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明慧법회| 아내와 자녀는 모두 중생의 일원

글/ 내몽고 대법제자

[밍후이왕]

존경하는 사부님 안녕하십니까!

수련생 여러분 안녕하십니까!

이제 막 산산조각 나려던 내 가정이 대법을 수련한 후 마른 나무에 꽃이 피게 됐다. 사부님께서 나를 구해주셨고 내 가정을 구해주셨다.

차마 다시 돌이켜 보기 싫은 그 나날들

우리 이 작은 현(縣)소재지에서 우리 집은 그래도 괜찮은 편이었다. 일자리가 마음에 들고 수입도 괜찮았다. 그러나 부부 간은 성격 차이가 너무 커서 늘 다투었다. 아내는 ‘남자형’ 여성이라 자신을 내세우기 좋아하고 사나웠다. 나 역시 제 분수를 지키는 사람이 아니어서 서로 지려고 하지 않았다. 성격이 강한 두 사람이 함께 있으니 다투고 때리고 그릇을 내던지는 일을 밥 먹듯 했다. 한 번씩 싸우고 나면 며칠 동안 나는 정신을 차릴 수 없었다. 기력이 쇠진하고 가슴이 답답하면서 몸이 무너지는 것 같아 할 수 없이 온돌에 누워 울화를삭일 수밖에 없었다.

아들은 자란 후 늘 무단결석을 하고는 온종일 게임을 하고 놀았다. 집에서 노는 것이 부족하면 PC방에 가서 놀았고 심지어 며칠 밤을 돌아오지 않을 때도 있었다. 퇴근 후 아내는 시내에 가서 모든 PC방을 샅샅이 뒤져 아들을 찾았다. 찾으면 아들을 보고 울었고 찾지 못하면 나를 욕했으며 어떤 때는 길가에 앉아 울어서 눈물투성이가 됐다. 아이 때문에 우리 둘은 수없이 싸웠다. 아내의 살상력 있는 말은 내 가슴에 줄줄이 상처를 남겼다.

나를 가장 가슴 아프게 한 것은, 아들이 한 번은 집의 돈을 훔친 것을 발견한 것이다. 한바탕 두둘겨 팬 후에야 여러 번 훔쳤다는 것을 알게 됐다. 몇 십 위안으로부터 백 위안에 달했다. 나는 소파에 쓰러져 상심해 눈물을 흘렸다. 이건 집에다 도둑을 기른 게 아닌가?

그 때 나는 사는 게 아무런 재미가 없고 정신적 압력이 갈수록 심해졌다. 사람의 이 일생은 왜 이렇게도 고달픈가? 아내가 아내답지 않고 자식이 자식답지 않은 이 나날을 어떻게 보낼 수 있을까?

매 번 아내와 나는 ‘전쟁’을 치르고 난 후면 서로 분노해 소리를 지른다. “이혼이야! 확실히 이혼이야!” 하지만 매번 친척과 친구들이 만류한다, “애가 이렇게 컸는데 무슨 이혼이야? 다시 다른 사람을 찾으려고? 그러다 나쁘면 또 이혼하려고? 어느 집안인들 이렇게 살지 않겠어? 그런대로 살어. 늙으면 다 좋아져.”

나는 자신의 계획을 시작했다. 몰래 돈을 모았다. 이혼 후 돈이 없어서는 안 되고 돈을 많이 모으면 즉각 이혼하려 했다. 아내도 내가 그녀와 한 마음이 아니란 것을 알고 자신만의 준비를 했다. 집안의 저축통장을 감추고 값나가는 물건은 꼭 붙들고 있었다.

우리는 삶의 질이 급격히 내려갔다. 항상 퇴근 후면 두 사람은 서로 미루며 누구도 밥을 짓지 않았고 혹은 남은 국이나 반찬으로 한 끼를 때웠다. 가슴에는 원한이 가득했다. 30살도 안 된 나는 온몸에 병이었다. 두통으로 가슴이 답답하고 장염에 위궤양 등등, 머리부터 발끝까지 아프지 않은 데가 없었고 체중은 50kg도 안 됐으며 얼굴은 잿빛이었다. 한약, 양약을 번갈아 먹어도 옛 병이 가셔지기도 전에 또 새로운 병이 생기곤 했다. 죽을 수도 살수도 없었다. 몇 번이나 세상을 다 산 것 같은 느낌이었다. 하지만 정말로 그 지경에 이르렀을 때는 또 이렇게 이 세상을 떠나고 싶지 않았다. 어둠 속에서 기적이 나타나기를 바랐으며 또 마치 무엇인가 기다리는 것 같기도 했다.

사부님께서 내 인생의 궤적을 바로잡아 주셨다

1996년 여름, 나는 기쁘게도 대법을 얻었다. 사부님 설법 동영상을 본 이튿날, 사부님께서 나에게 몸을 청리해 주셨다. 수련생이 말했다. “당신 근기가 괜찮아요, 사부님께서 당신을 관할하시니 수련을 잘 하세요.” 그 기간에 내 신체는 갈수록 좋아져 얼굴에는 홍조가 생기고 심정도 좋아졌으며 그야말로 홀가분하고 행복했다. 자전거를 타고 거리를 가면서 “이번에 나는 구원될 수 있다!”고 외치고 싶은 마음을 억제할 수 없었다. 내 인생의 가장 아름다운 시절이 바로 그때부터 시작된 것이다. 날마다 내가 가장 충실하다고 느끼는 것은 법공부와 연공이었다. 길을 걸어도 이어폰을 귀에 걸고 사부님의 설법을 들었다.

