글/ 동심(同心)
[밍후이왕] 99년 이전의 어린 대법제자들은 성장한 후 속인사회에 오염됐고 많은 아이들이 ‘중사가 도를 듣는 것(中士聞道)’이 됐거나 심지어 더 이상 수련하지 않게 됐는데 이러한 상황은 비교적 보편적이다. 만약 근원을 해결할 수 없다면 이 문제는 아마 줄곧 존재할 것이며 심지어 한 연령대 대법 수련자들을 망칠 수 있다. 본문은 이에 대해 여러분과 법리에서 교류하려 하며 타당치 못한 곳은 지적을 바란다.
사부님께서는 말씀하셨다. “어떤 때는 아이가 산에서 표현된 상태가 좋지 않은데, 나는 집에 있는 부모가 수련을 잘하지 못했다는 것을 알고 있다.”[1]
주위 수련생과의 접촉 중에서 우리는 어린 대법제자들의 문제의 근원은 모두 가족 내 어른 수련생에게 있음을 발견한다. 속인 중에서도 이렇게 말한다. “아이는 바로 부모의 그림자고, 부모의 결점은 모두 아이에게서 반영되어 나온다. 아이의 부족함은 모두 부모에게서 근원을 찾을 수 있다.”
중국에는 ‘3살이면 어린 시절을 볼 수 있고 5살이면 말년까지 볼 수 있다(三歲看小,五歲看老)’라는 속담이 있는데 어린 아이의 지능과 인격발전은 세 살 전이 아주 중요한 시기이며, 5살 아이의 표현으로 이미 그가 앞으로 자라서 무슨 모양새인지를 알아볼 수 있다는 뜻이다. 서방학자들이 발견한 바로는 0~5세까지의 경험이 사람의 일생을 결정한다고 한다. 즉 5세 이전에 어떤 어린 수련생은 이미 응석받이로 자라서 망쳐졌는데 근원은 역시 부모에게 있다.
1. 어른과 아이가 법을 빗나간 표현
(1) 어른의 법공부가 단지 표면에만 머물러 있다면 아이는 내심으로부터 법을 인식할 수 없다.
많은 사람들이 법공부를 함에 책을 다 읽고 나면 그만인데 일과 생활 속의 실제 수련 중에서는 여전히 자신의 방식을 고집하면서 자신이 속인 중에서 형성된 사상에 따라 행동한다. 또 어떤 이는 단지 감성적으로 대법의 가장 표면적인 뜻을 이해할 뿐이다. 대법에 대한 어른의 인식이 이성적으로 승화하지 않는다면 아이도 장래에 해낼 수 없게 된다.
여기에는 연령과 학력의 제한이 없는바, 학력수준이 높지 않은 많은 노년 수련생들은 법에서 정진하며 내면에서 외면까지 모두 대법제자의 면모를 체현해내는데 아이에 대한 도움 역시 아주 크다.
어떤 수련생은 아이에게 “창궁 무한히 머나(蒼穹無限遠) 생각 움직이니 눈앞에 다가오고(移念到眼前)”를 외우도록 가르치는데, 아이가 묻기를 “‘이념(移念)’이 무슨 뜻인가요?” 하니 수련생은 “속인의 관념을 없애버려야만 비로소 법의 더욱 깊은 내포를 깨달을 수 있단다”라고 하며 한참 이야기해 주었다. 아이가 “저는 또 ‘이념(移念)’이란 일종의 공능인가 했어요”라고 말하자 수련생이 듣고서 마음속으로 깜짝 놀라며 점화를 받고 깨우쳤다. “그래, 네가 깨달은 게 맞구나. 저층차의 관념을 없애버려야만 고층차의 신통이 나타날 수 있는 거야. 하지만 또 더욱 깊은 내포가 그 속에 있단다.” “그럼 또 무엇이죠?”라고 아이가 묻자 수련생은 “그건 우리가 착실히 수련해야만 비로소 깨달을 수 있는 거야”라고 말해주었다. 이렇게 법공부를 한다면 아이는 스스로 흥미를 느끼게 될 것이다.
