글/대륙대법제자 샹롄 구술, 수련생정리
밍후이왕】나는 올해 77세이며 대법수련을 한지 이미 십여 년이 되었다. 나는 현지 수련생들과 함께 조사정법하여 중생을 구도하고 있다. 거의 대부분 현 700여개 향촌을 돌았고 집집마다 ‘파룬따파는 좋다’를 알리면서 삼퇴를 권했는데, 신사신법에 의지해 매 한 단락 수련 역정모두 사부님의 불은호탕(佛恩浩荡)을 느낄 수 있었다.
여기서 나는 우리 현 대법제자들이 중생을 구도한 일부 사적을 써내어 이 신성한 교류법회에 바치고자 한다. 또 우리 지역의 수련생들과 중생들을 대표하여 우리를 구도해 주신 사부님의 은혜에 감사드리고자 한다. 또한 선량한 세인들이 우리의 이야기를 들어 파룬궁을 요해하고 파룬궁을 선하게 대하길 바란다. 또, 우리 사부님과 대법제자들이 겪은 이런 간고함과 고난 모두 중생을 구도하기 위한 것으로, 이 우주가 갱신되는 최후의 시각에 아름다운 미래를 택하기 바란다.
진상:고향의 집집마다 전하다
박해가 시작된 초기에 우리 현의 젊은 수련생들 모두 박해를 당해 우리는 진상자료를 얻지 못했다. 중생들도 모두 사당에 독해당해 파룬궁을 미워해서 집에 있던 나는 조급하기만 했다. 한 수련생이 성에서 전단지 한부를 가져와 보배를 얻은 나는 복사하기 위해 인쇄소를 찾아다녔지만, 아무도 복사해주지 않았다. 왜냐하면 그들은사당의 공갈통지를 받았기 때문이다. 그래서 우리는 펜으로 베꼈고 후에 수련생은 복사기 한 대를 사왔다.
그 시기에 사악한 마귀의 마수는 회사마다 뻗쳤다. 회사마다 일부 사람을 선발해 전 현성의 거리와 골목마다 그들을 배치해 하루 24시간 감시했는데, 매 구역마다 구체적인 회사와 개인이 책임지고 있었다. 대법제자들은항상 밤에 진상자료를 배포하거나 납치당했다.
그 시기 우리는 전단지를 배포하는 방식으로 민중들에게 진상을 알렸는데 성(도시)에서 배포하는 횟수가 더 많았다. 나는 농촌에서 배포했으며 그 당시 시골에 내려가는 수련생들이 많지 않아서 혼자서 다녔다. 내 다리는 풍습성 관절을 앓아 기형으로 변해서 길을 걷기 힘들어서 돌아올 때는 너무 피곤했다. 두 수련생은 내가 너무 고생스럽게 다니는 것을 보고 집에서 자료를 잘 접어라고 하고는 자전거를 타고 배포했다. 겨울에 떠나면 하룻밤이 걸렸는데 매일 밤마다 백 여리를 걸었다. 저녁 5시 넘어 출발하면 아침 7시 넘어야 돌아왔다. 그렇게 한동안 지나 시골에서 그녀들이 경찰에 납치되어 나는 또그녀들을 대신해서 해나갔다.
한번은 아주 먼 곳으로 갔다. 차에서 내린 후 하룻밤 걸어서 어느 마을에 도착했더니 그곳이 유명한 늑대굴이라 하여 저녁에 한사람도함부로 다니지 않았다. 나는 다리 상태가 나빠서 날이 밝아서도 두 다리를 구부릴 수 없었는데 마침 그 마을에 있는 먼 친척집을 찾아갔더니 친척이 신발을 벗겨주었다.
후에 나는 수련생을 찾아서 같이 다녔다. 가끔 저녁에 가거나 낮에 갈 때도 있었다. 출발 전에 우리는 먼저 지도를 보고 버스가 없는 곳은 할 수 없이 택시를 탔는데 택시비가 매번백 위안이 넘었다. 우리는 월급을 조금도 함부로 쓰지 않았고 전부 사람을 구도하는 데 썼다. 내 나이로 말하자면 먼 시골까지 가는 건 아주 힘든 일이었다. 특히 마을과 마을 7~8리 거리를 전부 걸어 다녀야 했다. 가끔 돌아올 때는 지쳐서 제대로 서지도 못하고 길옆에 누워서 차를 기다렸다. 한번은 나와 80여세 되는 노 수련생이 진상자료를 밤새워 배포하면서 백 여리 길을 걸어 다음날 아침 지쳐서 움직일 수가 없었다.