대법을 수련한 후 내 성격이 많이 고쳐졌다. 매번 법을 읽을 때면 자신과의 격차를 찾을 수 있었다. 그러나 아내는 늘 우락부락 하면서 나를 비난했다. 나는 새색시처럼 고분고분하게 그녀가 시키는 대로 했다. 그녀는 호랑이 상을 해가지고 전적으로 트집을 잡았다. 아주 오랫동안 퇴근해서 집 문을 열고 들어서면 그녀의 연극이 시작된다. “밖에서 힘들게 일했는데 왜 내가 밥을 지어야 하나요?” 내가 얼른 말했다. “내가 할테니 당신 쉬어요.” 그러나 밥을 다 지어놓으면 그녀는 욕을 했다, “주방을 어지럽힌 꼴 봐, 당신 돼지야?”

이후에 나는 깨달았다. 내가 일을 잘못해서가 아니라 내 이 마음이 욕을 감당하지 못하는 것이다. 수련 전에 내 쟁투심은 몹시 심했다. 나에게 이런 마음이 있으니 그녀에게 비로소 이런 일이 있게 된 것이다. 미시적으로 산과도 같은 그런 마성을 그녀가 나를 도와 털어주고 있는데 이건 좋은 일이 아닌가? 하지만 나는 참으려 하니 아주 힘들었다. 많은 때 나는 대법에서 요구한 ‘수련자의 참음’을 해내지 못했다. 비록 법을 적지 않게 공부했지만 법을 얻는 것은 아주 적었다. 그래서 가정관도 그치지 않았고 늘 끝이 없었다.

한번은 먹기 좋아하는 훙사오러우(紅燒肉)를 밖에서 사갖고 왔다. 그런데 식사 때 보니 보이지 않기에 물었다. “고기는?” 아내는 엄숙한 표정을 지었다. “고기요? 당신 먹고 싶어요?” 보니 쓰레기통에 버려졌다. 내가 말했다. “아주 비싼 건데 왜 버렸어요?” “정상인이라면 누가 그걸 먹어요? 바보 같은 걸!” 아내의 뜻은 이 말에 있지 않고 나를 혼내려 하는데 있음을 나는 알았다. 나는 속으로 이 고비를 잘 넘어야지 하고 생각하고는 웃어버렸다. 마난이 올 때는 산이 무너지듯 하고 고비는 바로 그 몇 초 사이에 있다. 그 몇 초는 그야말로 뼈를 깎듯 아프다. 그러나 지난 후 돌아보면 실은 아무것도 아니다.

수련 전에 나는 늘 이것저것을 먹고 싶어 했는데 입맛에 대한 집착이 몹시 심했다. 때문에 아내는 나와 다툰 적이 적지 않았다. 그녀는 밥을 아주 간단히 했는데 늘 묵은 밥, 묵은 반찬을 가져왔다가 가져가곤 했다. 내가 말했다. “구유에 여물이 있는데 당나귀가 굶어 죽을까 봐 걱정이랴?(굶어 죽지 않을 만큼만 해주고 질 같은 건 생각하지 않는다는 뜻: 역주)” 그녀가 말했다. “애석하게도 당신은 아직도 수련하고 있군요.” 매번 이 말을 하면 나는 밀레르빠를 생각하곤 한다. 그는 거의 먹을 것과 마실 것이 없는 그렇게 간고한 환경에서 수련했는데 그의 최저선은 굶어죽지 않고 수련만 할 수 있으면 된다는 것이었다. 법에 대해 얼마나 확고한 마음이 있어야 비로소 이렇게 할 수 있겠는가! 비교해 보니 나는 너무나 행복한 것이다. 설령 일 년 내내 찬밥이나 찬 반찬을 먹는다 하더라도 그보다는 만 배 천 배 행복한 것이다. 나는 밀레르빠가 남겨놓은 이 단락 수련 문화가 나에게 준 감동을 각골명심(刻骨銘心)했다. 나는 밀레르빠 부처를 나의 입맛에 대한 집착을 버리는 본보기로 삼고 매 번 식사 때면 ‘배만 불리면 된다’는 일념을 가졌다.

어릴 때는 집이 가난해 설을 쇠는 게 좋았다. 설이면 북적거리고 맛있는 것도 있어 일종 기쁨과 만족감이 있었다. 그러나 매번 설이면 모두 아내 때문에 어수선해서 설을 쇨 경황이 없었다. 한 번은 고향에서 아버지가 설을 쇠러 우리 집에 오셨다. 나는 체면 때문에 바닥을 닦고 사발을 씻고 야채를 따오면서 아내에게 말했다. “올해는 아버지께서 우리 집에 와서 설을 쇠니 싸우지 말고 순조롭게 설을 쇱시다.” 아내가 말했다. “어느 해인들 당신이 말썽을 일으키지 않은 때가 있어요?” 나는 본의 아니게 웃으면서 말했다. “그렇네요.” 하지만 말하고 말하다 웬일인지 아내의 화가 올라와 주방에서 와당탕 와당탕 하더니 나중에는 밥도 하지 않고 침대에 누워 텔레비전을 보는 것이었다. 아버지는 눈물을 흘리면서 말씀하셨다. “내가 온 게 싫어서 그러는 게 아니냐?” 내가 말했다. “아니, 아니예요, 성격이 원래 그래요,” 그때 생각했다. 만약 수련하지 않았다면 어떤 결과가 있었을지 모른다. 괴로운 가운데서도 이는 나의 명절 쇠는 것을 중히 여기는 마음을 버리라는 것임을 알고 있었지만 그래도 내려놓기 싫었다. 여러 해를 들볶이고 나서야 이 마음을 드디어 간신히 내려놓았다.

