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明慧법회| 사전 대원을 완수, 베이징에서 진상을 알린 경험

글/ 대륙대법제자

[밍후이왕]

존경하는 사부님, 안녕하십니까!

수련생 여러분, 안녕하십니까!

16년 동안 주야로 비바람 속에서 수련의 험난한 길을 걸어왔다. 다 말할 수 없는 이야기, 대법의 신기함이 있는데, 인류의 언어로는 사부님의 자비로우신 고도(苦度)에 대해 표현할 방법이 없다. 2012년 새해 전, 나는 원래의 살던 곳에 업무 처리 차 갔을 때 진상자료, 션윈 CD, 세화, 주련, 달력 등을 준비해서 챙겨갔다. 일부는 과거의 이웃, 친척, 친구에게 전해주었고, 남은 일부 자료는 지역사회 사무처로 갖고 가서 일일이 전부 나누어주었다(어떤 사람은 내가 파룬궁을 수련함을 알고 있음). 업무를 마치고 밖으로 나오다가 옛 친구를 만났는데 그 때는 이미 자료가 없었다. 나는 진상자료를 충분히 갖고 오지 못한 것을 몹시 후회했다. 오후 3시, 해질 무렵에 집으로 돌아가는 장거리 버스에 앉아서 하늘을 바라보았는데 하늘에는 온통 분홍색 연꽃이 피어 있었다. 꽃술이 CD 크기만큼 될 정도로 꽃은 컸다. 버스가 출발하여 달리자 연꽃도 점점 많아졌는데, 뭉게구름 가장자리가 모두 연꽃으로 수놓아져 있었다. 각종 형식의 도안이 매우 아름다웠다. 나는 눈을 비비고 다시 보아도 역시 온 하늘에 금빛으로 반짝반짝 빛나는 연꽃이었는데 이런 광경이 집으로 돌아갈 때까지 40여 분 동안 계속 지속되었다.

집에 도착한 후 남편에게 내가 목격했던 (연꽃)광경을 말했다. 그런데 남편은, 당시(3시 경) 큰 도로변, 공원 안 큰 나무 위에 있는 등에 황색 주단에 주황색 글자를 쓴 길이가 1미터나 되는 현수막을 걸고 있었다고 말했다. 그는 현수막 5개를 걸 때 장갑을 끼지 않았다고 했다. 동북의 설 전 날씨는 매우 추워 손이 얼어들었지만 그래도 상관하지 않고 계속 현수막을 걸었다고 했다. 그런데 현수막을 모두 걸고 나자 손이 뜨끈뜨끈하고 온몸은 따뜻했으며, 정말 그렇게 (심신이) 편할 수가 없었는데 아주 편하고 가뿐하게 집으로 돌아왔다고 했다. 내가 “아, 이것은 사부님께서 당신이 사람을 구하는 신성한 일을 잘하는 걸 보시고, 제게 온 하늘의 연꽃을 보여 주신 거군요”라고 말하자, 남편은 “당신도 있잖아요!”고 말했다. 나는 “법정인간의 시각이 멀지 않았어요. 우리들은 사부님께서 ‘수련을 처음과 같이 하면, 반드시 정과를 얻는다’고 하신 말씀을 기억해야 해요. 시간이 많지 않아요. 사람을 사악으로부터 되찾아 사람을 구하며, 세 가지 일을 잘하여 우리들의 사전 대원을 완수해 사부님을 따라 집으로 돌아가야 해요”라고 말했다.

나는 금년 들어 70세로 헤이룽장성(黑龍江省)에서 살고 있는데 1997년 7월에 운 좋게 대법을 얻었다. 지금 나 자신이 10여 년 동안 수련한 상황을 사부님께 보고를 드리고 또 수련생들과 교류하려 한다.

