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박해는 언제 결속되는가

글/ 대륙 대법제자 난주(南竹)

[밍후이왕] 박해는 언제 끝나는가? 이것은 매 대법수련자가 부동한 방식, 부동한 상태로 관심을 갖는 것이다. 어떤 사람은 다그쳐 정진하고, 어떤 사람은 내내 두리번거리며, 어떤 사람은 걷다가 쉬다가 하면서 마음이 안정되지 않는데, 사람 마음과 의문으로 가늠한다. 어떤 사람은 집에 숨어서 ‘정진’하면서 ‘전법륜(轉法輪)’만 볼 뿐 ‘경문’은 보지도 않고 ‘교류’도 않고, 어떤 사람은 집착심에 이끌려 포기하는 등등 이 모두가 ‘박해는 언제 끝나는가’를 둘러싸고 표현한 것이다.

요 며칠, 주위 수련생들이 몇 명 혹은 십여 명이 연이어 납치당했다. 이 ‘불행’한 소식을 듣고 나는 아무런 느낌도 없었는데, 마음에 어떤 움직임도 없었고 괴롭지도 두렵지도 않았다. 다만 일이 많아졌다는 것과, 할 수 있는 것을 해야겠다는 생각일 뿐 과거의 상태가 아니었다. 나는 갑자기 자신의 이런 뚜렷한 변화를 인식했고, 자신이 마비된 건 아닌지 혹은 선심(善心)이 없어진 건 아닌지를 의심했다. 왜냐하면 이러한 일은 과거에는 나에게 깊은 느낌을 주었기 때문이다. 매 번 자신 혹은 주위 수련생에게 무슨 일이 발생하면 나는 늘 이유 없이 괴로웠는데 마치 뭔가를 잃어버린 것처럼 당황했고 말로 표현 할 수 없는 두려움, 짜증과 무서워하는 기분이 엄습해 와 정상적인 법 공부와 연공에 영향을 주었다. 그리고 이런 마음들이 틀린 것임을 인식해서야 자신을 강제로 진정시켰다.

법 공부 중에서 내가 이해하고 깨달은 것은 관건적 시각에 사람의 사유는 우리 이 공간에서 오는 것이 아니라는 것이다. 사람은 왠선(元神)이 없다면 하나의 고깃덩이에 불과하다. 책 속의 ‘진풍(真瘋)'[1]의 예는 나에게 계시해주었는데 만약 사람 대뇌의 어느 부분이 막혔다면 어느 부분은 감각을 잃게 되어 찬 것도 더러운 것도 모르게 된다. 만약 모든 부분이 다 막혔다면 마치 왠선이 없는 것처럼 사람은 한 덩이의 고기로서 어떤 기능도 없다. 그렇다면 왠선은 우주 정보에 대한 선택으로 육신의 언행을 주도하는 책임을 짊어지고 있다. 이런 정보는 모두 물질이고, 모두 생명으로서 좋은 생명을 선택하면 바른 가지(加持)를 얻고, 좋지 않은 생명을 선택하면 부정적인 면에 조종당한다. 무엇 때문에 사부님께서는 우리에게 법 공부를 많이 하고, 법을 잘 배우라고 하시는가. 바로 우주 법리로 주왠선(主元神)을 충실히(充實) 해야만 주왠선은 우리 주위의 생명에 대해 긍정적인 선택을 하게 되고, 생명으로 하여금 정념 정행 할 수 있게 하기 때문이다.

오늘, 내가 이런 문제에 직면하여 표현한 상태는 도대체 어디에서 온 것인가? 내 생각에 마땅히 잘 수련된 그 한 면의 미시적 요소에서 온 것이지 마비와 선심(善心) 없음은 아닌 것 같다. 오직 의념 속에서 사람의 정을 내려 놓고, 대응되는 두려움의 일부를 제거한다면 괴로움, 짜증, 원망도 많이 제거될 것이며 따라서 평온하게 대할 수 있다. 이러한 일들을 모두 수련인의 관과 난, 수련의 기회로 본다면 우리 정체가 제고될 기회가 될 것이며 그것을 모두 좋은 일로 변화 시킬 수 있을 것이다. 오늘날, 수련인은 주인공으로서 주동적인 역할이지 박해 당하거나 억압 받거나 차별당하는 역할이 아니다. 오직 그 속에서 수련 제고하며 초월하고 관을 넘으며 중생을 구도하는 역할만 있고 또한 주동적인 것이다. 사람과 마는 신을 박해할 수 없는데 신은 사람을 구하고, 사악한 마귀(邪魔)를 제거하는 것이다.

과거에 나는 경찰에게 말한 적이 있다. “당신들은 우리를 박해하고 차별하며 억압했다!”