내가 집에서 늘 부딪히게 되는 문제는, 법공부와 연공을 하지 않으면 아무 일도 없는데 일단 법공부와 연공만 하면 아내가 이것저것 시키는 것이었다. 그녀는 어떻게 해도 다 만족하지 않으면서 그저 잘하지 못했다고만 하는데 내가 짜증이 나서 화가 나야만 그녀는 비로소 깃발을 내리고 북소리를 멈춘다. 내가 사부님께 향을 피워 올리면 그녀는 집이 꺼멓게 그을린다고 하고, 내가 사부님께 절을 하면 미신을 믿는다고 투덜거리며 여러 번 뒤에서 나를 발로 찼다. 내가 사부님께 과일을 올리면 올리자마자 집어다 먹는다. “누가 부처를 봤어요? 그래도 이건 사람이 먹는 게 아닌가요?” 내가 그녀에게 윤회 이야기와 대법 진상을 얘기하면 몇 마디 하기 전에 눈을 부릅뜬다. “그만해요, 입 다물어요. 누가 원만했어요? 당신도 원만 못해요!” 내가 말했다. “왜?” 그녀가 말했다. “마성이 크고 성격이 불안정해요.” 내가 말했다. “그건 과거야,” “지금도 당신은 얼마 좋아지지 않았어, 아직도 그 꼴이야.” 이는 사부님께서 내가 한 층차에서 너무 오래 배회하니까 그녀의 입을 빌어 나를 점오하신 것이다. 나는 어서 제고해 올라와 빨리 사람에서 벗어나야 한다.

아들의 마성은 아내 못지 않았다, 겨우 열 몇 살인데 여자 친구를 여럿 사귀고 또 사회 불량배와 섞여 다니면서 온종일 PC방에 박혀 있다. 밤중에 돌아와서는 오전 11시가 넘어서까지 자고 깨어나서 밥을 먹고는 또 PC방에 간다. 나를 보면 외면하고 말조차 하지 않는다. 세 식구는 한 자리에 앉아 식사할 때가 아주 드물었다.

한번은 저녁 9시가 됐는데 밖에서는 작은 비가 내리고 있었다. 아들이 아직 돌아오지 않아 짜증이 난 아내는 나를 꾸짖었다. “당신은 책을 보고 염불하면서 아들도 안 찾아와요!” 내가 말했다. “아들을 찾아온들 어쩌겠어요? 돌아오면 또 가버릴 텐데?” “당신이 그래도 애비야? 당신 애를 위해 해놓은 일이 뭐가 있어? 집에서 당신이 관심 있는 게 뭐야?” 나는 속으로 맞다고 생각했다. 이건 사심이 아닌가? 나는 미끄러져서는 안 되고 제고해야 한다. 나는 더 이상 다투지 않고 책을 내려놓고는 아들을 찾으러 나갔다.

밖에는 보슬비가 보슬보슬 내렸다. 길에는 사람이라곤 없었고 다만 희미한 가로등만이 비바람 속에서 기운 없이 빛을 뿌리고 있었다. 도로를 가로질러 건널 때 양쪽에 사람이 없는 것을 보고 성큼성큼 앞으로 걸어갔다. 몇 걸음 걸어가자 뒤에서 기척이 나기에 머리를 돌리는 순간 자신이 부딪혀 날아가는 것 같았다. 그 순간, 내 대뇌에는 오직 ‘내가 차에 부딪혔다’라는 일념만 있었다. 잇따라 나는 강대한 일념을 내보냈다. “괜찮아. 아무 일도 없어!” 이를 악물고 일어나서 다리도 보지 않고 10여 미터밖에 있는 오토바이로 곧장 걸어갔다. 기사는 두 손으로 머리를 부둥켜안고 땅에 꿇어앉아 있었다. 내가 물었다. “당신 왜 그래요?” 그가 말했다. “나 머리가 아파요, 안 되겠어요.” 내가 말했다. “일어나요. 나는 파룬따파를 수련하니 괜찮아요. 가세요.” 그가 즉시 일어섰다. “형님, 정말 괜찮아요?” 내가 말했다. “괜찮아요, 내가 만약 대법을 수련하지 않았다면 오늘 나는 바닥에 누워서 일어나지 않을 것이며, 병원에 보내주면 병원에 있으면서 나오지도 않았을 것입니다. 당신은 반드시 ‘파룬따파하오, 쩐싼런하오(法輪大法好, 眞善忍好: 파룬따파는 좋다, 진선인은 좋다)’를 기억하세요!” 그가 말했다. “그럴게요, 그럴게요, 오늘 좋은 사람을 만났네요.” 떠날 때 그가 말했다. “형님, 제가 형님께 절을 올릴게요.” 그러면서 꿇어앉았다. 나는 급히 부축했다. “절을 할 필요 없어요. 당신 가족과 친척 친구에게 ‘파룬따파하오, 쩐싼런하오’를 기억하라고 꼭 알려주세요.” 그는 감격해서 말했다. “기억하겠습니다, 꼭 기억하겠습니다!” 그는 말을 마치고는 ‘파룬따파하오! 쩐싼런하오!’를 외치면서 비가 내리는 어둠 속으로 사라졌다.

집에 돌아와서 아픈 왼쪽 다리를 보았더니 온통 검은 자주색이었고 바지와 옷도 찢어져 온몸이 꼴불견이었다. 아들은 이미 돌아와서 화를 내며 말했다. “누가 아빠더러 날 찾으러 가라 했어? 나 절로 집에 올 줄 몰라?” 아내가 텔레비전을 보면서 탓했다. “그렇게 멀쩡한 사람이 차에는 왜 부딪혀요? 아무 노릇도 못한다니까.” 나는 마음이 평온했다. 이는 어찌된 일인지를 아는지라 즉각 가부좌하고 두 손을 허스하고서 사부님께 생명을 구해준 은혜에 감사를 드렸다. 마음속에는 은혜에 대한 감사로 물결쳤다.