겨울에는 가끔 얼어서 온 몸이 마치 감각이 없어진 것 같았고, 발은 부어서 큰 물집이 생기기도 했다. 여름에는 또 30도가 넘기도 했는데 얼굴은 세수를 하는 것처럼 땀이 줄줄 아래로 흘러내렸다. 그럴 때 우리는 “참기 어려워도 참을 수 있고 행하기 어려워도 행할 수 있다”[1]는 구절을 외웠고 비록 많이 지쳤지만 마음은 그래도 아주 기뻤다.
2001년 1월 어느 날, 11명의 우리 대법제자들이 차 3대로 농촌에 진상자료를 배포하러 갔다가 경찰에 납치되어 순경대대에 수감되었다. 현 공안국 정위는 20여명 경찰과 함께 각종 고문으로 우리를 괴롭혔다. 야밤에 우리를 때리다 지치면 그들은 술과 요리를 시켜 먹고 마시면서 우리를 구타했다. 몇몇 젊은 수련생들은 매달아서 때렸다.의자로 등을 마구 때리고 송곳으로 찌르고 가는 줄로 목을 조였으며 빗자루로 머리를 마구 때렸다. 한 젊은 여성 수련생은 맞아서 피를 토했다. 공안국 정위는 끊임없이 고함을 질렀다. “더 힘을 가하라! 더 힘을 가하라!” 그는 다른 경찰들에게 잔혹하게 하지 않는다면서 가죽신발로 한 수련생의 손가락을 마구 짓밟았다. 그 당시 우리 모두 자료의 내원을 알았지만 한 수련생의 아들을 포함해서 한사람도 사악한테 굴복하지 않았고 한사람도 동수를 배신하지 않았다. 왜냐하면 우리 모두 알고 있었는바, 그 당시 유일했던 이 자료점은 수련생들이 생명의 위험을 무릅쓰고 건립한 것이기 때문이기도 했다. 우리가 중생을 구도하는 보장이었고 우리 생명보다 더 중요한바 맞아 죽더라도 말할 수 없었다.
경찰은 우리를 저녁 8시 이후부터 줄곧 새벽 5시 넘도록 고문했다. 경찰은움직이지 못하게 된 남자 동수를 들것에 실어구치소로 들고 갔다. 7일 후 공안국 정위는 전신이 상처투성이인 6명의 수련생들을 노동교양소에 납치하여 박해했고, 그중 한 남자 수련생은 후에 박해로 사망했다. 우리 몇몇 노년 여성수련생은 각각 나뉘어 며칠 수감된 뒤 가족에게 통고해서 집으로 돌려보내졌다. 수련생들은 그 당시 마난 중에서 정념 정행했는데, 우리 현의 대법제자들은 지금까지의 박해에서도 한 사람도 수련생을 배신하지 않았다.
2001년 현지에서 걸어 나올 수 있는 젊은 수련생들 대부분 불법 수감 박해를 당했고 이런 늙은 할머니들만 남았다. 그러나 우리도 사악에 놀라 넘어지지 않았고 아주 빨리 냉정해졌다. 민중에게 반드시 진상을 알려야 한다고 결심하고는 정체적으로 협조하여 자료를 배포했다. 사악의 봉쇄는 근본 작용을 일으키지 못했다.
