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明慧법회| 험난한 정법의 길, 서약을 간직하고 수련을 처음처럼 하자

글/ 랴오닝 대법제자 혜심(慧心)

[밍후이왕]

자비롭고 위대하신 사부님 안녕하세요!

수련생 여러분 안녕하세요!

18여 년 동안 사부님의 자비로운 고도(苦度)와 가호 속에서 12년의 억울한 감옥살이 박해를 지나면서 사부님께서 대륙 대법제자를 위해 개최한 특수한 법회에 참여할 기회가 없었다. 출옥한지 일 년여 만에 마침내 자신이 수년간 수련체득과 깨달음을 종합해 자비롭고 위대하신 사부님께 보고하고 수련생들과 교류할 수 있게 됐다.

‘파룬배지’로 득법하고 법을 배우면서 홍법하다

나는 헤이룽장성 변방에 있는 옛 도시에서 태어나 고등학교를 졸업하고 불문으로 귀의해 거사가 됐으며 1993년에 현재 거주하는 도시로 이사하게 됐다.

1996년 7월 친구의 이발소에서 한 아저씨가 ‘배지’를 가슴에 달았는데 내 관심을 불러일으켰다. 아저씨는 이는 ‘파룬배지[法輪章]’라고 알려줬고 파룬궁의 표지라면서 나에게 배워보라고 권했다. 나는 “저는 불가의 것을 찾고 있습니다”라고 대답했고 아저씨는 “이것이 불가의 것일세”라고 알려줬다.

아저씨 내외간은 모두 파룬궁 수련생이었고 나에게 ‘전법륜’ 보서를 안내해주었다. 이 책을 읽고 나서 이것이 바로 내가 생생세세로 찾고 있던 것임을 깨달았다. 이어서 나는 사부님의 9일 학습반에 참가했고 그때부터 나에게는 진정한 사부님이 계셨고 진정한 대법제자가 됐다.

수련은 좋은 사람이 되는 것부터 시작이며 사상과 행위를 바르게 해야 한다

그때는 생존을 위해 아무런 친척이 없는 도시에서 야간술집에서 돈을 벌어야 했다. 이런 난잡한 환경에서 좋은 사람이 되는 건 매우 어려웠다. 사부님의 경문 ‘수련자 금기’에는 이렇게 적혀있다. “돈에 집착함은, 재물을 구하는 거짓 수련이라, 교(敎)를 파괴하고 법을 파괴하여 백년을 헛되게 보냄이니, 부처수련이 아니다.” 이 말씀에 나는 깨어났고 현재 이런 직업은 속인 중에서 역시 도덕이 부패된 이후의 산물임을 알았다. 그래서 나는 다시 정상적인 일자리를 찾았다. 대법은 나의 심령을 정화해주었고 홍진세상에서 깨어나게 했으며 나는 세파의 흐름에 따라 내려가지 않게 됐다.

수련을 시작해 나는 하루도 빠짐없이 단체 법공부에 참가했고 매일 이른 새벽 공원으로 연공하러 나갔다. 얼마 안 돼 우리집이 법공부팀 장소로 됐다. 남편도 수련했고 우리의 홍법으로 주변 이웃이 적잖게 법을 얻어 수련을 시작했다. 나중에 또 우리 집 인근에 연공장을 개설했다. 폭염이나 엄동설한에 관계없이 비가 오나 바람이 부나 나와 남편은 이른 새벽이면 녹음기와 ‘파룬따파’ 글자가 새겨진 현수막을 들고 연공장에 나가서 수련생들과 함께 연공했다. 신 수련생이 오면 동작을 가르쳤다. 점차 나의 고향에 계신 부모님, 시어머니, 올케, 서방님이 모두 대법 수련으로 들어왔다.

