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明慧법회| 대법의 수요가 바로 나의 선택이다

글/ 대륙 대법제자

[밍후이왕]

존경하는 사부님 안녕하십니까!

수련생 여러분 안녕하십니까!

법을 얻은 지 17년이 되어간다. 사부님의 자비하신 보호하에 곤두박질하면서 오늘까지 걸어왔는데 돌이켜보면 역시 감개가 많았다. 이전 몇 회 대륙 대법제자 심득교류회의 원고모집 때 쓰려고 생각했지만 매번 써내지 못했다. 필을 들기만 하면 눈물이 나왔기에 번번히 포기했다. 후에 몇 회 원고모집 때 남을 도와 문장을 수개하고 타자하는 바람에 쓸 시간이 더욱 없어졌다. 또 핑계다. 이번에 수련생들의 도움과 계발 하에 어떻게든 쓰고 사부님께서 갖고자 하시는 것을 원용하고 지나온 길을 소중히 여기며 경험을 총괄하고, 교훈을 얻고 장점을 취하여 단점을 보완하며 함께 제고하겠다.

1. 나는 근면히 행하는 상사(上士)가 되겠다

내가 철이 들었을 때부터 줄곧 같은 문제를 사고하고 있었다. ‘인생의 의의는 무엇인가?’ 줄곧 추구하고 탐구하고 사색했던 것 같다. 비록 나의 인품이 유순하여 남과의 사귐성이 좋지만 지인이 하나도 없었고 누구도 나를 알아주지 않았다. 나이가 들어감에 따라 이런 마음은 갈수록 강렬해졌다. 기공에 흥미가 있었지만 만나는 것마다 사악한 공법이었고 명리를 다투는 기공사들이 마음에 들지 않아 들어가지 않았다. 이렇게 추구하던 중 세월을 헛되이 보내고 30살이 넘게 되자 희망이 보이지 않게 되었으며 성격도 갈수록 나빠졌다.

1996년 말 마지막 날, 이날은 내 생명의 전환점이었다. 원단에 3일 휴가가 있어 학교에서 퇴근한 후 버스를 타고 큰 언니 집에 갔는데 날은 이미 어두워졌다. 언니는 밥을 하면서 내개 대법을 소개했다. “우린 금방 공법 하나를 배웠는데 파룬궁이라고 한다. 동작만 하는 것이 아니라 심성을 연마하고 ‘진(眞), 선(善), 인(忍)’을 요구하는 것이다.” 나는 귀담아 들었는데 마음속 깊은 곳에서 호응이 있었으며 그녀가 리훙쯔(李洪志) 사부님의 “心性(씬씽)이 얼마만큼 높으면 공도 그만큼 높은데”[1]를 말했을 때 마음은 강렬하게 흔들렸고 이것이 바로 진리고 이것이 바로 내가 찾으려는 것이라고 단정을 내렸다. 그녀도 금방 법을 얻었기 때문에 “우리가 선생님의 학습반에 참가하지도 않았는데 파룬이 있는지 없는지 모르겠다.”고 했다. 나는 무의식중에 “진심이라면 외진 곳에 숨어있더라도 있을 것이고 진심이 아니라면 선생님의 이웃에 살아도 없을 것이다”라는 말이 나왔다. 어릴 적부터 무신론의 교육을 받은 내가 어떻게 이렇게 깨달음이 높은 말이 나왔는지 모른다. 정말로 인연이다! 그날 밤 꿈에서 평생의 수수께끼를 다 풀었고 아침에 일어나자 사부님께서는 신체를 정화시켜주셨다. 온몸의 병이 다 사라졌다.

기뻐하는 동시에 우리 현에 법을 얻은 지 이미 2년 된 사람이 있다는 말을 듣자 조급했다. 고생스럽게 오랫동안 찾아다녔는데 사부님께서는 왜 이렇게 늦게 법을 주셨어요? 아! 사부님이시여! 월반하게 해주세요. 저는 어떤 고생도 다 할 수 있으니 빨리 따라가게 해주세요! 집에 돌아온 후 내가 수련하겠다고 하자 내 말을 고분고분 듣던 남편이 미친 듯이 반대했고 내가 뭘 말해도 소용이 없었다. 그는 “당신이 연마한다면 이후로 난 아무 일도 하지 않을 것이야”라고 하자 나는 “이후 가사는 내가 다 할게요.”라고 했다. 그랬더니 그는 미친 듯이 물건을 내던지다가 내가 마음을 움직이지 않는 것을 보자 가스통에 불을 붙이려고 가는데 잡아당겼어도 말리지 못했다. 속으로 ‘사부님이 계시잖아, 죽을 때가 안 되면 죽지 않을 것이야.’라고 생각했다. 이 일념이 나오자 그는 가스통 옆에 가서 한 바퀴 돌고 돌아왔다. 또 한번은 그는 집게 같은 손으로 내 목을 조였는데 숨이 곧 넘어갈 찰나에 ‘사부님, 저 죽어서는 안 됩니다. 수련해야 합니다.’라고 생각하자 그는 즉시 손을 놓았다.

그때 아직 책을 보지 못했는데 연속 몇 번 생사고비를 넘겼고 내가 진짜로 수련하면 사부님께서는 정말로 관할하신다는 대법의 수승함을 내게 보여주셨다. 나는 자주 서점에 가서 책이 왔는지 물어봤는데 대법책을 파는 수련생이 결가부좌하는 것을 보고 몹시 부러워했다. 그는 내게 또 ‘진수(眞修)’와 ‘깨달음(悟)’을 외워줬는데 격동된 나는 울고 싶었다. “당신이 외운 것은 무엇입니까? 그 책이 어디에 있습니까?”라고 묻자 그는 사부님의 경문이라고 했다. 그때 자신에게도 책이 생기면 나도 꼭 외워내고 말겠다고 결심했다. 반달 넘게 기다려 드디어 귀한 책 8권을 구매했다. 법공부하고 연공하고 심성을 닦고 대법의 불광(佛光) 속에서 혜택을 받았다. 원래 성격이 거칠고 급했기 때문에 참는 데 신경을 많이 썼다. 사부님께서 때려도 맞받아치지 않고 욕해도 대꾸하지 말라고 요구하셨다. 이전에 집에서 내 마음대로였고 남편은 항상 나의 눈치를 봐가면서 행동하여 여태껏 다툰 적이 없었는데 이번에 그는 갑자기 내 머리 위에 올라탔다. 사부님의 설법 중 말씀하신 것과 똑같아 깨달을 것도 없었다. 참자. 그때 마음에 대법을 담았고 꿈에도 법을 외웠기 때문에 난관이 올 때마다 속으로 ‘사부님, 저는 할 수 있습니다’ 하고는 했다. 그러나 집착심을 제거할 때 정말로 힘들었다. 체면을 차리는 집착심을 제거할 때 마치 남에게 맞고 치욕당하는 것과 같았는데 나의 말로 말하자면 관을 넘길 때마다 극한이었고 한 방울을 더하면 곧 흘러나왔으며 조금만 소홀히 해도 넘길 수 없었다. 그러나 매번 관을 넘기면 수련하는 신심이 확고하게 되어, 매일 제고되고 매주가 지난주에 비해 완전히 같지 않은 자신이라는 느낌이었다.