아내와 아들이 대법을 바르게 인식하게 하다

7.20 사악의 박해가 시작된 후 아내가 나에게 경고했다. “연마하고 싶으면 집에서 연마해요! 나에게 말썽을 일으키지 말고, 더욱이는 나가서 당신 사람들과 접촉하면 안돼요.” 수련생이 오면 그녀는 밖으로 쫓아냈다. 한 번은 내가 남에게 대법진상을 알리는 것을 그녀가 알게 됐다. 집에 돌아와서 대법 책과 연공 테이프를 죄다 바닥에 내동댕이쳤다. 이번에는 내가 화를 냈다. “대법이 좋고 나쁜 건 다른 사람이 모른다 쳐도 당신은 몰라? 이혼하겠다고? 좋아. 나에게 대법을 배우지 못하게 하겠다고? 꿈도 꾸지 마!” 나의 반석같이 확고한 마음에서 나온 매 글자는 모두 그녀를 놀라게 했다. 그녀는 나를 바라보기만 하면서 더 이상 아무 말도 없었다. 그 후부터 그녀는 더 이상 상관하지 않았고 수련생이 나를 찾아와도 내쫓지 않았다.

구세력이 가정에서 사람을 해치는 것은 식은 죽 먹기다. 가령 법의 위력과 정념정행이 없다면 그건 그야말로 낙화유수다. 내가 가장 어려울 때도 나는 굳게 믿었다. ‘내가 그들을 개변하는 것이지 너희들이 나를 개변하는 게 아니다. 가정환경에서 나는 주연이고 나는 제1책임자다. 돈은 아내가 관리할 수 있고 집안일은 아내가 할 수 있다. 하지만 나는 세대주이고 내가 가정환경을 이끌어 당신들이 나에게 가까이 다가서게 하며 게다가 갈수록 좋아지게 한다. 당신들은 모두 보조역이다. 나는 구세력이 내 가족을 조종해 나를 아무것도 아닌 것으로 만들고, 난처하게 만들고 집에서 천덕꾸러기가 되고 아무 지위도 없게 할 수 없다. 사부님께서는 우리를 이렇게 수련하라고 하지 않으셨으며 대법이 우리를 이렇게 하라고 하지 않았다. 후덕하고 양보하는 것은 대법제자의 경지이며 좋은 사람이라고 만만히 볼 수 없다. 이는 천리다.’

매번 발정념 할 때마다 나는 하나의 염을 더 한다. 구세력의 일체 배치를 철저히 부정한다! 아내, 아들의 공간장의 일체 부패한 물질을 제거하며 그들을 조종하는 일체 사악한 요소를 제거한다! 그들의 생명은 법을 위해 왔으므로 아름다운 미래가 있어야 한다. 가족이 금세에 나와 이렇듯 큰 연분이 있으니 나는 꼭 그들을 개변시켜야 하고 구도해야 한다. 동시에 나는 심성을 지키고 매 하나의 관과 고비를 잘 넘어야 하며 이 이유로 자신이 제고할 기회를 방해해서는 안 된다. 마음에 법이 있으니 고비를 넘는데 방향이 있었고, 법공부를 잘하니 고비를 아주 시원스럽게 넘었다.

나는 사부님 법을 단단히 기억했다. “우리는 모두 心性(씬씽)을 지켜야 하는데, 남들은 틀릴 수 있지만 우리 자신이 틀려서는 안 된다. 만약 자신이 心性(씬씽)을 지킬 수 있다면 이 한동안 시간이 지나 이런 일들은 모두 지나가게 될 것이며 오래 지속되지 않을 것이다. 최후에 그는 틀림없이, 우리가 자신의 수련 층차를 돌파함으로써 변화가 발생할 것인데, 틀림없이 이러하다!”[3] 나는 믿는다. 어느 날인가는 나의 가정은 꼭 변화할 것이다! 나의 가족은 모두 가장 우수하다, 적어도 그들은 다음 법정인간에 법을 얻을 정수들이다.

그 여러 해 동안 내가 가장 조급했던 것은 바로 어떻게 하면 아내와 아들에게 대법을 바르게 인식하게 해서 사당의 선전에 영향 받지 않게 할 것인가 하는 것이었다. 왜냐하면 내가 그들에게 어떻게 대법이 좋다고 말하든 그들 입에는 늘 사당이 선전한 그런 사설이 걸려 있는 것을 보았기 때문이다. 나는 생각했다. ‘나는 자기 가족마저 다 구도하지 못하면서 어떻게 남을 구도한단 말인가? 어떻게 해야만 법의 위대함과 아름다움을 실증할 수 있는가?’ 사부님께서는 ‘안을 수련하여 밖을 안정시키다’[4]고 하셨다. 자신의 바른 장, 바른 행위, 바른 품행의 표현은 주위 일체를 영향주고 이끌 수 있음을 나는 믿었다. 분명히 말하면 그래도 법에서 명백하고 법에서 제고하며 명백함이 많을수록 내려놓는 것이 더 많고 그들의 변화도 더 빠른 것이다.

집은 정(情)의 장소다. 매 한 가족의 정은 천만 개의 실오리로 당신 마음을 꽁꽁 묶어 놓았다. 한 속인으로서는 정마에 충분히 모진 고초를 당할 수 있다. 정념이 강하지 못한 수련자라면 역시 정에 끌려 기진맥진해서 정진하기 어려울 것이다. 속인일 때 나는 정을 몹시 중히 여겼다. 수련 후에도 역시 정에 해를 당해 상처투성이가 됐다. 아주 오랫동안 나에게는 이런 인식이 있었다. 나는 아내와 아들을 이렇게 좋게 대해주는데 그들은 왜 나를 이렇게 대할까? 집에서 나는 이렇듯 많은 것을 지불하는데 그들은 여전히 흉을 잡는다. 마음속에는 불평이 있었다.

