학교(동풍 2로 광저우 열사능원 후문 서쪽 옆)의 수학루(樓) 1층 교실에서 개최됐다. 교실이 아주 작아 이튿날 저녁에 광저우시 연무장 서쪽길 광저우 고무공장 강당에서 개최했다. 이전에는 또 3518 무기공장이라 불렀다.(즉 지금 중화광장 장소다.)

한 수련생은 첫날 저녁(정상 설법 시간은 매일 저녁 7시 30분에서 9시 30분이었음) 사존께서 남색 양복을 입으셨고 체격이 크고 용모는 단정하고 얼굴에 인자한 미소를 짓고 씩씩하게 교실로 들어섰다고 회상했다. 사존께서는 간단하게 자신을 소개하신 후 이어서 설법을 하시기 시작했다.

한 수련생은 사존께서 설법을 하실 때 한 번도 초고를 사용하지 않으시고 매번 다만 종이 한 장을 지니고 계셨으며 한 번 보고 조리 정연하게 수련의 가장 낮은 층인 기공을 말씀하시기 시작했다고 말했다. 얕은 데서부터 깊은 데까지 고층법리를 논술하고 수련은 바로 사람의 심성(心性)을 수련하는 것이라고 명백히 말씀하셨다. 좀 지나 사존께서는 신청하지 않는 많은 사람이 문밖과 창문 밖에서 법을 듣는 것을 보셨다. 사존께서는 기공협회 업무자에게 “그들을 들어오게 하세요. 밖에서 엿듣게 하지 마세요. 아니면 도법(盜法)행위이니 그들이 모두 들어와 앉아 듣게 하세요”라고 말씀하셨다. 많은 사람들이 모두 들어왔고 아주 감동했다. 모두 이 선생님이 정말 좋다고 말했다! 다음 사존께서는 계속 설법하셨다.

강의를 하실 때 사존께서는 분필로 흑판에 파룬(法輪) 도형을 그리고 여러분에게 무엇을 보았는지 물으셨다. 일부 수련생은 천목이 열렸다. 그들은 파룬도형의 중간의 만자부호가 도는 것을 보았다. 나머지 4개 만자부호와 4개 태극도 역시 다른 각도로 돌고 있었다. 이튿날 저녁 강단에 들어서니 도처에서 향기로운 냄새가 났다!

매번 사존께서는 강의를 끝내고 강단에서 내려오실 때 줄곧 강의를 듣는 사람들이 있는 데까지 걸어오셨다. 적지 않은 수련생이 사존께 질문을 드렸다. 사존께서는 모두 하나하나 해답을 해주셨다.

반신불수 여성이 걷다

노수련생이 사존께서 광저우에서 학습반을 연다는 소식을 광저우의 가족, 동창과 친구에게 하나하나 통지해 친척, 친구들이 모두 파룬궁 학습반에 참석하게 하려 생각했다. 사존께서는 여러 번 그녀에게 ‘부처는 인연 있는 사람을 제도한다’는 법리를 말씀하셨다. 사존께서는 수련은 제일 엄숙하며 제일 신성한 일이므로 반드시 이 사람이 내심으로 우러나와 진정하게 수련하겠다고 생각해야 된다고 말씀하셨다. 우리에게 억지로 다른 사람을 끌고 와 학습반에 참여시키지 말며 다른 사람에게 강요하지 말라고 가르치셨다.

3일째 저녁, 수업이 시작된 지 얼마 되지 않아 광시(廣西)에서 한 부부가 들어왔고 한 남자가 반신불수의 안경을 쓴 중년 여성을 휠체어에 앉히고 들어와 법을 듣는 것을 보았다. 사존께서 처음으로 광저우에서 설법하셨기에 많은 사람은 병을 치료하려는 생각으로 배우려고 했고 파룬궁이 진정으로 고층차로 사람을 이끄는 진정한 불법(佛法) 수련인 것을 몰랐다. 때문에 강의가 끝난 후 얼마 되지 않은 수련생만 있을 때 사존께서는 전례를 깨뜨리고 이 수련생의 신체를 조절해 주셨다. 현장에 있던 많은 수련생은 직접 이 전체 과정을 다 보았다. 문득 사존께서는 오른손 손바닥으로 천천히 그녀의 오른쪽 종아리를 10여 차례 때리신 다음 그녀에게 걸으라고 했다. 처음에 그녀는 움직일 엄두를 내지 못했다. 사부님께서는 “괜찮아요. 내려와 걸으세요”라고 말씀하셨다. 그녀는 정말 한 발자국 한 발자국 걸었다. 여러 사람은 당시 매우 놀랐다. 그들은 처음으로 반신불수 환자가 사부님의 조절을 거친 후 더는 휠체어에 앉지 않고 아주 빨리 길을 걷는 것을 보았다. 정말 신기했다! 모두 사존의 공이 정말 높다고 찬탄했다!