2002년 우리는 발정념을 중시했다. 매번 나가서 진상을 배포하기 전에 우리는 모두 고밀도로 발정념을 했다. 시간을 정해 모든 인원이 출동(참여)했으며 돌아와서도 고밀도로 발정념을 하여 사악이 다시 덮치고 교란하는 것을 방지했다. 이런 협조를 2005년까지 견지하여 우리지역에서 더 많은 수련생들이 진상을 알리는 일에 나서게 되었고 법학습 장소도 몇 곳이 회복되었다. 비록 사악이 수차례 우리의 법학습 장소를 파괴하려고 노렸지만, 우리 현의 법학습 장소는 그 몇 해 동안 한 번도 사고가 난 적이 없었다. 교류를 통해 우리는 단체 법학습은 사부님께서 우리에게 남겨준 수련형식인 즉, 바르게 걷기만 하면 누구도 움직일 수 없다고 생각했다.
2005년 5월 어느 날, 우리 지역의 수련생들은 또 한 차례 대규모 박해를 받았는데 당시 많은 경찰 병력들이 동원되었다. 전 성에 걸쳐 수색해서 자료점 한 곳이 파괴되었고, 나와 7명의 수련생들이 구치소로 납치되었으며 그 중 두 명은 불법 노동개조를 당했다. 그때 당한 박해는 수련생의 마음에 오랜 시간 그림자를 드리우게 했다. 진상을 대면적으로 알리지 못했고 전단지도 성에서만 배포했다.
2007년에 이르러 곤경에서 벗어나 사악의 음영을 제거하고 현지 형세를 바로 잡기 위해 수련생들은 한차례 교류를 했다. 타지역 수련생의 도움으로 마땅히 정체 협조를 중시하고 정법 노정에 따라가야 함을 의식했다. 하여 우리는 ‘9평공산당’, 전단지, 소책자, 진상영상물을 한집도 빠짐없이 배포하기로 했다.
예전에는 소량으로 배포했지만, 이번에는 이렇게 계통적으로 행하자면 우리 앞에는 모두가 어려움이었다. 법학습 보장, 자료점 운영, 자재 운송, 자금, 협조, 그리고 시골로 가는 차, 또 대오에서 떨어진 수련생을 도와야 하고 많은 외부 교란을 배제함과 동시에 가정 마난 등등을 돌파해야 했다. 매번 한 걸음 앞으로 나아가고 세부절차마다 해결해야 할 문제 하나하나가 상당히 어려웠다. 모두 수련생들의 간고한 노력과 헌신을 필요로 했고 아울러 일체가 모두 끊임없는 법학습으로 생겨난 정념으로 개창해야 하는 것이었다. 하여 우리는 법학습을 매우 중요하게 보았다.
그 해에 우리는 8개월을 거쳐서 비로소 이 하나의 장거를 완성할 수 있었는데 한 동수는 감개하여 이런 말을 했다. “마치 한 가지 거대한 공정을 완성한 것 같네요.” 수련생 사이에는 한 점의 간격도 없었고 모두 주동적으로 협조 · 원용하고 작용을 발휘했는데 우리 이후의 법 실증과 각 항목의 협조에 견실한 기초를 다져주었다. 상당히 좋은 경험을 축적했는데 이후 2009년 겨울과 2013년 여름에 우리는 단지 일부분 수련생들만 참여하여 두 달 만에 그 항목을 다시 한 번 할 수 있었고, 션윈 동영상을 모두 얼굴을 마주하고 발송할 수 있었다.
이 길을 걸어가다- 시골에 가서 중생을 직접 만나서 구도하다
2004년부터 우리는 중생을 직접 만나서 진상을 알리고 3퇴를 권했다. 나는 매일 거리에 나가서 알렸다. 점차 얼굴을 마주하고 진상을 알리는 수련생들이 많아졌고 역전, 상점, 빌딩 거의 매일 수련생들의 모습을 볼 수 있었다. 나와 몇몇 수련생들은 두 팀으로 나뉘어 성안에 있는 단층 주택구역 거의 대부분의 집에 진상을 알렸다.
