글 / 대륙 대법제자
[밍후이왕] 나의 성격은 무슨 일에서나 사유가 간단하고 반응이 느린 것이 특징이다. 법을 얻을 때에도 파룬궁이 좋다는 어머니의 말을 듣고 “그럼 수련해야지!” 라고 말했다. 17년 동안의 수련의 길을 돌이켜보면 다른 수련생들처럼 천지를 놀라게 할 만한 경력이 없이 다 평범하지만, 지금까지 대법을 의심한 적은 없다. 99년 7.20 이후 숨을 쉬어도 질식할 것 같은 거짓말 속에서 나는 흔들리지 않았고 사부님과 대법을 굳게 믿었다. 사부님을 생각하기만 하면 나도 모르게 감동되었고 대법이 이미 골수에 깊이 들어가 신경 한 가닥, 세포 하나마저 사부님에 대한 바른 믿음으로 넘치는 것 같았다.
사부님의 가지로 2003년 우리 집에 작은 꽃(가정 자료점)이 피었다. ‘명혜주간’부터 시작해서 지금은 모든 진상자료를 빠짐없이 제작한다. 모든 자료를 필요한 만큼 제작하는데 지금까지 자료의 품질을 보증했다. 자료의 출처는 밍후이왕이다. 일주일 치 자료를 정리하여 포장을 다 하고 문을 나서기 전에 사부님 법상에 향을 올리고(시간이 없을 때에는 향을 올리지 않음) 꿇어앉아 가장 겸손하고 경건한 마음으로 사부님께 말씀드린다.
“사부님, 저를 가지해 주시고, 제가 자료를 가지고 가는 곳의 사악을 전부 멸하고 중생을 구도할 수 있게 해주십시오. 모든 진상자료를 제일 안전한 방식과 빠른 속도로 인연 있는 사람들이 가져가게 해주십시오. 자료를 받은 사람이 모두 소중히 여기고 진상을 알고 구도 받을 수 있게 해 주시고 그들의 친구들에게 전해주어 하나의 자료도 낭비하지 않고 사람을 구하는 제일 큰 작용을 발휘할 수 있게 해주십시오.”
나는 법공부 소조, 일부 수련생에게 10년 동안 자료를 보내주었다. 전화연락을 하지 않고 만나서 약속을 잡았는데 비가 오나 바람이 부나 철저히 지켰다. 무거운 자료를 메고 버스에 앉거나, 길을 걸으면서, 가끔 택시를 탈 때에도 줄곧 발정념했다. 자료가 너무 무거울 때 나는 ‘내 몸에 지니고 있는 모든 자료는 사람을 구할 의무만 있지 무게는 없다. 경공을 사용하라.’라고 하면 갑자기 무거운 자료가 가벼워졌다. 나는 사부님께서 고무해주시고 가지해 주신다는 것을 알기에 어떤 어려움에 부딪혀도 극복하고 자료를 제때에 안전하게 수련생에게 가져다줄 수 있었다. 같이 일하는 수련생과 잘 배합하고 부족한 점을 발견하면 제기하고 바르게 고치고 함께 잘했다. 보통 수련생과 만나는 시간은 아주 짧았다. 일주일 동안 무슨 문제가 있었는지, 무슨 일이 있었는지 간단하게 교류하고 또 다음 주를 준비한다. 우리는 만나면 아주 기뻤고 서로 고무해주고 다음 주에 만날 날을 기대했다.
겨울이 가고, 봄이 오고, 하루하루, 한해 또 한해, 자료점은 10년을 걸어왔다.주마다 빠짐없이 제때에 자료를 만드느라 소모품 얼마를 사고 자료를 얼마나 만들었는지 계산할 수 없다. 큰 방이나 큰 트럭에 담을 만큼은 될 것이다. 10년을 하루같이 주말은 나와 법기가 함께 하는 시간이었다. 자료를 제작할 때 이웃에게 영향주지 않으려고 항상 천음을 틀고 창문을 꼭 닫은 채 정신을 고도로 집중하여 종이를 넣고 먹을 갈고 책자를 맸다. 법공부를 잘하여 심성이 좋을 때에는 순조로웠지만, 심성이 좋지 않거나 사악에게 빈틈을 보이면 번거로움이 이어져 조금도 과장이 없이 반나절이 지나야 물을 마실 수 있었고 화장실에 갈 시간도 아주 촉박하거나 갈 사이가 없었다. 나처럼 작은 자료점을 하고 있는 수련생도 공감했다. 출근 시간 외에는 나는 다른 교제가 없이 장기간 법기와 함께 있었지만 고독하거나 적막하지 않았다. 매주 자료를 제때에 완성하기만 하면 되었기에 부담이 없었고 아주 즐거웠다.
