简体 | 正體 | 대법서적

‘안으로 수련하는 것’은 정말 하나의 법보다

글/미기명(未署名)

[밍후이왕]나는 최근 몇 년 동안 수련과정에서 많은 마난 혹은 모순을 만나면 즉시 안으로 찾아야 한다는 점을 인식해서 한 무더기 문제를 찾아냈다. 하지만, 그 관에서 근본 문제가 어디 있는지 찾지 못했고 마지막에도 찾지 못했는데, 시간이 길어지자 아무 것도 달라지지 않아 체념적인 상태에 빠졌다. 나는 나만 이런 게 아니라 많은 수련생과 교류하면서 모두 유사한 문제가 있음을 발견했다. 이것은 어찌된 일인가?

1. ‘안으로 수련하는 것’은 정말 하나의 법보다

일찍이 경험한 바에 의하면 나는 어느 한 각도에서 이 문제를 인식하게 되었다. 리훙쯔(李洪志)사부님은 거의 매번 설법에서 대법제자에게 안으로 수련하라고 격려하셨고 또 우리에게 “수련인이 안에서 찾는 이것은 법보(法寶)이다.”라고 알려 주셨다. 내가 착실하게 수련하자, 사부님께 나에게 이 법을 펼쳐주신 까닭을 알게 되었다. 정말 안으로 수련하는 게 법보라는 사실을.

당시 하나의 원추형 법보가 내 가슴 앞에 놓여 진 것을 본 게 생각난다. 뾰족한 쪽이 나의 가슴에 향했는데 다시 말하면 “마음”이다. 내가 진정하고 안으로 찾을 때 주의식은 즉시 강대해지고, 또 한 갈래 의식으로 갈라지더니 법보의 둥근 쪽에 들어가 원추형 법보를 통제해 신체 내 바로 ‘마음’을 힘껏 뚫는 것이었다. 그 장면은 마치 광석을 채굴하는 작업자가 착암기를 들고 동굴 벽을 힘껏 뚫는 것과 같았다. 나의 가슴 앞(마음 앞)을 막고 있던 층층의 굳은 물질을, 이 원추형 법보가 멈추지 않고 끝까지 뚫어 산산조각 내 부숴버렸다. 모든 견고하고 딱딱한 물질을 뚫은 후 ‘마음’의 제일 깊은 곳에 왔다. 그곳은 온통 밝고 하나의 극히 아름다운 공간이었다.

나는 즉시 알았다. 나의 가슴 앞 (마음 앞)을 가로막은 그 층층의 견고한 물질은 사실 바로 집착심이 다른 공간에서 현현한 것이었다. 하나하나의 집착심은 바로 층층의 견고한 물질이고 동시에 하나의 집착심은 많고도 많은 층이 있다. 이런 부동한 층의 부동한 집착심은 각각 교차하면서 함께 중첩되어 가슴 앞 (마음 앞)을 가로막고 강대하고 견고한 장벽을 형성했다.

이 강대하고 견고한 장벽은 얼마나 두꺼운가? 이전에 도가는 인체를 하나의 소우주로 보았다. 만약 인체가 정말 하나의 소우주라면 이 장벽은 아마 십만 팔천 리에 그치지 않는다.

“안으로 찾는 것”은 하나의 법보다. 그러나 그 본신도 하나의 생명이다. 그는 아주 순진하고 놀기 좋아한다. 대법제자가 정진하고 안으로 수련하면 나는 그에게서 그런 흥분된 열의를 발견할 수 있다. 마치 전기를 가득 충전한 것처럼 빠르게 앞으로 회전한다. 특히 모 한 층 견고한 물질을 끝까지 뚫고 제일 깊은 곳의 아름다운 공간에 도착하면 더욱 에너지가 사방으로 넘치고 의욕이 충만하고 빠르게 회전한다. 대법제자가 안으로 찾지 않거나 혹은 표면에 그치거나 마음을 잡지 않고 진정으로 자신을 수련하지 않을 때, 나는 그의 게으르고 산만한 모습을 발견한다. 그것은 당신을 아주 하찮게 여기는데 이것은 당신이 시원치 않기에 나는 당신과 놀지 않겠다는 의미였다.

