简体 | 正體 | 대법서적

한국 출가인 진정한 대법제자로 되다

글/한국 제주 대법제자

사부님 안녕하십니까?

수련생 여러분 안녕하십니까?

저는 2006년에 법을 얻었습니다. 제가 법을 얻은 과정과 진상 과정 중 얻은 체득을 여러분과 함께 나누고자 합니다. 부족한 부분은 자비로 지적하여 주시기 바랍니다.

1. 법을 얻다

저는 2006년 당시 불교의 출가 수행자로 대구 동화사에서 불교 수행을 하고 있었습니다. 2006년 7월 어느 날 사찰 봉고차에 물건을 가지러 갔다가 운전석 앞에 이라는 제목의 소책자가 눈에 띄었습니다. 훑어보니 불가 기공이라고 적혀 있었고 전 세계 1억 명이 수련하고 있으며 공법의 탁월한 효과로 중국에서 너무 많은 사람이 수련하자 중국 공산당이 두려움과 질투심으로 탄압한다는 내용 등이 실려 있었습니다. 그 책자를 다 읽고 나니 예전에 뉴스에서 본 ‘중국정부가 파룬궁을 사이비 종교로 간주해 수련을 금지한다.’라는 내용이 생각났고, ‘보도내용이 왜곡, 날조된 거짓말이었구나.’ 하고 단번에 진상을 알게 되었습니다. 그리고 고층차의 불가 기공이라는 말에 수련을 해보고 싶은 생각이 들었습니다. 며칠 후「파룬궁」과「전법륜」책을 주문해서 먼저「파룬궁」을 보았습니다. 처음 며칠 동안은 공법지도 동영상이 있는지도 몰라 그냥 책 속의 사부님 연공 동작 사진을 보며 구분 동작으로 따라만 했는데도 강한 에너지를 느낄 수 있었고 책에서 이야기하고 있는 이치들이 일반적인 기공과는 완전히 다르다는 인식이 들었습니다. 파룬궁을 다 보고 전법륜을 읽었는데 논어(論語)를 읽으면서 전율을 느꼈고 이 책은 보통 책이 아니라는 직감이 들었습니다. 그리고 사부님 존함대로 이분은 분명히 큰 뜻을 품고 오신 분 일거란 생각이 들었습니다.

그렇게 대법과의 인연이 시작되었고 초기에는 낮에는 틈틈이 책을 보며일과가 끝나고 밤이면 혼자서 연공을 하였는데 책에서 말씀하신 것과 같이 몇 차례 관정을 해주시는 것을 느낄 수 있었습니다.

2. 정체에 합류하다

저는 처음 법을 만나 혼자 수련할 당시에는 여전히 동화사 승가대학에서의 교과과정을 계속하고 있었고, 저 자신도 불교 경전에 대한 호기심과 미련이 남아 있어서 전일 문제를 인식하고서도 여전히 두 척의 배에 발을 딛고 있는 상태를 면치 못하고 있었습니다. 마지막 4학년에는 가장 방대하다는 화엄경을 배웠는데 화엄경을 배우고 나니 불교경전에 더는 미련이 없었고 대법이야말로 고층차의 법이고 대법을 전일하게 수련해야겠다는 결심이 확고해졌습니다. 대법을 만나고도 삼 년 동안은 두 척의 배에 발을 디딘 채 혼자서 법공부와 연공만하며 대법을 만났다고 만족하는 차원에서 머물러 있었는데 동화사 교육과정 4년을 졸업하고 나니 다른 수련생들은 어떻게 수련하는지 만나서 교류하고 싶은 생각이 들었습니다. 동화사를 나와서는 영덕의 한 사찰에 있었는데 인터넷에서 검색해보니 가장 가까운 곳이 울산 연공장이었습니다. 단체 법공부가 있는 날 전화를 하고 연공장에 갔는데 보도소장님을 비롯한 다른 수련생들이 모두 호의적으로 대해주셨고 단체 법공부와 단체 연공을 할 때는 혼자서 할 때와는 다르게 에너지 마당이 강하다는 것을 느낄 수 있었습니다. 시간을 내서 한 번씩 내려갈 때마다 혼자 수련해서 모르는 부분들을 교류를 통해 많이 배울 수 있었고 발정념과 진상을 해야 한다는 것도 그때야 알게 되었습니다. 주말에는 터미널 앞 내국인 진상이나 중국인 노동자들이 모여 있는 공단에 가서 진상지를 배포하면서 진상 활동에가끔 참여하기도 했습니다.

