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대법 홍전시기에 내가 겪은 이야기

사존님께서 국내에서 법을 전할 때의 약간의 에피소드

글 / 둥베이 대법제자 더윈(德云)

[밍후이왕] 눈 깜빡할 사이에 사존님께서 세상에서 법을 전하고 정법한지 22년이 지났다.

사부님께서는 대궁(大穹)을 바로잡기 위하여 그 해에 법을 전할 때 아주 많은 고생을 하셨고 남쪽과 북쪽을 오가면서 많은 신적(神迹)을 남기셨다. 사당이 통치하는 사회 속에서 이 대법을 널리 전하셔서 수억의 사람들이 법을 얻고 심신이 건강해지고 혜택을 입고 인연 있는 사람들이 진정하게 수련해 올라갈 수 있게 하셨다.

“명성공파 정말 신기하구나!”

초기 사부님께서는 사람들이 파룬궁을 알게 하기 위해 손을 내밀어 많은 사람들에게 병을 치료해 주셨다. 우리 집 친척에만 이런 영광을 지닌 사람이 3명이나 된다.

1992년 여름, 고모부의 장이 유착(腸粘連)되었는데 병원에서는 방법이 없는지라 죽음을 기다리는 수밖에 없었다. 다행히 사존님께서 고쳐주셨다. 작은 고모는 심장막이 탈락되었는데 사부님께서 보완해 주셨다. 만약 병원에 가면 10여 만 위안을 써야 하는데 그렇다고 꼭 치료할 수 있다는 보장도 없다. 셋째 삼촌은 어려서부터 몸이 약해 잔병치레가 많고 사는 것이 아주 고통스러웠다. 여러 가지 민간요법을 썼지만 효과가 없었는데 사부님께서 치료해 주셔서 건강한 신체를 얻게 되었다. (전에 이 사례들을 모두 써냈다).

1993년, 사부님께서 베이징 동방건강 박람회에 참가하셨다. 회의 기간에 사부님께서는 신변의 제자들을 거느리고 인연 있는 사람들을 위해 손을 내밀어 신체를 조정하고 병을 치료해 주시면서 사회에 파룬궁을 보급하여 사람들이 되도록 빨리 파룬궁을 알게 하셨다. 친척은 소식을 듣고 암에 걸린 이웃을 데리고 베이징에 왔다. 군사 이원(誼文) 출판사의 주소에 근거해 베이징에서 도처에 수소문한 끝에 1주일 만에 줘쟈좡(左家莊) 회의장소를 찾아 냈다. 이 환자는 이미 걸을 수 없어서 가족들에게 들려서 회의장에 들어 왔다.

병을 치료하려는 사람들이 매우 많아 2개의 부스에 한꺼번에 사람들을 다 수용할 수 없어서 옆 부스까지 밀려갔다. 그런데 이 환자는 기어코 이 대사님만 찾았다. 사부님께서는 현장에 사람이 많은 것을 보고 외부의 조용한 장소를 찾아 이 환자에게 신체를 조정해 주시고 청리하고 정화해 주셨다. 이 환자는 바로 걸을 수 있었다. 직접 목격한 사람들은 모두 경탄을 금치 못했다.

손이 닿자 병이 제거되고, 묘수회춘(妙手回春)이라, 사부님께서는 손을 젓는 사이에 환자가 고통에서 벗어나게 해 주셨는데 구원된 사람은 이루 헤아릴 수 없었다.

즉시 파룬궁은 베이징에서 단번에 센세이션을 불러일으켰고 도시 전역에서 유명해졌다. 박람회에서 이 대사님은 박람회의 최우수상 ‘변연과학진보상 (邊緣科學進步獎)’과 대회의 ‘특별금상’을 받았고 “군중들의 환영을 받는 기공사” 칭호를 받았다. 이번 박람회에서 리훙쯔(李洪志) 대사님은 가장 많은 상을 수상한 명성 기공사이시다. 세 번의 보고회는 모두 만원을 이루었고 회의장의 복도와 난간에도 사람들로 빈틈이 없었다. 매번 이 대사님의 보고가 끝나면 전 회의장에는 우뢰와 같은 박수소리가 오랫동안 그칠 줄 몰랐고 이 대사님에 대한 칭찬이 끊이지 않았다.

파룬궁에 대한 열기와 주목은 지속적으로 상승했는데 두 글자 신기!였다. 이는 무슨 공파인가? 많은 사람들은 일제히 말한다. “명성공파!”

