글/ 무기명
[밍후이왕] 많은 사람은 모두 자신의 애호가 있고 이후에 평생 신앙으로 된다. 도대체 얼마나 깊이 사랑하고 얼마나 확고히 믿고 있는 가는 오직 고험과 검증이 왔을 때 비로소 똑똑히 볼 수 있다.
1. 섭공식의 애호
섭공(葉公)은 용을 좋아해 허리띠 고리나 술잔에 용을 새겼으며 집안도 용으로 조각하고 장식했다. 그가 이렇게 용을 사랑하는 것을 안 천상의 용이 이후 천상에서 내려와 섭공의 집으로 갔다. 용은 머리를 창턱에 걸쳐 안을 살펴보고 꼬리는 대청까지 뻗었다. 섭공이 보니 진짜 용인지라 놀라서 몸을 돌려 도망쳤는데 마치 혼을 잃은 듯했다. 안색이 변하고 자신을 통제하지 못했다. 이것이 바로 섭공이 용을 좋아한 이야기다.
섭공이 용을 좋아하거나 용을 언급하거나 용을 그리고 조각한 것은 사실 그의 마음속의 용의 형상을 좋아한 것이지 현실적이고 객관적인 살아있는 진짜 용이 아니었다. 때문에 진짜 용이 그의 앞에 왔을 때 그는 아연실색하고 혼비백산한 것이다.
수련도 마찬가지다. 어떤 사람은 불경(佛經)을 읽기 즐기고 어떤 사람은 연공하는 것을 즐기는데 사실 지향하는 것은 그의 마음속의 수행—몸을 건강히 하고 불로장생하며 안락함을 원해서다. 이러한 사람은 자신의 지향에 따라 도를 닦는다. 현실과 이상이 차이가 있고 모순이 있고 충돌할 때, 특히 마난(魔難)이 거듭되면 섭공처럼 의심하고 두려워하고 겁을 먹는다. 사실 그들의 애호는 표면적인 것이고 입에 발린 것이며 다른 사람이 듣게 말하는 것이다. 유명무실하고 표리부동하다.
2. 유다식의 추구
유다는 그리스도가 환자를 치료하고 사악한 영혼을 쫓아내고 기사회생한 신의 기적을 직접 목격하고 그리스도를 뒤따랐다. 유다는 돈을 관리하고 조달하며 가난한 사람을 구제하는 것을 책임졌다. 비록 그는 매일 그리스도의 가르침을 듣고 그의 사심 없는 생활을 보았지만 시종 자신의 만족할 줄 모르는 습관을 고치지 않았다. 그는 그리스도를 위해 일할 때 늘 그 중에서 돈을 꺼내 자신의 사례금으로 삼았다. 그리고 스스로 이치에 맞는다고 생각했다. 그러나 하나님 눈에는 그는 도둑이었다. 많은 제자들은 유다를 아주 중시했고 그는 스스로 자신이 대단한 재능이 있다고 여기며 늘 사람들 앞에서 뽐냈다.
유다는 그리스도를 따랐지만 그는 근본적으로 성령의 가르침으로 자신을 개변하지 않고 재산에 대한 탐욕과 승리의 야심을 포기하지 않고 수행 중에서 이익을 얻고 자신의 총명함과 추구로 얻은 지위를 실증했다. 그가 취급한 그 돈은 그에게는 매시간 고험이었다. 그는 검증을 통과하지 못했으니 반드시 돈과 재물을 위해 배반할 것이다.
우리도 마땅히 늘 자신에게 물어봐야 한다. 수련 중에서 우리는 무엇을 내려놓았는가? 우리는 무엇 때문에 간혹 마음에 두고 있으며 평온치 않는가? 우리는 무엇을 다투고 있는가? 무엇을 구하고 있는가? 수련은 명리정(名利情)을 내려놓아야 한다. 만약 우리가 법을 실증하면서 명리정을 조장하면 우리는 수련하는 것인가, 아니면 구하는 것인가?