단체 수련 환경이 수련 제고에 훨씬 빠르다는 걸 알고 한 달에 한 번 정도 시간을 내어 울산에 내려갔는데 울산에 가는 버스를 타는 순간부터 대법제자들을 만나러 간다는 생각에 속으로 기뻐하던 기억이 새롭습니다.

한번은 보도소장님이 이렇게 가끔 내려올 게 아니라 연공장이 비어있고 숙식이 가능한 구조이니 연공장에 와서 지내보면 어떻겠냐고 하시기에 한동안 고민 후 울산 연공장에 와서 석 달을 살기도 했는데 그 기간에 못 읽었던 설법집들을 많이 읽을 수 있었고, 시간이 되시는 분들이 틈틈이 연공장에 오셔서 같이 전법륜과 설법집을 읽고 교류하며 인식이 많이 제고되었던 것 같습니다. 또 마침 그해 2월 말에는 부산 션윈 공연이 있었는데 션윈 활동에도 참가하며 더 큰 정체수련 환경을 경험하기도 했습니다.

이렇게 저는 보도소 단체법학습 참여를 계기로 정체에 합류하여 ‘불이법문’ 문제를 완전히 극복하고 진정한 정체 수련의 길로 들어서게 되었습니다.

3. 진상의 중요성을 인식하다

한번은 울산의 한 수련생이 제주도에 중국인 관광객이 많이 오는데 진상 활동을 할 사람이 부족하다며 시간 되면 한번 가보는 것도 좋을 것이라고 알려주는 것이었습니다. 그때는 그냥 흘려들으며 기회가 되면 가보겠다고 했습니다. 그 당시는 다시 영덕의 사찰로 올라가 가끔 울산에 단체 법공부하러 내려가곤 하던 때였는데 울산에 있을 때보다는 역시 수련이 느슨해지는 것이었습니다. 이래서는 안 되겠다고 전환점을 찾던 중이었는데 이번엔 부산에 있는 수련생이 전화를 걸어와 제주도에 대법을 수련하는 스님이 한 분 계시니 내려가서 같이 교류도하고 진상도 하면 어떻겠냐고 하는 것이었습니다. 그래서 전화번호를 물어서 제주도에 계신 스님한테 전화를 드리고 일주일 정도 중국인 진상을 하고 싶다고 했더니 흔쾌히 내려오라며 곧 중국인이 많이 오는 5월 1일 노동절 연휴인데 그때 내려오면 좋겠다고 하시며 내려오면 노 수련생이 계시니 그분의 도움을 받으라는 것이었습니다.

제주도에 내려와 보니 제주도에서 오랫동안 수련하며 진상 활동을 해오던 노 수련생이 계셨고 시간이 날 때마다 틈틈이 진상지를 주는 마음가짐과 진상지를 주는 위치, 좀 더 효율적으로 진상하는 방법 등을 알려주셨습니다.

제주도 진상 첫날, 4시에서 6시까지 새벽 연공을 하고 아침도 먹는 둥 마는 둥, 노 수련생을 따라 바로 공항으로 가서 6시 반부터 10시 반까지 진상을 했는데 중국인들이 그야말로 물밀 듯이 밀려들어 정신이 없었습니다. 그때가 마침 왕리쥔이 미국 영사관으로 도피한 내막을 폭로한 대기원 특간이 나왔을 때인데 정말 공항 곳곳에서 중국인들이 신문을 들고 열심히들 보는 모습들은 그야말로 장관이었습니다.

그렇게 중국인들에게 진상하고 11시쯤 숙소로 돌아와 점심 후 너무 피곤해 낮잠을 청했는데, 꿈을 꾸었습니다. 어느 기차역 종점에 기차 한 대가 길게 이어져 있고 맨 마지막 칸 한량이 기차와 연결되어 있지 않은 상태였는데, 저는 바로 그 맨 마지막 칸에 타고 있었습니다. 저는 마지막 칸의 맨 앞에 타고는 앞에 서 있는 기차에 그 칸을 연결하려고 애를 쓰고 있었습니다. 제힘이 모자라 제가 탄 칸이 옆으로 탈선하려고 하는 그 순간 누군가가 잡아당겨 줘 앞의 기차에 겨우 연결을 했고 연결하자마자 기차는 바로 출발하였습니다. 잡아당겨 준 사람의 얼굴은 기억나지 않지만, 느낌상 노 수련생 같았습니다. 그 기차가 지나간 선로 위에는 주황색 전깃줄 같은 것이 세 줄이 길게 있었고 그 줄에 크고 작은 시커먼 뱀들이 수십 마리가 축 늘어져 있었는데 마치 자석에 달라붙은 듯이 꼼짝을 못했고 제 가슴부위에서도 초록색 작은 뱀이 한 마리 빠져나와 그 주황색 전깃줄에 날아가 달라붙는 것이었습니다. 그 장면에서 꿈에서 깨어났는데 머리가 아주 상쾌하고 맑았습니다.