사부님께서는 말씀하셨다. “여러분이 한 가정으로 오거나, 세간에 오거나 간에, 마치 여관에 투숙한 것처럼 하룻밤 잠깐 머물다 다음날이면 흩어지는데 내세(來世)에 누가 누구인지를 알겠는가. 당신 주위에 바로 당신이 이전에 다정했던 남편과 다른 친인들이 있는데 당신은 알아보는가? 그가 당신을 알아보는가?”[5] 사부님의 이 단락 법을 나는 몇 번이나 봤는지 알 수 없다. 이는 ‘큰 천기’라고 느낀다. 나는 깨달았다. 생명은 생사윤회 속에서 오고간다, 표면으로 보면 친척이나 친구 관계가 있어 애한정구(愛恨情仇) 때문에 죽고 산다. 실은 이런 것은 은혜를 갚기 위한 은혜갚음이고, 빚을 갚기 위한 빚 갚음에 불과하다. 합쳤다가는 헤어지고 헤어졌다가는 합치는데 불법을 얻어 수련으로 삼계를 벗어나지 못하면 최종의 결말은 오직 하나, ‘계속되는 윤회와 훼멸’[1]이다. 인간세상 여관에서의 임시 조합은 서로 빚을 받아 내거나 은혜를 갚는 마당에 불과할 뿐이다. 만약 사부님께서 이런 진기를 우리에게 말씀해 주지 않으셨다면, 만약 대법을 만나지 않았더라면 이 망망한 고해의 윤회 속에서 나의 피안(彼岸)이 있을 수 있었겠는가? 이런 것을 깨닫고 나니 내 마음은 대번에 홀가분해 졌고 혈육의 정도 내려놓기 쉬웠다.

나는 체험했다. 아들에 대한 집착을 많이 내려놓을수록 그의 변화가 컸다. 그의 결점, 그의 장점을 보지 않으니 마음속에는 그에 대한 호감이 생겼다. 아들은 중생 중의 한 사람이다. 전세에 그는 누구였을까? 다음 내세에 오면? 다음다음 내세에는? 내가 그에게 책임을 다하면 그에게 일정한 바로 잡는 작용을 일으킬 수 있을 것이다. 하지만 나는 잘 안다. 나는 그를 대신할 수 없으며 그의 생명 궤적을 개변할 생각을 조금이라도 해서는 안 된다. 그의 기나긴 생명 세월을 나는 투철히 보지 못하고 또한 내가 말해서 결정되는 것도 아니다. 금세의 만남은 임시로 걸음을 멈춘데 불과한 것으로, 오직 만능의 불법만이 사람을 승화시키고 개변할 수 있는 외 다른 것은 무엇도 다 헛된 것이다.

아들에 대한 나의 인식에 근본적인 개변이 있게 된 후, 자비심도 커져서 그를 배려할 수 있었는데 그의 일부 구체적인 생활을 포함해서였다. 예를 들면 그의 더러워진 옷을 빤다든가, 추운 날이면 옷을 많이 껴입으라고 알려 준다든가……내 심성이 제고되자 아들의 변화도 뚜렷했다. 예를 들면 식사할 때 아들은 마른 음식을 즐겼으므로 죽을 보기만 하면 좋아하지 않았다. 이럴 때 아내가 달랬다. “엄마가 밥해 줄게.” 처음에 내 관념은 충격을 당한 후 몹시 반감을 가졌다. “조상으로부터 나 이 생애에 오기까지 모두 손아래 사람이 노인을 따랐는데 이 이치는 뒤집을 수 없는 거야.” 하지만 아내는 아들 쪽으로 편향했다. “그래도 연공한다고, 애가 어쩌다 집에서 밥 한끼 먹는데, 자기는 그래도 배불리 먹고 마시면서.” 내가 말했다. “버릇을 잘못 기르지 말아야 할 게 아니요? 누가 아빠요?“ 아들은 다투는 것을 보고 밥도 먹지 않고 훌쩍 가버렸다. 아내는 아들이 가버리자 화가 치밀어 욕설을 퍼부으면서 수저를 내동댕이쳤고 밥도 먹지 않았다. 그래서 우리 가족은 기분 나쁘게 흩어졌다.

내가 잘못했는가? 내가 뭘 잘못했는가? 법으로부터 한 바퀴 생각을 굴렸다. 나는 그래도 내가 잘못했음을 인식했다. 사부님께서는 우리에게 알려주셨다. “무슨 일을 하든지 언제나 다른 사람을 고려하여 매번 문제와 마주칠 때마다 이 일을 다른 사람이 감당해 낼 수 있는가 없는가, 다른 사람에게 해가 되는가 안 되는가를 우선 생각한다면 문제가 나타나지 않을 것이다.”[1] 나는 깨닫게 됐다. 내 관념을 고쳐야겠다. 그저 한 때 식사가 아닌가? 각도를 바꾸어 문제를 보고 아들에 대한 자신의 관념을 개변하면 우리는 대립되지 않고 화목해질 것이 아닌가?

다시 죽을 먹을 때 나는 아들에게 말했다. “얘야, 내가 직접 너에게 볶음밥을 해줄 테니 잠시만 기다려라.” 처음에는 아들도 사양하지 않고 거만한 모습으로 내가 해주기를 기다렸다. 그러나 몇 번을 이런 후 아들은 변했다. “아빠. 하지 말아요. 나도 엄마아빠와 같은 걸 먹겠어요.” 나는 웃으면서 말했다. “아니야, 내 아들을 굶기면 안 되지.” 아내가 말했다. “음, 이제야 연공인답네.”

집에서 나는 늘 그들에게 평화롭고 따스한 봄기운을 가져다주었다. 내가 대법제자의 노래를 부르고 내가 연공하며 내가 일부 윤회 이야기와 대법진상을 얘기하면 그들은 과거 반대하던 데로부터 이후에는 묵묵히 들었고, 더 이후에는 어떤 때는 몇 마디 끼어들기도 했다. 나는 이 은연 중의 감화에서 그들이 변하고 있음을 보아냈다. 더욱 중요한 것은 나 자신이었다. 나는 인식했다. 수련이란 곧 끊임없이 사람마음을 잘라버리는 과정에서 신에 가까워지고 부단히 신으로 다가가면서 자격이 되면 당신은 곧 원만할 수 있는 것이다.