한번은 사부님께서 나를 격려해주셨다. 꿈에서 내가 딸의 손을 잡고 끝이 보이지 않는 아득한 바다 위에서 바람을 맞받으며 파도를 헤치고 해가 떠오르는 방향을 향해 헤엄쳐가는 것을 봤다. 아침에 일어나 출근하러 나가면서 동쪽에서 떠오른 해를 보니 꿈에서 본 것과 똑 같았다. 나는 더욱 정진했고 연공 테이프가 없어 벽시계를 보고 제2장 공법을 했고 매일 연공하고 나면 온몸이 땀이었다. 가부좌할 때 더하면 더 했지 시간을 감하지 않았으며 여가시간의 전부를 법 공부하는 데 썼다. 1997년 겨울 방학이 끝나가고 개학날은 아직 10여일이 남았고 설도 지났으며 아이는 할머니 집에 있으니 ‘정진요지’를 하루에 10편씩 외워야겠다는 생각이 들었는데 사부님의 가지 하에 정말로 열흘만에 다 외웠다. 정말로 하늘이 맑고 신체가 투명해진 것 같았다. 이성적인 승화의 그런 기쁨은 언어로 표현할 수 없었다. 이것은 99년 ‘7.20’이후 정법 수련을 위해 기초를 닦아놓았다. 2003년 연말 교도소에서 나온 후 ‘정진요지2’가 이미 발표된 것을 보고 또 외웠고 잇따라 ‘정진요지3’도 외워냈다.

2, 책임과 사명

① 평범한 보도원을 잘 하다

1997년 여름, 나는 연공장을 찾아 단체로 법공부하고 연공하자 제고가 더욱 빨랐다. 연공장의 사람이 갈수록 많아졌는데 매일 언제나 40명 이상이었고 많을 때는 백 여 명이었다. 어느 날 동료 수련생이 “법공부 팀에 보도원이 수요 되는데 남이 나보고 당신에게 하고 싶은지 물어보라고 했다.”고 했다. 나는 주저 없이 “하고 싶다.”고 했다. 보도원은 명리가 없고 오직 지출뿐이라는 것을 잘 알고 있었으나 수련생들이 모두 법에서 제고하고 자신만 생각해서는 안 된다고 했다. 그래서 나는 여러 방면에서 선두 작용을 했고 적극적으로 법을 선전했고 주동적으로 안을 향해 찾았다. 한번은 연속 며칠 사상 속에서 더러운 색욕심이 반영되어 대담하게 법공부 팀에서 자신을 폭로하자 단번에 없어졌다. 정말로 “수련은 자신에게 달렸고(修在自己), 공은 사부에게 달렸다(功在師父)”[1]. 나의 선도 아래 몇 명 수련생도 같은 현상이 있다고 말함으로써 모두 법에서 제고됐다.

저녁에 법공부하고 자주 보도원들이 남아서 일을 상의하고 집에 돌아오면 밤 10시가 넘었다. 아침 단체 연공 때 몇 명 보도원이 번갈아 동작을 바로 잡았고 신 수련생이 공을 배우러오면 보도원은 귀찮아하지 않고 한번 또 한번 가르쳐줬다. 1998년 여름, 연공장의 사람이 너무 많아 십여 명 수련생이 부근 길가에 또 연공장을 건립했다. 아침 4시 15분에 일어나 녹음기를 들고 남보다 10분 일찍 나와 현수막을 걸었고 6시 50분 연공을 다하고 딱 좋게 출근하러 갔다.

가을이 지나가고 날씨가점점 추워졌다. 겨울이 되자 많은 수련생은 집에서 연공하고 나오지 않았는데 나도 같은 생각이었다. 그러나 동료 수련생은 “바깥에서 단체로 연공할 수 있는 겨울이 몇 개나 더 있을 수 있겠는가?”라고 했다. 수련생이 시간의 긴박함을 느꼈다고 하자 나는 바깥에서 연공하기로 결정했고 겨울 내내 하루도 빠뜨리지 않고 5장 공법을 견지해왔다. 겨울의 아침은 매우 추웠지만 나는 캄캄한 밤을 더듬으며 연공장에 와서 현수막을 걸고 4시 40분에 연공음악을 울렸고 몇 명이 오든지 상관하지 않았다. 가장 적었을 때 세 명이었는데 큰 바람이 부는 바람에 녹음기를 큰 비닐 주머니에 넣었다. 연공을 다하고 보니 녹음기가 흙에 묻혀버릴 뻔했다. 눈 내릴 때 가부좌하면 우리는 눈사람 같았고 가장 추웠을 때는 영하 15도였는데 녹음기가 얼어서 음이 변했다. 한번은 보도소 소장이 우리 연공장에 왔다가 녹음기 음이 변한 것을 듣고 솜옷을 벗어 녹음기를 덮어주었는데 우리는 크게 감동을 받았다. 우리는 겨울 내내 이렇게 견지해왔다.

이 한 해에 나는 거의 친정집에 간 적이 없었다. 내가 녹음기를 책임졌기 때문이다. 평범해 보이지만 하늘의 얼마나 많은 생명이 부러워하고 있는지 모른다. 한 속인이 우리가 매일 아침 가부좌하고 연공하는 것을 보고 아마 그가 무슨 공능 있는 것인지 혹은 사부님께서 속인의 입을 빌려 우리를 격려하시려는 것인지는 모르겠으나 그는 남들에게 말하기를 ‘우리 몇 사람이 모두 노란 옷을 입었고 부처의 형상으로 거기서 가부좌하고 있는데 파룬궁은 진정한 불가공(佛家功)이다’라고 했다. 1998년~1999년 사이의 겨울은 우리의 가장 아름다운 회억이 됐다.