대법을 처음 접하다

93년, 친척은 박람회 기간에 ‘파룬궁(法轮功)’ 비디오 테이프를 구매했는데 간단한 소개가 있고 공을 가르치고, 보고회 및 사부님께서 환자들에게 병을 치료해 주신 전형적인 사례가 기자의 인터뷰로 나와 있었다.

94년 정월, 친척이 우리 집에 오면서 비디오테이프와 플레이기(VCR)를 가져 와 우리에게 보게 하고 연공을 따라 배우라고 하였다. 그 기간은 우리 집이 법을 얻을 수 있는 인연의 시작이었다. 친척은 나에게 알려 주었다. “비디오 테이프를 보고 따라서 연공하면 신체는 조정될 수 있는데 아주 신기해요!”

집에 네 명이 따라서 배우고 연공했다. 매일 저녁 비디오테이프에 따라 배우고 연공했는데 눈은 이 대사님이 친히 가르치는 동작과 요령을 보면서 귀는 연공음악을 들었다. 모두 대법의 자비로운 에너지와 강대한 에너지 장을 갖고 있었다. 공(功) 중에 여러가지 반응이 다 있었는데 덥고 춥고, 배설하고 토하고, 기침하고 머리가 아픈 등 소업과 신체를 정화하는 증세가 모두 나타났지만 어찌된 일인지 몰랐다.

사부님께서 나의 천목을 열어주셨다. 눈을 감고 연공할 때 부처, 보살, 산수 등 도안을 모두 보여주셨다. 고공에서는 보살이 법기 목탁을 가지고 한 번 또 한 번 중생의 머리를 때렸다. “탁탁” 소리는 업이 구르고 굴러서 굴러온, 우리처럼 오랫동안 봉폐되어 길을 잃어버린 자들을 깨워주고 있었다. 영혼이 진감하고 몽롱한 가운데 대법 사부님께서 중생을 구도하러 오셨다는 것을 느꼈다.

어느 날, 나의 눈앞에는 멀리서부터 가까이로, 금빛이 번쩍이고 머리카락은 곱슬곱슬하며 손은 제인(結印)하고 있는 부처의 좌신상(나중에 사부님의 법신임을 알았다)이 서서히 표류하는 것을 보고 내심 희열을 느꼈다. 마음 깊은 곳에서 전체 생명에 대한 행복감이 넘쳐나 다른 사람에게 부처를 보았냐고 물었다. 원래 이것은 자비로운 사부님께서 제자를 제도하기 위해 한 번 또 한 번 나를 점오하여 진상을 보여주신 것이다. 정말 행운이었다.

사존님께서 우주대법을 전하심에 내 몸과 마음은 법광 속에 푹 빠져 있었다. 같은 해 3월에 사부님께서 친히 가르치는 학습반 티켓 7장을 예매하여 4월 28일 – 5월 8일 까지 창춘 제7기 학습반에 참가했다.

법연(佛緣)이 있는 것은 화(化)해 온 것이다

1994년 4월 28일 – 5월 8일, 나는 사부님께서 창춘에서 개최한 제7기 파룬궁 학습반에 참가하는 행운을 가졌다. 참가하려는 사람은 특별히 많아서 약 3천 명이었는데 공간이 제한돼 있어 학습반은 낮과 저녁반으로 나뉘어 모두 열흘이었다.

1994년 4월 27일, 우리 온 가족과 친구는 창춘시에 도착하여 잠시 친척집에 머물렀다. 첫 날, 우리 10명은 무궤도 전차를 탔는데 회의장으로 가는 도중에 정전 되는 바람에 모두 내려서 도보로 갔다. 약 3리쯤 걸어서야 회의장 – 지린대학 명방궁(鳴放宮) 강당에 도착할 수 있었다.

시간이 촉박하여 우리는 지각할까봐 두려워 다급히 길을 재촉했다. 누구도 경추증식으로 뇌신경을 압박하는 환자가 한 분 있다는 것을 생각하지 못했다. 그녀는 창춘에 온 지 한 달이 넘었는데 병원에서 천 위안 넘게 썼지만 낫지 않았고 돈도 다 써버렸다. 이 대사님이 전수반을 연다는 소식을 듣고 따라 왔던 것이다. 말하자면 신기한데, 병고에 시달려 죽니 사니하며 아파서 벽을 찧던 이 환자는 사람들과 똑같이 빨리 걸었다. 머리의 아픔을 느끼지 못했고 모든 불편한 증세가 다 사라졌으며 강당에 들어서자 모두 나았다! 원래 오는 길에서 사부님께서는 그녀의 신체를 조정해 주신 것이다. 10강 강의가 끝나자 건강한 사람과 같게 되었다.

