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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수련을 처음과 같이 하다’ – 감성에서 이성으로의 승화

글/ 중국 대륙대법제자

[밍후이왕] 금방 법을 얻었을 때 격동돼 하던 그 열정이 생각났다. 저녁에 흥분되어 잠을 이루지 못했고, 책을 안고 필사적으로 법 공부를 하였다. 금방 박해가 시작됐을 때 생명의 위험을 무릅쓰고 각종 비인간적인 박해를 참고 견디면서 과감하게 걸어 나와 진상을 알리고 중생을 구도하였다 … … 그런데 후에는 왜 나태해졌는가? 가로막을 수 없었던 정진하려는 의지가 왜 생활 속에서 천천히 없어졌는가? 심지어 한때는 속인처럼 미혹 속에 빠졌는가? 무엇 때문에 지금은 법을 받쳐 들고 있어도 처음과 같은 격동이 없어졌는가? 비록 마음속으로는 여전히 대법이 좋다는 것을 깊이 알고 있고, 포기할 수도 없지만 왜 처음의 정진 상태로 돌아가지 못하는가?

이 몇 년이래 나에게만 이런 문제가 있고, 이런 의혹이 있는 것이 아니라 내가 만난 많은 수련생에게도 모두 똑같은 문제가 존재한다는 것을 발견하였다. 무엇 때문에 대법수련 중에서 갈수록 처음보다 못해지는가? 이런 곤혹스러움을 안고 견디기 어려운 외로움 속에서 나는 자신을 강박하여 세 가지 일을 잘하려고 했다. 법 공부를 많이 하고, 항상 법의 이치로 가늠하며, 사부님의 말씀대로 안으로 찾았는데 천천히, 조금씩 안일한 마음을 제거하면서 이 상태에서 벗어났다. 지금 나는 또다시 처음의 정진하는 상태를 되찾았다! 나는 마음속으로 묵묵히 사존께 감사드린다. 이 상태에서 벗어나온 후에야 나는 문제의 원인을 찾아냈고, 당시의 곤혹도 잇따라 해결되었다.

무엇 때문에 처음에는 정진하고 후에는 나태해졌을까? 내 생각에 원인은 ‘원동력’에 있었다. 애초 법을 얻었을 때 흥분해 마지않던 상태는 사실 사람의 마음이었고, 강렬한 정이었다, 오직 사람 마음만이 흥분할 수 있지 신불神佛은 절대로 흥분의 상태가 있을 수 없다. 말하자면 당초에 법을 얻었을 때는 강렬한 사람 마음을 지니고 대법에 들어섰고, 상상 속의 아름다운 생활을 추구하려는 강렬한 바램을 안고 대법에 들어왔다. 스스로 여기기를, 원만한 후 되돌아갈 천국의 세계는 너무나도 아름다운 것이고, 내 마음속의 가장 완벽한 아름다운 생활 상태였다. 이 때문에 이처럼 지극히 강렬한 사람의 집착을 안고 대법수련에 들어섰고, 원만한 후의 아름다운 귀착점을 추구했다.

사부님께서는 말씀하셨다. “어떤 사람은 대법(大法)이 자신의 과학 관념에 부합한다고 여기고, 어떤 사람은 자신의 사람 되는 도리에 부합한다고 여기며, 어떤 사람은 자신의 정치에 대한 불만에 부합한다고 여기고, 어떤 사람은 대법(大法)이 부패한 인류의 도덕을 구원할 수 있다고 여기며, 어떤 사람은 대법(大法)이 자신의 병을 낫게 할 수 있다고 여기고, 어떤 사람은 대법(大法)과 사부님이 바르다고 여기는 등등이다. 사람이 세상에서 이러한 마음을 갖고 아름다운 추구와 소원을 동경하는 것은 잘못이 아니다. 그러나 수련하는 사람으로서는 당연히 안 된다. 그렇다면 당신은 이러한 사상의 작용 하에서 대법(大法)의 문에 들어올 수는 있지만, 수련 과정 중에서 자신을 수련하는 사람으로 간주하여 이후에 책을 보고 법을 배우며 정진하는 중에서 자신이 입문할 때 어떤 생각으로 대법(大法)에 들어왔는지 똑똑히 알아야 한다. 한동안 수련을 했지만, 아직도 애초 생각인지, 사람의 이 마음이 자신을 여기에 남아 있게 한 것은 아닌지? 만약 그렇다면 나의 제자로 여길 수 없다. 이것이 바로 근본적인 집착심을 제거하지 않은 것이며 법에서 법을 인식하지 못한 것이다.” [1]