② 폭풍이 오려하고 고험을 맞게 되다

겨울이 지나고 1999년 봄을 맞이했다. 단체로 법공부하는 수련생들은 비약적으로 제고됐고 사부님의 각 지역 설법 영상도 끊임없이 대륙으로 전해와 동시에 이성적으로 승화하고 있었다. 사부님의 일부 법에서 큰 고험이 올 것이라는 것을 느낀 나는 끊임없이 법공부 팀에서 수련생과 교류했다. 결과 한 달도 안되어 세계를 놀라게 하는 ‘4.25’사건이 발생했다. 그날 아침에 연공장에서 연공하는데 어떤 수련생이 베이징에 청원하러 가자고 했고 우리 몇 명은 택시를 타고 베이징으로 갔다. 목적지가 베이하이(北海) 공원과 가깝다는 것만 알았지 구체적인 위치를 잘 몰랐고 목적지에 도착했을 때는 이미 길가에 많은 사람이 서 있었으므로 우리는 맨 끝에 섰다. 신발을 바꾸지 못하고 하이힐 구두를 신고 달려온 나는 서 있기가 매우 힘들어 뒤에서 좀 쉬고 싶었지만 ‘모두들 힘들어 뒤에 가 앉으려고 하면 누가 서 있겠는가?’하는 책임감이 저절로 나와 맨 앞에 서 있었는데 녹화하는 차량이 줄곧 저녁까지 서 있었다. 수련생들이 흩어지자 또 역전까지 10여리 걸어 대형 버스에 올랐다. 수련생들이 빼곡하게 앉았고 서 있는 사람도 있었는데 또 책임감에 응당 서 있어야 한다고 생각하고 200여리 노정을 내릴 때까지 줄곧 서 있었고 걸어서 집에 도착하니 이미 후반야가 됐다. 아침 4시 50분 알람이 울리자 나는 일어나 녹음기와 현수막을 들고 맨 먼저 연공장에 나왔는데 역시 책임감 때문이었다.

③ 정법수련의 시작

5월 1일, 새벽 5시 조금 전에 연공장에서 연공하는데 아빠가 돌아가셨다는 소식을 듣고 바삐 집으로 달려가 장례식을 치르고 3일 후 학교에 출근했는데 파출소 경찰이 이미 학교에서 나를 기다리고 있었다. 이때야 고험이 왔다는 것을 명확하게 알게 됐다. 잇따라 교육국, 학교, 가정에서의 압력이 몰려왔다. 만약 ‘7.20’부터 박해하기 시작했다고 말하면 우리 교사(敎師) 수련생들에 대해서는 2개월 전부터 교육국과 학교에서 해고하거나 멀리 전근 보낸다는 위협으로 한층한층 압력을 가했고 강온 양면의 술수(强穩兩策)를 함께 써가면서 ‘보증서’를 쓰라고 협박했다. 내가 쓰지 않겠다고 하자 교장이 남편에게 압력을 주었고 남편은 집에 돌아와 주먹으로 때리며 발로 차고 식칼을 휘둘렀다. 이때 법은 이미 마음속 깊은 곳에 뿌리를 박았기 때문에 전부 고험이라는 것을 알았다. 학교 지도자들은 나를 동요시킬 수 없는 것을 보자 타협하기 시작했다. “쓰지 않겠으면 쓰지 않아도 된다. 연공을 집에서 할 수 없겠느냐?”, “안 됩니다”라고 하자 그들은 또 한걸음 물러섰다. “바깥에서 연공하는 것도 괜찮은데 현수막을 걸지 않으면 안 되겠니?”, “안 됩니다.”라고 했다.

1999년 6월에 수련생들이 각기 여러 번 톈진, 베이징에 청원하러 갔는데 나도 갔었다. 형세는 갈수록 긴장해졌고 연공장에 나와 법공부하는 사람도 갈수록 적어지자 책임이 중대함을 더욱 느꼈고 정체의 정념을 확고하게 하기 위해 매일 될수록 일찍 가고 늦게 집으로 갔다. 법공부할 때 경찰이 온 적이 있었지만 우리는 예전대로 법공부하면서 대법이 병을 없애고 신체를 건강하게 하는 신기한 효과를 말했고 대법이 좋은 사람이 되라고 가르쳐준 실례를 말했다. 분위기는 날마다 긴장해졌고 7월 19일 저녁에는 연공장의 부부가 파출소에 불려간 까닭에 (그의 집의) 문이 닫혀 있었는데 여러 사람이 문밖에서 기다리자 파출소 경찰이 와서 문을 열어줬다. 원래 그 부부가 그들 집에 법공부하러 오는 사람들이 기다리며 들어갈 수 없을 것 같아 열쇠를 경찰에게 주면서 (문을) 열어주라고 부탁한 것이었다. 매번 이 일을 회상하면 울고 싶었다. 연공장의 보도원에 비해 그들의 압력은 더욱 컸고 책임감이 더욱 강했다.

이튿날 아침이 바로 7월 20일이었다. 사악이 인간세상에 완전히 (모습을) 드러내자 피비린내가 났고 사악은 경찰들을 조종하여 연공장에 가서 현수막을 빼앗고 많은 보도원을 구치소로 잡아가고 대법책을 몰수해갔다. 어리둥절해진 나는 이번에 집으로 돌아와 바닥에 무릎을 꿇고 사부님의 점화를 빌었다. 당시 구치소에 수감되고 대법책을 몰수해가면 연공할 수 없고 법공부를 할 수 없는데 어떻게 수련하겠는가고 생각했다. 날씨가 몹시 더워 땀투성이가 됐고 꿇고 있던 바닥의 타일이 다 젖었는데도 해결 방법을 찾지 못했다..

나는 처음으로 미망했고 당시 두려움도 있어 속인의 교활한 문자 게임을 사용했고 남편이 두 조각으로 찢은 대법책을 바쳤으며 구치소에 가서 여기서는 법공부하고 연공할 수 없다고 언니에게 권하기도 했다. 이것은 나의 오점이기 때문에 이 일을 회상할 때마다 치욕스러워했다. 한 달 후에야 진정으로 법에서 깨닫고 자신이 틀렸다는 것을 알았고 이후 잘 하겠다고 마음먹었다.

3, 개인 수련으로부터 정법수련으로

1999년 전국 각지에서 대법제자들이 각기 베이징으로 호법(護法)하러 갔고 베이징에 가서 호법하는 것은 대법제자의 책임이므로 나도 가야한다고 깨달았다. 베이징에 가면 어떻게 되는 줄 알고 있었기 때문에 두려움이 매우 심했다. 밤부터 날이 밝기 전까지 아이, 일자리, 가정을 생각하고 자신이 모든 것을 잃어버리게 될 것이라고 생각하니 안색이 누렇게 되고 밥이 내려가지 않았으나 한 가지 책임감에 아무리 두려워도 베이징에 가겠다는 일념을 포기하지 않았고 최종에는 법을 첫자리에 놓았다. ‘죽음뿐이잖아? 법을 위해 생사를 내려놓을 수 있는가 없는가?’ ‘할 수 있다’ 끊임없이 자신에게 물었다. 처음에 수련생 몇 명이 상의하고 함께 가겠다고 했는데 갈 시간이 되자 가려는 사람이 없어져 혼자서 가기로 결정했다. 짐을 싸고 출발하려고 할 때 뜻밖에 매우 탄연했고 마치 친척을 방문하러 가는 듯했다. 사부님께서 나의 마음을 보시고 가지해주셨을 것이다. 아니면 누가 그렇게 탄연할 수 있겠는가! 나는 “수련은 자신에게 달렸고(修在自己), 공은 사부에게 달렸다(功在師父)”[1]라는 말씀에 새로운 깨달음이 있게 됐다. 표면으로 보기엔 자신이 대법을 위해 무엇을 하는 것 같지만 사실은 사부님께서 성사되게 해주시는 것이다.