학습반에 있는 나날에 매일 강의 후 휴식시간에 우리 몇몇 수련생은 문 앞의 장소에서 사부님 곁에 서서 사부님을 보았다. 눈앞의 사부님은 아주 친절하고 상냥하셨으며 조금도 틈이 없었다. 사부님의 얼굴빛은 불그스레하고 피부는 특별히 섬세하고 매끄러웠으며 전신에서 말로 형언할 수 없는 특별함이 베어 나왔다. 기질이 장중하고 표정과 태도가 침착했는데 정말 매우 젊고 영준했다. 회색 양복을 입고 흰색 와이셔츠를 입었는데 30세쯤 되어 보였다. 매일 강의가 끝날 때면 우리는 오랫동안 떠나기 싫었고 계속 사부님 옆에 좀 더 오래 있고 싶고 한번 더 보고 싶어했다. 매번 사부님께서 승차해야 우리는 회의장을 떠났다.

그 해 5월 1일 오전, 주최측은 수련생들의 요구에 따라 사부님과 기념사진을 찍을 것을 제의했고, 사부님께서는 흔쾌히 동의하셨다. 매 지역의 수련생들은 순서대로 자리를 잘 잡고 사부님께서는 한 팀 한 팀 연이어 수련생들과 기념사진을 찍었다. 우리 지역 수련생들과 사진을 찍을 때, 사부님께서 아버지를 위아래로 한 번 훑어 보셨다 (당시에 어찌된 일인지 몰랐다), 후에 사부님께서 설법하신 것을 알게 되었다. “많은 수련생은 예전에 내가 속인에게 병을 치료해주는 것을 본 적이 있는데, 나는 손을 댈 필요가 전혀 없었다. 내가 당신을 보기만 해도 좋아졌다. 당신을 볼 때 어떤 것을 내보냈는데, 나는 내 신체의 어떠한 한 부위에서라도 모두 신통을 내보낼 수 있다. 내보낸 후 당신의 그곳은 즉시 좋아진다.”[1] 이것은 매우 확실한 것이다.

그 때 아버지는 노년에 아들을 잃어 밤낮으로 아들을 생각하여 병이 났고 매일 눈물로 지내면서 도처에 사람을 찾아 수소문하였다. 온 식구들은 걱정했지만 누구도 방법이 없었다. 이번에 아버지도 와서 사부님께 가르침을 얻으려 했지만 사부님께서 매우 바쁘신 것을 보고 물어볼 기회가 없었다. 하지만 사부님께서는 무엇이나 다 아시고 강의 중에서 설법하셨다. “어떤 사람은 그의 자녀를 내려놓지 못하여 어떠어떠하게 좋았는데 그가 죽었다 하고, 그의 어머니가 어떠어떠하게 좋았는데 역시 죽었다고 그는 그지없이 비통해 하는데, 그야말로 후반생에 마치 그것을 따라가려는 듯하다. 당신은 생각해 보지 않는데, 이것은 당신을 시달리게 하려는 것이 아닌가? 이런 형식으로 당신을 편안히 지내지 못하게 한다.”[2]. “속인은 아마 이해할 수 없을 것인데, 당신이 만약 이런 것에 집착한다면 당신은 전혀 수련할 수 없다. 그러므로 불교 중에는 이 내포가 없다. 당신이 수련하려고 하면 사람의 정(情)을 내려놓아야 한다.”[2] 아버지는 이 단락의 설법을 들을 때 자신을 말한다는 것을 알았다! 강대한 에너지 장의 가지 하에 확실히 마음속의 번뇌를 모두 잊었다. 사진을 찍던 그날에 거처에 돌아와서 늙으신 아버지는 말씀하셨다. “정말 신기하구나, 대사님이 나를 관할하신다. 울고 싶지 않아 졌어. 대사님께서 나와 같은 수련생을 제도하기에 너무 힘들고, 너무 무겁다, 대사님은 정말로 대자대비 하시다!”

