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우리는 무엇을 수호하는가

밍후이 편집부 글 ‘출발점’을 읽고

글/ 베이징 대법제자

[밍후이왕] 나는 밍후이편집부에서 최근에 발표한 글 ‘출발점’을 읽고 큰 충격을 받았다. 글에서 지적한 문제는 최근 베이징 수련생들 가운데서 갈수록 심각해지고 있다. 왜 정법이 최후의 최후에 이르렀는데 아직도 이런 복잡한 상황이 나타나고 있는가? 이 글은 우리 매 한 사람에게 자신의 수련과 일의 출발점을 새롭게 들여다볼 것을 경고하고 있다. 아래 나는 한 방면에서 자신의 인식을 이야기하려 한다.

밍후이편집부에서 엄중한 문제가 있다고 지적한 사람에 대해 베이징의 일부 수련생들은 그가 오늘도 자료를 배포하고 삼퇴를 권하는 일을 했다면서 그가 여전히 정진하는 진정한 수련자라는 것을 증명하고 싶어 하고 있다. 이처럼 그를 긍정하고 있었기에 그가 자신이 과거에 얼마나 대단했고 역사상의 누구였으며 어떠한 공능이 있다는 등의 말을 했을 때 믿었을 것이다. 심지어 그가 만들어낸 거짓말도 모두 그대로 믿으면서 의심하지도, 조사를 통해 확인하지도 않았다.

사실 한 사람이 진수 대법제자인지 여부를 식별하는 것은 어렵지 않다. 사부님께서는 ‘싱가포르법회 설법’에서 이렇게 말씀하셨다. “당신들은 법을 원용하기 전에 우선 좋은 사람이 되어야 한다. 여러분들이 좋은 사람이 되는 것은 한 편으로 법을 원용하는 것이다.” “이렇다면 여러분들은 바로 법을 원용하고 있는 것으로서, 바꿔 말하면 당신 역시 법을 수호하고 있는 것이다.” 하지만 어떤 사람의 언행을 보면 과시심의 작용 하에 자신이 남다르다는 것을 선전하고 표현하며 심지어 다른 사람의 안전도 고려하지 않는다. 또 자신을 드러내기 위해 큰일을 벌여 성과를 내기 좋아하고 떠들썩한 효과를 추구한다. 심지어 사람이 해서는 안 될 일을 하고도 전혀 부끄러워하는 마음이 없는데 이것이 진수제자의 행위가 맞겠는가? 그는 법을 수호하는 것인가 아니면 파괴하는 것인가?

사부님께서는 ‘대뉴욕지역법회 설법’에서 “만약 충고를 듣지 않고 너무 집착한다면 그럼 해놓은 일이 더 나쁘게 되며, 마에게 이용당하게 될 것이다.”라고 말씀하셨다. 이러한 사람이 베이징 지역에서 이미 나타나지 않았는가? 하지만 그를 옹호하는 수련생들의 출발점은 어디에 있는가?

우리는 대법제자는 어떠한 경우에도 수호해야 할 것은 오직 대법뿐이라는 것을 모두 알고 있다. 하지만 집착과 좋지 않은 관념 속에 있을 경우 우리는 집착과 관념에 잘못 이끌려, 법을 수호한다는 것이 사실은 자신의 집착과 관념을 수호하게 된다. 이는 원래의 목적과 대법에서 빗나간 것인데 자신은 모르고 있다.

우리가 자신의 인식을 강조할 때, 다른 수련생과 언성을 높이거나 소리 없이 논쟁할 때, 자신의 명리정을 위해 수련생과 정면 혹은 배후에서 충돌하고 힘겨루기를 할 때, 겉보기에는 법을 수호하는 것 같지만 그 심태는 이미 일의 본질을 소홀히 하고 자신의 맞고 틀림만을 증명하고 있는 것이다.

수련생들이여, 생각해 본적이 있는가. 이는 개인을 수호하는 것이고 자아를 수호하는 것이지 대법을 수호하는 것이 아니다. 우리는 수련생과 자신, 대법의 전체 국면을 위해 책임져야 하겠는가 아니면 자신이 어느 한 개인을 ‘자비롭게’ 대했는지에 초점을 맞춰야 하는가? 다른 수련생의 법에 있지 않은 언행에 대해 경고할 때, 우리는 그에게 안으로 찾고 수련을 엄숙하게 대하라고 권고할 것인가, 아니면 인정에 이끌려 표준을 낮추고 그의 외적인 표현을 단편적으로 긍정함으로써 대법 파괴 언행에 시장을 줄 것인가? 과분하게 치켜세우는 것은 그 사람을 죽이는 것과 같다는 말이 있듯이 그가 자신을 심각하게 반성하고 바로잡지 않는다면 어디까지 팽창하겠는가? 우리의 사람 마음이 그를 치켜세워 마로 만들지 않았는가? 이는 그로 하여금 자신이 잘났다고 여기면서 갈수록 바른 길에서 멀어져 돌아올 수 없게 만드는 것이다.