성안에서 진상을 알리는 사람들이 많아지자 나는 농촌에 가서 진상을 알리고 싶었다. 왜냐하면 그 곳은 전단지에만 의지하면 3퇴 문제를 해결할 수 없었는데,가난한 농민들 다수가 글을 모르고 영상물을 볼 조건도 없었기 때문이었다. 어떤 이는 몇 십 년 동안 집 문을 나서지 않아 진상을 듣는다는 것은 아주 곤란했다. 나의 생각을 말하자 일부 수련생들은 여전히 매우 걱정하며 너무나 위험하고 실현하기 어렵다고 했다. 왜냐하면 전단지를 배포하는 것만으로도 마을의 악인들에게 납치되기도 했고, 한 마을을 전부 돌면서 진상을 알리면 몇 시간 혹은 며칠이 소요돼 그 마을을 신속하게 떠날 수 없었기 때문이었다. 2003년 우리 현지에서는 한 여성 수련생이 시골에 가서 진상을 알리다 납치당해 후에 박해로 사망했다.
그러나 나는 그렇게 많은 농촌 사람들이 진상을 듣지 못하고 있다는 것을 생각하니 조급해졌다. 그들은 선조 때부터 시골에서 빈곤한 나날을 보냈고 공산 사당의 잔혹한 박해를 당해왔는데 오늘날 대법의 진상을 들으려고 기다린 것이 아닌가? 사부님께서는 이렇게 말씀하셨다. “진상을 밝혀 중생을 구도하는 것을 구세력은 감히 반대하지 못하는데, 관건은 일을 할 때의 심태(心態), 그것이 빈틈을 타지 못하도록 해야 한다.”[2] 하여 나는 마음을 굳게 먹었다. 죽기내기로 한다! 이 일을 해내고 말 것이다.
마침내 어느 날, 한 노년수련생이 나와 함께 시골에 가서 3퇴를 권하는 그 일보를 걷게 되었다. 우리는 각자 등에 진상자료, 호신부, 전단지, 영상물, 소책자를 가득 메고 3퇴를 권한 후 무엇이 적합하면 무엇을 주었다. 그러나 경험이 없어서 진상을 알리는 게 너무 느렸다. 300여 호가 모여 있는 큰 마을이 있었는데 두 사람은 5일간 진상을 알렸고 최후에는 한 악인한테 고발당했다. 경찰은 우리를 납치하여 구치소에 가두었다. 우리 두 사람은 검은 소굴에서 진상을 알리고 발정념을 했고, 밖에 있는 수련생들에게 협조하여 사악을 폭로했는데 보름 뒤 우리는 나왔다. 우리 두 사람은 안을 향해 찾았더니 나는 조급한 마음이 너무 돌출했고 하루 종일 조급해하는 것을 발견했다. 사람이 너무 많으면 진상을 알릴 수 없다고 생각했고 선한 마음도 모자랐다. 수련생도 자아에 너무 집착하는 마음을 찾았다. 가끔 탈퇴하지 않는 사람에게 그녀는 기어코 탈퇴시키고자 해서반감을 샀다. 그리고 몇 사람이 그녀에게 이렇게 물었다. “할머니, 이런 일을 하면 누가 당신을 가둘까봐 두렵지 않나요?” 그녀는 이렇게 말했다. “나는 5번이나 잡혀 들어갔어요! 공안국은 내가 맘대로 드나들어요. “이런 말을 하면서 말투가 좀 컸는데 사악한테 빈틈을 타게 했다.
돌아온 후 우리 두 사람은 심태를 잘 조절하고 계속 시골에 가서 이야기했다. 아울러 한 80여세 되는 여성 수련생과 다른 한 수련생도 우리의 시골팀에 참가했다. 우리는 두 팀으로 나눠서 한집도 남김없이 문만 있으면 들어갔다. 한 지역을 하루 빨리 하기 위해 우리는 점심에도 쉬지 않았고 또 밥도 먹지 않았다.
어떤 곳의 마을 사람들은 독해를 무척 심하게 당했다. 한 시골은 사악의 요소가 너무나 커서 나와 수련생은 그 곳에서 예전에 3번이나 납치당했고 5번이나 악인의 소란을 당했다. 80여세 되는 할머니 수련생은 한 젊은 폭도한테 맞아서 다쳤다. 후에 우리 현지 수련생들은 정체적으로 협조하여 발정념했고 그 지역에 선을 권하는 편지를 썼다. 진상전단지를 보냈고 이렇게 먼저 전초 작업을 한 후 우리는 다시 이어서 진상을 알렸다. 바로 이렇게 50여개 마을에서 우리는 모두 3개월 넘는 시간을 썼고 몇 차례 우여곡절이 있었지만 결국 그 곳을 전부 해냈다.