나는 전문점 팀장이며 대법으로 자신에게 엄격히 요구해 탐오하지 않았다. 가게 사람들은 모두 나를 신임했고 월급 배분을 처리하도록 했다.(사람마다 매월 실적에 따라 다름) 날마다 법공부하고 법을 외웠으며 심신은 불법 속에 용해됐다. 떠돌이 아이가 집을 돌아가는 길을 찾았다. 나의 심정은 매우 기뻤고 걸음도 뛰어서 가고 싶었다. 그리고 법회와 광장에서 진행된 단체 대 연공에 참가했다.

그때 크고 작은 연공장은 이 도시의 모든 공원, 잔디밭, 주민구역, 길가에 널렸으며 이른 새벽이면 ‘파룬따파’ 현수막과 파룬 깃발, ‘파룬궁 간단한 소개’가 이 도시에서 가장 아름다운 풍경을 형성했다.

피비린내 나는 바람에 맞서 베이징에 법을 실증하러 가다

갑자기 하룻밤 사이에 급격한 변화가 일어나 1999년 7월 20일 아침 많은 보도원이 지난밤에 붙잡혀 간 것을 알았다. 그래서 수련생들은 시정부에 청원을 갔다. 광장에는 대량의 경찰이 집결했고 특수경찰도 있었다. 그들은 붙잡고 때리며 우리를 학교에 감금시킨 후 상세한 주소를 기록했다. 잠깐 사이에 피바람이 일었고 거짓말이 온 천하를 뒤덮었으며 모든 언론매체에서 끊임없이 방송됐다. 장(江) 마귀의 질투로 인한 잔혹한 파룬궁 박해는 억에 달하는 좋은 사람을 정부의 대립 면으로 몰고 갔다. 그 수단은 참혹해 보기 어려우며 행위는 공포적이고 그들이 목적을 이루려는 방식은 마치 하늘이 무너질 듯한 기세였다. 그때 공기 중에도 사악의 기운이 충만했고 숨쉬기조차 힘들었다.

7월 22일 사부님에 대한 유언비어 모함과 수배령이 내려진 것을 보고 나는 베이징에 가려고 결정했다. 그 당시 베이징으로 가는 모든 노선은 다 봉쇄됐으며 지나는 관문마다 엄격히 검사했다. 공항 대기실에서 나는 수련생 여러 명이 붙잡히는 것을 보았으며 나는 순리롭게 비행기를 탈 수 있었다. 처음 비행기를 타보는 나였지만 아래로 야경을 감상하려는 마음은 조금도 없었다.

그해 베이징의 7월은 기온이 최고 40여도로 올랐고 천안문 광장, 지하통로 곳곳마다에 대법제자였다. 나는 목욕탕 혹은 지하실에서 잤고 기회만 되면 타지 수련생과 교류했다. 어떤 수련생이 말했다. “법을 바로잡지 않으면 집에 돌아가지 않을 겁니다!” 경찰, 사복경찰, 특무, 특수경찰, 경찰차는 베이징 광장, 통로, 큰 거리 작은 거리에 가득해 분위기가 삼엄하고 공포스러웠다. 우리는 날마다 천안문 광장에서 돌아다녔으나 어떻게 해야 할지를 몰랐다. 3일 후 나는 집으로 돌아왔다. 가게 사람들은 모두 나를 이해해주었고 특히 점장은 자원적으로 나의 업무를 대신해주었으며 대법책도 보호해주었다.

하루는 수련생 W가 대륙 수련생이 광저우에서 열린 법회의 일부 발언고를 가져왔다. 그 중 한편의 글에서 깊은 감동을 받았고 내가 만약 걸어나와 대법을 실증하지 않으면 더는 대법제자의 자격이 안 됨을 깨달았다. 대법이 모함을 받고 사부님께서 악독한 유언비어 공격을 당하는데 대법제자로서 더는 집에 숨어서 법공부할 수 없으며 걸어나와 대법을 실증하는 것이 대법제자로서 유일한 선택임을 깨달았다. 나는 사직하려 했고 점장과 사장은 거듭 만류했다. 그들은 나 혼자 가서는 소용이 없으며 만약 효과가 있는 일이라면 함께 가주게다고 말했다. 내가 말했다. “정성이 지극하면 돌에도 꽃이 핍니다.” 나는 반드시 가야 했다.