사부님께서 중생구도의 장면을 그렇게 꿈의 형식으로 점화해주시고 제 신체도 청리해 주시지 않았나 생각됩니다. 그래서 저는 중생을 구도하는 진상이 얼마나 중요한지 실감을 했고, 신심이 나서 더 열심히 진상했습니다. 또 중국인들이 뭐라고 자꾸 말을 걸어오는데 못 알아들으니 답답해서 중국어도 틈틈이 배우기 시작했습니다.

일주일간의 진상을 마치고 육지로 돌아온 후에도 제주도에서의 중국인 진상이 뇌리에 남아 시간이 날 때면 한 달, 석 달씩 내려가 노 수련생 집에서 묵으면서 진상 활동을 했는데 오전은 공항, 낮엔 용두암, 저녁에는 다시 공항에 나가서 진상하고 돌아와 법공부와 발정념을 하는 노 수련생의 간고한 생활은 제게 귀감이 되었고 따라다니면서 어느새 저도 처음 왔을 때보다는 힘이 생겨 혼자서도 쭈뼛거리지 않고 진상을 할 수 있게 되었습니다. 진상 활동을 마치고 육지로 돌아올 때마다 중국인은 이렇게 많이 오는데 진상을 할 수련생이 부족한 것이 늘 마음에 걸렸습니다. 그래서 작년에는 아예 제주도에 방을 하나 구했고 장기적으로 중국인 진상을 하기로 마음먹었습니다.

4. 진상과정에서 제고하다

공항에서 장기간 진상하다 보니 공항직원들과 모순도 많았는데 청소하는 아주머니부터 카트 끄는 청년, 청소 책임자, 경비, 공항 관계자 등 매번 사람이 바뀌어 가면서 진상을 못 하게 교란하는 것이었습니다. 공항 안에서 신문을 주면 안 된다며 나가라는 직원들이 가장 많았고 한번은 제 이름과 전화번호를 적어가는 직원도 있었고 계속 이러면 과태료를 징수하겠다는 직원도 있었습니다. 그럴 때는 마음이 위축되었고 진상 장소를 잃게 되는 것은 아닌가 두렵기도 했습니다. 그때마다 공항 진상을 오랫동안 해 오신 노 수련생과 교류했고 당신도 다 그런 과정을 걸어왔다며 우리가 정념이 약해 빈틈이 있어 구세력에게 빌미를 제공해 그들 배후의 사악이 속인을 통제하여 그들 입으로 말하게 해, 중생구도를 못하게 하는 것이니 결국에는 법공부를 많이 하고 정념을 강화해서 돌파해야 하는 고험이라며 사부님의 설법 내용을 인용해 알려주셨습니다.

그 당시 진상 경험이 없고 법인식이 낮아 그런 상황에서 어떤 법리로 가늠하고 어떻게 안으로 찾아 제고해야 하는지 모르던 제겐 큰 도움이 되는 교류였습니다. 그렇게 제가 법인식이 제고되고 발정념을 강화하자 며칠 후 정말 변화가 있었습니다. 카트 끄는 한 청년은 늘 2번 출구로 왔다 갔다 하며 제게 눈을 흘기거나 일하는데 걸리적거린다며 짜증을 내곤 했었는데 항상 상화하게 웃으며 ‘미안합니다, 조금만 하다가 가겠습니다.’ 하면서 한편으로는 진상을 교란하는 그의 배후 요소를 청리하는 발정념을 지속해서 했더니 하루는 그가 다가와서 하는 말이 ‘삼촌, 저 안쪽에 신문 떨어져 있으니 빨리 치워요, 안 그러면 공항 직원들이 뭐라 그래’ 하는 것이었습니다. 저는 그의 태도 변화에 깜짝 놀랐고 ‘이것이 자비와 정념의 힘’이구나 하며 이내 사부님께 감사한 마음이 들었습니다. 그 후로 그 청년과는 서로 인사를 주고받으며 친하게 지내고 있습니다.