2009년에 이르러 한 타지역 수련생이 우리의 정황을 안 후 자신이 저축한 돈을 전부 내어 차 한 대를 샀다. 현지 한 수련생은 각종 압력을 견디면서 운전을 배웠다. 우리는 사람을 구하는차가 있게 된 후 효과가 배로 제고되었다. 그 당시 우리 현은 이미 8명의 수련생이 시골팀에 합류했고 우리는 4개 팀으로 나눠 활동하며 매일 몇 백 명을 탈퇴시켰다.
박해를 마주하다: 신사신법 정념정행
한번은 한 마을에서 4명의 수련생들이 경찰에 납치되었다. 우리는 전체가 발정념했고 사악을 폭로하고 선을 권하는 편지를 썼다. 수련생들은 갇혀서도 아주 단호했고 일주일 후에 전부 검은 소굴에서 걸어 나왔다.
2009년 6월 20일 현지의 한 남자 수련생이 납치되었지만, 다음날 검은 소굴 심문실에서 벗어나왔다. 경찰은 미친 듯이 곳곳을 뒤졌지만 사람을 수색하는데 실패했다. 화가 잔뜩 나서 그 수련생의 수련하지 않는 형을 가두고 가족한테 그 수련생을 데려오라고 했다. 그러나 우리 현지 수련생들은 그 일을 중시하지 못해 폭로하지 않았고 도움을 주지도 못했다. 더욱이 다른 공간의 사악은 이미 무더기로 사악한 요소를 모집하여 우리를 내리눌렀다. 6일 후 우리는 백 여리 밖의 한 큰 산촌에서 3퇴를 권할 때 악인과 경찰에 납치되었고 사당 국보대대에 보내졌다. 우리가 들어간 후 수련생은 말 한마디도 하지 않고 발정념만 했다. 또 경찰에게 진상을 알렸더니 경찰은 마구 왔다 갔다 하면서 어찌할 바를 몰랐다.
나중에 경찰은 4명의 수련생 가족에게 돈을 요구했다. 그러나 그들은 나와 다른 한 수련생에 대해서는 묻지도 않았고 그날 밤 우리 모두 집에 돌아갔다. 그러나 그 일은 우리 지역에서 일부 수련생에게 아주 큰 압력을 조성했고, 오랜 시일동안 진상 알리는 항목을 회복하지 못했다.
그해 9월 현지 사당인원은 경축을 한다고 각 부서가 전부 출동하여 각 지역을 마구 들쑤시며 대법제자를 교란하고 곳곳에서 상방인원을 가로 막았다. 나와 한 수련생은 중생구도를 멈추고 싶지 않아서 계속 시골로 내려갔다. 그러나 발정념을 소홀히 했고 한 마을에서 고발당했다. 현지 경찰은 우리 두 사람을 납치해 국보대대에 보냈다. 대대장은 또 우리 두 사람인 것을 보고는 화가 나서 난리를 부리며 마구 욕을 해댔다. 우리 두 사람을 늙은 고집불통이라고 하며 어느 때인데 또 감히 이런 짓을 하느냐고 했다. 전화를 걸어서 곳곳에 물어보면서 이번에는 우리를 죽을 때까지 가만두지 않겠다고 했다. 그들은 우리 두 사람을 노동 개조시킨다고 했다. 우리 둘이 모두 70세가 넘어 위에서 허락하지 않을까봐 69세라고 적었다. 그리고 또 ‘610’시스템에 압력을 넣어서 회사에 퇴직금을 멈추라고 했다.