사실 아이에게는 어른의 그런 관념이 없고 선천적인 본성이 있기에 오성이 결코 어른에 비해 낮지 않다. 만약 아이가 법공부 중에서 이성적으로 승화하는 즐거움을 체험할 수 없다면, 장차 커서 속인 중에서 그 즐거움을 찾게 될 것이다.
(2) 어른이 대법 중의 ‘고생을 겪다’의 내포를 이해하지 못한다면, 아이는 ‘고생을 낙으로 삼다’와 더욱 요원해질 것이다.
‘전법륜(轉法輪)’ 중에는 많은 곳에서 ‘고생을 겪다’를 언급했다. 많은 사람들이 읽고 나서 그대로 지나쳐버리며 또 자신과 대조하지도 않는다. 이것은 착실히 수련하지 않는 전형적인 사례에 속한다. 아이에게 ‘원만은 불과(佛果)를 얻나니 고생을 낙으로 삼노라’를 외우도록 가르치지만 어찌 보면 마치 동요를 부르듯 돼버렸다.
어떤 수련생은 심성 중의 ‘고생을 겪다’의 내포를 이해하지 못하고 심성수련 자체가 비어있기에 대법 중의 ‘고생을 낙으로 삼다’의 경지에 동화될 수 없다. 어떤 사람은 생활이 부유하지 않아 때로는 어쩔 수 없이 고생을 겪게 되지만 이럴 때 마지못해 ‘고생을 낙으로 삼다’를 입에 달고 있지만 그것은 결코 내심의 본성에서 우러나온 것이 아니다. 즉 표현되는 것이 바로 만약 고생을 겪지 않을 수 있다면 갖은 방법을 다해(인위적으로) 고생을 겪지 않는데, 혼자서 발정념할 때 일반적으로 가부좌하지 않으며(다른 사람과 함께 있을 때는 체면 때문에 할 수 없이 가부좌함), 게으름을 부릴 수 있다면 최대한 게으름을 부리고 잘 먹고, 잘 놀 수 있는 기회가 있다면 꼭 시간을 많이 들이고 돈을 많이 써가며 그 속의 즐거움을 누린다. 그들은 속인생활의 즐거움을 누리는 것에 습관이 됐지만 정진하는 중에서의 충실함과 경지 제고로부터 비롯된 즐거움을 체험할 수 없다. 이러한 수련생들이 길러낸 아이는 그녀보다도 더 나태하고 산만하며 더욱 더 향락을 즐긴다.
이러한 경우 만약 가정환경이 좋지 못한 수련생이라면 아이를 나쁜 버릇이 들게 만들 것이고, 가정환경이 좋은 수련생이라면 아이를 응석받이로 키워 속인보다도 못하게 만들 것이다. 이와 같은 말과 행동의 가르침을 받아 자라난 어린 수련생은 책을 외우고 법을 배우는 것이 모두 표면 글자에만 머물러 있고 고생을 겪는 것은 좋은 일임을 더욱 이해하지 못한다. 그러므로 주동적으로 고생을 멀리 하고, 잘 먹거나 잘 입는 것에만 신경 쓰며, 놀이에 탐닉하고 돈을 쓰기 좋아한다. 고생을 겪으면 바로 견뎌내지 못한다. 더운 날씨에 다른 사람은 괜찮으나 그들은 에어컨을 켜지 않고서는 견뎌내지 못하며 심지어 에어컨 온도를 아주 낮게 설정하고 두꺼운 이불을 덮고 잠을 잔다. 기회가 있으면 돈을 요구하고 즐거움을 누려야만 비로소 기뻐하며 그렇지 않으면 기분이 나빠하며 성질을 부린다. 하지만 어른 수련생은 이에 대해 오히려 타협하거나 종용한다.