마지막 날, 이 여성은 온 얼굴에 눈물을 흘리면서 써 갖고 온 긴 감사의 편지를 읽었다. 그녀는 편지에 말했다. “중의사와 양의사에게 적지 않은 약을 받아먹어도 낫지 않았습니다. 일찍 항저우에서 광저우에 와서 학습반을 연 한 기공사에게 병을 치료해 달라고 했지요. 키가 작고 여위고 얼굴은 창백했고 등은 좀 굽은 기공사가 제 병을 치료할 수 있다고 했어요. 그러나 조건이 하나 있는데 반드시 신문기자, 방송국과 TV방송국 기자들이 와서 촬영하고 취재하게 해야 했어요. ‘내가 당신의 반신불수를 치료했다고 그들이 나를 선전하고 광고하게 해야 한다!’고 말했습니다. 그래서 그가 말한 대로 했습니다. 당시 이 기공사가 공을 내보낸 후 길을 걸을 수 있었어요. 그래서 돈을 이 기공사에게 주었지요. 그러나 그와 기자들이 떠난 후 반신불수는 다시 재발했습니다. 돈을 썼지만 병은 낫지 않았죠. 저는 그제야 속았다는 것을 알았어요. 그러나 파룬궁 창시자 리훙쯔(李洪志) 사부님은 진정으로 저의 반신불수를 치료하시고 돈 한 푼 받지 않으셨어요. 그리고 또 신문사 기자가 사진을 찍어 과시해 광고를 하지 않으셨어요. 사부님께서는 제가 다시 길을 걷게 하셨고 두 번째 생명을 주셨습니다.” 여러 사람은 듣고 매우 감동됐고 한동안 사방에서 박수소리가 터져 나왔다.

사존의 자비

제1기 사부님 학습반 4번째 수업시간에(1993년 4월 16, 17일) 사존께서는 휴식시간에 학습반에 참여한 전체 수련생에게 광저우 파룬궁 보도소를 설립할 것을 요구하셨다. 주요 목적은 수련생이 연공을 배우고 공을 배우려는 사람을 가르치는 사람이 있게 하며 또 연공하는 수련생이 만약 동작을 잘못하면 시정해주고 시간이 있으면 수련생을 소집해 함께 연공하고 서로 촉진하려는데 있었다. 사부님께서는 그 자리에서 여기 있는 수련생 중 누구에게 이런 열정이 있고 참가하기를 원하는지 손을 들어 지원하라고 하셨다. 당시 성(省) 기공협회 책임자도 제1기 학습반에 참여했다. 수강 중 그는 천목이 열렸고 파룬을 보고 매우 흥분됐다. 수업이 끝나자 그는 수강생들에게 자신이 본 것을 말했고 수강생들도 아주 고무됐다. 이 책임자는 손을 들어 자진해 광저우 파룬궁 보도소 소장을 맡겠다고 했다. 한 광저우 수련생도 당시 손을 들었다. 사존께서는 즉시 광저우 보도소 업무는 성 기공협회의 이 책임자와 이 광저우 수련생이 공동으로 책임진다고 선포하셨다. 제1기 광저우 설법반이 끝난 후 이 두 소장은 광저우 보도소 명의로 수련생을 대표해 사부님께 우승기를 드렸다.

사존과 베이징 파룬궁 연구회 업무자들은 주최 측이 배치한 광저우 시(市) 고무공장 초대소에 묵었다. 그곳은 매우 초라했고 사존께서는 공장 내 식당에서 식사를 하셨다. 사존께서는 일반적으로 라면을 드시고 간혹 식당 밥을 드셨다. 어느 날 저녁 식사 때 한 수련생이 쌀밥 한 그릇에 기름기 없는 몇 가닥 배추를 보았다. 배추뿌리를 자르지 않아 정말 넘기기 어려웠다. 마침 광저우의 한 수련생이 그녀를 보러 왔다가 이상한 눈길로 그녀를 보며 “당신들은 왜 이런 것을 먹어요…”라고 말했다. 이 수련생이 머리를 돌려 사존을 보니 사존께서는 밥과 반찬을 이미 전부 드시고 허허 웃으시면서 강의를 하러 가려고 준비하셨다. 그녀는 갑자기 형언하기 어려운 느낌이 들었다. 하루는 강의가 끝난 후 사존께서는 웃으시며 신변 업무자에게 “갑시다. 오늘 우리는 음식점에 가서 식사를 합시다”라고 말씀하셨다. 사부님과 제자 6명은 길가에서 거위 볶음면을 시켰다. 돌아오는 길에 베이징 파룬궁연구회 수련생은 “당신들이 아니었더라면 사부님께서는 밖에서 식사를 하지 않으셨을 거예요. 늘 라면을 드세요”라고 말했다.