나의 마음은 조금도 움직이지 않았고, 수련생은 더욱 정념을 단호히 하며 그들에게 진상을 끊임없이 알렸다. 나는 이렇게 말했다. “당신들이 결정할 수 없어요. 나는 당신들의 관리를 받지 않고 나는 사부님께서 상관해요.” 경찰이 말했다. “이번에는 내가 결정한다! 이번에 당신은 나가려고 생각하지 말라. 나는 믿지 않으며 이렇게 큰 당이 당신들을 다스리지 못하겠는가? 우리는 회사에서 당신을 제적하라고 했고 당신한테 월급을 주지 않을 것이다.” 나는 이렇게 말했다. “당신이 결정하지 못해요, 나의 사부님께서 결정해요.” 그 당시 정말로 한 치의 집착과 두려운 마음이 없었다. 그들은 우리 두 사람을 구치소에 가두어 우리는 그 안에서 하루 종일 발정념하고 연공했다. 만나는 사람마다 진상을 알렸는데 그들은 모두 이렇게 말했다. “당신들은 이번에 나가지 못해요. 나갈 수 있더라도 11월이 지나야 하고 11월 이전엔 생각도 말아요.” 나는 마음속으로 이렇게 생각했다. “당신들은 누구도 결정하지 못한다. 밖에서 그렇게 많은 중생들이 구도를 기다리고 있고 이곳은 내가 있을 곳이 아니다. 비록 내가 집착이 있다고 해도 구세력도 박해할 자격이 없고 나는 사부님께서 배치하신 길에서 자신을 바로 잡을 것이다.”
경찰은 우리 딸집을 찾아가서 돈을 요구했다. 사위는 “내가 어디에 돈이 있어요!” 라고 하자 경찰은 “돈을 바치지 않으면 당신의 장모는 세뇌반에 갈 것이고 1년 반 정도 가둘 것입니다.” 나의 사위가 말했다. “어디에 보내려면 어디에 보내세요. 나는 상관하지 않아요!” 경찰은 화가 나도 방법이 없자 또 우리 아들을 찾아서 3천 위안을 요구했다. 아들은 “나한테 이런 말을 하지 마세요! 나는 출근하지 않아서 밥도 제대로 먹지 못하는데 또 나한테 돈을 요구해요!”라고 했다. 경찰이 말했다. “당신이 돈을 내지 않으면 어머니는 감옥에 보내질 것입니다.” 나의 아들이 말했다. “나의 어머니를 보내지 마세요. 저를 보내세요. 제가 엄마 대신 감옥에 갈 겁니다!” 경찰대장은 ‘610’에 전화를 걸어”나는 돈을 만들어내지 못하겠으니 당신들이 하세요! 나는 방법이 없어요!”라고 말했다.
사부님의 보호와 가족의 저지, 수련생들의 구원 하에 우리 두 사람은 19일 만에 구치소에서 나왔다. 그러나 또 며칠 지나서 국보 경찰은 우리 회사 사람을 이끌고 주관국 관원과 같이 6명이 집에 쳐들어왔다. 말로는 나를 찾아 담화하는 것이라며 종이와 펜을 꺼내 기록을 했다. 나는 그들이 나의 공직과 퇴직급여를 향해 온 것임을 알았다. 그 당시 그들에게 진상을 알리고 대법의 아름다움과 세계에 널리 전해지고 있는 상황 등을 이야기했다. 회사 사람이 말했다. “당신은 그래도 감히 연마 하나요! 당신이 한 이런 말을 나는 전부 기록합니다.” 나의 마음은 조금도 움직이지 않았다. 그들이 간 후 또 그 수련생의 집에 찾아갔지만 그 수련생은 더욱 아무 것도 대수로워하지 않았으며 그들에게 진상을 알리고 또 탈당을 설득했다. 그들 중 몇 사람은 또 인정한다고 표시했다. 후에 이 일은 흐지부지되었고 우리의 퇴직급여는 여전히 정상적으로 발급되었다.
이런 여러 차례 박해를 겪은 후 우리 현지 수련생들은 한차례 교류가 있었다. 즉 우리는 모두 안을 향해 찾아야 하고 각자의 집착과 사람마음을 찾아야 한다는 것이다. 아울러 이 항목을 계속 진행해야 하고 전 현에서 시골에 내려가지 못하는 수련생들은 집에서 정각 발정념을 하여 정체를 형성해야 한다고 했다.
사람을 구하다: 정념, 순념으로 해야 한다.
