글/ 허베이대법제자
1994년 3월 2일, 한 친구로부터 전화가 왔다. “오늘 오후 스좌장 신화구 화시가 군사강당에서 파룬궁(法輪功) 창시자께서 공(功)을 가르치는 학습반을 열어, 공에 대한 보고회를 2시간 갖고 오후엔 방직2공장 구락부에서 ‘9일학습반’을 꾸린대. 그 보고회 입장권을 함께 구입했어. 입장권은 10위안이고, 10일 강의 입장권은 50위안이야”라고 했다.
나는 친구의 소개전화를 받고 다소 망설였다. 왜냐하면 ‘파룬궁’이라, 지금까지 들어본 적이 없었기 때문이었다. 그동안 우리 지역과 또 베이징에서 개최되는 무슨 기공보고회나 학습반과 같은 곳에 참가해 봤는데, 그들은 모두 전국에서 유명한 대사급(大師級) 인물이라며, 하루 이틀 학습반에 참가하는 데에 1백 위안 심지어 몇 백 위안이나 받았다. 하지만 그것들을 듣고 나서 무엇을 배웠는지 알 수도 없었다. ‘그런데 파룬궁은 열흘에 50위안만 받는다니, 그다지 어려운 기공도 아니겠구나’라는 생각과 함께 별로 배울게 없을 것이라고 지레짐작했지만 이미 친구가 보고회 입장권을 구입했다고 하니 “그럼 같이 가자”라고 대답했다.
오후에 극장 문 밖에서 친구와 만나 함께 입장했다. 그런데 입장하고 보니, 다른 기공처럼 그렇게 거창한 선전이 없었으므로 어쩐지 좀 썰렁하다는 분위기를 느꼈다. 또한 우리의 좌석은 오른쪽 뒤 귀퉁이어서 위치가 좋지 않다고 생각했다. 왜냐하면, 당시 사람들은 모두 기공사와 가까울수록 장이 강하다고 여겨 누구나 늘 앞자리를 다투었기 때문이다.
보고회가 시작되자 사회자가 파룬궁(法輪功) 창시자 리훙쯔(李洪志) 대사에게 강의를 청했다. 척 보니 젊고 멋지게 생겼는데 훤칠한 몸매에 온 얼굴에 상냥한 모습을 한 사람이 강단으로 올라왔다. 사부님께서는 “파룬궁은 불가공법이라”는 역사를 간단히 소개한 후, “파룬궁은 병을 치료할 수 있다. 그러나 파룬궁은 병을 치료하려고 전해진 것이 아니다. 그것은 높은 층차로 사람을 이끌기 위해서다”라고 하셨다. 리 선생님은 또 말씀하셨다. “불가는 연분을 따진다, 파룬궁이 병 치료를 하지 않지만, 오늘 여러분이 오게 된 것은 연분이므로 당신이 수련을 하든, 안 하든 오늘 회의장에 온 매 사람에게 모두 한 가지 병을 치료해 줄 수 있다. 만약 본인에게 병이 없으면 가족의 병을 생각해도 된다.”라고 리 선생님은 말씀하셨다. “여러분에게 신체를 조절해 줄 때는 파룬(法輪)을 내보내는데 파룬은 당신의 병소 부위에서 돌면서 당신에게 신체를 조절해 줄 것이며 바로 당신의 병을 치료해 주는 것이다.”
리 선생님은, 먼저 자신이 치료할 병을 생각하라고 하셨다. 그 때 나는 만성 담낭염을 앓고 있었다. 리훙쯔(李洪志) 선생께서 강단에서 오른 손을 휘젓는 것이 보였는데 순간 나의 담낭부위에 얼음물이 주입된 것 같더니 그것이 담낭부위에서 돌았다. 극장 안에서는 삽시에 우레와 같은 박수소리가 터져 나왔다. 사람들은 모두 감각이 있었고 이 대사님을 만난 것을 모두 행운으로 여겼다. 파룬궁이 이렇듯 신기했으므로 모두들 감탄을 금치 못했다. 철석같이 확고한 이 사실은, 금액을 놓고 좋고 나쁨을 가늠했던 나의 관념을 철저히 동요시켰던 것이다.
잇따라 나는 사부님의 10일 학습반에 참가했다. 첫 날 저녁 자전거 보관소에서 한 줄로 자전거가 바닥에 넘어져 있는 것을 보았다. 이때, 사부님께서 나타나시더니 넘어진 자전거를 한 대 한 대씩 일으켜 세우시는 것이었다. 나는 몹시 격동됐다. 나는 파룬궁사부님께선 친히 정과 선을 체현하신다고 생각했다. 강당에 입장하여 자리를 잡고 앉았다. 이때에 나는 이미 기공보고회에서는 앞자리에 앉아야 한다는 고정관념이 개변되어 어디에 앉든 다 마찬가지라고 여기게 되었다. 강의시간이 되자 사부님께서는 제 시간에 강단에 앉으셔서 하시는 첫 말씀이 바로 “여러분께서 지각하지 말기 바라며, 늦게 오면 다른 사람에게 영향이 있다”고 하셨다. 나는 방금 본 장면을 연상하자 갑자기 한 가지 생각이 불쑥 솟아났다. ‘사부님께서 생각하시는 것은 늘 다른 사람이다.’