2000년 구치소에서 적지 않은 수련생들이 한 가지 일에 연루됐고 나도 그 중에 있었는데 수련생들에게는 구속 영장을 발급했으나 유독 내게는 주지 않았는데 법에서 인식하지 못하고 자신은 응당 교도소에 들어가지 않을 것이고 모두 사부님의 배치를 듣겠다고만 생각했으며 교활하게도 요행을 바라는 마음을 품고 아마 나는 일이 없을 것이라고 생각했다. 그 며칠 반(反)박해하고 법을 실증하는 일에 나서기 싫어하자 사악은 나의 이기적인 마음을 보고 어느 날 수련생들이 모여서 함께 교류하는데 한 악한 경찰이 흉악스럽게 나를 째려보면서 “당신이 바로 그 특무 같다. 그녀들이 둘러앉고 당신은 듣고 있으니. 내가 당신에게 조건을 모아줄 테니 기다려라.”고 했다. 나는 듣고 정말로 가슴이 두근두근 거렸다. 마음을 안정시키고 내가 보호한 것은 자신이고 법이 아니며 몹시 이기적이라는 것을 깨닫고 그것을 없앴다. 이후로 반박해하고 법을 실증하는 일에 나는 언제나 선두로 나섰고 자신의 후과를 생각하지 않았다. 그때 박해를 부정할 줄 몰랐지만 박해 당할까봐 두려워하는 것도 집착이라는 것을 깨달았기 때문에 일생 감방에 있겠다는 좀 극단적인 생각이 있었다. 거기에 3개 여자 감방이 있었는데 대략 30여명 대법제자가 있었고 우리는 끊임없이 교류하고 매일 정체 협조해 반 박해를 했고 함께 ‘파룬따파하오(法輪大法好-파룬따파는 좋습니다)’, ‘파룬따파는 천고의 억울함이다’를 외쳐 사악을 벌벌 떨게 했다. 구치소는 나와 다른 한 수련생을 선두자라고 하며 분산시켜 시내의 구치소로 보냈다. 우리는 변함없이 매일 ‘파룬따파하오(法輪大法好)’, ‘파룬따파는 천고의 억울함이다’ 등의 진상을 외쳤다. 2000년 연말은 사악이 아직 창궐한 시기이었지만 사악이 두려워 벌벌 떨게 했다. 경찰들이 수갑, 족쇄, 전기봉을 들고 흉악스럽게 달려와 위협하고 엄포를 놓았으며 어떤 때 우리에게 족쇄를 채우고 바깥으로 끌고 가 괴롭혔다. 이튿날 다시 외치려고 하니 두려움이 생겼다. 속으로 같은 감방의 몇 명 수련생이 함께 외치면 법은 군중을 벌하지 않는다는 마음을 품었다. 결과 몇 명 남자 경찰과 여자 경찰이 나를 향했고 전문적으로 나를 괴롭혔다. 그리하여 즉시 자신을 찾아봤더니 다른 사람에게 의뢰하는 마음이 있고 사람이 많으면 세력도 크다는 생각이 있다는 것을 깨달았다. 사흘째 혼자서 외치려니 여전히 두려워했기에 두려움을 없애려고 감방의 문 앞에서 큰 소리로 외치자 옆 남자 감방에서 욕하는 소리가 들려왔다. 이전에 우리가 진상을 알리면 그들은 다 듣기 좋아했는데 이번에 어찌 욕을 초래했을까? 법을 실증하고 중생을 구도하는 각도에 있지 않고 자신의 두려움을 없애려는 것이라고 깨달았다. 찾지 않으면 몰랐는데 찾아보니 깜짝 놀랐다. 같은 일을 하는데 하나는 자신을 위한 것이고 하나는 법을 실증하는 것으로 기점이 달랐으며 천지 차이였다.

이후로 자신의 일사일념을 주의했고 법을 보호하고 자신을 보호하지 않았다. 교도소에 들어가는 그날 교도관은 우리보고 벽을 보고 서 있으라고 했지만 자신이 대법의 이미지를 대표하기에 설 수 없다고 생각했다. 또 우리보고 교도소의 규칙을 외우라고 했지만 그것은 죄수에게 정한 것인데 내가 외우면 스스로 죄수라고 승인하는 것이기에 외울 수 없다고 생각했다. 또 드나들 때 우리보고 보고(報告)를 외치라고 했는데 죄수가 아니므로 외칠 수 없다고 생각했다. 또 일하고 사진을 찍고 교도소 대장이 감방에 들어올 때 일어서야 한다고 했지만 협조하지 않았고 ‘바오자(包夾)’ 죄수가 “교사(敎師)라고 하던데 예절도 모릅니까, 집에 손님이 오면 일어서야 하는 것이 아닙니까?”라고 하자 나는 “함부로 연결시키지 마세요, 내가 대장 사무실에 갔을 때 대장이 나를 보고 왜 일어나지 않습니까?”라고 하자 그녀는 말문이 막혔다. 깨달았으면 했고 자신을 생각하지 않았으며 완전히 법을 보호하는 기점에 서 있자 정말로 감히 건드리는 사람이 없었다. 간단해 보이지만 매번 먼저 생사를 내려놓아야 해낼 수 있는 것이고 잇따라 바로 유암화명(柳暗花明)이고 불가능하게 보이는 일도 법을 보호하는 기점에 서면 감히 건드리는 사람이 없을 뿐만 아니라 모두들 당신을 탄복하게 된다.