얼굴을 마주하고 진상을 알릴 때 마음속으로 아무런 잡생각이 없어야 하고 관건적 시각에 반드시 정념을 내야 한다. 예를 들어 한번은 한 사람에게 진상을 알리는데 그는 핸드폰을 꺼내어 파출소에 전화를 걸겠다고 했다. 나는 허허 웃으면서 말했다. “당신 핸드폰이 망가졌어요. 전화가 안돼요.” 정말로 전화를 걸 수 없었다. 우리는 계속 그 마을을 돌면서 전부 진상을 알렸다.
한번은 우리 네 명은 50여리 밖의 한 마을에 갔다. 절반 정도 진상을 알렸는데 큰비가 내렸다. 한 수련생이 말했다. “하지 말아요. 집에 돌아갑시다.” 나는 “마침 비가 오면 사람들이 모두 집에 있으니 몇 명을 구도하면 몇 명으로 쳐요.” 나는 수련생과 협조하면서 비에 젖는다는 것을 생각하지도 않았다. 빨리 진상을 알리기 위해 우산을 펼치지도 않았다. 이 집 문을 나서서 저 집 문으로 들어갔는데 머리는 온통 정념이었다. 마치 비가 온다는 것을 잊어버린 것 같았다. 그 마을을 전부 돌면서 진상을 알린 후 나는 나의 머리와 몸이 그렇게 젖지 않은 것을 발견했다. 3퇴를 기록하는 종이는 조금도 젖지 않았다. 나는 사부님께서 비를 막아주셨음을 알았다!
또 한 번은 한 마을을 돌고 난 후 다음 마을에 가려면 또 십여 리 길이 있었다. 나는 “만약 택시가 있으면 얼마나 좋을까!”라고 생각했다. 이때 택시가 왔고 이미 사람이 타고 있었다. 차 주인이 물었다. “할머니! 어디 가세요?” 우리가 가는 곳을 말하자 그는 차 안의 두 사람을 내리도록 하고는 우리 두 사람을 태우고 그 마을에 갔다. 그 날은 마침 아주 무더운 날이라 30여도에 달했다. 마을은 또 컸고 5시간 넘게 진상을 알렸다. 우리 두 사람은 온 몸이 흠뻑 젖었고 더는 움직일 수 없었다. 이때 또 갑자기 도시로 돌아가는 택시 한 대가 나타났고 우리 두 사람을 집까지 데려다 주었다. 사부님께서 일찍이 우리에게 배치해주신 것이다!
1년이 넘는 시간동안 우리는 아주 평온하게 해냈다. 몇 백 개 마을을 돌았고 만여 명을 탈퇴시켰다. 시골로 내려가는 수련생들도 십여 명으로 늘어났다. 우리는 오전에 시골에 내려가고 오후에는 단체로 법학습했다. 아울러 매일 시간을 내서 그날 부딪친 문제들을 교류하고 안을 향해 부족한 점을 찾아 손실을 감소시켰다.
그런데 시간이 길어지자 또 경솔해졌고 우리는 차를 운전하는 수련생의 상태에 대해 홀시했다. 그는 자기 집 장사로 바빴고 저녁에 늘 잠을 제대로 자지 못했다. 낮에 하루 종일 운전하니 법공부하고 연공할 시간이 없었다. 장기간 이런 상황이 지속되자 상태가 갈수록 나빠졌다. 2011년 겨울 우리는 시골에서 돌아오는 길에 납치되었다. 나는 15일 수감된 후 나왔다. 그 외 다른 수련생들도 부동한 방식으로 가족들에 의해 풀려나왔다. 그러나 그 남자수련생은 불법으로 노동개조 박해를 당했다. 나는 돌아온 후 안을 향해 찾았고 후회하며 눈물을 흘렸다. 사람을 구하는 마음이 조급해서 너무나 자아에 집착했었고 또한 수련생의 감당능력을 고려하지 못했다. 그의 일부 부정확한 상태를 즉시 지적하지 못했던 것이다.