1. 대법이 나를 구하다

수련 전 나는, 머리끝에서 발끝까지 모두 병이 있었는데, 베이징 유이(友誼)병원에서 뇌종양이 생겼다는 진단을 받았다. 늘 두통과 현기증, 눈이 아픈 증상, 귀에 고름이 흐르는 난청 증세, 위장병, 다리가 아픈 증상, 왼쪽 허벅지 안쪽 근육통(붉거나 붓지도 않아 표면적으로는 이상 없음), 발목과 발뒤축이 아픈 증상이 나타나는 등등 질병으로 인한 고통으로 거동이 힘들었다. 체중은 겨우 40kg도 되지 않았으며 제대로 걷기도 어려웠다. 이런 병마의 시달림으로 사는 게 죽는 것만도 못했다. 그때 형편이 넉넉하지 못했으나 그래도 세 아이들을 공부시켜야 했다. 또 고향에 있는 4명의 노인을 부양하기 위해 돈을 부쳐야 했으니 어디 내 몸을 치료를 할 돈의 여유가 있었겠는가? 그때 나는, 그냥 살 때까지 살면서 그러다가 죽는다면 그것도 운명이려니 하고 체념하고 있었다.

나는 어린 시절부터 몇 차례 큰 재난을 겪었다. 어릴 적에 천연두에 걸려 이미 숨이 끊어져 가족들이 나를 집 문밖으로 내놓았다. 나중에 부친이 만져보고 숨이 붙어 있는 걸 발견하고 다시 안고 집안으로 들여 놓아 서서히 회복돼 살아났다. 또 한 번은 가을에 감기에 걸려 아무것도 먹고 싶지 않았다. 풋대추를 먹고 싶었으나 감히 어른에게 말하지 못했다. 우리 집 뒤뜰에 대추나무 몇 그루가 있었는데 대추가 이미 절반 정도 붉게 익었으나 아직 완전히 익지 않은 상태였다. 그래도 대추가 먹고 싶어서 뒤뜰 낮은 담을 타고 지붕위로 기어 올라갔다. 방금 비가 내린 터라 지붕 기와가 젖어 매우 미끄러웠는데, 순간 발이 미끄러져 넘어지며 지붕 아래로 떨어지다가 간신히 처마 끝에 걸려 아래로 떨어지지 않았다. 지붕 3미터 아래 땅바닥은 벽돌이 깔려 있었으니 만약 떨어졌다면 죽었을 것이다. 어머니는 예수를 믿었다. “신께서 너를 보우해 목숨을 구했어”라고 어머니는 말씀하셨다.

어릴 적에 어머니는 늘 나에게 “마을에 동냥하는 사람이 오면 욕하거나 때리면 안 된다. 그에게 먹을 것을 주면 돼. 그들은 보통사람이 아니야. 어떤 이는 신이 인간으로 내려와 동냥하는 것이다”라고 말씀하셨다. 중공은 ‘4청운동(四淸-마오쩌둥이 농촌에서 진행한 사회주의 교육)을 전개하면서 소위 ’면상사교(面上社敎-사회주의 교육운동)‘를 꾸며 우리 집을 부농으로 지목했고, 문화대혁명 때는 또 지주(남편 집안도 지주 성분으로 지목돼 대학졸업 후 변방 배치됨)로 지목돼 우리 집의 논밭, 재산, 양식은 전부 다 빼앗겨 분배됐다. 어머니는 “공산당은 매우 나쁘다. 토비다. 공산당이 언제라도 망하면 인민은 그제야 좋은 날을 보낼 수 있을 거야”라고 말했다. 우리 마을 입구에 묘지가 있었다. 고향은 산비탈 황토밭이여서 가뭄이 심했는데 마을 사람들은 그럴 때면 늘 묘를 찾아가서 비를 내리게 해달라고 빌었다. 나도 어릴 적에 가서 비를 내리게 해달라고 빌기도 했다. 그렇게 빈 뒤 잠시 후 또는 그 다음날이면 비가 내렸다. 문화대혁명 때 홍위병이 묘를 부수고 신상(神像)을 부수자 어머니는 “묘가 없어지고 신이 떠나버려 사람을 상관하지 않는구나, 사람이 죄가 있어 업을 짓는구나!”고 말했다. 나는 어려서부터 부처님과 인연이 있어서 부처님을 존경하면서 신불의 존재를 믿었다.