안으로 수련하는 이 법보는 평소 당신의 가슴 앞 (마음 앞)에서 움직이지 않는다. 그는 수련자가 의식하고 가동한다. 수련자가 모순이나 마난을 만났을 때, 즉시 안으로 자신의 사상의식을 수련하면 수련자의 주의식이 청성하고 강대하다는 것을 설명하며, 그 의식은 안으로 수련하는 이 법보를 통제한다. 그런 의식은 이 법보의 주체의식이 되며 집착으로 형성된 견고한 물질을 안으로 깨지도록 뚫는다. 수련자가 얼마나 큰 의식 에너지가 있으면 안으로 수련하는 이 법보의 동력이 얼마나 강하며 그러면 얼마나 깊게 뚫는다. 심지어 한 층의 견고한 물질을 완전히 뚫어 파손한다. 내가 법 공부를 할 때 “진념(眞念)이 온 하늘을 용해하여 맑구나”[2] 이 구절을 배울 때도 그런 유사한 상태를 느꼈다.

법에서 우리는 리훙쯔(李洪志) 사부님께서는 대법제자를 위해 아주 많은 것을 하셨으며 대법제자 신체에 많은 종자를 심으셨고 많은 기제를 심으신 것을 알았다. 나는 안으로 수련하는 것 역시 그 중의 한 가지라는 것을 체득하고 깨달았다.

안으로 수련하는 이런 법보는 변화할 수 있다. 그때 나에게 현현한 것은 원추형이지만 사실 기타 모양, 심지어 기타 형식으로 현시한다.

우리가 말하는 심성을 닦는다는 것은, 나의 이 층차 상태에서 바로 이런 장벽을 제거하는 과정이라는 것을 발견했다. 장벽을 제거하고 마음 제일 깊은 그 극히 아름다운 공간에 도착하였을 때, 당신은 그런 자비롭고 상화한 에너지의 포용상태를 느끼며 자비로운 에너지 상태에서 일체 마난과 모순을 풀 수 있다.

대법제자는 마땅히 수시로 자신의 심태에 관심을 갖고 주의해야 한다. 만약 업무 중, 사회생활 중, 모순이 표출되는 마난 중에서 원망하고 미워하고, 조급하게 서두르고, 짜증나고 마음이 움직이는 등, 각종 상태가 나타나면 즉시 자신의 심태를 조정하고 시시각각 일종 자비롭고 상화한 상태에 있어야 한다.

수련자가 평소 업무 중이나 생활 중에서 이런 자비롭고 상화한 상태에 장기적으로 놓여 있으면 당신은 아주 강대한 에너지가 당신 신체를 포용하고 가부좌할 때처럼 계란 껍데기 속에 앉은 것과 같은 상태를 느낄 수 있다. 이런 에너지 상태는 당신이 가부좌 할 때만 있는 것이 아니라 업무 중, 생활 중에 언제 어디서나 이런 상태가 나타날 수 있다.

구세력은 대법제자를 고험하기 위해 많은 고험을 배치했다. 많은 것은 모두 변이된 파괴적인 고험, 각양각색의 모험, 심성 마찰, 마난이며 당신의 심성이 도대체 견고하게 수련했는가를 본다. 이런 모순, 심성 마찰, 마난에서 수시로 견정하게 수련자의 이런 자비롭고 상화한 상태를 안정하게 유지할 수 있는가를 고험한다. 그것들은 겉으로 명분을 내세워 이것은 대법제자가 제고하는 것을 도와준다고 말한다. 당신이 하지 못하면 그것들은 목적을 달성한 것이며 그것들의 이런 배치가 옳다는 것을 증명한다.

2. 안으로 수련하는 부동한 정도

안으로 수련하는 것 역시 정진하는 요구가 있다. 예를 들면 병업 상태가 나타나거나 혹은 사람과 모순이 발생하거나 번거로움을 만난다. 수련초기 수련자는 안으로 수련하는 것이 생각나 자신의 어디에 문제가 있는지 사고하며 관을 넘는다. 왜냐하면 속인은 밖으로 찾는 것만 알며 안으로 자신을 찾는 것을 모르기 때문이다. 속인이 일단 안으로 자신을 수련하면 그것은 하나의 거대한 개변이며 한 생명의 근본적인 전변이다. 때문에 수련자는 문제를 해결할 수 있다.