한번은 가족이 면회하러 왔고 1년 동안 가족을 보지 못했기에 그들을 매우 보고 싶어 하자 구세력은 탈 틈이 생겼다고 생각했다. 대장이 보고를 외친다면 면회할 수 있다고 했으나 나는 외치지 않았다. 대장은 “당신 가족이 많이 왔고 바깥에서 얼고 있다. 지금 4시고 곧 날이 어두워진다. 외치지 않는다면 그들이 바깥에서 얼게 할 것이고 만나지 못하게 할 것이다.”라고 했다. 또 몇 명이 모여와 “두 글자뿐인데 아무것도 아니니, 외쳐라, 외쳐라”라고 권했다. 나는 정신을 똑바로 차리고 자신의 마음을 가다듬고 개인의 집착이 안에 있는가 없는가를 봤다. 없다. 정말로 없다. 완전히 법을 보호하기 위한 것이다. 나는 마음을 안정시키고 영원히 만나지 못하게 하면 만나지 않겠다고 생각했다. 반시간이 지난 후 대장은 면회하러 나가라고 했다. 이후로 보고를 외친 적이 없었고 벌을 선 적도 없었으며 사진을 찍은 적이 없었고 구치소의 규칙을 외운 적이 없었으며 일도 하지 않았고 청소하는 것은 다른 수련생과 접촉하려고 하는 것이었다. 법에 있기만 하면 모든 것을 사부님께서 하시고 있는 것이다. 사실 나는 아무것도 할 수 없다. 이것은 나의 가장 깊은 체득이었다. 표면으로는 당신을 질책하지만 마지막에 모두 당신을 탄복하는 것이다. 사실 잘 해내지 못한 곳도 적지 않지만 사부님께서는 마음도 보시고 당신이 어떤 생각을 하는가를 보시기 때문에 당신이 얼마를 깨달았으면 얼마를 해내어야 한다.

4, 안을 향해 찾는 것은 법보다

나는 법에 대해 매우 확고했고 법리에 대해서도 비교적 명석했으나 사악은 여전히 사오(邪悟)한 사람을 배치해 나를 전화하게 했다. 그들은 법리상에서 전혀 나를 동요시킬 수 없는데 왜 왔을까? 안을 향해 찾아봐야겠다. 자신의 쟁투심이 너무 강해 사악은 자신의 쟁투심을 겨냥하여 온 것이고 특히 그들이 대법에 대해 단장취의하고 마음대로 깨닫고 함부로 말하는 것에 대해 난 정말로 견딜 수 없었다. 말하다가 다투자 문 밖에서 당직하는 사람이 문을 열고 “목소리를 좀 낮춰라.”라고 했다. 말소리가 크고 격동하는 이미지가 좋지 않다는 것을 깨달았다. 그러나 구세력은 나의 쟁투심을 노렸고 전문적으로 사부님과 법을 모욕하는 말을 하자 나는 또 목소리를 높였으며 문밖의 당직하는 사람이 또 문을 열고 목소리를 낮추라고 주의를 줬다. 연속 며칠 다 이러했다. 반드시 노력해서 자신을 연마해야 한다. 아니면 법을 실증할 수 없을 뿐만 아니라 대법에 먹칠한다고 생각했다. 나는 사부님께 그녀들이 무엇을 말해도 쟁론하지 않겠다고 보증했다. 구세력도 봤지만 그들은 달가워하지 않았는데 여러 가지 수단으로 나의 쟁투심을 겨냥했고 내가 말하지 않으면 안 되고 꼭 말하라고 해놓고 또 관건적인 곳까지 말을 했을 때 또 말하지 못하게 한다. 나는 자신의 마음에 신경을 썼고 시시각각 자신의 심성을 지키자 구세력은 이 방법이 소용없다는 것을 보고서 또 나를 모욕하기 시작했으나 나는 미소를 지으면서 들었고 대꾸해서는 안 된다고 자신을 경계했다. 마침내 자신을 이기자 구세력도 철수했고 다시는 나를 ‘전화’하러 오는 사람이 없었다. 이번에 나는 정말로 제고했고 갈수록 자신을 연마하고 안을 향해 찾는 것이 제고하는 관건이고 문제를 해결하는 관건이라는 것을 깨달았다. 사부님께서 “내가 예전에 말했다. 내가 말하는데, 실제로 속인사회에서, 오늘날에 발생된 일체 일들이 모두 대법제자들의 마음에 의해서 촉성(促成)된 것이다. 비록 구세력이 존재해도, 당신들에게 그 마음이 없다면, 그것들은 방법이 없다.”[2]라고 말씀하셨다. 그러므로 어떤 일에 부딪히든지 자신부터 찾으면 가상, 사람의 정에 따라 움직이지 않을 것이다. 모두 배후의 사악이 사람의 마음을 겨냥한 것이고 사람을 조종하여 한 것이다. 그러므로 어느 대장, 어느 죄수, 어느 사오자(邪悟者)를 원망한 적이 없었고 그녀들은 나에 대해 악행을 부리지 않았다.

5, 신사신법

많은 수련생들이 혈육 간의 정을 내려놓지 못하는 바람에 구세력이 틈을 타게 하여 ‘전화’, 심지어 ‘사오’하게 된 것을 보고 가슴 아파하며 동시에 자신을 찾았더니 자신도 혈육 간의 정이 있다는 것을 발견했다. 아이를 돌봐 줄 사람이 없을까봐, 친정 엄마가 나를 걱정할까봐 걱정했다. 이 모든 것은 구세력을 속일 수 없었다. 남동생이 면회하러 왔을 때 그는 만나자마자 “아이를 돌봐 줄 사람이 없어 옷을 거지같이 입고 다녀요.”라고 했다. 나는 눈물이 글썽했고 감방에 돌아와서도 괴로웠고 한참 되서야 깨달았다. ‘아야, 속았구나, 속인의 정에 마음을 움직인 것이 아닌가, 대법은 하지 못하는 일이 없는 것이다. 사부님께서 “한 부처가 손을 한 번 휘저으면, 전 인류의 병이 모두 없어지는데, 이것은 보증코 해낼 수 있다.”[1]라고 말씀하셨다. 사부님께서 내게 아이가 있고 어머니가 있는 줄 모르시겠느냐? 아이는 괜찮고 어머니도 나를 걱정하지 않을 것이다.’ 마음이 법에 있자 즉시 마음이 안정됐다. 다음 면회할 때 아이도 왔는데 속옷과 겉옷에 이르기까지 새 옷을 입었고 발을 들고 새 신발까지 보여줬다. 내가 정말로 마음을 내려놓자 사부님께서는 뭐든 다 해주셨다. 비록 사소한 일이지만 나는 신사신법하는 방면에서 크게 한걸음 내디뎠다. 후에 교도소에서 나온 후 언니는 엄마는 여태껏 널 걱정하지 않았다고 알려줬다. 나는 또 다시 대법의 초상함과 사부님의 자비로움을 봤다.