3. 욥식의 순결
욥기는 ‘구약성경’에서 나온다. 욥은 한 의인이자 신을 경외하는 사람이다. 신도 그를 축복해주어 그는 많은 가업과 자식을 소유하고 있었다. 사탄은 욥을 보고 신에게 그를 고소했다. 그는 욥은 신이 그에게 각종 풍요로움을 부여했기에 신을 경외하는 것이지 만약 신이 일체를 회수하면 그는 신을 배반할 것이라고 말했다. 그리하여 신은 사탄에게 욥의 재산을 빼앗아 오는 것을 허락하지만 욥의 신체를 다치게 하면 안 된다고 했다. 그러나 재산을 빼앗긴 욥은 결국 신을 떠나지 않았다. 사탄은 기분이 좋지 않아 재차 신에게 욥기가 신을 배반하지 않은 것은 그의 몸을 해치지 않았기 때문이라 지적했다. 그리하여 신은 사탄에게 그의 신체를 공격하고 그의 전신에 부스럼이 나게 했다. 욥은 아주 고통스러웠다. 그의 아내마저도 그에게 신을 버리고 죽으라고 했지만 그는 그렇게 하지 않았다. 그의 친구도 와서 그를 비난했다. 그는 비록 신이 무엇 때문에 자신을 이렇게 대하는지 모르지만 마음과 언어로 신을 원망한 적 없고 여전히 신을 배반하지 않았다. 그는 마침내 신도들의 모범이 됐다.
대부분 사람들은 고난이 없을 때는 신을 믿는다. 하지만 아무런 재산도 없고 온몸이 상처투성이가 되더라도 원망하지 않고 신을 믿는 사람은 아주 적다. 신앙에 대한 확신은 포상이나 성공의 기초 위에 세워져서는 안 되며 마땅히 사심이 없는 순결함, 욕망이 없는 공경함과 숭상에서 실행해야 한다. 뿐만 아니라 참된 신앙은 고난이 있을수록 더욱 믿어야 한다.
4. 신앙의 경지
노자는 도를 듣는 몇 가지 경지를 말했다. “상사(上士)가 도를 들으매 근면히 행하고, 중사(中士)가 도를 들으매 있는 듯 없는 듯하며, 하사(下士)가 도를 들으매 크게 웃어버리거니 웃지 않으면 도라고 할 수 없도다.”[2]
수행도 역시 몇 가지 경지가 있다. 첫 번째는 단지 마음은 움직이나 행동은 하지 않는다. 이런 사람은 갓 입문한 후 피가 끓어 열정이 높고 입에는 늘 ‘신’이란 말이 떠나지 않는다. 그러나 경을 읽지 않고 병이 생기면 죽을까 두려워한다. 두 번째는 반신반의하고 못이기는 척 하는 사람이다. 이런 사람 중에 어떤 사람은 난을 피하기 위한 것이고, 어떤 사람은 복을 구하기 위해서다. 모두 바라는 것이 있다. 이런 사람은 마음도 움직이고 행동도 하지만 늘 절반은 사람 마음이고 절반은 부처 마음이며 부처를 얻으려 하지만 또 사람의 것을 잃을까 두려워한다. 선행하는 것을 원하지만 또 고생을 원하지 않고 손해를 보려 하지 않는다. 세 번째는 생명으로 신앙하고 신앙이 자신의 혈액에 용해되게 하며 신앙 중에서 더욱 새로운 생명으로 된다. 그들은 버리지 못할 것이 없고 그들은 놓지 못할 것이 없으며 그들은 영혼으로 신앙에 동화하며 생명으로 신앙을 이행한다.
5. 최종적인 사고(思考)
불교 중에는 정토를 수련하는 사람은 서방 극락세계로 왕생할 수 있다고 묘사했고 서양의 그리스도는 그의 제자에게 “나를 믿는 자는 천국으로 갈 수 있다”고 알려 주었다. 그러면 예부터 지금까지 사람들은 모두 자신 장래의 더욱 좋은 귀속을 위해 수련하는 것인가?
종교 중에는 많은 신의 기적이 있다. 그리스도는 3일 후 부활했고 사람들은 그 후부터 그가 신이라고 인식했다. 그러면 만약 그리스도가 부활하지 않았다면 그는 신이 아니란 말인가?
어떤 사람은 부처를 믿으면 더욱 많은 돈을 벌 수 있다고 인식한다. 어떤 사람은 부처를 믿으면 보호를 받을 수 있다고 생각한다. 어떤 사람은 부처에게 절하면 자손이 번창하다고 믿는다. 사실 이런 믿음은 모두 속인의 믿음이며 역시 추구를 위해 믿는 것이다. 신앙의 입문은 여기에서 시작되지만 신앙의 핵심은 절대 이익이 아니다. 만약 신앙이 금생에 행복을 갖다 주지 않는다면, 만약 신앙이 내생의 극락을 보증하지 않는다면, 그러면 사람은 여전히 믿겠는가? 믿지 않겠는가?