2000년 2월 나와 남편은 다시 베이징으로 법을 실증하는 길에 올랐다. 우리는 금수교(金水橋)에서 연공하다가 붙잡혔다. 10여일 후 나는 자유를 얻었고 남편은 불법적으로 노동교양소에 납치됐다. 같은 해 5월, 나는 수련생과 함께 베이징으로 가서 현수막을 펼쳤다. 금수교에서 ‘파룬따파는 우주의 진리다’라는 3미터 길이의 현수막을 펼쳤는데 다시 붙잡혔다.

나는 불법적으로 우리 지역의 계독소(戒毒所: 마약 중독자 재활원)에 감금됐고 우리는 단체 단식으로 박해를 반대했다. 나는 사부님의 법 “살아 바라는 것 없고 죽어 애석할 것 없네 허망한 생각 다 떨쳐버리면 부처 수련 어렵지 않도다”[1]를 기억하고 있었다. 나는 자신이 법에 용해되어 있음을 느꼈고 이미 생사에 바람이 없었다. 사부님의 가지(加持) 하에 단식 12일 만에 자유를 얻었다. 같은 해 10월에 나는 또 베이징에 갔다. 이번에 함께 간 수련생이 비교적 많았고 밤에 베이징에 있는 수련생 집에서 붙잡혔고 나중에 또 사부님의 가지 하에 자유를 얻었다.

베이징으로 법을 실증하는 중에서 나와 남편은 여러 차례 붙잡혔고 우리 부부는 14년 세월을 갈라져 살았으며 남편은 지금까지 불법적으로 감옥에 감금돼있다.

간수소에서 법을 실증하며 감옥에서 박해를 반대하다

2001년 사람 마음의 교란으로 사악이 틈을 타 자료점이 사악한 경찰에게 수색당하면서 나는 간수소에 납치됐다. 불법적인 심문조사에서 머릿속에는 똑똑한 일념뿐이었다. “나는 대법의 한 입자이며 위력이 비할 바 없다.” 나는 다른 수련생 한 명도 입 밖에 내지 않았다. 그들은 원래 고문으로 다스리려고 했으나 실현될 수 없었다.

나는 간수소에서 감옥 규칙을 외우지 않았고 감옥에서 입는 옷을 입지 않았다. 나는 수련생들과 함께 법공부, 연공, 발정념을 했다. 치약 껍질을 펜으로 삼아 웨이웨이(維維) 콩 분유 포장지에 경문을 베껴 다른 감방과 서로 전했고 그곳 수감자들에게 대법 진상을 알렸으며 많은 사람은 대법이 좋음을 알았다. 나는 노래를 잘하지 못해 ‘원원(媛媛)’이라는 여자아이에게 기타 감방 대법제자에게서 ‘득도(得度)’를 배워 부르게 했다. 배운 후 우리 감방 전원이 따라 배웠다. “속세에 깊이 떨어져, 미혹돼 돌아갈 길 모른다네. 수천 년 윤회 속에서 행운으로 사존의 보도(普度)를 만났네. 제도받을지어다, 제도받을지어다.” 우아한 노랫소리는 사람들의 심령을 씻어주었고 마치 신불(佛神)이 길 잃어버린 아이를 부르는 것 같았다. 일부 수감자는 눈물을 흘렸다….

대법제자로서 사악의 그 어떤 심문도 거절해야 하며 그들에게 협조하지 말아야 맞다. 나는 사람 마음으로 나 혼자서 책임을 감당하면 기타 붙잡힌 수련생에게 형을 감소시킬 것이라 여겼다. 사실은 구세력의 올가미에 넘어간 것이며 그 결과 나는 12년 중형을 받았다.