우리 집 친척 중에 13명이 사부님께서 친히 전수한 학습반에 참가하였다. 마치 80년대에 공능이 있는 한 친척이 말한 것처럼. “우리 중국에서 이후의 진짜 신, 진짜 부처, 진짜 보살은 모두 사람의 몸에 내려 올 것이다. 장래에 가장 큰 부처님이 우리 동북에서 나실 것이다. 너의 집은 가장 큰 부처님과 연분이 아주 크다. 너의 집에서 그 중 한 사람이 다른 사람들을 이끌고 잘 수련할 수 있을 것이다(사부님을 도와 대법을 널리 전하고 인연 있는 사람을 이끌어 연공함을 가리킴).” 나는 법을 얻은 후에야 그 사람이 한 말이 진짜라는 것을 알게 되었다.

왜냐하면 당초에 학습반에 참가한 수련생 다수는 병이 있는 것으로서 일이 있으면 속으로 매듭을 풀지 못하고 사부님께서 야속한 인연을 풀어주시기를 바라는 등등이었기 때문이었다. 병을 제거하고 신체가 건강하기 위해서 온 사람들은 학습반에서 사부님께서 설법하신 법리를 잘 알아듣지 못하고 완전하게 이해하지 못했다. 다만 좋다는 것을 알고, 도리가 있고 듣고 싶다는 것 뿐이다. 그 10일반에서 신체는 매일 아주 큰 변화가 발생되고 있었다.

하지만 어떤 사람은 눈을 멀거니 뜨고 파룬은 어떻게 넣어 주는 것이냐고 물어 본다. 나는 전반 법을 전하는 마당(傳法場) 상공 꼭대기에 큰 파룬 하나가 있는 것을 보았다. 작은 파룬이 내려오면 사람은 순식간에 얻는다(즉 넣어준 것이다). 파룬은 영성이 있는 것으로서 사람을 안다. 연분이 없으면 파룬은 몸에 올라가지 않는다. 파룬좡파(法輪樁法)를 배울 때, 큰 파룬은 두 팔 사이에서 회전하면서 보라색 조리개를 발산한다. 파룬이 아랫배 부위에서도 도는 것을 느낄 수 있는데 부동한 수련생들에게 신체를 조정해 준 후 파룬을 넣어 주는데 아주 분명하게 보았다. 사부님께서 “또한 금빛 찬란한 法輪(파룬)과 이 법 전반의 많고도 많은 것을 당신 몸에 넣어주어 당신으로 하여금 수련할 수 있도록 하는가 하면, 당신에게 비할 바 없이 더러운 그 신체를 정화(淨化)해 줌은, 이는 천지개벽 이래 해준 사람이 없는 일이다.”[3] 마음속으로 기쁨을 느꼈는데 정말 너무 행복했다.

10일 학습반이 끝났다. 집으로 돌아오는 길에 나는 줄곧 속으로 사부님께 말씀드렸다. 파룬따파의 법리는 나의 마음속 깊이 넣어 지고 나의 생명 속에 스며들었습니다. 사부님께서 마지막 수업에서 설법하신 것을 염두에 두어야한다. “사실 여러분은 이미 주력군의 역할을 하고 있으며 특히 이 기간 동안에 당신은 확실하게 주력(主力)이 되었다.”[4] 1년 후 진정한 홍법 수련 중에서 비로소 대법을 선양하는 선두에 서서 이 지역에서 작용을 일으켜야 한다는 것을 알게 되었다. 관과 난을 넘어야 할 때, 집착을 내려놓지 못해 고민할 때, 사부님과 함께 찍은 사진을 보곤 한다. 그것은 자신이 제자로서의 자랑이고 그것은 이전의 인연이다 ! 모든 고민이 사라졌다. “하루를 스승으로 모시면 평생 아버지로 모신다.” 수련자에게 더는 전통속의 스승의 존엄이 아니라 생명을 초월한 귀속으로서 수련의 길이며 도이며 광명이다.

18년이 지났다. 비바람의 세례에, 길바닥에 헛되이 보낸 세월도 있었지만, 파룬궁 수련생들이 사존님과의 상봉의 희열은 우리가 대법의 견증인임을 운명적으로 정해 놓았다.