또 하나의 돌파해야 하는 큰 관은 여행 가이드였는데 가이드는 공항직원과는 다르게 공항, 용두암, 크루즈선에까지 중국인들을 데리고 다니며 중국인 진상에 미치는 영향력이 컸습니다. 가이드가 파룬궁 신문이니 받지 말라고 한마디 하면 한 무리의 중국인이 신문을 하나도 받지 않거나 받았던 신문도 돌려주곤 했는데 그럴 때는 매우 안타까웠고 가이드를 원망하는 마음마저 올라왔습니다. 어떤 때는 쟁투심으로 가이드와 실랑이를 해 진상 장소을 더 흐려놓는 오류를 범하기도 했습니다. 이런 일이 있을 때마다 노 수련생을 비롯한 다른 수련생들과의 교류를 통해 누락을 안으로 찾고, 법으로 가늠하며 제고의 기회로 삼았습니다. 특히 노 수련생들의 풍부한 진상경험에서 나오는 교류는 큰 도움이 되었습니다. 수차례의 교류 이후 어떤 상황이 벌어지더라도 모두가 내 수련상태가 촉성한 일로서, 내가 제고해야 해결되는 문제라는 인식이 명백해졌습니다. 그 후 간혹 교란하는 가이드들을 만날 때면 마음을 움직이거나 가이드를 탓하지 않고 먼저 자신의 심태를 바로 잡으며 그들 배후의 사악을 제거하는 발정념을 하고, 가이드의 명백한 일면을 향해 ‘당신은 중생을 구도하는 것을 막지 말고, 업을 짓지 말라.’라는 일념을 보내곤 했습니다. 그러자 언제부터인지 교란하던 가이드들이 신문을 받지 말라는 말을 점차 하지 않는 것이었습니다.

진상하면서 나타나는 수련생 간의 모순이든 세인들과의 모순이든 문제가 나타났을 때는 먼저 안으로 찾으며 자신의 누락을 법으로 가늠해 살피고 진지한 교류를 통해 더 제고할 기회로 삼았습니다. 그렇게 정체제고가 이루어지자 공항직원들이나 가이드들과의 모순이 없어졌고 간혹 모순이 있다 해도 상황에 따라 이지적으로 대처할 수 있게 되었으며, 제 마음도 크게 흔들리지 않고 담담하게 진상을 견지할 수 있게 되었습니다.

5. 진상과정에서 생긴 일들 몇 가지

공항 진상을 하다 보면 공항직원뿐만 아니라 중국인들과 많은 에피소드가 벌어지는데 가장 많이 부딪치는 문제와 기억에 남는 몇 가지만 소개하고자 합니다.

중국어를 틈틈이 익히면서 간단한 소통은 가능하게 되었는데 진상지를 주면 가장 많이 묻는 말이 ‘당신은 어느 나라 사람이냐?’, ‘한국인이 왜 중국 일에 관여하느냐?’, ‘돈은 얼마를 받고 하느냐?’, 하는 질문들이었습니다. 그럴 때면 저는 ‘나는 한국인이고 파룬따파를 수련한다. 파룬따파는 좋은데 공산당이 선량한 파룬궁 수련생들을 박해하니 중국인들에게 진상을 알리는 것이다. 돈을 받고 하는 게 아니라 자원봉사로 하는 것이다.’ 라고 각각의 질문에 맞는 대답을 해주면 대부분은 고개를 끄덕입니다. 기회가 되면 ‘전 세계가 파룬따파를 수련합니다, 한번 보세요.’ 하며 휴대폰으로 대법홍전(大法洪傳) 동영상을 보여주면 어떤 사람들은 네댓 명이 몰려와 신기하게 쳐다보기고 하고, 대번에 눈빛이 달라지며 고개를 끄덕이는 사람도 있습니다. 때론 보고 나서 “파룬따파 하오.” 라고 외치는 사람도 있고, 때론 “하오, 하오”하며 엄지손가락을 추켜세우는 사람도 있습니다. 이렇게 명백해지는 중국인들을 볼 때면 정말 보람을 느낍니다.

한번은 3층에서 진상지를 주고 있는데 70세쯤 되어 보이는 건장한 노인에게 진상지를 주니 이미 보았다며 살며시 저를 따라오더니 탈당하고 싶다는 것이었습니다. 그때까지 저는 진상지만 주었지 탈당을 받아본 적이 없기에 그 노인의 말에 어떻게 해야 할지 당황했습니다.