감옥에서 사악의 저질적인 박해 속에서 갖은 비인간적인 수모를 당했고 나는 감당하지 못하고 사악에게 타협했다. 그러나 몇 시간 후 깨어났고 일념이 나오자 생사를 내려놓기로 결심했다. 3일 후 나는 관련 경찰에게 ‘엄정성명’을 제출해 고문의 시달림 속에서 말한 일체를 전부 폐기한다고 성명했다. 이때 나는 진실로 죽음에서 다시 부활하는 과정을 느낄 수 있었다. 이 과정에서 나는 어떤 이유, 어떤 구실로도 수련, 대법을 포기할 수 없으며 사악에게 타협할 수 없음을 깨달았다. 이지와 명백한 일면은 절대적으로 잘못된 것임을 알았다! 이 양자의 충돌에서 유일한 느낌이라면 바로 사는 게 죽는 것보다 못하며 구차하게 살아감은 일종 치욕이었다. 성명을 제출하고 나는 자비롭고 위대하신 사부님께서 재차 나를 지옥에서 건져내 씻어주시고 나에게 정정당당한 대법제자의 수련심태를 주심을 알 수 있었다. 이런 힘으로 나는 비로소 검은 장막의 길고 긴 12년 세월을 지나올 수 있었다.

12년 동안 내 팔은 고문으로 불구가 됐으나 신기하게 회복됐고 7년 병업 가상의 시달림에서 법리를 깨닫지 못해 단지 소극적으로 감당했으나 조금도 사부님과 법에 대한 확고한 믿음에 동요를 주지 못했다. 정신이 붕괴되는 순간에 또 신속히 의식이 또렷해졌고 정말로 갖은 시련과 고난을 다 겪었다. 그 동안의 가장 힘들고 가장 검은 피비린내 나는 폭력이 가득한 나날에 정신과 육체적인 이중적인 박해 속에서, 정과 사의 결투에서 엎어지고 넘어지면서 나는 또렷하게 의식할 수 있었다. 구세력이 갖은 방법으로 나의 의지를 무너뜨리려고 나를 철저히 훼멸시키려 하고 있음을. 바로 사부님의 자비로, 한번 또 한 번의 가지로, 거센 파도 속에서 나의 손을 잡아 주시어 그 암흑 같은 나날을 지나올 수 있었다.

감옥에서 나는 감옥 규칙을 외우지 않았고 그곳의 학습을 하지 않았으며 평가심사표에도 체크하지 않았다. 사악은 갖은 방법과 수단을 부렸고 나는 바오자(包夾: 수감자로 이뤄진 밀착감시원)의 어떠한 방식도 인정하지 않고 협조하지 않았다.

한번은 소위 ‘학습’을 하라고 했는데 사악한 경찰은 대법을 모함하는 책자를 읽었다. 수련생들은 묵묵히 말이 없었고 나는 마음속으로 매우 괴로워 사악에게 시장을 줄 수 없다고 생각했다. 이튿날 다시 공부하라고 할 때 나는 가지 않겠다고 했다. 바오자는 소위 ‘사상 대대장’에게 달려가 보고했고 돌아와서 말했다. “가지 않으려면 가지 말라!”(사실은 대장의 뜻이다.) 며칠 지나 우리에게 감수를 쓰라고 했다. 이에 나는 숫자 돌림의 타유시(打油詩: 운율에 얽매이지 않는 통속적인 해학시)를 썼다. “일장 허튼소리, 두 손에 피비린내, 세 발 달린 두꺼비, 네 발로 마구 뛰며, 무력 진압[무(武:Wu)는 중국어에서 오(五)와 발음이 같음]하네. 육친을 몰라보고, 호랑이를 타고[말 탈 기(騎:Qi)자와 칠(七)자는 중국어에서 발음이 같음] 내려올 줄 모르는구나. 팔면에 적이 있으나 구구귀진(九九歸眞)이라, 십년 정법으로 백만 제자가 천 가지 고비를 용감히 뚫고 나가네, 만민이 한 마음 되어 나의 사부님을 따라 집으로 돌아간다네!”