또 한 가지 일이 있었는데 나에 대한 영향이 더욱 컸다. 곧 교도소에서 나가게 되었을 때 마음은 물처럼 고요했고 자유를 얻어 가족을 만날 수 있다는 기쁨이 없었다. 교도소에서 나오는 그날 남편은 이혼하겠다고 했고 집도 팔았다고 했으나 나는 전혀 마음을 움직이지 않았고 다만 집으로 돌아가 법공부하고 연공하려고 생각했다. 당시의 마음상태는 확실히 좋았다. 후에야 바깥 수련생이 내게 정념을 가지해줬다는 것을 알았다. 몇 개월 후 정말로 이혼했을 때 마음이 슬펐다. 뭐든 다 내려놓을 수 있고 아무것도 가지지 않을 수 있는데 유독 아이를 내려놓을 수 없었다. 아이는 법을 얻으러 왔는데 그가 주지 않으면 어떻게할까 하는 어려운 문제에 부딪혔다. 이때 나는 신사신법만하고 모든 사부님의 배치를 따르겠다고 마음먹었다. 아이의 양육권을 그에게 주자 나는 다시는 아무런 생각을 하지 않았고 조금도 괴로워하지 않았다. 사부님께서 어떻게 배치하셔도 다 가장 좋은 배치라고 생각했기 때문이다. 나는 정말로 모든 것을 사부님께서 결정하시라고 했고 다시는 아이에 대해 집착하지 않자 사부님께서는 관할하셨다. 결과 아이가 얼마나 말을 잘 듣는지 상상도 감히 못할 정도였다. 우선 아이는 엄마를 보지 못한다고 해서 괴로워하지 않았고 마음이 평온했고 적극적이고 낙관적이었으며 겨울, 여름 방학에는 외할머니 집에 있었는데 그녀보고 법공부하라고 하면 법공부를 했고 연공하라고 하면 연공을 했으며 그녀보고 ‘홍음’을 외우라고 하면 매우 능숙하게 외웠으며 그녀보고 장편 경문을 외우라고 해도 하나도 빼먹지 않았다. 아이는 내가 있던 원래 학교를 다녀 담임선생도 다 아는 사람이라 학부형으로서 내 아이에게 무슨 문제가 있으면 알려달라고 했더니 한참 생각하다가 “이 아이는 여러 방면에서 다 괜찮고 정말로 좋은 아이입니다.”라고 했다. 나는 다시 한 번 대법의 초상함을 봤다. 이것은 분명히 사부님께서 관할하시고 있는 것인데 내가 뭘 더 걱정하겠는가. 여름 방학, 겨울 방학 때 남의 아이들은 과외반에 다녔는데 나는 아이에게 “네가 신사신법한다면 괴외반에 참가하는 것보다 법공부하는 것이 낫다”라고 했다. 나는 아이의 학습에 집착하지 않았기 때문에 성적은 줄곧 매우 안정했고 보통 이상을 발휘하여 좋은 고중(고등학교)에 붙었으며 또 일류 대학에 붙었다. 신경을 조금도 쓴 적이 없었고 돈 한 푼도 쓴 적이 없다.

6, 자아를 내려놓고 간격을 돌파하다

2003년 연말 소굴에서 나오게 되자 법공부하여 자신을 매우 빨리 정체에 합류하게 했고 나도 적극적으로 자신의 작용을 하자 수련생 사이에서 일정한 위신이 생기고 어디에서 교류하든 나를 불러 말하라고 했는데 칭찬하는 말을 많이 듣게 되자 자기도 모르게 자신을 높였다. 사실 이미 매우 위험했지만 본인은 몰랐다. 집착이 있으면 구세력은 틈을 탈 수 있다. 나와 한 협조인 사이에 간격이 생겼는데 표면상 수련생이 일부러 나의 흠만 찾고 내가 어떻게 해도 마음에 들어 하지 않고 말하기만 하면 틀렸다고 했다. 나는 비록 불만을 내색하지 않았으나 속으로는 수련생에 대해 의견이 생겼고 법에 있지 않기 시작했으며 바깥을 향해 봤다. 탈 틈이 생긴 것을 보고 구세력은 나에 대한 수련생의 태도를 더욱 나쁘게 강화했고 합작하려고 해도 매우 어렵게 됐다. 나는 안을 향해 찾지 않았고 수구(修口)해야 함은 알기에 비록 수련생에 대한 불만을 다른 사람에게 말하지는 않았으나 속으로 수련생이 나를 불공평하게 대하는 것이고 자신의 잘못은 없다고 생각했으며 그럴수록 마음은 더 뒤죽박죽 됐다.

자신을 찾지 않으면 구세력이 거기에 가로막고 있고 전문적으로 수련생의 결점, 부족을 내게 보여줬으며 심지어 기타 수련생들의 이 수련생에 대한 의견도 나의 귀에 반영되자 ‘봐라, 남들도 그에 대해 의견이 있다. 더욱 그가 틀리고 내 잘못이 없다.’라는 생각이 생겨 안을 향해 찾는 난이도가 커졌다. 사부님께서는 보시고 조급하셨다! 내가 오토바이의 타이어 바람이 빠져 넘어지고 발정념하면 발이 미끄러져 내려갔다. 문제의 심각성을 아무리 깨닫지 못하더라도 잘 깨달아봐야 하고 사부님께서 마음을 쓰시게 하면 안된다고 생각했다. 그때 ‘명혜주간’에 늘 수련생 사이에 간격이 생기는 바람에 구세력에 틈을 타게 해서 박해를 받아 자료점이 파괴당하는 등의 교류문장이 있었다. 정각에 발정념할 때 사부님께 “법을 위해, 정체를 위해, 어떤 고생도 다 할 수 있고 어떤 사람이라도 다 참아낼 수 있습니다. 꼭 그와 잘 협력하겠습니다.”라고 말하고는 억울해 눈물이 주르르 흘러내렸다. 사부님께서는 법을 위해 책임지려는 마음을 보시고 눈물이 마르기도 전에 명백하게 했다. 언제나 자신이 누구와도 다 마음이 맞고 신수련생, 노수련생과 협력을 잘한다고 생각했는데 사실 그런 게 아니었다. 수련생들이 나를 공손하게 대하고 존중하기 때문에 내가 잘 협력할 수 있었던 것이다. 나의 잘못을 찾는 사람, 나의 말을 듣지 않는 사람과 부딪히자 견딜 수 없었다. 좋은 말을 듣기 좋아하는 이것은 명을 추구하는 마음이 아닌가? 이렇게 생각하자 온몸이 가벼워졌다. 사부님께서 좋지 않은 물건을 없애버렸고 며칠 후 또 그 수련생을 만났는데 멀리서부터 웃으면서 나를 향해 걸어왔고 특별히 친절했다. 정말로 신기하고 정말로 미묘했다.

나는 곤두박질하면서 깨달은 과정을 수련생들에게 알려주고 여러 수련생이 나처럼 굽은 길을 걷지 말고 일에 부딪힐 때자신만 찾으면 넘길 수 없는 관이 없다고 알려줬다. 교류회에서 자아에 대한 집착을 폭로하고 곤두박질하면서 깨달은 체득을 말하자 나와 간격이 생겼던 그 수련생은 감동을 받아 “큰 언니에게 이렇게 큰 상처를 어떻게 가져다 줬는지도 몰랐어요.”라고 했다. “이것은 당신 잘못이 아닙니다. 내가 자아에 너무 집착했기 때문에 구세력이 와서 방해하고 우리의 간격을 벌려놓은 것입니다.”라고 했다. 그 수련생도 큰 계발을 받았고 심성도 제고됐다. 이후로 우리의 간격은 그림자조차 보이지 않았고 아주 묵묵히 협력했다. 이번의 교훈은 심각했다. 수련생과 모순이 있거나 사상 중에 수련생의 부족이 반영되면 자신에게 문제가 있다는 것을 즉시 깨달을 수 있는 것이다.