1997년 어느 날, 언니가 고향에서 전화로, 파룬궁이 좋다며 빨리 파룬궁을 연마하라고 알려주었다. 나는 전화를 내려놓고 나가서 대법을 수련하는 사람을 찾았다. 아주 오랜 시간을 들여서 마침내 찾았다. 그날 저녁에 연공장에 가서 연공을 했는데(당시 6명이 있었음) 저녁에 나는 꿈을 꾸었다. 꿈속에서 아주 많은 사람이 있는 큰 거리에서 나는 체격이 크고 영민하고 준수한 젊은이를 보았다. 나는 그가 소탈하고 선량하게 보였다. 그를 보자 그도 나를 보고 있었는데 나는 그가 매우 낯익어 어디에서 많이 본 느낌이 들었다. 그러나 누구인지는 생각나지 않았다. 그를 따라가면서도 생각해봐도 역시 생각이 나지 않았다. 그 다음 날 연공장에 가서 사부님께서 설법하시는 영상을 보았는데, 단번에 이분이 바로 꿈속에서 본 바로 그 젊은 분이라는 것을 알았다. 원래 사부님이셨던 것이다. 나는 즉시 두 손을 합장했다.

연공장에서 제2장 공법 포륜(抱輪)을 연마할 때 머리위에 뭔가 ‘윙윙’ 하고 울리는 소리가 들렸다. 그러다가 급속하게 회전하더니 허리 사이에 큰 접시(파룬)가 나를 두 조각으로 잘라놓고 빠르게 회전했다. 내 몸은 끊임없이 흔들거렸다(보도원이 걸어와서 나에게 몸을 움직이지 말라고 했음). 연공이 끝나자 온몸은 땀투성이가 되었으나 매우 가벼웠다. 5장 공법을 할 때는 반가부좌도 하지 못했다. 다리는 매우 높게 들려 있었는데 아래로 누르면 아파서 몹시 괴로웠다. 네 번째 날 사부님의 설법 “부처(佛)는 당신들을 제도하기 위해 일찍이 속인 중에서 동냥했고, 나는 오늘 또 큰문을 열고 대법(大法)을 전수하여 당신들을 제도하고 있다. 나는 무수한 괴로움을 겪었어도 고통스럽다고 느낀 적이 없는데, 당신들은 또 무슨 내려놓지 못할 것이 있는가?”[2]를 학습했다. 나는 이 부분을 읽고 매우 상심해서 울었다.

법공부를 한 뒤에 가부좌로 정공을 연마하며 사부님께서 말씀하신 이 단락 법이 생각나서 줄곧 눈물을 흘렸다. 부처님은 너무 자비롭고 선량하셨다. 나는 마음이 완전히 비었고 나도 모르는 사이에 완전한 결가부좌를 할 수 있었는데 두 다리는 직경이 1미터 굵기의 큰 적송 같은 감이 들었다. 나이테가 아주 똑똑히 보였으며 한 바퀴 한 바퀴씩 천천히 약해졌다. 맨 마지막에는 또 약하고 부드러운 자전거 고무관처럼 보였는데 그것은 내 왼쪽 허벅지 안쪽, 매우 아팠던 부위와 아랫다리를 거쳐서 맨 마지막에는 엄지발가락을 통해 나갔다(이후로 다리와 그곳 근육은 아프지 않았음). 다시 틀어 올려 가부좌를 하자 마치 계란 껍질 안에 앉아 있는 듯한 묘함과 편안함을 느꼈다. 팔과 다리마저 감각이 없었다. 나는 출정(出定)할 때 시계를 보았는데 꼬박 1시간이었고 손바닥은 전부 땀이었고 눈물범벅이었다. 이것은 사부님께서 나를 격려해 주시어 고통을 참고 정진해 잘 수련하도록 해주신 것임을 깨달았다. 그 후 완전한 가부좌를 하지 못하면 날마다 다리를 틀어 올려 시간마다 연마했고 다리를 누르며 고통을 참고 정진했다. 보름 후 완전한 가부좌를 틀어 올릴 수 있게 됐다.

수련을 시작한 지 9일 째 되는 날, 나는 꼬박 7일 동안 먹지도 않고 마시지도 않으면서 의식이 없을 정도로 잠을 잤다. 누가 깨워도 정신을 차리지 못했고 깨어나서는 곧 설사하고 토했다. 사부님께서는 말씀하셨다. “다른 공간에서 당신의 신체를 보면 그 뼈마저도 군데군데 시커멓다. 바로 이런 신체를 단번에 당신에게 정화해 주는데, 조그마한 반응도 없어서는 안 된다. 그러므로 당신은 반응이 있을 것이다. 어떤 사람은 또 설사하면서 토하기도 한다. 과거에 많은 지역의 수련생이 나에게 쓴 심득체험 중에서 이런 문제를 제기했다. 스승님, 저는 학습반에서 강의를 듣고 돌아가는 길에 집에 도착할 때까지 줄곧 화장실만 찾았습니다. 이는 내장(內臟)까지도 모두 정화해야 하기 때문이다. 어떤 소수의 사람은 또 잠을 잘 것인데, 내가 강의를 끝내면 그도 잠을 깬다. 무엇 때문인가? 그의 머리 안에 병이 있어 그에게 조정(調整)해 주어야 하기 때문이다. 머리를 조정하면, 그는 전혀 견뎌내지 못한다. 그래서 반드시 그를 마취 상태로 들어가게 하는데, 그는 알지 못한다.”[3]