나는 늘 ‘사상 대대장’에게 편지를 써 진상을 알렸다. 그녀는 매번 당직 때마다 나를 불러 면담을 했다. 나는 편지에서 공산당은 악당 사령(邪靈)이며 다른 공간에서는 한 마리의 붉은 악룡이라 알려주고 ‘삼퇴’를 권했다. (그때 감옥에서 사부님의 경문 ‘미국 서부 국제법회 설법’과 ‘시카고시 법회 설법’을 보았으나 아직 ‘9평공산당’의 구체적인 내용을 알지 못했다.)

2006년 그녀는 퇴직했다. 어느 한번 물건을 찾으러 온 것을 알고 그녀를 찾아 ‘삼퇴’에 대해 말했다. 그는 “당신이 뭘 알죠? 이 감옥에서 몇 사람이나 탈퇴했어요?”라고 말했다. 나는 있으며 그들은 모두 가명을 사용했다고 말했다. 그녀가 말했다. “당신이 쓴 편지를 나는 다 보관하고 있어요. 종종 꺼내 봐요.” 나는 그녀에게 반드시 ‘삼퇴’를 해야 하며 가명을 사용해도 된다고 알려줬다.

2012년 나는 감옥 내에서 대대를 옮겼다. 내가 불법적으로 감금된 소대의 사악한 경찰은 수련생 A가 일하지 않자 작은 쪽걸상에 앉히는 벌을 주었다. 그가 앉지 않자 억지로 눌렀고 나는 이를 저지하려 나섰다. 수련생 A가 큰 소리로 외쳤다. ‘파룬따파하오(法輪大法好)’ 그러자 그들은 구타했다. 나는 큰 소리로 외쳤다. “때리지 말라!” 위층의 4개 소대의 1소대 수련생 B도 높이 외쳤다. “법을 알면서 법을 위반하면 천리가 용납하지 못한다. 사람을 때리지 말라!” 3, 4소대 수련생도 이쪽을 바라보면서 일하지 않았다. 우리 소대 두 명의 수련생도 일어섰고 위층의 모든 사람이 모두 일하지 않았으며 대법제자 거의 모두가 이 일에 관심을 돌렸다. 그 중에 “사람을 때리지 말라!”고 외치는 사람도 있었다.

일이 지난 후 수감자가 나에게 알려줬다. 그때 그 장면은 너무나 ‘장관’이었다고, 대법제자의 마음이 정말로 하나같았다고. 수련생 A는 독방에 감금됐고 그 시각부터 나는 단식하고 일하지 않는 것으로 수련생 A를 성원했다. 수련생 B도 그 사악한 경찰을 보면 외쳤다. “사람을 때리면 법을 위반하는 것이며 천리가 용납하지 않는다!” 또 감옥 경찰 사무실에 찾아가 사람을 풀어주라고 했다. 다른 소대 수련생도 눈길로 나를 격려했다. 수련생 D는 줄곧 일하지 않았고 얼마 안 돼 나와 같은 소대에 있는 수련생 C도 나의 격려 하에 일하는 것을 거절했다. 수련생 B가 속해있는 소대 수련생 E도 일하지 않았다. 이때 나는 여기까지 왔으니 마땅히 노예 같은 일을 마땅히 거절해야 함을 의식했다.

나중에 수련생 D가 앞가슴에 범죄명이 적힌 배지를 달지 말라고 암시했다. 그때 나는 사람 마음이 올라와 ‘마트에서 물건을 살 때 이 배지가 없으면 사지 못하게 하는데!’라고 생각했다. 얼마나 강한 이기심인가. 그러나 이틀이 지나 나는 자신의 집착을 깨달았고 자신에게 이렇게 말했다. “요만한 이익마저 내려놓지 못하겠는가?” 나는 즉시 배지를 뜯어냈고 다른 사람은 내가 배지를 달았는지 대해 신경 쓰지 않았다.