한동안 수련하면 제고해야 할 때가 온다. 다시 문제를 만나면 안으로 찾는 의식이 있어야 할 뿐만 아니라 당신은 자신의 어느 마음이 초래했는지 명확히 찾아야 한다. 바꾸어 말하자면 수련 중에서 그 마음을 제거하는 게 필요하다. 이때는 수련자를 고험한다. 반드시 진수하는 태도가 있어야 하며 사람마음을 하나하나 안으로 찾아야 한다.

표면으로 당신이 한 더미 마음을 찾아도 쓸모없다. 표면에 그치고 슬그머니 넘어가는 것으로는 문제를 해결할 수 없다. 당신은 반드시 이 관, 이 난이 상대적으로 대응되는 마음을 찾아야 비로소 된다. 수련자가 진정으로 문제를 찾아 해결하면 신체는 늘 명확한 감수가 있으며 아주 강대한 에너지가 전신을 뜨끔하게 하거나 신체가 갑자기 통하는 느낌이 있다.

진수하는 태도 체현 여부는 당신이 진지하게 자신을 찾는가에 있다. 아마 당신이 몇 시간 심지어 하루 동안 찾을 수 있으며 시간은 단지 검증하는 하나의 요소며 제일 중요한 것이 아니다. 제일 중요한 것은 당신이 진수 상태여야 하며 줄곧 그런 진지하게 자신을 찾는 힘을 유지하는 것이다. 그러면 물질과 나를 잊는 상태에 도달하며 일념이 만념으로 대체한다. 사부님께서는 당신이 이 상태, 요구에 도달하면 아마 아주 빨리 당신의 머릿속에 이 관과 난이 대응되는 그 일이 떠올라 당신이 문제의 소재를 찾도록 해 주신다.

더 한 동안 수련하면 또 제고될 것이 요구된다. 수련자는 오성이 있어야 하며 상관되는 법리를 깨달아야 하며 법리로 수련을 지도해야 한다. 법 공부는 책을 보는 게 아니라 동화하는 것이다. 배우면서 자신이 했는지, 요구에 부합되는지 대조해야 한다. 이해가 되지 않는 곳이 있으면 놓치지 말고 기억해야 한다. 그것은 아마 바로 수련자가 제고해야 하는 곳이며 잘 체득하고 깨닫는 게 필요하다.

한동안 수련하면 다시 제고해야 한다. 당신 자신이 잘 수련해도 안 되며 당신은 또 주위 환경을 잘 원용해야 한다. 모순, 마찰, 마난에 연관되는 사람, 당신은 그(그녀)를 잘 원용해야 하며 그들이 마음이 평형 되게 하며 그(그녀)들이 이로 인해 업을 빚게 해서는 안 된다.

수련자의 층차 제고에 따라 모순, 마찰, 마난 중 관련되는 사람은 점점 많아지고 미치는 환경도 점점 넓어지며 일도 점점 커진다. 이런 것은 수련자가 모두 원용하고 평형을 잘 해야 한다.

더 수련해 제고하면 원용하고 평형할 뿐만 아니라 당신은 상관되는 환경과 사람 모두 진상을 명백히 알게 해야 하며, 사리를 명백히 알게 해야 하며 더 진일보 법을 얻고 수련에 들어서야 한다.

나는 단지 일종 사고의 방향, 일종 방법으로 안으로 수련하는 부동한 정도를 논술했다. 그렇지만 반드시 이렇다는 것은 아니다. 더욱이 매 대법제자의 수련의 길은 모두 다르다. 이렇게 논술하는 것은 단지 사유를 넓히는데 이롭고 더욱 청성하게 대법을 체득하고 깨달을 수 있기 때문이다. 실제 수련 정황은 매 개인이 부동하며 아마 천차만별일 것이다. 수련의 길은 부동하며 고유의 방식이 없다. 희망하건대 서로 교류하고 참고하기 바란다.

주:

[1] 리훙쯔(李洪志) 사부님 저작:‘각지설법9-2009년 워싱턴DC국제법회설법’

[2] 리훙쯔(李洪志) 사부님 경문:‘강개(感慨)’

문장발표: 2014년 11월 25일
문장분류: 수련마당>정법수련마당>이성인식
원문위치: http://www.minghui.org/mh/articles/2014/11/25/300670.html

ⓒ 2024 명혜망. All rights reserved.