대법 홍전 초기 연공장을 조직

1995년 이른 봄인 3월말, 몇몇 공우(功友)들이 우리에게 연공장을 조직해야 한다고 제안했다. 사람이 점점 많아지고 재료를 구매하는 것도 편리하고 학습반에서 돌아온 지 일 년이 다 되어 의무 보도소를 신청 건립하는 조건이 기본적으로 충족했다. 현재 2명의 공우가 자원적으로 보도원(공을 가르치는 자원 봉사)을 담당하기로 했다. 그들은 창춘 본부에 신청하러간 김에 신 수련생을 도와 일부 책, 자료, 연공 테이프, 설법 테이프를 가져와 사람들이 법을 얻고 수련할 수 있게 도와주었다. 이 또한 조사 홍법에 미약한 힘이나마 보태고 덕을 쌓는 일이기도 했다.

4월에 사람들 모두가 고대하던 사부님의 세 번째 책 ‘전법륜’이 왔다. 우선 다만 ‘전법륜’ 50권, ‘파룬궁’ 30권(수정본)과 비디오 테이프, 연공 테이프를 모실 수 있었는데 사람들이 법을 배우려는 염원을 충족시킬 수 있었다.

7월 여름 방학기간에 창춘 본점에서 각 시, 현 보도소의 보도원들을 소집하여 훈련하였다. 북으로 하얼빈, 남으로 선양까지 각 보도소에서 3, 4명이 1주일간의 훈련을 받았다. 지점은 지린대학 회의장이었다. 사람들을 조직하여 매일 사부님의 설법 테이프를 보고 실외에서 연공했다. 그때 사부님께서는 각 지역 보도소에 한 세트의 설법 테이프를 주셨다. 제자들에게 공을 전하는 방식에 대해 경고를 주셨다. 각 지역으로 돌아간 후 보도원이 어떻게 현지의 홍법을 이끌어 공을 가르치며 그리고 비용을 받지 못한다. 교실이나, 회의실을 빌려 혹은 수련생의 집에서 돌아가며 비디오 테이프를 틀고 어떻게 법공부를 조직할 것인가 상의하고 교류한다. 그리고 매 사람에게 복사본 ‘사부님께서 광주 보소도에서 설법’ 및 ‘베이징 보도원 회의에서 정법의견 설법’을 두 권 나누어 주셨다. 사람들은 어떻게 공을 전하고, 공을 가르치고, 교류하며 법에서 어떻게 해내야 수련인가를 상의하고 교류하였다. 단체로 법공부 하고 전체적으로 제고하여 인원이 신속히 발전하여 각 진에서 끊임없이 연공장을 건립하고 농촌 수련생 집에 가서 비디오 테이프를 틀어 공을 가르치고 책을 모시고 자료를 구하는데 도움을 주었다.

내가 법을 얻은 지 5개월이 되는 어느 날 흐릿한 꿈속에서 한 목소리(사람을 보지 못했음)가 물었다, 일만 하고(아르바이트) 돈을 벌지 못하는 일이 있는데 당신은 하겠습니까? 당시 나의 주왠선(元神)은 생각도 하지 않고 불쑥 말했다. “하겠습니다!” 당시에 무슨 일(업무)을 하는지도 모르고, 깨어나서도 (무슨 일을 할 건지) 깨닫지 못했다. 후에야 사존님의 선택이라는 것을 알게 되었다. 나는 본 지역의 보도원이 되었다. 이런 일이 바로 힘을 들이고 돈을 벌지 못하는 것이다. 하지만 우리가 성취하는 것은 위덕인데 이는 얼마나 많은 돈으로도 바꿀 수 없는 것이다.

1996년 대법이 홍전할 때, 중원대지에 한동안 바람이 잦아들고 날씨가 좋은 시기가 있었다. 각 연공장의 신 수련생이 점차 증가되어 대략 한 달에 한 번씩 창춘에 가서 책, 설법 비디오, 연공 비디오를 구해 왔는데 얼마를 구매해도 늘 부족했다. 처음에는 한 사람이, 후에는 두 사람, 세 사람 나중에는 택시를 타고 책을 구매하러 갔는데 점차 발전하여 책을 구매하는 환승역을 형성하였다. 여기의 수련생은 모두 친척 친구가 있는데 자료를 얻은 후 모두 자신의 친척 친구들에게 전해 주었다. 이렇게 친척이 친척에게 전하고 친구가 친구에게 전하는 것이 가장 진실한 것이다. 우리의 대법은 널리 전하는데 광고가 없다. 이런 형식으로 전국 각지에 전해졌는데 우리 여기에 와서 책과 자료를 가지고 다시 전한 지역으로는 헤이룽장(黑龍江), 쟈무스(佳木斯), 하얼빈(哈爾濱), 지린(吉林), 더후이(德惠), 숭웬(松原), 허난(河南), 허베이(河北), 간쑤(甘肅), 상하이, 하이난성(海南省), 본 지역 주변의 인근 현, 그리고 대만의 한 공우가 친척집에 놀러 왔다가 비디오 테이프를 구매하여 대만에 가져갔다. 이렇게 표면적으로는 우리가 입을 놀리고 다리를 움직인 것이지만 진정하게는 사실상 사부님의 법신이 하고, 연분이 있고 인연 있는 사람을 찾는 것이었다.