우리의 대답은 여전히 신앙이 필요하다는 것이다. 왜냐하면 진정한 신앙은 자신이 우주의 특성에 동화되기 위한 것이고 우주 중의 하나의 좋은 생명이 되기 위한 것이기 때문이다. 신앙은 우주를 보호하는 책임을 감당하기 위한 것이다. 사부님께서는 “무엇이 부처인가? 여래(如來)란 진리를 딛고서 여의롭게 왔다는 이런 하나의 세상 사람의 호칭이지만, 진정한 부처인 그는 우주의 보위자(保衛者)이다. 그는 우주 중의 일체 바른 요소를 책임질 것이다.”[4]라고 말씀하셨다. 신앙은 기득권이 아니며 또한 내세의 복을 받기 위한 것이 아니며 신앙은 사심이 없고 남을 위한 것이며 책임이자 의무이자 삶이며 사람을 위하는 사명이다.
나는 많은 사람들이 수련 중에서 오직 조금이라도 얻으면 조금 믿고 조금 보면 조금 믿는 이러한 신앙은 누락이 있으며 고험에 견딜 수 없다는 것을 발견했다. 사부님께서는 “어떠한 압력도 모두 불법(佛法)에 대하여 근본적으로 견정(堅定)할 수 있는가 없는가를 고험하는 것이 아닌가? 근본적으로 법에 대하여 아직 견정하지 않다면 아무것도 말할 것이 없다.”[5]라고 말씀하셨다.
어떤 수련생은 법공부, 연공에 아주 적극적이다. 그러나 괴로우면 납득하지 못한다. 그러면 무엇 때문에 이러한 고험이 있고, 이러한 고난은 무엇을 검증하는가? 사실 이 고난이 검증하는 것은 그의 믿음이 충분한가, 충분하지 못한가, 그가 법공부를 하고 연공하는 것이 내심에서 우러러 나오는 믿음인가, 아니면 건강을 얻기 위한 것인가 하는 것이다. 사부님께서는 “어떤 사람은 병을 치료하려다가, 내가 여기에서 기공이란 전혀 병을 치료하는 데 쓰는 것이 아니라고 하자, 그의 사상은 곧 반감이 생겨 이때부터 말하는 것을 더는 믿지 않는다.”[3] 참된 믿음은 속인의 실익이나 얻음을 추구하지 않는다. 참된 믿음은 치료를 추구하지 않는다. 참된 믿음은 병이 있든지 없든지 모두 믿는다.
서방의 결혼맹세 중에 물어보는 말이 있다. 당신은 “병이 생기든지 건강하든지, 부유하든지 빈곤하든지, 줄곧 이 세계를 떠날 때까지 시종 그에게 충실하겠는가?” 사랑, 속인의 정(情)조차 병이 있거나 건강하거나, 빈곤하거나 부유하든지 충절을 필요로 하는데 사람이 신에 대한 신앙은 마땅히 사람의 이런 충성을 더욱 멀리 초월해야 하지 않겠는가?
우리 자신에게 물어보자. 질병에 걸리든지 혹은 건강하든지, 부유하거나 빈곤하든지 시종일관하게 신을 믿겠는가.
신앙은 경지가 다르고 층차 구별이 있으며 장기적으로 한 경지에 머물 수 없다. 사상을 승화해야만 신에 다가갈 수 있고 비로소 신을 향할 수 있다.
주:
[1] 리훙쯔(李洪志)사부님 시사: ‘홍음-착실한 수련’
[2] 리훙쯔 사부님 저작: ‘파룬궁 제3장- 心性(씬씽) 수련’
[3] 리훙쯔 사부님 저작: ‘전법륜(轉法輪)’
[4] 리훙쯔 사부님 저작: ‘도항-미국서부법회설법’
[5] 리훙쯔 사부님 저작: ‘정진요지-누구를 위해 수련하는가’
문장발표: 2014년 4월 17일
문장분류: 수련마당>정법수련마당>이성인식
원문위치: http://www.minghui.org/mh/articles/2014/4/17/290044.html