또 한 번은 여러 사람이 한창 식사를 하는데 사부님께서는 신변의 한 수련생에게 “오세요”라고 하시더니 계란 프라이를 수련생 밥그릇에 넣어주셨다. 이 수련생이 머리를 들어 보니 다른 수련생은 모두 손으로 자신의 밥그릇을 막고 두 수련생은 밥그릇을 들고 자리를 떠났다. 알고 보니 이 계란 프라이는 한 수련생이 사부님께서 고생스럽게 강의하시니 특별히 사서 사부님께 드시게 한 것이었다. 사존께서는 인자하게 미소를 지으며 ”드세요, 여러분은 모두 고생을 많이 하시니 드세요!“라고 말씀하셨다. 사부님께서는 늘 이렇게 마음속으로 타인을 염려하신다.

한 수련생은 회상했다. 리훙쯔(李洪志) 선생님의 강의가 너무 좋다고 생각되어 녹음해 반복적으로 들으려 생각했다. 그는 즉시 200위안 되는 녹음기 한 대를 샀다. 동의를 거쳐 사부님의 설법 단상에 놓았다. 당시 단상에는 녹음기 두 대가 놓여있었는데 한 대는 베이징 연구회의 한 수련생이 놓은 소형 녹음기고 다른 한 대는 광저우 한 수련생의 큰 녹음기였다. 어찌된 영문인지 광저우 이 수련생의 녹음은 효과가 좋지 않아 강의를 들은 후 베이징 연구회 수련생에게 테이프를 빌려 복사하려 했다. 그들이 사부님께 물어보자 사존께서 동의하셨다. 사존께서는 또 즉시 파룬배지 하나를 이 광저우 수련생에게 주었다. 이 수련생은 매우 영광으로 생각해 지금까지 소중히 보관하고 있다.

양성(羊城)을 유람하다

학습반을 연 기간 사존께서는 일부 수련생을 데리고 월수(越秀)산, 서한 남월왕묘, 육용(六榕)사 등을 가셨다. 육용사는 지금 광저우 시의 류룽로에 자리 잡고 있고 1400여 년 역사를 가지고 있는 불교 명승고찰이다. 일찍 남북조 시기 송대(420~479년)에 육용사는 이미 불전을 세우고 보장엄사(寶莊嚴寺)라고 불렸다. 그 절 문미(門楣)에는 ‘육용’ 두 글자가 있는데 송대 대문호 소동파(蘇東坡)의 글이다. 이 절은 역대 양성의 저명한 고찰 중 하나다. 사존 일행은 절 입구에서 한 승려가 승복을 흔들흔들하며 사슬이 있는 금테안경을 쓰고 ‘산악자전거’를 타고 ‘유유히’ 흔들면서 사당 쪽으로 가는 것을 보았다. 여러 사람은 “와, 지금 출가인은 이런 모습도 있구나!”고 말했다. 사존께서는 “이것은 지금의 승려입니다”라고 말씀하셨다.

제1기 설법반에서 바오린(寶林) 학교장이 사부님께 제1기에 수련생이 180여명이라 보고 드리자 사부님께서는 “배운 사람이 너무 적습니다. 다음에 더욱 많은 사람이 배우기를 희망합니다”고 말씀하셨다. 일부 수련생은 들은 후 이렇게 좋은 기공은 마땅히 더욱 많은 사람이 배워야 맞다고 느꼈다.

제1기 광저우 학습반이 끝나기 전 일요일 아침, 수련생들은 3518 공장 맞은 편 열사릉 입구에서 사존과 기념사진을 촬영했다.

학습반 기간 베이징 파룬궁 연구회 업무자는 선전(深圳)에 가려고 준비했고 현지 기공협회와 상의해 선전에서 파룬궁 학습반을 개최할 일을 상의했다. 당시 연구회 노수련생은 많은 대법서적을 등에 지고 기차를 타고 선전으로 가서 선전 체육관에서 선전시 기공협회 업무자를 만났다. 당시 거기서는 한창 만인(萬人) 기공보고회를 열고 있었다. 그들과 교섭했지만 성사되지 않았다. 그 후 한 수련생은 면담 상황을 전화로 사존께 보고 드렸다. 사존께서는 그 책임자와 전화통화를 했지만 합의를 이루지 못하셨다. 수련생들은 하는 수 없이 밤새도록 가차를 타고 광저우로 돌아올 수밖에 없었다. 이후에 연구회의 한 수련생은 “선전시 기공협회 사람들은 돈 벌이에 너무 집착합니다. 당시 기차에 우리가 타지 않았다면 반드시 일이 발생했을 겁니다”고 말했다. 이로 인해 이후에 선전은 파룬궁 학습반을 개최할 기연을 잃어버렸다. 이것은 정말 매우 유감스러운 일이다.

광저우 제1기 파룬궁 학습반이 종결된 후 파룬궁은 광저우에서 싹이 트고 성장하고 뿌리를 내렸다. 수련생들은 기쁨과 행운을 깊이 느꼈고 사존께서 다시 한 번 광저우에 와서 법을 전하고 공을 전하기를 기대했다.

(계속)

문장발표: 2015년 2월 25일
문장분류: 온고명금(溫故明今)>사부님의 은혜
원문위치: http://www.minghui.org/mh/articles/2015/2/25/304864.html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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