우리는 각자 모두 속인사회의 직업이 있다. 휴일을 이용해 자발적으로 외지에 가서 책과 자료를 구매해 오는데 시간과 비용문제에서 자신에게 엄격히 요구하였고 사존님의 경고를 엄격히 준수하였다. 그 속에서 돈 한 푼 벌지 않았다. 돈과 시간에서 자신은 기꺼이 지불하였고 몇 년을 하루와 같았다. 자신의 미약한 월급에서 차비를 대고 길에서 아껴 먹고 아껴 쓰면서 모든 것을 간단히 했다. 자신의 집, 전화, 텔레비전, 비디오 플레이어를 이용하여 신 수련생에게 비디오를 틀어주고, 몇 년을 하루와 같이 신 수련생에게 공을 가르친 후 책과 자료가 있으면 연공장에 와서 고정적인 법공부 시간을 조직하고, 연공장을 조직하여 다른 마을, 진 및 본 시 주변의 인근 현으로 보급하였는데 자전거를 타고 4,5십리를 왕복하는 것은 자주 있는 일이며 수차례 왕복하면서 연공을 해야 건립할 수 있었다.

사존님게서는 제자들에게 경고하셨다. “신 수련생은 반드시 도와주어야 하고, 일부 사람이 문의하면 인내심 있게 잘 해석해 주어야 한다. 우리 연공장의 모든 수련생은 중생을 널리 제도해야 하는 이런 책임이 있다. 무엇을 중생을 널리 제도하는 것이라고 하는가? 중생으로 하여금 법을 얻게 하는 것이야말로 진정하게 중생을 널리 제도하는 것이다.”[4]

99년 ‘7.20’ 중공의 박해가 시작된 후, 경찰, 국보, 형사경찰, 검찰원의 체포과(批捕科)에서도 재물을 긁어모으는 면에서 문장을 만들려고 하였다. “재료는 얼마에 사왔습니까? 여비는 어디에서 왔고, 밥 먹고, 물마시고, 자동차 대여비, 책을 구매하러 다니는 차비는 어디에서 났습니까?” 나는 말했다. “당신에게 알려주면 믿을 수 있겠습니까? 우리는 자신의 월급에서 비용을 대고 책, 자료는 한 푼도 보태지 않고 얼마에 샀으면 집에 와서 얼마에 팔지요. 그리고 판매에서 발생한 모든 손실은 자신이 책임지지요!” 그들은 듣고 나서 말했다. “불가사의하네요. 당신들 대법은 무엇을 바라는 겁니까?” 나는 말했다. “바로 중생들이 선을 향한 그 마음을 바라는 것입니다.” 이 사건은 입안하지 않았다.

영원히 마멸되지 않는 홍법 편장

97년도 3월, 창춘 보도소에서 “사부님 전법 5주년 그림과 서예, 사진 작품 전시회”를 준비했다. 준비 기간은 30일이었다. 우리 지역은 시간에 맞춰 크고 작은 전시품 근 200점을 보냈다. 작은 것은 한 장의 그림, 시구 몇 구절에서 큰 것은 간판 한 장의 크기가 1.8미터 이다. 전시품 두 점은 대회 인터뷰 호평을 받았다. 우리 지역에서 오백 명(人次)이 전시회를 방문했다. 총 열흘간의 전시회에 매일 만 명을 받아 들였다. 전례 없던 성회였다. 2004년 8월 4일에 밍후이에 투고하였는데 기존의 문장에 자세한 기록이 있다. “강남과 만리장성 이북 지역(塞北)을 진감시킨 성회 — 창춘 파룬따파 서예 사진 작품 전시회”