지금 나는 이것이 나의 근본적인 집착이라는 것을 깨달았는데 나는 바로 이 근본적인 집착을 안고 대법수련에 들어섰다. 이 또한 내가 당초에 흥분하여 마지않던, 내가 ‘정진’할 수 있었던 동력이었다. 심지어 나로 하여금 이를 위해서는 생명의 위험도 고려하지 않고, 비인간적인 고통을 무릅쓰면서 걸어 나와 진상을 알릴 수 있게 하였다. 애초의 동기가 순수하지 않았다! 애당초 정진하던 것을 생각해 보니 법을 받쳐 들고 필사적으로 읽었을 때, 법이 내 마음속의 아름다운 동경에 부합되었기 때문이고, 나의 이상적인 생활에 대한 추구에 부합되었기 때문이다. 그리하여 읽을수록 흥분됐다. 후에 생명의 위험을 무릅쓰고 나와서 진상을 알릴 때에도 역시 속인의 ‘생선도 내가 얻고자 하는 것이고, 곰 발바닥도 내가 얻고자 하는 것이요. 양자를 동시에 얻지 못할 바에는 생선을 버리고 곰 발바닥을 얻으리라.”라는 집착을 안고 걸어왔다. 천국과 인간세상 양자를 동시에 얻지 못하는 상황에서 결국 신불(神佛)의 천국세계를 선택함으로써 인간의 삶을 포기하고 걸어 나와서 진상을 알렸다. 심지어 사람을 구할 때도 생각 깊은 곳에는 ‘나는 나의 세계를 원만하게 하고, 나의 세계의 중생을 풍부하게 하고 있으며, 장래에 원만할 나의 세계를 더욱 아름답고 더욱 다채롭게….’ 한다는 일념이 숨어 있었다. 이것은 얼마나 이기적이고 더러운 사람 마음인가!

욕망과 집착, 이는 속인의 동력으로서 속인은 바로 이것을 위해 살고 있다. 욕망과 집착이 없으면 속인은 동력이 없게 되고, 무슨 일을 하든지 모두 재미가 없으며 의욕이 없어진다. 이것이 바로 속인의 상태이다. 이 때문에 속인은 변하기 쉬우며, 사람 마음은 무서운 것이다. 하지만 우리 수련하는 사람은 속인의 물건을 추구하지 않고, 속인의 집착과 욕망을 버려야 한다. 이 때문에 우리의 원동력은 여기서 오는 것이 아니라, 우리의 ‘원동력’은 대법에서 오고, 우주 법리에 대한 이성적인 인식에서 비롯된 사상의 승화에서 오며, 자비에서 오고, 우주 진리와 우주중생의 영원히 행복하고 아름다움을 지켜 주는 데서 오는 것이다! 목적이 다르면 일을 함에 나타난 효과와 위덕도 완전히 다르다.

이 때문에 이런 강렬한 사람 마음의 집착 하에 근본적인 집착을 버리지 않고 법 학습을 하거나, 수련하거나, 진상을 알리면 기필코 의지가 굳지 못할 것이다. 설령 일시적으로 아주 ‘정진’하는 상태가 있더라도 그것은 가상(假相)으로서 시간이 오래되면 꼭 나태해 질 것이다. 견디기 어려운 외로움 속에서, 오랜 기간 박해를 받아 희망이 보이지 않을 때, 오래도록 기다려도 시간이 결속되지 않을 때 이런 강렬한 사람 마음의 집착은 서서히 사람으로 하여금 지치게 하고 소극적이게 하며 실망하게 한다. 이런 사람 마음의 집착이 가져온 원동력도 이 때문에 서서히 약해지고 따라서 소실된다. 서서히 나태해지고 안일해지며 심지어 속인 속에 빠져 더는 정진하지 않게 된다.

“집착을 가지고 법을 배우는 것은 진정한 수련이 아니다. 하지만 수련 중에서 자신의 근본적인 집착을 점차 인식하여 그것을 제거함으로써 수련인의 표준에 도달할 수 있다. 그렇다면 무엇이 근본적인 집착인가? 사람은 세상에서 많은 관념을 양성했으며, 관념에 이끌려 동경하는 것을 추구한다.” [1]

사람 마음을 안고, 근본적인 집착을 지니고 법 공부를 하거나 수련하면 비록 일정한 층차의 법리에 대해서는 알 수 있을지 몰라도 그것은 다만 감성으로 법을 인식할 뿐 기필코 견정하지 못할 것이고 법에 대한 이성적인 인식으로 승화할 수 없다! 이 때문에 법에서 법을 인식하는 경지에 도달하지 못하면 빗나가기 쉽다.

이 때문에 내 생각에 빗나가거나, 사오하거나(邪悟), 심지어 완전히 반대방향으로 나아간 많은 수련생은 모두 이성적으로 법을 인식하지 못했고, 사람 마음을 갖고 감성적으로 법을 인식한 것이었다. 감성적인 기초 위에서는 더욱 높은 층차의 법리가 나타날 수 없는데 왜냐하면 고층차의 법리를 속인에게 보여줄 수 없기 때문이다. 그러므로 법 속에서 인류에 가까운 낮은 층차의 ‘작은 지혜’만 조금 얻을 수 있을 뿐, 법 속에서의 경지의 제고에는 매우 큰 제한을 받을 수 있다.