수련생 C가 일하지 않게 된 후 여전히 그 사악한 경찰은 수련생 C를 작은 걸상에 앉게 했다. 나는 기회가 되면 반드시 바로 잡으려고 마음먹었다. 어느 날 아침 작업장에 도착하니 수련생 C가 서 있었다. 우리는 서로 사선으로 마주했고 나는 그녀를 보았고 그녀는 손가락으로 그 작은 걸상을 가리켰다. 나는 머리를 저었고 앉지 말고 입장하라고 암시했다. 그는 머리를 끄덕였고 발정념을 하라는 뜻임을 알았다. 나는 대장이 오면 반드시 찾아가리라 마음먹었다.

교도원이 오자 나는 일어섰다. 마음이 세차게 뛰었으나 자신에게 이렇게 단속했다. “긴장할게 뭐가 있는가, 무엇이 두렵겠는가? 나는 바르고 사악은 바른 것을 압제할 수 없다!” 마음이 평온해졌고 나는 교도원에게 다가가 그들이 C에 대한 불공정한 대우를 말했고 그리고 내가 일하지 않는 원인을 말했다. 그녀는 상황을 알아보겠다고 말했다. 나중에 수련생 C는 정상적인 걸상에 앉았다. 나중에 수감자가 알려주기를 C는 밤에 감방에 돌아가서 계속해서 일을 하도록 핍박을 받는다고 말했다. 나는 방법을 찾아 그녀와 접촉해 절대 사악에게 협조하지 말라고 알려주었다. 그녀는 밤에 더 이상 일하지 않게 됐다.

수련생과 협력해 검은 소굴에서 사람을 구하다

나는 곧 출옥하게 됐다. 나는 나와 인연 있는 사람을 모두 ‘삼퇴’시키고 싶었다. 그러나 사악은 형사범을 감시해 나와 말하지 못하게 했다. 사부님께서 내 마음을 보셨고 내가 누군가에게 ‘삼퇴’를 시키려 할 때 늘 그 사람과 접촉할 수 있도록 묘하게 배치해주셨다. 예를 들면 식사 시간에 앞뒤로 서게 하거나 그가 나에게 어떤 도움을 청하거나 당직을 그 감방 입구에 서게 하는 등이다. 나는 몇 마디로 그들을 탈퇴시켰고 ‘파룬따파는 정법’임을 기억하라고 알려주었다. 이는 바로 사부님의 자비롭고 고심한 구도이다. 사부님께 감사드린다!

나는 사람 이름과 전화번호를 외우기 시작했다. 나에게는 펜과 종이가 없었다.(모두 수색해 몰수했다.) 그러나 ‘삼퇴’한 사람은 목숨을 나에게 맡긴 것으로 나는 반드시 그녀들을 이끌어나가야 한다.

출옥하기 3일 전에 아래층의 한 대법제자는 죄수를 시켜 나에게 쪽지를 전했다. 거기에는 이렇게 적혀있었다.

“성결한 연꽃이 진흙 속에서 피어 감방 문을 뚫고 나가니 많은 친인들이 영접하는구나.

밝은 등불이 왕자의 귀환을 밝혀주나니 홍진세상은 나를 어찌할 방법이 없다네.

언젠가는 연꽃이 하늘에 오를 것이니 부처의 은혜 호탕하여 온 우주를 밝힐 것이네.

우리는 미소 지으며 다시 모일 것이며 함께 사부님께서 구도해주신 은혜에 감사드릴 것이라네.”

그때 나는 감옥을 나서면 어떤 상황에 어떻게 대처해야 할지 잘 몰랐다. 하지만 이 시를 읽고 가슴이 밝아졌다. 사존의 자비로운 가호에 감사드린다. 나중에 이 시는 ‘감옥에서 서로 격려하다’라는 제목으로 2013년 10월 18일 밍후이왕에 발표됐다. 발표된 시를 보고 나는 그 수련생도 집에 돌아왔음을 알았다. 이 자리를 통해 그 수련생의 격려에 감사드린다!