8일이 지나서야 나는 자리에서 일어났는데 온몸이 가벼웠다. 마치어떤 일도 발생하지 않은 것처럼 예전에 비해 더욱 씩씩했다. 이 때부터 내 온 몸의 질병은 온데간데없이 사라졌으며 자전거를 타고, 걷고, 층계에 오르는 것도 매우 가뿐했다. 나는 70세인데 줄곧 자전거를 타고 가서 자료를 사고 프린터를 수리했으며 진상을 알리고 거리로 나가 일을 처리했다. 대법이 나를 구했고 사부님께서 나를 구해주셨다. 사부님께 감사를 드리고 대법에 감사를 드린다.

가족은 내가 대법을 수련하고 겪은 신기함을 보고 남편, 큰 아들, 딸, 손자, 외손자가 같은 해 같은 달에 모두 대법수련으로 들어섰다. 만족스러운 것은 막내아들도 지금 법공부를 하고 연공을 하기 시작했고 큰 며느리, 막내며느리도 대법을 인정하고 지지하며 또 사부님의 설법을 보고 있는 것이다.

2. 신사신법(信師信法)으로 대법을 실증하다

1999년 7월, 사당은 광적으로 파룬따파(法輪大法)를 박해했다. 우리 현지 파출소 지도원과 구역 경찰은 우리 두 부부(큰 아들, 며느리는 외지로 일하러 갔고, 손자는 우리 두 사람이 돌봄)를 감시하며 외출을 허락하지 않고 일이 있으면 허락을 받도록 했다. 그리고 연공하는 것도 금지시켰으며 대법 책을 찾기 위해 날마다 수색하며 소란을 피웠다. 2000년 4월, 우리는 은밀하게 아파트를 팔아치우고 베이징으로 갔다. 베이징에서 작은 단층집을 구입했다. 딸은 수련생과 함께 셋집을 맡아 자료를 만들면 나는 남편과 함께 언제나 큰 자루에 담아 메고 골목골목 다니며 배포하고 또 현수막을 걸고 진상표어를 붙였다. 또 여러 차례 천안문에 가서 대법을 실증했지만 언제나 사부님의 가호로 안전하게 집으로 돌아왔다.

2001년 10월 1일, 그날이 기억난다. 나와 남편, 딸, 손자는 천안문으로 대법을 실증하러 가면서 많은 자료를 메고 갔다. 옷 호주머니에까지 접착용 진상자료를 가득 넣었다. 그 중에는 ‘장적민(江賊民)’ 즉, 장쩌민(江澤民)을 추악하게 묘사한 것도 있다. 가는 큰 길에서 배포하며 천안문까지 갔다. 도중에 길옆에 정차해 있는 경찰차와 경찰 오토바이에 맞닥뜨렸다. 경찰관 5명이 있었는데 두 사람은 차 밑에서 차를 수리하고 있었고 세 사람은 옆에서 말을 하고 있었다. 나와 손자는 경찰차와 오토바이 위에 ‘파룬따파(法輪大法)는 정법이다’를 붙였다. 금수교(金水橋)까지 걸어갔는데 외지에서 일하러 온 한 무리 노동자와 관광객이 땅에 앉아 휴식하고 있었다. 딸은 걸어가서 매 사람에게 대법자료와 ‘장적민’의 추악한 사진을 주었다. 어떤 이는 받고, 어떤 이는 감히 받지 못하면서 신변 경찰의 눈치를 살폈다. 그 때 경찰은 곳곳에 널렸었는데 사복경찰이 2보에 한 사람, 3보에 한 사람씩 깔려 있었다. 딸이 관광객에게 “별일 없어요. 가지고 돌아가서 보세요”하고 말하자, 그들은 잽싸게 받았다. 또 천안문광장으로 걸어가면서 붙였는데 채색 깃대 위, 감시카메라 위, 주춧돌 위, 광고판 위, 잔디밭의 작은 걸상 위에까지 ‘파룬따파하오(法輪大法好-파룬따파는 좋습니다)’, ‘쩐싼런하오(眞善忍好-진선인은 좋습니다)’, ‘나의 사부님께서 결백하시다’는 등등의 접착용 표어를 붙였다. 황색 바탕에 붉은 글자인데 매우 산뜻하고 아름다웠다. 그리고 또 ‘장쩌민은 파룬따파를 박해한 원흉’이란 검은 바탕에 검은 글자인 접착용 표어도 있었다. 우리는 자료를 배포하면서 경찰은 전혀 우리를 보지 못한다는 감을 느꼈다. 모든 자료를 다 배포하고는 집으로 돌아왔다(올 때 제각기 집으로 돌아가자고 결정했음).