지금은 그때와 달리 이렇게 말할 것이다. “당신들은 법을 어기고, 세인, 자신과 가족을 박해하며, 진상을 모르는 사람들을 납치하여 신불에게 죄를 범하는 것이다! 천재인화 앞에서, 신의 경고 앞에서, 당신들은 도리어 무관심하다. 몇 십 년의 ‘무신론’이 5천 년의 ‘유신론’을 부정하려 한다. 진리는 생명력이 있는 것으로서 영원히 존재할 것이다. 오늘날 설을 지낸 후 제일 첫 번째로 올리는 향은 모두 공산당의 관원이 올리고 있는데 이것은 오늘날의 중국 사회에서 모든 사람에게 잘 알려진 ‘상식’이다. 사람의 본성은 모두 신을 믿는다. 다만 ‘무신론’에 세뇌당해 본성이 변이된 것뿐이다. 만약 진정으로 신을 믿고 신의 보호를 받으려면 신에게 진실된 행동을 해야 한다. 무신론 조직(黨, 團, 隊)에서 탈퇴하여 사람으로 복귀하고, 염황자손(炎黃子孫), 신의 자녀가 되며, 당을 어머니로 인정하지 않고 마르크스의 후손이 되지 않는 것이다. 다리를 두 척의 배 위에 하나씩 올려놓고 한 면으로는 신을 믿고, 다른 한 면으로는 ‘무신론’의 구성원이 되어 신불을 존중하지 않는다면 위험하게 된다. 이러한 인식과 경지 중에서 나는 구세력이 없어지고 박해가 없어졌다는 것을 느끼게 됐다! 이것이 바로 구세력을 인정하지 않고, 박해를 인정하지 않는 것이다! 사부님께서 인정하지 않으시면 우리도 갖지 않는다! 그럼 이 박해 또한 존재할 수 있겠는가?

여기까지 말한 김에, 그럼 박해는 언제 끝나는가? 분명한 것은 외부 힘의 작용에 의존하는 것이 아니라는 것이다. 즉 오늘날의 사회의 변화에 의존하는 것이 아니고, 신불이 우리를 위해 손을 휘저어 ‘새롭게 만들어서’ 결속되는 것도 아니다. 사부님께서는 모든 생명을 아끼시어 모든 생명이 스스로 걸어 나오기를 바라신다. 우리는 착실히 수련하여 박해를 반대하고 부정하며, 경지를 제고하고 박해를 초월하면서 박해의 요소가 우리의 공간 마당에 존재하지 못하게 해야 한다. ‘안을 수련하여 밖을 안정시키'[2]면 따라서 이번 박해도 종료된다. 이렇게 하려면 모든 대법제자가 모두 안으로 착실히 수련(是修)하여 두려운 마음, 집착심을 제거해야 하며, 박해가 번식할 수 있는 토양을 제거해 버리고 나와야 한다. 이렇게 되면 구세력이 어떻게 배치하든지 모두 작용을 일으키지 못한다. 박해를 사람이 사람에 대한 박해라고 본다면 바로 사람이고, 배후의 사악이 사람을 조종하여 일으킨 것이라 생각한다면 수련하는 사람이며, 박해가 없이 수련만 있고, 박해를 초월하여 사람을 구한다면 비로소 신이다!

나는 진일보로 깨달았는데 우리 수련의 정체에서 각자 모두 부동한 길을 걷고 있다. 수련 층차가 부동하고 상태가 부동하기에 정체가 지나왔다고 해도 여전히 박해 받고 있는 사람이 있다. 때문에 ‘내일 종료해도, 오늘 여전히 박해가 있다’. 그러므로 수련은 자신의 일이고 본보기가 없으며 순풍에 돛 다는 일이 없다. ‘사부가 문으로 이끌어 들이나 수행은 개인에게 달렸다'[1]. 일체 상황의 변화는 모두 대법제자의 마음으로 이루어진 것이다. 사람에게 의존하지 않고 사회적 정세에 의존하지 않으며 기다리거나 기대거나 요구하지 않는다. 대법에는 표준이 있는데 사부님께서 거듭 마감 시간을 연장하시는 것은 한 명의 제자라도 떨어뜨리고 싶지 않으시기 때문이다. 우리에게는 긴박감이 있어야 하는데 기다리거나 두리번거리거나 아랑곳 하지 않는 상태에서 나와야 한다. 정진하자!

개인적 인식이므로 수련생께서 지적해 주시기 바란다!

주 :

[1] 리훙쯔(李洪志) 사부님 저작: ‘전법륜’

[2] 리훙쯔 사부님 저작: ‘정진요지 – 안을 수련하여 밖을 안정시키다’

문장발표: 2014년 5월 13일
문장분류: 수련마당
원문위치: http://www.minghui.org/mh/articles/2014/5/13/291772.html