‘삼퇴’의 홍류에 가입해 광범히 하게 중생을 구도하다

출옥 후 시어머니 집에 머물렀다. 3일째 되는 날 공안국장은 한 여성 및 관할경찰과 함께 찾아왔다. 뜻인즉 나가서 진상을 알리지 말라는 것이었다. 그 여성이 말했다. “이렇게 많은 고생을 했는데 또 시달림을 받겠어요?” 내가 말했다. “당신은 위협하는 건가요?” 국장은 급히 말을 돌렸다. “아니에요, 아니에요…” 잠시 후 그들은 갔다. 며칠 후 그는 또 그 관할 경찰을 데리고 찾아왔다. 그날은 내가 혼자 집에 있었다. 나는 공안국장에게 진상을 알렸다. “현재 많은 변호사가 대법제자에게 무죄변호를 합니다. 왜냐하면 파룬궁 수련은 합법적이기 때문입니다. 대법은 백여 개 나라와 지역에 널리 전해졌습니다. 만약 대법이 좋지 않다면 외국인들이 수련하겠어요?” 나는 또 ‘천안문가짜분신자살사건’과 ‘장자석(藏字石)’(이는 내가 금방 알게 된 것이다) 등 내용을 말했고 그는 매우 열심히 들었다.

세 번째에 그는 두 명의 남자 경찰과 함께 왔다. 나는 우선 마음속으로 발정념하여 그들이 구도되는 것을 교란하는 일체 사악한 생명과 요소를 깨끗이 제거했다. 그리고 그들에게 체계적으로 진상을 알렸다. “파룬따파의 아름다움은 1998년 인민대표대회 노간부들이 파룬궁에 대한 조사에서 알 수 있습니다. 결론은 파룬궁은 나라와 백성에게 백가지 이로운 점이 있어도 한 가지 해로운 점이 없습니다.” ‘4.25’ 진상도 이야기했다. 장쩌민은 왜 파룬궁을 두려워하는지, 대만에서는 몇 십만 명이 수련하고 있으며 파룬궁은 홍콩, 마카오에서 모두 합법적이며, 또 보시라이가 대법제자의 장기를 생체에서 적출한 죄악을 말했다. 그리고 중국공산당의 사악한 본성과 천멸중공(天滅中共), ‘삼퇴하면 평안을 보장한다’ 등을 이야기했다. 공안국장이 말했다. “당신은 나에게 수업해주었네요.”

나는 그들이 명백해졌음을 알았고 당신들 세 사람에게 가명을 지어줄테니 중국공산당에서 탈출하는 게 어떻겠냐고 물었다. 그들은 밖으로 나가려 했다. 세 사람이 함께이니 탈출하는 게 불편할 것이라 생각됐다. 시어머니 집을 떠날 때까지 국장은 더 이상 찾아오지 않았다. 나는 시어머니에게 반드시 기회를 찾아 국장을 탈퇴시키라고 했다. 왜냐하면 그는 진상을 알았기에 탈퇴하지 않으면 너무 유감스럽기 때문이다.

나는 마음을 조용히 하고 계통적으로 사부님의 설법을 공부하면서 자신이 박해당한 원인을 찾았다. 그리고 삼퇴해 사람을 구하는 역량을 더 강화했다. 나는 두 대의 음성전화를 준비해 자동으로 진상을 알리는 외 일대일로 전화를 했다. 전화하는 과정에서 나는 심성을 단련시킴을 직감할 수 있었다. 욕하는 사람, 이치 없이 떠들어대는 사람, 돈을 요구하는 사람, 애인으로 사귀려는 사람, 정말로 갖가지였다. 발정념 외에 나는 자신을 찾고 화를 내지 않았다. 처음에는 해내기가 매우 힘들었으나 점차 전화하는 횟수가 늘어나자 심태가 안정됐다. 어떤 때는 일념으로 반드시 그를 구하겠다고 마음먹고 두 번이나 끊은 전화를 다시 걸었다. 정말로 그를 구도하고 나면 나는 내가 견지한 게 얼마나 값진지 느낄 수 있었고 어떤 때는 한 가족씩 탈퇴시키고 어떤 때는 몇 마디 말로 삼퇴시킨다.