아들의 뚜렷한 변화는 일에 부딪히면 나와 상의할 수 있다는 점이었다. 한번은 실연한 후 병든 고양이처럼 침대에 누워서 먹지도 마시지도 않았고 눈물까지 흘렸다. 조급한 아내는 나 보고 어떡하겠냐고 물었다. 나는 정에 시달리는 아들의 고통스러워하는 모습을 보고 웃으면서 그에게 말했다. “얘야, 너는 그녀를 그렇게 좋아하는데 그녀는 너를 팽개쳤어. 이는 뭘 설명하는 거냐? 정은 믿을게 못 된다는 것을 설명하는 게 아니냐.” 그리하여 나는 그에게 사부님의 법을 말해주고 어떻게 사람이 될 것인가? 이 일을 어떻게 처리할 것인지 얘기해 주었다. 그는 마음이 홀가분해졌고 일어나서 밥도 먹었다.

자식에 대한 교육 방법에 대해 오랫동안 나는 잘 파악하지 못해 태도가 딱딱했다. 그러면 그가 나보다 더 딱딱했고 내가 화를 내면 그가 나보다 더 화를 냈다. 하지만 나는 아무리 어려워도 모두 내가 걸어야 할 길이며 그 사이의 정도는 오직 끊임없이 사람 마음을 내려놓는 것과 법공부를 하는 가운데서만이 비로소 어떻게 해야 하는지 알게 된다는 것을 나는 분명히 알게 됐다. 사부님께서는 말씀하셨다. “어떤 사람은 자녀를 단속하는 데도 화를 내며 그야말로 떠들썩한데, 당신이 자녀를 단속한다 해도 그럴 필요가 없으며, 당신 자신은 진정 화를 내지 말아야 한다. 당신은 좀 이지(理智)적으로 자녀를 교육해야만 비로소 진정으로 자녀를 잘 교육할 수 있다. 작은 일마저 넘기지 못하고 화를 내면서도 공을 자라게 하려고 생각하는가.”[1] 사부님께서는 자녀를 교육함에 이지적이어야 한다고 우리에게 알려주셨다. 무엇이 이지적인가? 나는 단순하고 거칠게 했는데 이 방법은 신통하지 못하다. 이후에야 나는 아직도 결과를 중히 보았으며 과정이 가장 중요하다는 것을 깨닫게 됐다. 과정에 이지와 지혜가 필요하며 자녀를 관할할 때 자신을 높이 놓지 말고 평온한 심태를 가져야 하고, 굳어진 얼굴로 수업하듯 하지 말고 평등하게 상의하면서 상대방 각도에서 문제를 생각하며 그를 배려한다는 마음을 품어야 한다. 이러면 말한 말에는 자비의 힘이 있고 그가 들어도 짜증이 나지 않으며 그는 당신이 그를 배려한다는 선심을 느끼게 될 것이다. 이러한 효과는 당신이 반나절 떠들썩 고함친 것보다 훨씬 좋다.

한 번은 아들이 놀러 나가서 이틀이나 돌아오지 않았다. 아내가 전화를 해도 받지 않으니 화가 치민 아내가 나를 훈계했다. 내가 말했다. “화내지 말아요, 내가 하는 걸 봐요.” 전화하기 전에 나는 강대한 일념을 발했다. ‘이 일을 조종하는 사악한 생명을 즉각 해체한다! 그는 좋은 생명이니 반드시 즉각 전화를 받게 하라, 내가 그를 이끄는 것이지 그가 나를 영향 주는 게 아니다.’ 그리고는 아들에게 전화를 걸었더니 그가 즉각 받았다. 나는 말했다. “아들아, 너 이미 이틀이나 집에 오지 않았구나. 내가 밥을 가져다줄까?” 아들이 급히 말했다. “아니, 아니예요.” 내가 말했다. “어서 돌아오너라, 아빠는 네가 보고 싶구나. 우리 배불리 먹고 마신 후 다시 놀자꾸나. 그럴 거지?” 그가 말했다. “나 조금만 더 놀래요.” “그러지 말어. 아니면 내가 차로 너를 데리러 갈까? 너도 우리의 감정을 생각해보려무나!” 그는 그러겠다고 대답했다. 아들이 돌아온 후 내가 말했다. “앞으로 너의 아들도 이렇게 너를 괴롭힌다면 너는 어떤 느낌일까? 종일 PC방에 파묻혀있다면 너는 어떤 느낌이겠니? 이건 정도가 아니다. 그렇지 않니?” 아들은 “예”하고 말했다. 이 일을 내 친구가 보았다. 그는 놀라면서 말했다. “너 아들에게 이렇게 겸손해? 두 손 다 들었다. 나 같은 성질에는 진작 따귀를 때렸을 텐데.” 내가 말했다. “사부님께서는 우리에게 알려주셨지. 연공인은 누구에게나 다 좋게 대할 것을 강조하는데 하물며 자신의 아이임에랴?”

사실 우리의 마음속에는 모두 자식에 대한 수많은 희망이 숨겨져 있다. 그들이 장래에 어떻게 되기를 바란다. 당신은 이런 희망을 내려놓아야 하며 그가 장래 얼마나 우수하고 얼마나 큰 재간이 있든 기대하지 말아야 한다. 설령 그가 정말 출세했다 하더라도 그것 역시 그의 명에 있어서 만들어진 것이고, 명에 없으면 힘들어 죽는다 해도 헛된 짓이다. 그의 세세생생은 어디서 온 것인가? 어디로 가는가는 당신과 조금도 관계가 없다. 당신의 집에 환생해 왔다 해도 임시적으로 몇십 년이다. 가령 그가 정말로 성과를 얻었다면 그건 당신의 공로가 아니며 일체는 모두 신이 안배하고 당신은 그의 나무 아래서 잠시 바람을 쏘이고 있는데 불과하다. 일단 헤어지면 무엇이나 다 끝난다. 내세에는 누가 누구인가?