집에 도착한 후 막 차에서 내리자 남편이 우리를 기다리고 있었다. 나는 “당신은 어째서 집으로 돌아가지 않고 이곳에서 우리를 기다리세요?”고 묻자 그는 열쇠가 없다고 말했다. 그는 말했다. 그가 마침 광장 인근에서 진상표어(前門-첸먼 파출소 앞인데 당시에 몰랐음)를 붙이고 있었다. 그런데 그 때 뒤편에서 경찰차 한 대가 오더니 두 경찰관이 차에서 내려 남편을 경찰차로 끌어올렸다. 남편은 경찰차에서 남은 자료를 차의 좌석 틈에 밀어 넣었는데, 부주의로 열쇠까지 함께 넣었던 것이다. 경찰차는 첸먼 파출소로 들어가서 남편을 한 방에 넣었다. 온 방안 사람들은 모두 대법제자였다. 어떤 이는 이미 하루 동안 갇혀 있었고 어떤 이는 외치고 있었으며 또 어떤 이는 말을 하지 않았고 어떤 이는 경찰과 이치를 따지고 있었다. 한 경찰관이 남편에게 “어디 사람입니까? 퇴직금을 타고 싶지 않습니까?”하고 물었다. 잠시 후 다른 키 큰 경찰관이 와서 남편의 따귀를 두 차례 때렸다. 남편은 움직이지 않았다. 조금도 아프지 않았고, 또 그를 보지도 않았다. 그런데 오히려 그 경찰관은 주먹을 쥐며 손바닥을 문질렀는데 마치 너무 손바닥이 아픈 듯 참으며 무안스러웠는지 황급히 안으로 들어갔다. 잠깐 지나서 남편은 이곳은 자신이 있을 곳이 아니라는 생각이 들어 ‘사부님 가지해 주세요. 저는 집으로 돌아가야 합니다’라고 빌었다. 방안 입구는 긴 책상으로 막고 있었는데 세 명의 경찰관이 지키고 있었고 출입구 쪽에는 4명의 경찰관이 총을 들고 지키고 있었다. 남편은 사부님의 가호 하에 경찰의 눈앞에서 파출소를 유유히 벗어나서 광장으로 걸어갔다. 그곳을 나와 우리를 찾지 못하자 곧바로 집으로 돌아왔던 것이다. 그 후에 알게 됐는데 10월 1일 전후 사당은 천안문에서 많은 대법제자를 체포했다고 했다.