대면하여 삼퇴도 시키고 션윈 CD도 배포한다. 어디에 가든지 가방에는 션윈 CD, ‘9평’ CD, 호신부, 봉쇄돌파 프로그램이 들어있다. 언제든지 배포할 수 있는데 채소를 살 때, 물건을 살 때 매우 자연스럽게 말할 수 있으며, 기차역에서, 버스에서, 상가에서, 공원에서, 아파트 단지 내에서 마주치는 인연 있는 사람에게 삼퇴를 권하고 션윈 CD를 배포할 수 있다. 또 길가다가 어려움을 도와주거나 자리를 내주거나 길을 안내해주면서 말을 건네고 기회를 보아 삼퇴를 시킨다.

검은 소굴인 베이징에 남동생을 보러 갈 때 지하철에서도 삼퇴를 권했다. 두 남학생과 ‘바비(芭比)’라는 예쁜 여학생이었다. 나는 기회를 엿보아 그들과 이야기를 주고받으며 전부 공청단원과 소선대원에서 탈퇴시켰다. 신발을 수리하러 가면서도 상대에게 진상을 알렸고 몇 마디 말에 그는 매우 흔쾌히 탈퇴했다.

친인척이 모이는 자리에서 삼퇴는 더욱 반드시 해야 한다. 여동생 남편 생일에 많은 사람이 왔다. 나는 여동생 남편에게 당신 가족들에게 진상을 알려 ‘삼퇴’를 권하겠다고 말했다. 그는 그녀들에게 말하라면서 동의했다. 나는 밥을 먼저 먹었고 그들은 아직 식사 중이었다. 나는 그들에게 삼퇴하면 평안을 보장한다는 일을 말했다. 한 상에 앉은 7,8명이 모두 탈퇴했고 나중에 함께 컵을 들고 “파룬따파하오!”라고 외쳤는데 정말로 감동적이었다. 진상을 알게 된 중생은 구도되기를 기다리고 있었고 나는 그들에게 호신부를 건네주었다.

나는 사람을 구도할 때 겉모습을 보고 대하지 않는다. 어떤 때 겉모습이 그리 좋지 않고 얼굴이 흉한 인상이어서 구도할 수 없는 사람 같으나 몇 마디로 탈퇴시킬 수 있었다. 그리고 션윈CD, 호신부, 봉쇄돌파 프로그램을 건네주는데 감사하다고 말한다. 자비의 힘은 거대한 것이다. 자비심이 나오면 상대방은 우리의 선량함과 아름다움을 느낄 수 있다.

이 일 년 동안 나는 인연 있는 사람 한 명도 놓치지 않았다. 상가에서 두 달만 일하게 됐을 때도 길을 가면서 18명을 탈퇴시켰었고 그 중 몇 사람은 가족 전체를 탈퇴시켰다.

불법적으로 12년 감금되어 출옥한지 1년 남짓이 된다. 시간의 소중함을 절실히 느끼고 있다. 나는 하루하루를, 매 사람을 소중히 여겨야 하며, 나는 수련을 처음같이 하는 마음의 경지를 유지해 많은 사람을 구도해야 한다. 정진하여 사존께서 웃음을 짓게 하고 싶다! 다시 한번 사부님께 무릎 꿇어 절을 올립니다!

만약 부적절한 곳이 있다면 수련생 여러분께서 자비롭게 지적해주시길 바란다.

주)

[1] 리훙쯔(李洪志) 사부님의 저작: ‘홍음-무존(無存)’

(밍후이왕 제11회 중국대륙 대법제자 수련심득 교류회)

문장발표: 2014년 11월 9일
문장분류: 수련마당>정법수련마당>밍후이대륙법회>제11회(2014년)
원문위치: http://www.minghui.org/mh/articles/2014/11/9/299617.html
영문위치: http://en.minghui.org/html/articles/2014/11/15/146871.html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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