중생은 평등하며 아들도 예외가 아니다. 누가 잘못했는지는 모두 이치로 가늠한다. 한 번은 내가 한바탕 아들을 훈계했더니 그는 하루 동안 집에 돌아오지 않았다. 나는 전화로 말했다. “얘야, 난 왜 늘 착오를 범할까?” 아들은 무슨 일이 생긴 줄 알고 물었다. “무슨 일이세요?” 내가 말했다. “난 왜 늘 내 아들을 화나게 하는지 몰라?” 아들은 웃었다. “아빠는 이 며칠 늘 얼굴을 찌푸리고 있으면서 나를 잘못했다고 하고선.” 내가 말했다. “아니야, 아빠가 잘못했어. 아빠가 수련을 잘하지 못했어.” 아들이 돌아온 후 나는 온화하게 그에게 말했다. “얘야, 너는 내가 금방 너에게 사과했다고 여기지? 그러나 사부님께서는 말씀하셨단다. ‘아들이 부모에게 효도하지 않으면 다음번에 거꾸로 되는데, 바로 이렇게 돌아오고 돌아간다.’[1] 네가 오늘 나를 어떻게 대하면 너의 자손도 그렇게 너를 대한단다. 이걸 무엇이라 부르겠니? 이것을 선에는 선한 보답, 악에는 악한 보답이라 부르는데 하늘의 이치야. 알겠니?” 아들은 나를 바라보면서 말이 없었다. 하지만 나는 내 말이 그의 마음속에서 그래도 작용을 일으키고 있는 것을 보았다.

그 몇 해 동안 아내는 내가 진상을 알리는 것을 늘 방해했다. 특히 본 현의 수련생이 납치됐을 때 그녀는 강온 양면책을 다 썼다. “당신과 함께 살자니 하루 종일 간이 콩알만 해져요. 남에게 말하지 않으면 안 돼요? 경찰이 알면 이 집은 망하지 않겠어요?” 내가 말했다. “나도 위험한 건 알고 있어요. 하지만 앞으로 큰 도태가 있을 텐데 우리가 이 일을 알면서도 죽는 사람을 보고 구해주지 않을 순 없잖소? 다시 말해서 당신 울타리 안의 그 친구가 재난이 올 때 이렇게 영문도 모르고 죽어버리면 애석하지 않겠소? 오직 그들이 진상을 알아야만 구원될 수 있어요.” 아내는 막을 수 없게 되자 말했다. “그럼 이후 진상 알릴 때 내가 당신을 도와주겠어요, 누가 감히 붙잡는지 보죠.” 이때부터 나에게 진상자료가 있으면 그녀가 몰래 나가서 나를 도와 배포했다. 내 손에 진상 지폐가 있으면 그녀가 나를 도와 써버렸다. 내가 진상을 말할 때면 그녀가 곁에서 도왔다. “탈퇴하세요, 탈퇴하세요, 공산당이 무슨 좋은 점이 있어요?”

사부님께서는 말씀하셨다. “남들의 좋은 점을 많이 보고 남들의 좋지 않은 점을 적게 보라.”[6] 이 몇 년 동안 나는 될수록 아내와 아들의 좋은 면만 보면서 사람의 이치를 따지지 않았다. 그들과 말할 때면 옛날 상처를 건드리지 않았고 나쁜 물질을 상대방 공간장에 던지지 않았다. 당신에게 정념이 족할 때면 정말로 주위환경을 개변할 수 있고 심지어 어떤 때는 당신이 한 번 웃기만 해도 주위는 모두 빛으로 빛난다. 당신 얼굴이 음침하면 주위는 모두 검은 구름으로 꽉 찬다. 자신의 장이 바르면 일체는 서서히 모두 변한다. 우리의 존재는 중생이 구원받을 수 있는 희망이다.

한 동안 나는 밥을 지을 때면 언제나 션윈의 한 노래 ‘인생은 무엇을 위해’를 부르기 좋아했다. 심령을 진동하는 노래가사를 부르면 마음이 뜨거워지고 눈물이 흐른다.

인생 백년 누구를 위해 바쁜가

명리친정(名利親情)에 애간장 태우누나

연극이 끝나 가는데 누가 나인가

창천은 말이 없고 아득하기만 하여라

주위에 대법이 널리 전해지니

진상을 알고 방향을 바로잡네

깨어난 중생들 선악을 분명히 하니

자아를 찾아 천당(天堂)으로 돌아가네 [7]

아내가 말한다, “이 가사 정말 듣기 좋아요. 베껴 주세요, 나도 부르겠어요.” 그래서 나는 베껴서 주방 벽에 붙여놓았다. 그녀는 외우고 또 외웠다. 한번은 내가 아내와 함께 장 보러 갔는데 그녀가 야채 파는 여자에게 말했다. “내가 가사 한 수를 읽어 줄게요. ‘인생 백년 누구를 위해 바쁜가, 명리친정(名利親情)에 애간장 태우누나, 연극이 끝나가는데 누가 나인가, 창천은 말이 없고 아득하기만 하여라.’[7]” 상대방은 몹시 놀랐다. “어머, 언니는 시를 지을 줄 아나봐요?” 내가 말했다. “이는 파룬궁의 가사인데 훌륭하죠?” 상대방은 말했다. “훌륭해요, 훌륭해요” “그럼 당신은 파룬따파하오, 쩐싼런하오를 기억하세요,” “기억했어요, 기억했어요.” 아내가 이어서 말했다. “주위에 대법이 널리 전해지니, 진상을 알고 방향을 바로잡네, 깨어난 중생들 선악을 분명히 하니, 자아를 찾아 천당(天堂)으로 돌아가네”[7] “당신들 부부를 보니 정말 행복하군요.” 우리는 함께 상대방을 삼퇴시키고 야채를 사갖고 즐겁게 돌아왔다.