베이징에 있던 몇 년 사이에 사악의 박해 납치 때문에 우리는 차례로 20여 차례나 집을 이사하며 옮겨 다녔다. 그러므로 여러 개 도시 구역 즉, 펑타이구(豐台區), 다싱구(大興區), 충원구(崇文區), 차오양구(朝陽區), 창핑구(昌平區) 등에서 거주한 적이 있다. 남편, 아들, 딸은 노동교양소 박해를 당한 적이 있고 나도 예전에 세뇌반에 갇힌 적이 있는데 돌아온 후에 머물 곳이 없었다. 사당(邪黨-중공)은 어느 집주인이 대법제자에게 세를 주면 곧 집을 몰수하고 벌금을 부과시킨다고 규정했으므로 집 주인은 두려워서 감히 세를 주지 못했다. 어떤 때에는 불법 가택수색을 당하고 납치를 당해 도망쳐 나왔으나 행장과 옷을 챙기지 못했다. 두 차례는 돈마저도 가져오지 못한 적도 있다. 우리는 단층집, 층집, 지하실에 세를 얻은 적이 있었다. 두 손자가 있었는데 생활이 매우 어려워 어떤 때는 집세도 내지 못하는 경우가 있었다. 그러나 고생스럽고 힘들더라도 마음에는 대법이 있고 사부님이 계셨기에 매우 위안을 느꼈다. 두 손자는 ‘파룬따파하오(法輪大法好)’ ‘쩐싼런하오(眞善忍好)’란 표어를 썼는데, 공체자(空體字)로 써서 잘라내 다른 종이 위에 붙인 후 각종 색깔을 사용해 글자마다 한 가지 색깔을 칠했으며, 아래에는 또 ‘6세 어린 대법제자’라고 썼다. 그들은 할아버지와 함께 교차로 받침돌 위에, 교량 위에, 교문 입구 등등에 붙였는데 어떤 것은 아주 오랜 시간 동안 붙은 채로 보존됐다.

어느 날 저녁, 나는 딸과 함께 자료를 배포하러 갔다(그때 남편과 아들은 불법 노동교양 박해를 당했음). 단지 나와 딸, 두 손자 네 사람만 집에 있었을 뿐이었다. 우리 두 사람은 한 구역 한 구역씩 아파트 단지에서 배포했는데, 순리롭게 한 자루나 되는 자료를 다 배포했다. 환희심이 생겨 또 집으로 돌아가서 한 자루 자료를 가져오려 했다. 막 집 문을 나서자마자 내 머리는 어디에 심하게 부딪혀 큰 혹이 생겼다. 이것은 사부님께서 지금 다시 나가면 안 된다는 것을 점오해 주신 것인데 나는 그걸 깨닫지 못하고 주택단지로 가서 맨 위층에서부터 아래층으로 내려오며 배포했다. 막 3층까지 배포했을 때, 한 노부인이 자료를 발견하고는 곧 큰소리로 “파룬궁을 붙잡아요!”하고 외쳤다. 위아래층 주민들이 전부 나와서 우리 두 사람을 에워쌌다. 우리 둘은 그들에게 진상을 알렸으나 노부인은 여전히 “그들을 붙잡아서 파출소로 보내요!”라고 외쳤다. 이때 중년 남자가 막 차를 몰고 집으로 돌아왔는데 그 노부인의 아들이었다. 그 남자가 “당신들은 파룬궁을 연마하는 사람입니까?”고 묻자, 그렇다고 대답했다. 그러자 또 “이 자료는 당신들이 배포한 것입니까? 국가에서 연마하는 것을 허락하지 않는데, 당신들은 모릅니까?” 나는 “그럼 당신은 신고하겠습니까?”하고 물었다. 딸은 “파룬따파는 정법입니다. 정부에서 파룬궁을 박해함은 잘못입니다. 우리 사부님은 좋은 분이시며, 우리에게 진선인(眞善忍)에 따라 좋은 사람이 되라고 하셨습니다. 당신들에게 나눠준 자료를 자세히 보시면 곧 진상을 분명히 알 겁니다”하고 말했다. 이때 그 사람은 이미 110(신고전화번호)을 눌렀다. 그리고는 “내가 전화번호를 눌러서 5분이면 110 차가 곧 도착합니다”고 말했다. 그 때 우리는 매우 평정했고 두려운 마음이 없었다. 나는 위엄 있고 선량한 눈길로 그를 보며 계속 진상을 알렸다. 그는 전화를 잡았던 손을 내려놓고 우리에게 정말 좋은 사람이라며 가라고 말했다. 우리는 집으로 돌아왔다. 이미 저녁 10시가 넘었는데 두 손자는 여전히 현수막을 만들고 있으면서 우리가 집으로 돌아오길 기다리고 있었다. 생각해 보라. 만약 우리가 집으로 돌아오지 못했다면 여섯 살인 이 두 아이는 어떻게 됐겠는가? 이것은 사부님께서 또 한 차례 우리를 보호해 주신 것이었다. 사부님께 감사를 드렸고 대법에 감사를 드렸다. 오직 신사신법(信師信法), 정념정행(正念正行)하기만 하면 사부님께서는 모두 우리를 책임지고 결정해 주실 것이다.