병업으로 소업(消業) 시 똑같이 39도 고열이지만 정진하는 어린 제자는 부모의 격려 하에 일어나 연공하고 법을 외우면서 하루를 지낸다. 이들의 부모 역시 소업 시 이렇게 정진하며 지나온 것이다. 하지만 응석받이로 키운 꼬마제자는 부모가 달래야 하고 누워있어야 하며 부모가 책을 읽어주고 아이를 도와 발정념을 해줘야 하며 맛있는 음식을 해주어야 하는데 이렇게 며칠 동안이나 끌어서야 겨우 버텨낸다. 하지만 그들의 부모 또한 병업을 소업할 때 역시 누워서 사부님의 설법을 들으며 그렇게 버텨냈던 것이다.
이렇게 응석받이로 자라난 아이가 커서 병업관을 어떻게 넘길 수 있겠는가? 수련의 길에는 그처럼 많은 고생이 있는데 그가 정념으로 대할 수 있겠는가? 이러한 아이는 고생을 겪을 수 없기에 아주 조그마한 고생이라도 그들에 대해 말한다면 엄청 큰 것이다.
사부님께서는 “고생을 너무 크게 겪는다면 당신은 곧 수련할 수 없다.”[5]고 말씀하셨다.
어린 수련생들은 어릴 적부터 대법에 걸어 들어왔으나 대부분 고생을 겪는 것이 두려워 주동적으로 대법을 떠났고 오히려 속인 중에서 안락을 찾고 있다. 사실 고생스러운 것은 자신의 업력에 의해 조성된 것이다. 그들이 수련하지 않고 속인 중으로 돌아가서 잠시 가뿐해지는 것은 유혹에 불과하며, 그 이후에 오는 고난이 더욱 클 것이다. 왜냐하면 속인은 소업함에 사부님의 도움이 없이 모두 스스로 감당해야 하기 때문이다.
부모는 흔히 아이에 대한 지나친 사랑을 스스로 느끼지 못할 뿐더러 승인하지도 않는다. 최후에 이렇게 아이를 망가뜨려놓고는 그제야 깨달을지라도 이미 늦었으며 방법이 없다.
(3) 고질적인 속인의 ‘착함’과 ‘좋음’의 관념이 어른과 아이가 법을 이해하는데 있어 장애가 된다.
사부님께서 말씀하신 “부모에 대해, 자녀에 대해서도 모두 잘 대하고, 곳곳마다 다른 사람을 고려하는 이 마음은 곧 이기적인 것이 아니며, 모두 자선지심(慈善之心)이고 자비(慈悲)이다.”[5]를 이해함에 있어 어떤 수련생은 이 ‘좋음’이란 속인 중에서 아이에게 잘 먹이고 잘 입히며 잘 놀게 하는 것이라 생각해서 아이가 돈을 요구하면 바로 주고, 아이에게 편안하고 유쾌한 생활을 보내도록 해주며, 아이가 고생을 겪지 않게 하는 것이 비로소 좋은 것이라고 생각한다. 사실 이것은 속인의 좀 높은 경지 중에서 본다 하더라도 역시 좋지 않은 것으로 속인마저도 “근심, 걱정을 하는 사람은 부지런해져 살아나가게 되고 안일을 추구하는 사람은 게으름을 피우게 되어 살아나갈 수 없게 된다”고 말하는데 이것은 영원히 변치 않는 인간세상의 법칙이다. 수련 중에서 속인 층차를 초월해 본다면 더욱 나쁘다. 끊임없이 아이로 하여금 자신의 덕을 낭비하게 하고 아이의 근기와 심성을 망가뜨리는 것이다.