사부님의 강의에는 원고가 없었으며 물 한 모금도 마시지 않으셨다. 사부님께서는 앉아서 말씀하셨는데 잠시라도 뭘 생각하시는 모습을 보지 못했다. 그렇게 자연스럽고 유창했다. 사부님 설법을 듣는 것은 마치 라디오에서 옛말을 듣는 것처럼 나를 푹 빠지게 했다. 나는 사부님께서 내가 알고자 하고 내가 묻고자 하는 문제들을 모두 말씀하셨다고 생각했다. 예전에 아예 인식하지 못했고, 또한 전혀 인식할 수 없었던 것도 모두 명명백백하게 말씀해주셨다. 사부님 강의를 듣는 것은 일종의 혜택이었다. 두 시간의 시간은 눈 깜짝할 사이에 지나가 버렸다. 나는 빨리 다음날 사부님의 가르침을 계속 듣기를 고대할 수밖에 없었다.
첫 날 설법 후 파룬따파 제1장 공법을 배웠는데 사부님께서 친히 파룬궁의 공법을 강의하신 후 노수련생이 공의 시범을 보여줬다. 당시 내가 눈을 감고 한창 공을 연습하고 있는데 누가 나의 동작을 바로잡아 주는 감각을 느끼고 눈을 떴더니 사부님께서 바로 나의 곁에 있는 수련생의 동작을 바로잡아 주시고 계셨다. 이는 내가 참가했던 다른 공법에서는 전혀 생각도 할 수 없었던 일이다. 10일강의가 끝나자 나는 내가 이미 이전의 내가 아님을 느꼈다. 나의 세계관이 변했고, 수련이란 바로 반본귀진(返本歸眞) 하는 것임을 알게 됐다. 파룬궁은 바로 내가 바라던 것이었다.
설법이 막 끝날 무렵, 한 수련생이 사부님과 사진을 찍자고 제안했는데 이는 사실 전체 수련생들 모두의 큰 염원이었다. 사부님께서는 즉석에서 수련생들의 청을 들어주셨다. 그리고 “스스로 직접 촬영하는 것이 비용을 절약할 수 있어 제일 좋다”고 하셨다. 사부님께서는 참으로 곳곳에서 수련생들을 배려하셨다. 사진을 찍는 그 날, 근 천여 명이나 되는 수련생은 수강증의 순번에 따라 매 50명을 한 팀으로 도합 19개 팀으로 나뉘어 사부님과 함께 사진을 찍었다. 그 중에는 또 아주 많은 사람이 단독으로 사부님과 함께 찍기도 했다. 사부님께서는 늘 수련생의 요구를 들어주시느라 오고가시며 바쁘게 움직이셨다.
나는 이 하루를 가장 성대한 명절로 보았다. 실제로 수련생들은 모두 나와 똑같은 심정이었다. 모두들 가장 정결한 옷을 입고 격동된 심정으로 사부님과 함께 사진을 찍어 가장 아름다운 기념을 남겼다. 또한 자신에게 가장 아름다운 시절을 견증하고 회억할 수 있는 기념을 남겼다. 사부님께서는 중생에게 자비롭게 대법을 널리 전하신 역사의 견증을 남기신 것이다.
사진을 나누어 줄 때 또 30전을 돌려주었다. 그건 이 일을 맡은 수련생이 사부님 말씀대로 될수록 수련생들을 위해 배려한 것이다. 당시 외지 수련생은 이미 모두 돌아갔으므로 나중에 우편으로 사진을 모두 우송해 주었다. 이 사진은 나의 대법 수련 20년을 동반해 주었다. 비록 중국공산당의 광적인 가택수색, 잔혹한 납치와 박해를 겪었지만 나는 오늘날까지 줄곧 소중히 간직했다. 매번 사부님의 정결하시고 소박한 옷차림새, 먼 길에 수고하시는 사부님의 사진을 볼 때마다, 늘 사부님께서 우리에게 주신 일체에 대해 우리는 영원히 조금도 보답할 길이 없다는 생각을 하곤 했다.
1994년 3월 8일 저녁, 학습반은, 사부님께서 수련생의 물음에 해답하신 후 헤어지기 아쉬운 가운데서 원만히 끝났다. 이때로부터 대법은 영원히 스자좡에 뿌리를 내렸으며, 대법수련생들의 마음속에 남아 스자좡에서 꽃피고 열매 맺었으며 널리 발전했다. 이 글을 쓰는 과정에서, 사부님과 함께 있었던 아름다운 시절을 추억하면서 나는 줄곧 눈물을 흘렸다. 그야말로 불은호탕(佛恩浩蕩)인 것이다!
문장발표 : 2014년 12월 27일
문장분류 : 수련마당
원문위치 : http://www.minghui.org/mh/articles/2014/12/27/301998.html