베이징에서 늘 집을 이사했으므로 손자는 여러 곳 학교로 옮겼다. 학교마다 또 찬조금을 받으려 했기 때문에 어떤 때는 1년 6개월 동안 정학을 당하기도 했다. 2007년 나와 남편은 손자를 데리고 동북의 다른 한 도시로 이주했는데 손자가 학교에 등록을 하려면 주택 증명서와 호구가 필요했다. 나는 호구를 옮겨 등록하려고 그동안 전전하며 살았던 여러 곳을 다니며 찾았으나 호구등록이 쉽지 않았다. 호적을 올리기는 더욱 어려웠다. 나와 남편은 대면하여 진상을 알리려 결정했다. 파출소장, 지도원, 부소장 또 610주임(파룬궁 전문적으로 박해하는 사악 조직)을 찾아가서 우리의 기록을 작성했다. 우리는 그들이 묻는 말을 막아내며 청산유수처럼 그들에게 진상을 알렸다. “우리는 국민이므로 호적에 등록할 권리가 있습니다. 국가 법률에 신앙은 자유이고 언론은 자유라고 규정되어 있고, 법률상 파룬궁을 ‘×교’라고 규정한 것이 전혀 없습니다. 사부님의 대법 책에는 정부를 반대하신 말은 한 마디도 없습니다. 대법은 정법입니다. 전 세계 백 여 개 국가에서 모두 파룬궁을 연마하고 있는바, 이것은 파룬궁이 정법임을 증명합니다……” 그리고 또 천안문 분신자살사건은 가짜임을 말하고 구이저우(貴州)성의 ‘망당석(亡黨石)’, ‘중국공산당망(中國共產黨亡)’이란 여섯 글자는 하늘이 중공을 소멸하려 하는 것임을 말했다. 610주임은 “나는 대법제자를 많이 접촉했습니다. 당신들은 모두 좋은 사람입니다”라고 말했다. 소장은 두 손을 맞잡고 “당신들에게 감사를 드립니다. 좋은 사람, 나중에 다시 만납시다. 6개월만 있으면 나는 퇴직합니다. 퇴직하면 또 파룬궁을 연마하겠습니다. 어떤 사람은 또 나에게 탈당을 권했습니다!”고 말했다. 나는 “그럼 탈당하세요. 삼퇴하면 평안을 유지할 수 있습니다”고 말해 줬다.

2008년 베이징 올림픽을 개최했는데, 큰 아들이 베이징에서 현지로 납치돼 돌아와서 세뇌반에 감금되어 박해를 받았다. 우리는 이 사실을 알게 된 후 아들의 석방을 요구했으나 그들은 허락하지 않았다. 나와 남편은 정법위(정치법률위원회) 서기를 찾았고 또 610주임을 찾았다. 맨 마지막에 파룬궁을 납치하는 데 주요 역할을 하는 시 구역 위원회 부서기를 찾아가서 그에게 석방을 요구했다. 진상을 알렸으나 그는 듣지 않으며 매우 화를 냈다. 부서기는 일어나더니, 오른손을 아주 높이 들어 책상을 두드리며 우리를 위협하려 했다. 그러나 우리는 두려워하지 않고 당당하고 위엄 있는 눈길, 자비한 어조로 “우리 아들이 무슨 법을 위반했어요? 당신도 백성의 아들입니다. 만약 수년간 집으로 돌아오지 못하다가 집에 도착했는데도 노인에게 문안인사 조차 못하게 한다면 당신이라면 어떤 심정이겠습니까?”라고 말했다. 그는 즉시 손을 내리고 말을 하지 않았다. 계속해서 “우리는 도둑질을 하지도 않았습니다. 사부님께서는 우리 대법제자는 때려도 맞받아치지 않고 욕을 해도 말대답하지 말고 일을 함에 먼저 다른 사람을 위해 고려하도록 가르치셨는데 어느 점이 틀렸습니까? 국가에서 올림픽을 개최함은 인민의 신체를 건강하게 하기 위함인데 파룬궁과 무슨 관계가 있습니까? 무엇 때문에 그렇게 파룬궁을 박해합니까? 무엇 때문에 이들 좋은 사람을 그렇게 두려워합니까? 정부에서 파룬궁을 박해함은 완전히 잘못된 것입니다”라고 말했다. 우리는 줄곧 반시간 동안 이야기했다. 그는 “내일 당신 아들을 집으로 돌려보내겠습니다”라고 말했다.