마음의 소원: 중생들이 모두 대법의 진상을 듣게 하다
차가 없어서 우리는 곤경에 빠졌다. 그러나 나는 아직도 그렇게 많은 곳에 진상을 하지 못한 것을 걱정했고 한동안의 조정을 거쳐 나와 한 수련생은 다시 보행으로 행각하는 형식으로 중생을 구도하는 여정을 시작했다. 우리는 매일 시간을 조금도 낭비하지 않았는데 그것은 사존께서 거대한 감당으로 우리를 위해 바꿔 오신 것이기 때문이다. 나의 생활은 무척 간소했고 법학습 외에 바로 진상을 알리는 일이다. 날씨가 좋지 않으면 도시에 알리고 날씨가 좋으면 시골로 내려갔는데 장기간을 견지했다. 비록 수많은 고생을 했지만 아무도 우리가 사람을 구도하려는 정념을 가로막지 못했다.
시골에 내려가 진상을 알릴 때마다 모두 사람을 감동시키는 많은 이야기가 있다. 일부는 진상을 들은 후 우리를 아주 멀리까지 바래다주며 헤어지기 싫어했다. 일부는 이렇게 말했다. “당신들은 어찌 이리도 좋은가요! 정말로 당신들이 하는 말을 듣고 싶어요! 다음에 또 오게 되면 반드시 우리 집에 와야 합니다!” 또 어떤 이는 “이렇게 추운 날 빨리 구들에 올라와서 녹이세요. 여기서 식사하고가세요.”라고 했다. 또 일부는 기어코 감을 따서 우리에게 먹게 했고 또 어떤 이는 진상자료를 받은 후 우리에게 돈을 주려고 했다. 가끔 멀리 걸어갔는데도 뒤에서 쫒아 와서 다시 호신부 몇 개를 요구했다. 어떤 이는 “남들은 집에 책이 있는데 우리 집에는 없어요. 당신은 저한테 큰 책 한권 주세요!”라고 했다. 자주 이런 말을 하는 사람도 있다. “당신들은 파룬궁이 아닌가?” 우리는 “그래요! 우리는 불가공법입니다.”라고 했다. 상대방이 말했다. “아! 저는 꼭 파룬궁을 배우고 싶어요. 파룬궁의 것이 아니면 싫습니다!” 또 어떤 이는 이렇게 말했다. “당신이 가져오면 제가 전달하겠습니다!” 이런 일은 너무나 많았고 거의 매일 부딪칠 수 있었다.
십여 년간 엄동설한이든 폭염이든 사악의 공포이든 우리는 모두 이렇게 견지했다. 지금까지 전 현 700여개 마을의 몇 십만 명의 인구에 대해 진상알림의 공백이란 거의 얼마 남지 않았다. 우리는 여기의 중생들에게 진상을 알리고 싶다.
현지 한 수련생은 우리의 사적을 보고서 시 한수를 적었는데 “향촌고도(鄕村苦度)”라고 불렀다. 우리의 진실한 감촉을 여기에 기록한다.
남쪽 산간 밥 짓는 연기 하늘거리고
서풍은 음침한 구름을 몰고 오네
시골 마을은 옛 모습을 그리고
노부인은 새로운 아침을 맞이 하네
집집마다 3퇴를 권하여 집집마다 진언을 들었네
법이 촉촉이 스며들어 자손에 복이 깃들고
인연이 시골로 이어져 순정해지네.
비바람 십여 년 창상 수년의 흔적
법도의 의지는 변함없고 구도에 수고를 모르네.
수련의 길을 돌이켜보면 늘 뜨거운 눈물이 얼굴을 적신다. 너무나 많은 감개무량함과 희노애락, 끝없는 이야기들. 사존에 대한 형용할 바 없는 감은뿐이다. 조사정법의 위대함과 수승함은 사람의 언어로 형용할 수 없다. 지금 우리 현지 수련생들은 이미 갈수록 성숙해졌고 우리는 법을 잘 배우고 마지막 길을 더 이지적으로 단호하게 걸음으로써 사부님께 걱정을 덜 끼치고자 한다.
사부님 감사합니다!
수련생 여러분 감사합니다!
주:
[1]李洪志사부님 저작:《전법륜》
[2]李洪志사부님 경문:《각지설법2》〈2002년 보스턴법회 설법〉
문장발표:2014년 11월11일
원문위치: http://www.minghui.org/mh/articles/2014/11/11/299605.html