그러나 재빨리 중국인 노 수련생이 탈당 받을 때 하는 멘트를 떠올려 몇 마디 건네니 당원이라며 이름을 ‘진승’이라고 알려주는 것이었습니다. 제가 발음만 알아듣고 글로 쓰지 못하자 본인이 직접 한자로 眞昇이라고 쓰는 것이었습니다. 처음으로 그것도 얼떨결에 탈당을 받아서 저 자신도 믿기지 않았습니다. 또 한 번은 저 혼자서 1층 국제선 입국창구에서 진상지를 주고 있는데 한 청년이 건네는 진상지를 받으면서 ‘당신은 연마합니까?’라고 묻는 것이었습니다. 뜻인즉 파룬궁을 연마하느냐는 것인데 그렇다고 하니까 한참을 망설이더니 따라오라며 사람이 없는 한적한 곳으로 가더니 쪽지를 건네며 ‘중국 대륙은 지금 아주 어렵습니다, 공산당은 희망이 없어요. 당신이 탈당을 도와주세요.’ 라고 짧게 몇 마디 하는 것이었습니다. 그래서 알았다며 ‘평안을 축원합니다.’라고 했더니 ‘감사합니다.’ 하고는 이내 같이 여행 온 무리로 가는 것이었습니다. 쪽지에는 다섯 명의 이름과 각각 당, 단, 대 표시가 있었습니다.

이 두 차례의 경험으로 ‘아, 이렇게 탈당을 하고 싶어 스스로 찾아오는데 전면적으로 탈당을 받을 수 있는 중국 수련생이 노 수련생 한 분뿐이라는 게 너무 안타까웠습니다. 한편으로는 혼자서 이 많은 중국인을 상대로 탈당을 받고 있는 중국인 노 수련생이 대단하다고 느껴졌습니다. 그때부터 저도 진상지를 주다가 기회가 되면 탈당을 권하기도 하면서 간혹 몇 명씩 탈당을 받고 있긴 하지만 제 역량이 너무 부족해 그들 마음속의 매듭을 정확히 풀어주지는 못하는 아쉬움이 큽니다.

때론 반대로 독해가 심한 중국인들을 만나기도 했는데 진상지를 받자마자 찢어버리는 사람, 구겨서 얼굴에 던지는 사람, 진상지를 주면 저리 가라며 험상궂게 밀치는 사람, 적대적인 눈빛을 보내는 사람 등 각종 사람이 다 있었습니다. 그런 반응들을 대할 때면 처음에는 마음이 불편했지만, 시간이 지나면서 그런 반응들에는 담담해졌고 오히려 그들이 구도되지 못할 범위에 드는 중생들이라는 생각에 마음이 안타까웠고 그 상황에서 제가 해줄 수 있는 게 아무것도 없다는 게 또한 안타까웠습니다.

6. 정체 협력으로 더 많은 중국인들에게 진상을 알리게 되다

한번은 3층에서 진상지를 주는데 20대 중반쯤 돼 보이는 중국 여성이 뭐라고 한참을 이야기하는 것이었습니다. 파룬궁 뭐라고 하는데 말이 빨라 제가 잘 못 알아들어 자주 교류하는 인천의 교포 수련생에게 전화를 걸어 통역을 부탁했더니 수련생은 아니지만, 파룬궁이 좋다는 것을 아는 세인인데 ‘중국인이 많이 다니는 곳에 왜 현수막이나 진상 보드판을 펴고 더 전면적으로 진상을 알리지 않느냐?’라고 한다는 것이었습니다. 그 말을 듣고 속으로 이건 사부님 점화일지 모른다는 생각이 들었지만, 그 당시엔 다른 곳 진상은 엄두가 안 나서 그냥 지나쳐 버렸습니다.

그리고 한참이 지난 어느 날 다시 공항 3층에서 진상지를 주는데 한 중년 여성과 딸이 반갑게 인사하며 다가와 고생한다며 자신들도 동수(同修)라는 것이었습니다. 그러면서 한참을 이야기하는데 다는 알아들을 수는 없었고, 요지는 홍콩과 대만에는 진상 현수막과 보드판을 펴고 대면적인 진상을 하는 곳이 많은데 제주도에서는 보지 못했다며 왜 하지 않느냐는 이야기였습니다. 그래서 ‘제주도에 아직은 수련생이 많지 않아 못하고 있다.’라고 말해주었는데 마음속으로 미안한 생각이 들면서 두 번이나 더 전면적으로 진상하라는 이야기를 들었으니 이것은 결국사부님께서 저들의 입을 빌려 점화해 주시는 것이라는 생각이 들었습니다.