처음에 자료를 만들 때에는 아주 어려웠다. 월급이 적은 데다가 부모님을 모셔야 했고 아이도 어리고 경험도 부족했다. 만들 자료는 그리 많지 않았지만, 후에 자료량이 많아지고 항목이 늘자 개인 자금으로 유지하기 어려웠다. 남들이 들으면 웃을지 모르지만 아이 간식도 다 떼어먹었다. 아이가 초등학교에 다니기 시작해서 졸업할 때까지 용돈 50전도 준 적이 없지만 자료점에 쓰는 항목에는 돈을 아끼지 않았다. 심혈을 기울여 제일 좋은 종이를 사고 먹물도 제일 좋은 것으로 샀다.
후에 내 수입으로 감당할 수 없게 되었을 때 주위 수련생이 자금을 주어 조금씩 받았다. 다 쓰고 나면 또 조금 받아 돈과 재물을 두지 말라는 법리를 지켰다. 특히 수련생이 준 돈으로는 소모품만 샀고 조금의 빈틈도 주지 않았다. 개인 돈은 장부 기록을 하지 않았고, 잔업비, 명절 때 주는 돈이나 상여금 등은 별도로 한곳에 두고 대부분 개인 자료점에 사용했다. 나처럼 자료점을 하고 있는 수련생께 꼭 자금을 분명히 사용해야 평온하게 우리가 해야 할 일을 할 수 있다는 점을 알리고 싶다. 사실 내 돈이든 수련생의 돈이든 다 대법의 자원이며 모두 사부님께서 주신 것이기에 반드시 잘 사용해야 하고 바르게 사용해야 한다고 생각하고 그렇게 해왔다. 이 자리를 빌려 줄곧 자금을 대주고 있는 수련생에게 감사의 마음을 전하고 싶다. 감사합니다.
99년 7.20 이후, 가정과 직장의 압력이 컸다. 아이가 어렸고 남편은 포기하라고 강박했다. 결국, 남편은 포기하고 나를 상관하지 않았고 우리 집에는 작은 꽃이 피었다. 처음에는 간단한 대법 진상과 신전문화를 남편에게 보여주면서 함께 보았고 후에 차츰 많이 보여주었다. 마지막에 남편은 모든 진상자료를 보기 좋아했고 어떤 때에는 주동적으로 달라고 했다. (집에는 속인의 신문을 주문하지 않았음) 남편은 내가 아주 힘들어하는 것을 보고 주동적으로 집안일을 맡아서 출근 이외의 시간을 내가 자유롭게 사용하게 되었다. 진심으로 가족에게 고마움을 전하고 싶다. 고맙습니다.
자료를 만드는 10년 동안 많은 어려움을 겪고 극복했다. 육체적인 고통, 내심의 고통, 기술의 어려움 등 여러 방면의 고통이 있었고 어떤 때에는 고통 속의 고통이 있었다. 특히 이 몇 년간 주위에서 함께 대법 일을 했던 수련생이 납치당하고, 노동교양, 판결을 받았고, 병마에 갑자기 육신을 잃은 수련생이 있었으며 몇 개의 자료점이 동시에 파괴되기도 했다.
주위에서 이런 가슴 아픈 일이 발생할 때마다 몇 번이나 자신에게 물었다. ‘자료를 계속 해야 하나? 나를 보호해야 하나? 아니면 중생을 구해야 하는가?’ 나는 속으로 사부님께 말씀드렸다. ‘사부님, 저는 사부님의 제자입니다. 사부님을 뵙지 못했지만, 사부님께서 바로 제 옆에 계신다는 것을 알고 있습니다. 사부님의 말씀만 듣고 제가 해야 할 일을 하겠습니다.’
사부님의 보호로 지금까지 걸어왔으며 압력이 얼마나 크든 얼마나 고생스럽든 나는 즐겁다. 고생을 겪는 것도 즐거움의 한 경계가 아닐까.
분장발표: 2014년 5월 4일
분장분류: 수련마당
원문위치: http://www.minghui.org/mh/articles/2014/5/4/290838.html