아내는 매 번 직장에서 출장을 나갈 때면 사부님께 향 한 대를 공손하게 피워 올리면서 입으로 뭐라고 중얼거린다. 내가 물었다. “무슨 말을 했어요?” “사부님께 내가 출장을 가는데 순조롭도록 보우해 주시며 우리 집이 돈을 벌게 보우해 달라고 했어요.” 내가 말했다. “부처님은 돈 버는 일을 상관하지 않으세요.” 그녀가 말했다. “헛소리, 부처님은 뭐나 다 관할해요. 당신을 봐요. 수련 전에는 누가 관할할 수 있었어요? 지금은 괜찮아요. 리 선생님께서 당신을 꼭 잡았으니까요.” 내가 말했다. “당신 보건대 내가 수련성취 할 것 같아요?” 그녀가 말했다. “할 수 있어요, 틀림없이 수련성취 할 수 있어요.” 말을 마치더니 기분이 소침해졌다. “당신 말해 봐요, 당신이 수련성취 하면 나는 어떻게 하죠?” 내가 말했다. “수련하지 뭐, 사람이 세상에 온 건 수련하기 위해서라고 하는데 이건 천기요. 다만 사람이 모르고 있을 뿐이지. 수련 외에는 다른 출로가 없소. 당신을 보라구. 하루 종일 사람의 것을 틀어잡고 있으니 어느 때 저승사자가 될지도 모르잖소.” 그녀가 말했다. “난 가부좌를 틀 수 없어요.” 내가 말했다. “그건 모두 작은 일이오. 법공부하고 마음을 닦는 것이야 말로 근본이요.”

나는 아들에게 알려주었다. “너는 ‘파룬따파하오, 쩐싼런하오’란 이 말을 너의 모든 친구에게 알려줘라. 그들이 믿기만 한다면 너는 곧 그들을 구한 것이다.” “알았어요.” “분명히 말하지 못하겠으면 네가 그들을 우리 집에 데려오렴, 내가 그들에게 말해주겠다.” 한 번은 전화로 아들에게 집으로 오라고 하니 그는 안 오겠다고 했다. 내가 뭘 하는지 물으니 아들은 “친구들과 함께 있는데 그들에게 그 뭐뭐가 좋다. 그 뭐뭐가 좋다(파룬따파하오, 쩐싼런하오)를 말해주고 있어요”라고 했다. 아들 말을 들으면서 나는 그가 말하는 것이 어떠하던지 상관없이 다른 공간에서는 마찬가지로 마음을 놀라게 하고 넋을 뒤흔들고 있을 것이라고 생각했다.

몇 번인가 아들은 헐레벌떡 집으로 달려왔다. “아빠, 책을 감춰요. 친구가 말하는데 또 아빠네를 붙잡는데요. 당분간 아빠는 나가서 말하지 마세요.” 내가 말했다. “죽는걸 보고 내가 구해주지 않아서야 되겠니?” 아들이 말했다. “내가 보건대 아빠는 적지 않게 말했으니 좀 그만하세요.” 내가 말했다. “이건 사명이야 아들아, 넌 몰라, 사명이야.”

당시 나는 생각했다. 만약 사부님이 아니었다면, 대법이 아니었다면, 내 이 아들이 그래도 아들이겠는가? 우리 이 집이 그래도 집이겠는가? 죽지도 살지도 못하는 나 자신마저 어디로 갔을지 모를 것이다.

후기

똑같은 가정이지만 수련 전후가 천양지차다. 가정 마난에서 걸어 나올 수 있었던 것은 나에게 털끝만한 재간이라도 있어서인 게 아니라 사부님의 자비로운 구도의 결과이며, 심지어 나를 앞으로 밀어준 매 한 발자국마다 모두 사부님의 심혈이 고여 있고 매 한 점 제고에도 모두 나에 대한 사부님의 거대한 지불이 묻어 있으며, 조금 조금씩의 인식과 제고는 모두 사부님의 자비로운 구도의 결과다. 사부님께서 계시지 않으면 나의 일체가 없으며 나의 오늘은 더욱 있을 수 없다. 여기까지 쓰고 나니 정말로 눈물이 흐른다. 사부님의 자비는 말로는 표현할 길이 없다. 정법의 종결은 눈앞에 닥쳤는데 나는 반드시 정진하고 또 정진하며 반드시 대법의 표준에 도달해 사부님을 따라 집으로 돌아가겠다!

사부님 감사합니다!

수련생 여러분 감사합니다!

주)

[1] 리훙쯔(李洪志) 사부님 저작: ‘전법륜’

[2] 리훙쯔 사부님 경문: ‘정진요지-무엇을 참음이라 하는가’

[3] 리훙쯔 사부님 경문: ‘미국 중부법회 설법’

[4] 리훙쯔 사부님 경문: ‘정진요지-안을 수련하여 밖이 편안하다’

[5] 리훙쯔 사부님 경문: ‘휴스턴법회 설법’

[6] 리훙쯔 사부님 경문: ‘2003년 대보름설법’

[7] 리훙쯔 사부님 저작: ‘홍음3-인생은 무엇을 위해’

(밍후이왕 11회 중국 대륙 대법제자 수련심득 교류회)

문장발표: 2014년 11월 12일
문장분류: 대륙법회
원문위치: http://www.minghui.org/mh/articles/2014/11/12/299779.html
영문위치: http://en.minghui.org/html/articles/2014/11/14/146847.html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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