이러한 아이들은 “어떤 어린이 제자는 한 여름동안 아이스크림을 사먹지 않고 모은 30여 위안의 돈을 대법 진상자료를 만드는데 쓰라고 보태줬다”라는 말을 들었을 때 자신과는 상관없는 일이라고 여길 것이고, 이것이 얼마나 훌륭한 일인지 분간하지 못하며 그것은 어린 수련생이 고생스러운 수련 중에서 과위(果位)를 실증하는 과정임을 이해하지 못할뿐더러 더욱이 우주의 뭇 신들이 왜 이에 대해 칭찬이 자자한지 알지 못한다. 그들 중 개별적인 사람은 따라서 자신도 대법을 위해 돈을 좀 공헌하기는 하지만 주로는 여전히 자신의 향락을 누리는데 사용하며 그 뿌리를 캐보면 자아중심적인 것으로 이러한 심성기초는 모두 부모가 아이를 아이 중심으로 응석받이로 키운 데에서 비롯된 것이다.
(4) 어른이 대법의 ‘인(忍)’을 이해하지 못한다면 아이는 더욱더 ‘인’을 해내지 못하고 제멋대로이며 하고 싶은 대로 한다.
사부님께서는 수차례 ‘인(忍)’에 대해 말씀하셨다. “화가 나 원망하고, 억울해하면서 눈물을 머금고 참는 것은 속인이 해를 입을까 염려하는 참음이다. 화를 내거나 원망함이 전혀 생기지 않으며 억울함을 느끼지 않는 것이야말로 수련자의 참음이다.”[6]
처음에 속인의 ‘억지로 참음’을 해내는 것도 괜찮다. 필경 참았으니 말이다. 끊임없이 자신을 엄격히 요구하는 가운데서 서서히 수련자의 ‘참음’을 해낼 수 있게 되는데 이것은 하나의 승화 과정이다. 하지만 어떤 수련생은 법에서 정진하지 못하고 장기적으로 법에 대한 표면인식에 머물러 있기에 참음 역시 가장 표면적인 것만 해낼 수 있다. 대법 중에서 말하는 ‘수련자의 참음’, ‘태연히 버리다’, 이러한 참음을 부모가 해내기 어렵다면 아이는 더욱 해낼 수 없다.
어떤 때 아이가 고생을 좀 겪고 집에 돌아왔는데 아이 본인은 아무 말 없으나 부모가 먼저 가슴 아파한다. 어떤 때 아이가 학교에서 억울함을 좀 당했는데 부모는 아이가 박해를 받은 것처럼 여기며 상대방을 찾아 이치를 따지는데 어떤 수련생은 정말로 남과 싸우기까지 한다. 이것은 개인 수련에서 넘어야 할 관과 정법 중에서 사악을 없애는 것을 동일시한 것이다. 예를 들어, 만약 아이가 ‘다른 사람의 가랑이 밑을 빠져나가는 치욕’의 고험을 겪으면 수련하는 부모는 오히려 달려가 보검을 빼앗아서라도 남과 필사적으로 싸우려는 것이다. 아이가 이러한 말과 행동의 가르침을 받아 자란다면 무엇이 대법 수련의 ‘인’인지를 이해하지 못한다.
어떤 어린 수련생은 생일이 되면 부모가 백화점에 가서 선물을 사준다. 아이가 가장 평범한 옷걸이 10개를 고르며 집에 마침 옷걸이가 부족한데 이것을 생일선물로 하겠다고 말한다. 수련생이 그럼 또 무슨 선물이 더 필요하냐고 묻자 아이는 이것만으로 족하다고 말해 두 사람은 기쁘게 옷걸이를 사서 집에 돌아온다. 이에 대해 만약 어떤 수련생이 “친부모 맞아요? 너무 하네!”라고 생각할 수도 있는데, 무릇 이런 생각을 움직인 사람이라면 모두 마땅히 자신의 고질적인 관념의 기점이 어디에 있는지 찾아봐야 한다. 이것은 아이를 도와 자아를 내려놓는 것을 배우게 하고 도처에서 타인을 배려하는 습관을 기르게 하며 선타후아(先他後我)하는 경지에 도달할 수 있도록 하는 것이다. 그것은 입으로만 말해서 해낼 수 있는 것이 아니라 실제 행동을 통해 해내는 것이다. 이것이 태연히 내려놓는 가운데서 착실한 수련을 통해 과위를 실증하는 것이 아니란 말인가? 이러한 아이는 어려서부터 성인이 될 때까지 기본상 부모가 걱정할 필요가 없으며 학교에서도 선생님과 친구들로부터 모두 칭찬이 자자하다.