7, 대법의 수요가 바로 내 자신의 선택이다

진짜로 수련하는 대법제자마다 자신이 배운 것을 이용하여 법을 실증하고 있고 자신이 해야 할 일을 하고 있다. 2003년 말 소굴에서 돌아오자 수련생들은 나보고 자료를 가져오는 것을 책임지라고 했는데 법공부 팀의 수련생들이 배포하는 진상자료는 모두 외지 마을에서 가져온 것이라는 것을 알았다. 한번은 볼 일이 있어 시내 한 수련생 집에 갔는데 그녀에게 소형 복사기가 있는 것을 봤고 사용하기 매우 간단하다고 했다. 나는 수련생보고 즉시 하나 사달라고 했다. 최저한도 우리 법공부 팀 10여명이 쓸 자료를 제공하면 되고 자료점 수련생의 부담도 좀 덜어줄 수 있다고 생각했다. 사온 후 자료점 수련생에게 사용방법을 배우려고 찾아갔는데 원래 수련생도 같은 소형 복사기였다. 수련생은 매주 ‘주간(週刊)’만 복사해도 100여권 복사해야 한다고 했다. 나는 몹시 부끄러워 “이렇게 작은 복사기로 그렇게 큰 면적의 수련생이 사용할 자료를 제공해 주는 줄은 몰랐어요. 이후 제가 절반 감당할게요.”라고 했다. 그날 밤 내내 자료를 복사했다.

후에 수련생은 나보고 컴퓨터를 배우고 프린터 사용방법을 배우라고 했다. 나는 테이블식(데스크 탑형) 컴퓨터와 대형프린터밖에 본 적이 없고 집에 속인이 있어 감추기 어렵다며 동의하지 않았다. 며칠 지나지 않아 한번은 우연한 기회로 몇 십리 밖에 있는 수련생 집에 갔는데 처음으로 노트북과 소형프린터를 봤고 침대에 놔두고 수련생이 자료를 만드는 것을 봤다. 나는 즉시 “이렇다면 저도 살래요”라고 하자 수련생은 “가져가세요. 바로 당신을 위해 준비한 것입니다.”라고 했다. 그제야 이 모든 것은 사부님의 배치라는 것을 깨달았다. 사부님께서는 내가 염려가 있음을 보시고 직접 눈으로 어떤 것인지를 보게 하신 것이었다. 나는 당시 있는 몇 천 위안을 다 꺼내줬고 3일 내내 자료점에 있으면서 수련생에게 프린트, 인터넷 접속, 다운, 타자, 편집 등 가장 자주 사용하는 기술을 배웠다.

당시 배울 때 집의 전화선으로 인터넷에 접속하는 것을 배웠는데 안전 위험이 있었으나 나는 다른 선택이 없었다. 대법의 수요라면 해야 하기 때문이다. 자료를 다운하고 USB에 저장하고 컴퓨터를 사용해서 프린트하는 수련생에게 전해줬고 또 여러 개 원고를 출력하여 복사기를 사용하는 수련생에게 줬다. 진상자료를 다운하는 외에 또 많은 여러 가지 진상편지를 저장했다. 한번은 한 수련생이 그녀의 멀리 떨어져 있는 친정 남동생이 현지 파출소에 납치되고 구치소에 수감됐다고 했다. 나는 관련되는 정보와 상세한 주소를 기록하고 밤을 새워 참여한 박해자 개인을 겨냥한 3통의 같지 않은 내용의 진상편지를 편집하고 진상그림도 삽입해 동시에 현지 마을 위원회, 파출소와 구치소에 보냈다. 며칠 후 수련생의 남동생은 석방됐고 집으로 돌아왔는데 전화에서 그들 현지 사람들은 먼 곳에서 보내 온 진상편지를 받고 벌벌 떨었다고 했다. 이것은 사부님께서 나를 격려해주시는 것임을 깨닫고 신심이 더욱 족했다. 그리하여 밍후이 당일 문장을 다운하고 대법제자가 납치되고 박해당한 정보를 보면 가장 빠른 시간으로 편지를 편집하고 참여한 박해자와 그의 직장에 보냈고 만약 박해받은 수련생의 상세한 가정 주소가 있다면 동시에 편지 한통을 보내고 가족에게 용기를 내게 하며 정념을 보태줬다. 몇 년 동안 진상편지를 전국 각 성, 자치주와 직할시 등에 보냈다.

우리 마을과 몇 십리 떨어진 곳에 노동교양소가 있는데 박해가 매우 심했다. 거기에 여러 명 악한 경찰이 있는데 고향은 바로 우리 현에 있었다. 우리의 책임이 중대하다는 것을 깨닫고 정체 교류한 후 수련생들은 악인의 정보를 열심히 수집했다. 그리고 같지 않은 내용을 편집하여 악한 경찰의 아내, 자녀, 친척, 동료와 그의 직장과 개인 및 현지 정부, 파출소에 보내 크게 사악의 기염을 약화시켰고 어떤 사람은 전임해갔고 어떤 사람은 대법제자에게 억울함을 호소했다. 한번은 우리 현지 파출소에 품성이 매우 나쁜 악한 경찰이 있었는데 악인으로부터 악의적인 고발을 접수하고는 수련생을 납치하여 돈을 뜯어내려다가 성사되지 못하자 수련생을 구치소에 수감했다. 우리는 정체로 협력하여 그날 밤으로 스티커를 만들고 마을 전봇대에 다 붙였일 뿐만 아니라 모든 향진 파출소 부근에 갖다 붙였고 악한 경찰의 고향 마을, 또 샛집의 주택단지에도 붙였다. 결과 이 악한 경찰은 즉시 전임해갔다. 몇 년 동안 파출소에는 주동적으로 박해하는 사람이 없었다.

후에 우리는 또 현지 민중들에게 현지 사악을 폭로해야 하고 개별적으로 심하게 박해한 사악을 폭로할 뿐만 아니라 대법제자마다 박해당한 것을 폭로해야 한다고 생각했다. 때리고 욕하지 않았더라도 ‘7.20’ 때 협박으로 인해 연마하지 않겠다는 보증을 쓴 것, 민감한 날 협박으로 향 정부나 파출소에 붙들려가서 감시당한 것이 박해가 아닌가, 강박으로 깔개(방석)를 바친 것 역시 박해이기에 많으면 많이 쓰고 적으면 적게 쓰고 사람마다 쓰고 쓸 줄 모르면 대필을 찾아야 한다고 교류하자 정체 수련생은 모두 깨닫고 모두들 썼으며 모두들 제고됐고 다른 공간의 사악도 해체했는데 정체환경도 변했다.