이튿날, 파출소 지도원과 지역사회 서기가 우리 집으로 차를 보냈다. 그리고 “이후에 무슨 일이 있으면 얼마든지 말하세요”라고 말했다. 우리는 중생이 진상을 분명히 알고 구도를 받았음을 느껴 마음이 많이 편해졌다. 사부님께서는 “생각이 바르면 사악은 무너지리라”[4]고 말씀하셨다. 오직 정념이 강하기만 하면 무엇도 우리를 막아내지 못한다.

2007년 모 지역에 안착한 뒤, 현지 협조인이 나를 찾아와서 우리 집에서는 두 사람이 다 수련하기에 조건이 된다면서 사부님께서 말씀하신 “곳곳에서 진상을 알리라”[5]는 법을 전했다. 나는 학력이 높지 않았고 또 컴퓨터도 만진 적이 없다. 베이징에서 딸이 자료를 만들었을 때 나는 단지 제본, 정리, 분류, 포장 등 보조 작업만 했을 뿐이다. 컴퓨터, 프린터를 사용할 줄 몰랐으나 나는 그래도 하겠다고 대답했다. 이튿날 컴퓨터, 프린터도 다 설치해 놓았고 기술 수련생은 나에게 켜고, 끄고, 다운로드하고, 프린트 하는 방법을 가르쳐주었다. 나는 눈이 어지럽고 가르쳐 준 내용을 기억하지 못해 필기를 했으나 그래도 여전히 알 수 없었다. 머리는 온통 텅 비어 있어서 다음 주에 주간을 프린터 할 때에는 아무 것도 기억나지 않았다. 기술 수련생은 직장을 다녀 매우 바빴는데도 짬을 내어 나를 찾아와 가르쳐주었다. 그러나 조금 배워 알게 되면 또 그것을 잊어버려 여전히 하지 못했다. 손자는 그때 12세였는데 컴퓨터를 사용한 적이 없었다. 기술 수련생이 나에게 가르치는 걸 보고 손자가 먼저 알게 되어 그가 일일이 나에게 사용법을 가르쳤다. 나는 그를 따라서 인터넷에 접속하고, 다운로드하고 프린터 하는 방법을 배웠다. 그는 프린터에 종이가 걸리는 등 고장이 났을 때 프린터를 열 줄도 알았다. 또 한자 병음을 가르쳐 주고 자판 다루는 방법도 가르쳐 주었다. 지금 나는 삼퇴 명단은 타자할 수 있으나 문장은 타자할 줄 모르며 속도가 매우 느리다. 이 일을 통해 사부님께서 내 신변에 어린 대법제자를 배치해 주셔서 자료를 만들고 중생을 구도하게 하셨으며 한 송이 아름다운 꽃을 피워 또 어린제자에게 위덕을 세워주셨다는 것을 깨달았다. 나는 법정인간(法正人間) 때까지 자료를 만들겠다고 결심했다.

나는 이 문장을 처음으로 투고한다. 눈물을 흘리면서 문장을 완성했다. 대법에 부합되지 않는 곳이 있으면 수련생 여러분께서 자비로 지적해 바로 잡아 주기 바란다.

사존님께 감사를 드리며 수련생 여러분께 감사를 드립니다. 허스.

주:

[1] 리훙쯔(李洪志)사부님의 경문: ‘2009년 대뉴욕국제법회설법’

[2] 리훙쯔 사부님의 저작: ‘정진요지-진수(眞修)’

[3] 리훙쯔 사부님의 저작: ‘전법륜(轉法輪)’

[4] 리훙쯔 사부님의 시사(詩詞): ‘홍음2-두려울 것 뭐냐(怕啥)’

[5] 리훙쯔 사부님의 저작:‘2003년 정월대보름설법’

(밍후이왕 제10기 중국대륙 대법제자 수련심득교류회)

문장발표: 2013년 11월 12일
문장분류: 대륙소식> 더욱 많은 박해사례
원문위치: http://www.minghui.org/mh/articles/2013/11/12/282147.html
영문위치: http://en.minghui.org/html/articles/2013/11/25/143376.html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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