그러나 많은 어린 수련생은 평소 집에서 보호를 받는 중심 위치에 놓여 있기에 생일 때면 더더욱 유아독존이 되어 어른에게 선물을 요구하며 주지 않으면 도저히 안 될 지경이다. 어떤 아이는 아주 어릴 때부터 이러한데 평소에 이것을 가지겠고 저것을 가지겠다고 하며 어른이 주지 않으면 떼를 쓰고 심지어 울고 불며 야단법석이다. 사실 이때 속인 중에서의 가장 좋은 교육방법은 바로 아이를 만족시키지 않고 좌절교육을 실시하는 것인데 이렇게 함으로써 아이에게 욕망을 내려놓는 것을 배우도록 한다. 이렇게 키운 아이야말로 비로소 제멋대로 하지 않고 비로소 자아를 단속할 줄 알게 된다. 하지만 많은 부모 수련생들은 끊임없이 아이의 요구를 만족시켜 주며 평소 자그마한 일에 대해 전혀 개의치 않는데 사실 이러한 ‘구애되지 않은 사소한 것들’이 아이에 대해 말하면 오히려 모두 아주 큰일로서 아이의 심성 기초를 망가뜨리게 된다.
위와 같은 수련생들은 아이가 물건을 요구하면 바로 주고 아이가 야단법석이면 따라 주면서 아이를 만족시키지 않으면 오히려 그 스스로 견디기 어려워하는데 이렇게 키워낸 아이는 곧 무엇을 갖고 싶으면 가져야 하고, 무엇을 하려 하면 해야 하는데, 이는 대법의 요구와 마침 상반대가 된다. 아이가 커서 가지려는 물건(각종 욕망)이 자신의 만족을 채우지 못할 때 그가 참을 수 있겠는가? 마음속으로 자신을 단속해 태연히 버릴 수 있겠는가? 사부님께서 말씀하신 ‘속인 중의 각종 욕망과 각종 집착심을 버릴’[5] 수 있겠는가? 이러한 아이들이 장래에 ‘중사가 도를 들음’이 된다면 그래도 괜찮으나 많은 이들은 스스로 수련하지 않게 된다. 실제로 그의 마성은 어릴 때부터 어른의 지나친 사랑과 종용 하에 조금 조금씩 팽창되어 이미 너무나 커졌고 불성을 완전히 덮어버렸는바 그 스스로 주동적으로 대법을 떠난 것이다. 속인들도 “방자함이 실패된 인생을 만든다”고 말하는데 수련하는 어린 대법제자라면 더욱더 방자한 마성에 의해 좌우지되어서는 안 된다.
만약 부모 수련생이 더욱 깊이 대법을 이해하고 대법 표준에 따라 아이를 키운다면 이와 같은 결과를 초래할 수 있겠는가?
(계속)
주)
[1] 리훙쯔(李洪志) 사부님 경문: ‘2014년 샌프란시스코법회 설법’
[2] 리훙쯔 사부님 시가: ‘홍음(洪吟)-넒음(洪)’
[3] 리훙쯔 사부님 저작: ‘정진요지(精進要旨)-경지(境界)’
[4] 리훙쯔 사부님 시가: ‘홍음(洪吟)-마음고생(苦其心志)’
[5] 리훙쯔 사부님 저작: ‘전법륜(轉法輪)’
[6] 리훙쯔 사부님 저작: ‘정진요지(精進要旨)-무엇이 참음인가(何爲忍)’
문장발표: 2014년 12월 30일
문장분류: 수련마당
원문위치: http://www.minghui.org/mh/articles/2014/12/30/302310.html