홍법 성회 전체적으로 제고하여 수련을 촉진

1998년 3월, 수련생들은 상의하였다. 이전에는 모두 외지 수련생들의 법회 교류를 보았다. 우리는 보도소를 건립한 지 3년이 되었는데 아직도 대형 법회를 한 번도 열지 않았다. 본 지역에서 법을 배우고 연공하고 홍법하고 수련하고 전체적으로 제고하는데 촉진작용을 일으키게 하기 위해, 진정으로 수련을 촉진할 수 있는 장엄한 법회를 개최하려 하였다. 각종 준비는 나누어서 진행하였다. 장소를 임대하고 각 연공장의 수련생들에게 심득교류 원고를 쓰라고 알려 주었다. 수련생의 심득체험 담론 모임을 어떻게 조직할 것인가에 대해서는 사존님의 설법에 따르기로 하였다. “우리는 선택적으로 할 수 있으며 사전에 그가 뭘 말하려 하는가를 들어 보아야 한다. 더욱이 우리가 일부 대형회의를 개최하는 데는 반드시 발언 원고를 심사해야 한다. 만약 한 수련생이 말 한 마디를 잘못한다면 우리 이 일은 자칫하면 문제가 생길 수 있다.”[5]

원고를 심사하면서 각 방면에서 대표성이 있는 문장을 선택했는데(초, 중, 고) 학생을 포함하여 노동자, 농민, 간부, 공정사, 보도원, 법공부 팀장 등 부동한 유형별로 20명이 4시간에 걸쳐 발언하였다. 법회는 사존님의 시구 “법을 배우고 법을 얻어 배움을 견주고 수련을 견주나니 일마다 대조하여 해 내어야 수련이로다.”[6]로 수련생들의 수련을 지도하였다. 대법수련 중에서 사상경지가 승화하고 도덕이 되돌아 올라오며 병을 제거하고 신체를 건강하게 하는 데로부터 고층차 수련과 같은 전체적인 제고를 목적으로 하였다.

마음속에 간직한 기억

때는 1998년 7월 26일 이었다. 나는 한 명의 보도원, 노수련생의 신분으로 매우 행운스럽게 사존님께서 창춘 보도원 법회에서의 설법에 참가하여 사존님께서 보도원, 노수련생에 대한 부탁과 무한한 사랑의 가르침과 기대를 공손히 들었다. 그때부터 수련의 길에서 자신을 잘 수련해야 할 뿐만 아니라 더욱이 자신의 책임이 중대함을 깊이 느꼈다. 매번 “창춘 보도원법회에서의 설법” 이 책을 들 때마다 항상 마음을 격동시키는 그 장면들을 잊지 못한다. 귓가에는 사부님의 간곡한 가르침이 울리고 항상 눈물이 솟구쳐 흐른다.

회의장은 창춘 샹그릴라 국제 호텔 강당이었다. 26일 오후, 법회에 참가하는 수련생들이 사면팔방에서 연이어 호텔 앞에 모여서 입장하였다. 순서에 따라 우리는 제일 먼저 입장하였다. 강당에 들어서자 우선 눈에 들어온 것은 연단의 전면과 주위에 가득한 생화였는데 눈부시게 아름다웠다. 회의장은 엄숙하고 경건하였으며 온화하고 상화로워 이전의 모든 법회와 모두 달랐다. 당시 나는 매우 격동하고 흥분하여 옆의 수련생과 말했다, 사부님께서 친히 회의장에 임하신다고. 하지만 옆의 수련생들은 모두 믿지 않았다(왜하냐면 사부님께서는 이미 미국에 정착하고 계셨기에 이번 법회는 무슨 내용인지 누구도 몰랐던 것이다). 나는 말했다, 당신들 기다려 보세요. 꼭 그럴 것이에요. 입장이 끝나고 전체 회의장은 쥐 죽은듯 조용했고 빈 좌석이 없었다.

다섯시 정각에 자비로우신 은사께서 갑자기 회의장 입구에 나타나셨다. 삽시간 전체 회의장에 우레와 같은 박수가 터졌다. 사부님께서는 미소를 지으시고 침착하고 힘 있는 걸음걸이로 회의장에 들어오셨다. 사부님께서 지나가시는 통로 양쪽의 수련생과 제자들은 앞다퉈 사부님과 악수 하였다. 사부님과 멀리 떨어진 수련생과 제자들은 약속이나 한 듯이 쌍수 허스(合十)하여 사부님께 불가의 예를 올렸다! 수련생이 사부님께 생화를 바쳤다. 사부님께서는 힘 있는 걸음으로 강단에 오르셔 단수 입장하여 수련생과 제자에게 인사를 건넸다. 긴 박수 후 사부님께서는 수련생들에게 앉으라고 손짓하셨다.