그래서 이날 있었던 일을 노 수련생들과 교류했고 차차 준비해 보자고 의견이 모였습니다. 사실 그전부터 보드판 진상을 이야기하던 노 수련생도 계셨는데 수련생 간의 인식차이도 있었고 여러 조건이 여의치 않았기에 계속 미루고 있었습니다. 때마침 호주에 있는 한 수련생이 진상 차 잠시 제주에 왔다가 보드판 진상의 필요성을 공감하며 필요한 지원을 해 주셨고 전체 교류 후 의견이 모이고 내륙에서도 수련생들이 오면서 인원도 보충되고 정체협력이 이루어졌습니다.

결국, 6월 말에 중국인들이 많이 가는 시내의 신라면세점 앞에 집회신고를 내고 전면적으로 보드판 진상을 할 수 있게 되었습니다. 면세점에서 물건을 사고 버스 기다리는 시간이 제법 되는데 남녀노소 많은 중국인이 정말 진지하게, 유심히 보드판을 보고 많은 사람이 휴대폰으로 사진을 찍어가곤 하는데 진상의 효과는 아주 큽니다. 한편으로는 면세점 앞에도 중국인 수련생이 전문적으로 탈당을 받으면 더 많은 중생을 구도할 수 있을 텐데 하는 아쉬움이 있습니다. 그나마 다행인 것은 5월 만해도 몇 명 안 되는 인원이 공항, 부두, 용두암을 쫓아다니며 정신없이 바빴고 물밀 듯이 밀려드는 중국인들을 감당하기가 벅찼는데, 6월부터는 수련생분들이 계속해서 교대로 내려와 주시고 최근에는 중국인 수련생도 한 분 더 왔고, 방을 얻고 장기적으로 정착하시는 분들도 늘어나 예전보다는 안정적으로 시간을 안배해가며 진상과 탈당 활동을 하고 있습니다.

한편으로는 불학회에서 제주도의 상황에 지속적인 관심을 가져주시고 진상자료와 진상인원 안배 등 여러 방면에서 협력해 주셔서 가능한 일이었다고 봅니다. 한 학회 관계자의 말씀처럼 다른 지역도 그렇겠지만, 특히 제주도 진상은 제주도만의 문제가 아니라 한국 전체 수련생의 정체 협력으로 진상이 진행되고 있다고 생각됩니다. 정말 서울, 대전, 광주, 대구, 포항, 울산, 부산 등 전국 각지에서 오셔서 진상하시면서 정체의 장을 더 크게 해주고 계십니다. 각지의 수련생들이 제주도에 오셔서 진상 활동을 하며 제고되는 면도 있겠지만, 제주도에 있는 수련생들 또한 전국 각지에서 오는 수련생들과의 심득교류와 법인식 교류 등 다양한 교류를 통해 비학비수하며 정체제고, 정체승화를 하고 있다고 생각됩니다.

그리고 제 개인적으로는 출가제자 형식을 고수하다가 제주도에 내려와 진상하는 계기로 자연스럽게 승복을 벗게 되었고 지금은 속인사회 형식에 부합하며 세 가지 일을 하려고 노력 중입니다. 되돌아보면 근기와 오성이 차해 수련과정 중에 부끄럽고 아쉬운 부분들이 많지만, 사부님의 자비하신 인도로 여기까지 올 수 있었다고 생각됩니다. 오늘의 이 법회를 계기로 자신의 부족한 점을 보완하며, 더 높은 표준으로 더 정진하고자 다짐합니다. 끝으로 진상하면서 자주 마음에 새기던 홍음 한수를 여러분과 함께 나누며 마무리 할까 합니다.

正念正行

대각자는 고생을 두려워하지 않거늘

의지는 금강으로 만들었구나

생사에 집착이 없으니

正法의 길은 평탄하여라

사부님 감사합니다!

수련생 여러분 감사합니다!

(2014년 한국 파룬따파 수련심득교류회 발언고)

문장발표: 2014년 11월 5일
문장분류: 수련마당>정법수련마당>해외법회 발언고
원문위치: http://www.minghui.org/mh/articles/2014/11/5/299896.html

ⓒ 2024 명혜망. All rights reserved.