반년 전에 전화카드의 비용이 갈수록 커지고 카드의 종류도 여러 가지로서 가격도 차이가 많다는 것을 보고 잘 구매하면 최저한도 2배 심지어 몇 배의 자금을 절약할 수 있다고 생각했다. 이런 정황을 알게 된 것도 우연이 아니라고 생각하고 나는 스스로 카드를 사러 갔다. 길을 몰랐는데 어떤 사람이 내게 노선을 알려줘 차를 타고 카드를 파는 데까지 매우 순조롭게 도착했다. 몇 번 하다 보니 자신이 산 가격이 누구보다도 싸다는 것을 보고 과시심, 환희심이 생겨 결과 연속 번거로움이 나타났다. 사온 핸드폰 전지의 사이즈가 맞지 않아 핸드폰 카드의 서비스로 주는 몇 분의 시간을 사용할 수 없어 모두 바꿔야 했는데 카드는 이미 나눠줬기 때문에 추운 겨울에 수련생이 오토바이를 타고 각 마을의 수련생 집에 가서 거두고 내가 또 시내 시장에 가서 환불했다. 이렇게 큰 번거로움에 부딪혔는데 우연인가? 자신을 봐라, 당초 그런 신성하고 순정한 마음과 얼마나 차이가 많은가! 도매시장이라 물건이 싸서 수련생에게 옷, 양말을 사다 주었고 후에는 집착심이 생겨 보따리 째 옷을 사다 줬는데 수련생이 감사하다고 하면 속으로 기뻤고 자신이 잘한다고 과시했다. 인식하게 되자 모든 것이 또 순조로워졌다. 과시심을 의식했기에 이 방면에서 주로 연마했는데 또 이익심도 폭로됐다. 어떤 때 금방 사온 카드는 수련생이 다 가져가 자신의 것을 또 사러 가야 했는데 어떤 때는 연속 몇 번을 갔다왔다해야 했고 차비는 한 번에 몇 십 원이나 됐다. 마음을 움직이자 가부좌할 때 마음을 안정시킬 수 없었다. 나는 자신에게 질문하기를 “수련생이 몇 천 몇 만의 지불을 하고 경제조건이 좋지 않은 사람도 몇 백을 쓰는데 네가 차비를 좀 썼다고 마음이 움직이니 무슨 위덕이 있겠느냐?”고 했다. 이렇게 생각하자 마음은 즉시 가라앉았고 신성감이 있었다.

8, 사부님께서 가지시려는 것을 원용하다

협조인은 고생하고 지불해야 할 뿐만 아니라 가장 갖춰야 할 것은 커다란 너그러움이다. 법리는 다 명백하지만 구체적인 일에 부딪히면 여전히 자비롭고 너그럽게 대할 수 없고 표면으로 해낼 수 있어도 마음속으로 내려놓을 수 없었다. 이것은 자신을 속이는 것이 아닌가? 한번은 한 수련생이 갑자기 겸손치 않게 내게 말했을 때 나는 ‘이것은 좋은 일이다. 좋은 일이다. 없애지 못한 사람의 마음은 또 수련생의 부족을 보게 했는데 사부님께서 무엇을 깨달으라고 하시는 것이 아니겠는가?’라고 침착하게 사고했다.

내가 진정으로 안을 향해 찾을 때 자신을 내려놓지 못한 것이 문제의 근원이라는 것을 발견했다. 그리하여 (남을 보지 않고) 자신만을 연마하고 연마했으나 한동안 지나자 또 모순이 표현됐고 심지어 이전보다 더욱 격렬했다. 한번은 교류회에서 한 수련생의 발언이 나에게 큰 계발을 주었다. 대의는 법을 실증하는 수련 중 만약 사부님께서 요구하시는 것을 원용하면 제고가 매우 빠르고 수련도 간단해진다는 것이었다.

한번은 외지 협조인과의 교류회에서 한 외지 협조인이 까다롭고 심지어 모욕하는 언어로 우리를 겨냥하여 말했다. 나는 강대한 정념을 발했는데 ‘나는 사부님께서 가지시려는 것을 원용하겠다. 우리와 외지 수련생은 하나의 정체다. 수련생을 이용하여 자신을 연마하지 않겠다. 구세력 너는 수련생을 박해해서는 안 된다. 이 수련생은 매우 대단한 일면이 있다. 그가 아직 없애지 못한 마음이 있어도 강화하지 말라. 내게 없애지 못한 마음이 있어도 당신은 상관하지 말라. 나는 수련생을 이용해 자신을 연마하지 않는다. 우리는 하나의 정체고 우리는 사부님께서 관할하시고 있다.’라고 했다. 이 일념이 완전히 정법의 기점에 있고 이기적인 기점에서 자신을 연마하는 것이 아니기 때문에 자신이 자비로운 에너지 속에 녹아들어간 것처럼 매우 편안했고 자신을 연마할 때의 뼈에 사무치는 느낌이 아니고 수련생을 위해 안타까워하고 수련생이 말을 잘못하여 업을 만들어 자기 자신이 제고하는 데 방해될까봐 걱정하는 것이었다. 한마디로 말해서 모두 다른 사람을 위해 생각해주는 것이었다. 이런 마음씨는 여태껏 있어본 적이 없었고 마치 금방 수련의 문을 찾은 것 같았다. 그러므로 사부님께서 가지시려는 것을 원용하는 것은 가장 큰 자선심이고 또한 구세력에 대한 부정이기도 하다.

하려는 말은 아직 많지만 너무 많이 말했으므로 이만 하겠다. 만약 법에 있지 않는 곳이 있으면 수련생들이 자비로 지적해 주시기 바란다.

사부님께 감사드립니다!

수련생께 감사드립니다!

주:

주:

[1] 리훙쯔(李洪志) 사부님의 저작: ‘전법륜’[2] 리훙쯔 사부님의 경문: ‘각 지역 설법2-2002년미국필라델피아법회설법’

[2] 리훙쯔 사부님의 경문: ‘각 지역 설법2-2002년미국필라델피아법회설법’

(밍후이왕 제10회 중국대륙 대법제자 수련심득교류회)

문장발표: 2013년 11월 14일
문장분류: 수련마당>정법수련마당>제10회 밍후이법회
원문위치: http://www.minghui.org/mh/articles/2013/11/14/281166.html
영문위치: http://en.minghui.org/html/articles/2013/11/27/143405.html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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