사부님께서는 사부님을 좀 더 똑똑히 보고 싶어하는 제자들의 마음을 알고 계셨다. 그리하여 사부님께서는 좀 높이 앉으셨다. 우리는 모두 비할 바 없이 숭경하고 기쁜 심정으로 열중하여 사부님의 매 한 마디 설법을 공손히 들었다. 나에게 가장 크게 느껴진 것은 사부님의 설법 중 말씀이셨다. “이 자리의 보도원·노수련생들은 여러분 자신이 아직 인식하지 못한 많고 많은 위대한 일을 했는데 진정으로 위대한 일이다.”[7] “당신들은 자신이 한 일이 비교적 간단한 일인 것처럼 느끼고, 또한 속인의 지도자 일처럼 어떤 보수가 있는 것도 아니다. 당신들은 완전히 모두 자신의 열정과 대법에 대한 인식에 의거하여 하고 있는데, 보기에는 간단하고 간단하여 무슨 경천동지(驚天動地)할 일이 아니다. 그러나 내가 당신들에게 알려주는데 속인 이쪽의 표현이 평범할수록, 아마 당신들은 보지 못하겠지만, 당신들이 수련한 이 경지 중의 표현은 정말로 굉장한 것이다. (박수소리) 다시 말해서 당신들은 당신들이 한 일을 그렇게 간단하게 보지 말아야 한다. 당신들이 기왕 이 일을 하게 된 이상 그것을 잘해야 한다.”[7] 여기까지 듣자 한 가닥의 따뜻한 흐름이 전신을 뚫고 지나가면서 이 일에 대한 신성한 감정을 불러 일으켰다. 왜냐하면 어떤 때는 사람의 협애한 관념으로 사람을 대하고 일을 하기 때문에, 어떤 때는 여러 가지 모순에 부딪쳤을 때 씬씽(心性)을 지키지 못하고 사존님께서 요구하신 대선(大善), 대인(大忍)에 따라 하지 않았기 때문이다.

사부님께서 설법하셨다. “흔히 우리 수련 중에서도 어떤 요란한 것이 없으며, 모두 속인의 각종 모순의 표현 중에서 우리의 心性(씬씽)을 연마(魔煉)한다.”[7] 때문에 지금까지 나는 줄곧 사부님의 가르침에 따라 하려고 노력하였다.

십여 분 휴식할 때 제자들은 모두 사존님의 주위에 모여들어 사존님께 수련 중에서 부딪치는 여러 가지 문제를 물어 보았다. 사부님께서는 줄곧 미소를 지으시며 인내심 있게 해답을 주셨다. 법회는 5 시간 이상 지속되었다. 사람들은 모두 더 듣고 싶어 했다. 이미 저녁 10시가 넘었지만 피곤하지도 배고프지도 않았다. 법회가 끝날 때 수련생 제자들은 몹시 아쉬워하면서 사부님을 배웅해 드리고 오랫동안 떠나기 싫어했고 행복과 기쁨에 잠겨 있었다. 나중에 주최 측 제자의 말을 들으니 이번 법회에 임대한 강당은 사부님께서 돈을 지불하셔서 수련생 제자들의 돈을 한 푼도 쓰지 않았다고 했다.

주 : [1] 리훙쯔(李洪志)사부님저작 : ‘法輪大法 로스앤젤레스시법회 설법’[2] 리훙쯔사부님저작 : ‘전법륜’[3] 리훙쯔사부님저작 : ‘法輪大法 유럽법회 설법’[4] 리훙쯔사부님저작 : ‘파룬따파의해(法輪大法義解) – 창춘(長春) 法輪大法(파룬따파) 보도원을 위한 설법’[5] 리훙쯔사부님저작 : ‘파룬따파의해(法輪大法義解)전국 일부 보도소 소장들을 위한 광저우(廣州) 설법’[6] 리훙쯔사부님저작 : ‘홍음 – 착실한 수련’[7] 리훙쯔사부님저작 : ‘法輪大法 창춘보도원법회 설법’

문장발표: 2015년02월15일
문장분류 : 수련마당>온고명금(溫故明今)>사부님의 은혜
원문위치 : http://www.minghui.org/mh/articles/2015/2/15/304629.html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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