처음에는 사람 마음 집착의 감성적인 인식에서 원동력을 찾았기에 자신의 ‘정진’ 상태를 유지할 수 있었다. 차츰 사람 마음으로 보기에 희망이 보이지 않고, (원만 후 돌아갈 천국 세계에 대해 동경하는) 집착이 닳아 없어짐에 따라 원동력도 소실되었으며, 따라서 느슨하게 변했다. 만약 지금 다시 처음의 그런 정진 상태로 되돌아가게 하려면 반드시 법 공부를 많이 해야 하고, 세 가지 일을 잘하는 가운데서 사람 마음의 모든 집착을 제거해 버려야 한다. 근본적인 집착을 끄집어내어 자신의 목적을 순정하게 해야 하고, 자신으로 하여금 법에 서서 감성적인 인식에서 이성적인 인식으로 승화되게 해야 한다.

이 과정에서 사상은 승화와 비약을 얻을 수 있고, 우주 진리에 대한 뚜렷하고 이성적인 인식 가운데서 신심(信心)은 전에 없이 견정해지며 정념도 갈수록 강대해질 것이다. 이는 대법 중에서 얻은 에너지이며, 새로운 원동력이다. 이는 이성적인 동력으로서 진정하게 강대한 동력이고, 가장 견정하고 영원히 느슨해지지 않은 동력으로서 영원히 정진하고 멈추지 않는 금강불파(金剛不破)하고, 용맹하여 막을 수 없는 동력이기도 하다!

지금 다시 되돌아보면 이전의 ‘정진’ 상태는 진정한 수련인이라 할 수 없었다. 이전에 수련생들이 “전법륜”을 한번 읽을 때마다 새로운 인식이 있고, 동일한 한마디 말을 읽을 때마다 모두 부동한 뜻이 있다고 말할 때 나는 늘 이해하지 못했다. 왜냐하면, 나는 보지 못했기 때문이다. 근 20년 이래, 나는 법리에 대한 깨달음이 아주 늦다고 느껴졌는데 “전법륜”을 수없이 읽었지만 다른 뜻을 보아내지 못했기에 의문이 생겼다. 이전에 나도 늘 수련생들과 함께 이성적으로 법을 인식하는 것을 교류하였는데 비록 입으로는 늘 이성적으로 법을 인식해야 한다고 말하였지만, 그때 나는 이성이 어떤 개념인지를 알지 못했다.

내가 많은 사람 마음을 제거하고, 근본적인 집착을 파버리며, 자신의 목적을 순정하게 한 후 나는 부지불식간에 감성에서 이성으로의 승화를 달성하였음을 발견했다. 법리는 전에 없이 명석해졌고, 나는 수련생이 말하는 “전법륜”을 한 번씩 읽을 때마다 모두 부동한 인식이 있다는 말을 이해하게 됐다. 지금 나는 매 한마디 말에도 모두 부동한 인식이 있다는 상태를 뚜렷이 감수하고 있다. 지금 나는 늘 법 공부를 하는 중에서 매 한 구절을 읽을 때마다 신체 깊은 곳의 진동을 느낄 수 있고, 새로운 한 층의 법리를 느낄 수 있으며, 온 경지의 법리가 순식간에 나의 눈앞에 입체적으로 나타난다는 것을 느낀다. 비할 바 없이 미묘하여 나는 늘 눈물이 가득했고, 사부님의 은혜에 감격해 마지않는다! 이전에 법리를 보아내지 못하거나 여러 가지 아득함과 이해하지 못한 것들은 모두 자신의 사람 마음이 가로막고 있었다!

나는 “수련을 처음과 같이하는” [2] 상태를 되찾았고, 자신이 한 바퀴 돌아 다시 새로운 높이로 돌아갔다는 것을 느꼈다. 이전보다 더욱 순정하고 더욱 이성적이었다. 지금은 흥분이 없고 격동도 없으며 마음이 물처럼 고요하다. 다만 애초의 아득함과 충동을 쓸어버린, 더는 동요될 수 없었다.

“수련을 처음과 같이 하다.”라고 함은 나의 수련에서 하나의 어려운 과정이었는데, 감성에서 이성으로의 승화이며, 양적 변화에서 질적 변화로의 하나의 과정이었다!

주:

[1] 리훙쯔(李洪志) 사부님 저작: “정진요지2” ‘원만을 향해 나아가자’

[2] 리훙쯔(李洪志) 사부님 저작: “각 지역 설법 9” ‘2009년 대뉴욕국제법회 설법’

문장발표: 2014년 2월 14일

문장분류: 수련마당

원문위치: http://www.minghui.org/mh/articles/2014/2/14/287640.html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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