정말 자비롭다면 그의 진념을 깨워주어 과시심, 색욕에 이끌려 업을 짓고 대법에 죄를 범하지 못하게 해야 한다! 또한 그가 법에 부합되지 않게 했던 일들을 공개하고 더 이상 자신을 과시하고 개인의 명리를 위하는데 마음을 쓰지 못하게 해야 한다! 더 이상 사방으로 돌아다니며 형식적인 ‘정진’의 가상으로 수련생들의 신임을 얻고 수련생 가운데서 밍후이왕에 대한 불만과 난법하는 주장을 퍼뜨리게 해서는 안 된다.

우리는 그가 교란한 수련생들 중에 이미 어떤 사람은 밍후이왕을 인정하지 않다는 것을 알고 있다. 수련생들이여, 아직도 이것이 작은 일이라고 생각하는가?

사부님께서는 ‘싱가포르법회 설법’에서 우리에게 이렇게 알려주셨다. “그렇다면 부처도 오직 사람의 마음만 볼 것이고 사람이 지키는 이 형식을 보지 않을 것이다. 지키는 자체도 모두 집착이고 모두 속인이 내려놓지 못하는 것일 뿐 진정한 부처수련이 아니다.” 우리는 사부님 설법에 대조하여 자신에게 물어야 한다. 우리는 대체 무엇을 수호해야 하는가? 리쉬펑(李旭鵬)의 사례는 베이징에서 처음이 아닌데 매번 모두 추종 하는 가운데서 진정한 자신을 잃은 수련생들이 있었다. 이는 우리의 수련의 출발점에 대한 검증이 아닌가? 이것을 교훈 삼아 자신을 바르게 수련하는 것이야말로 진수제자다.

사부님께서는 ‘미국수도법회 설법’에서 이렇게 말씀하셨다. “사람은 일하는 것을 수련으로 간주하며, 사람은 종교의 형식을 수호하는 것을 수련으로 간주하고 있다. 사실 신은 이러한 것을 전혀 중시하지 않으며 오로지 사람 마음의 제고만을 중시할 뿐인데, 그것이야말로 진정한 제고이다. 그 환경은 단지 수련자, 부처를 믿고 신을 믿는 사람들에게 일종 공동으로 제고할 수 있는 그런 하나의 장소를 마련해 주어 서로 거울로 삼을 수 있게 한 것에 불과하다.” 우리 자신을 반성해 볼 때 리쉬펑과 같은 사람들에게 미혹되는 것은 우리가 일하는 모습을 중시하고 수련인의 근본적인 심성을 중시하지 않기 때문이 아니겠는가?

우리는 한 사람이 수련자가 맞는지를 살펴볼 때 안정적인 심성 표현과 전면적인 상태를 보아야지 한 두 번의 ‘돌출된’ 표현을 강조하지 말아야 한다. 개별적인 사람들은 몸은 대법제자 속에 있지만 마음은 대법 속에 있지 않다. 만약 우리가 눈으로 본 것만 인정하고 법에서 수련해낸 마음속의 ‘진정한 눈’으로 가늠하지 않는다면 형식적인 것과 표상 및 가상에 미혹될 것이다.

사부님께서는 이렇게 가르치셨다. “중생이 대법(大法)을 소중히 함은 자신의 생명을 소중히 하는 것이고 중생에 대한 자비이다.”[정진요지’-정론(定論)] “구 우주의 생명으로서 일체 생명의 요소를 포함하여 정법 이 일에서, 나의 선택 중에서, 모든 생명들이 모두 내가 선택한 대로 그것을 원용(圓容)하고, 당신들의 가장 좋은 방법을 내놓으며, 내가 갖고자 하는 것을 고치려하지 말고 내가 한 말에 따라 그것을 원용하는, 이것이 바로 우주 중 생명의 가장 큰 선념(善念)이다.”(2003년 정월대보름설법)

이에 비춰 한번 생각해 보기 바란다. 한 사람에 대해 ‘자비’하고 옹호하는 것에 비하면 어느 것이야말로 대법제자가 갖춰야할 진정한 자비와 선념인가?

아래 함께 사부님의 설법 몇 부분을 되새겨 보자.

“그러므로 사람들은 일부 것들이 틀렸다는 것을 알면서도 여전히 감정적으로 이런 이지적이지 못한 행위를 수호하고 있다. 이리하여 우주의 진상에 대해 오히려 인위적으로 자신이 자신을 봉폐(封閉)해 버렸다.”(각 지역 설법1-미국 제1차 설법)

“그러나 매 개인마다 모두 자신을 느슨히 해서는 안 되며 또한 남이 대법의 명성에 손실을 조성하는 것을 보고도 무관심하면 안 된다. 이는 당신들에 대한 요구이다. 대법제자로 말하면 여러분은 모두 법을 수호하고 법을 실증하고 있지 않은가? 이것이 바로 당신들의 책임이다.”(각 지역 설법7-2006년 캐나다법회 설법)

“바로 사람의 마음이 너무 많았기 때문이며, 문제가 나타났을 때 수호한 것은 자신이었지 법이 아니었다.”[각 지역 설법10-따지웬(大紀元)회의 설법]

이상은 개인적인 깨달음으로서 법에 있지 않는 부분은 수련생께서 지적해 주시기 바란다.

문장발표: 2015년 3월 5일
문장분류: 수련마당
원문위치: http://search.minghui.org/mh/articles/2015/3/5/305908.html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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