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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4년의 반(反)박해, 사악을 제거하다(상)

[밍후이왕]

서문

1999년 ‘7.20’ 중공(중국공산당) 악당(惡黨)은 파룬궁에 대해 전면적인 박해를 발동했고 파룬궁수련생도 즉시 평화적인 반(反)박해 노정을 시작했다. 14년간 사악한 세력은 끊임없이 쇠퇴했고 정기(正氣)는 끊임없이 발양됐다. 최후까지 견지할 수 있는 사람들은 정의가 악을 이기는 이 한 차례 역사적 필연을 모두 볼 수 있을 것이다.

오늘날에 이르러 국제적으로 중공의 ‘파룬궁 박해’ 수출은 이미 철저히 실패했고 전 세계 범위에서 중공의 박해정책은 각국 정부와 각계 사람들의 강렬한 비난을 받았다. 예를 들어 국제적 고소는 폭풍처럼 일어났고 박해 원흉 장쩌민(江澤民), 뤄간(羅幹), 저우융캉(周永康), 류징(劉京) 등 중공 고위관리는 수십 개 국가에서 고소당했으며 여러 국가 법정에서 유죄 판결을 받았다.

또 예를 들어 2013년 12월 12일, 유럽의회 의원들은 긴급 결의안 하나를 투표해 통과시켰는데 ‘중공이 양심수 및 종교신앙과 소수민족 단체의 장기를 생체 적출하는 행위를 즉시 저지할 것’을 요구했고, ‘EU가 중국 경내의 장기이식 및 이런 부도덕한 행위와 관련되는 박해에 대해 전면적이고 투명하게 조사할 것’을 요구했으며, 동시에 중공이 파룬궁수련생을 포함한 모든 양심수를 즉시 석방할 것을 호소했다.

국제적으로 중공 박해세력이 끊임없이 쇠퇴되는 것과 대비해 파룬궁의 영향과 명예는 끊임없이 상승했고 파룬궁은 박해 중 사라지지 않았을 뿐만 아니라 오히려 세계 각국과 지역에 널리 전해졌고 ‘전법륜’과 기타 파룬궁 서적은 30여개 언어로 번역돼 세계 각지에서 발행됐다. 세계 각지에 약 110개 파룬궁 사이트가 있고 파룬궁은 1,000개의 표창장과 지지안을 받았다. 대기원시보에 ‘9평공산당’이 등재된 후 ‘삼퇴(역주: 중공의 3대 조직인 공산당, 공청단, 소선대 탈퇴)’의 열조는 폭풍처럼 일어났고 지금 ‘삼퇴’ 인원은 이미 1억5천만을 초과했으며 ‘세계 최고의 쇼’라고 불리는 션윈 공연은 세계를 휩쓸고 있다….

국내에서도 정과 사의 대비는 갈수록 뚜렷해졌고 중공 사악한 세력은 갈수록 쇠퇴하고 있다. 예들 들어 2002년부터 중공 언론은 다시는 감히 공개적으로 파룬궁을 먹칠하는 보도를 하지 못했고 오늘날에 이르러 ‘9평공산당’을 대면해, 세계 여론의 ‘생체 장기적출’에 대한 비난을 대면해, 박해를 주도한 고위관리에 대한 국제적인 고소를 대면해, 중공의 언론매체는 아예 감히 공개적으로 대응하지 못하고 있다. 언급만 하면 폭로되기 때문이다.

또 예를 들어 박해운동을 발동한 장쩌민 집단은 끊임없이 권세를 잃고 보응을 받고 있다. 장쩌민은 권력을 잃고 또 중병에 걸렸으며, 주요 박해자인 보시라이(薄熙來)는 보응을 받아 감옥에 들어갔고, 박해 원흉 중 하나인 저우융캉은 이미 조사를 받고 처리됐다는 소식이 있으며, 죄악의 박해 기구 ‘정법위(정치법률위원회)’는 권력을 대폭 빼앗겼고 해체를 직면하고 있고, 죄악의 노동교양제도는 폐지됐으며, 박해 지휘기구 ‘610’인원들은 몹시 두려워 하루도 살 수 없을 것 같은 느낌이다….

국내에서 박해세력의 쇠퇴에 비해 파룬궁수련생과 반(反)박해의 정의로운 힘은 갈수록 강대해졌고 정기는 끊임없이 발양되어 갈수록 많은 파룬궁수련생이 박해자의 범죄를 고소했다. 갈수록 많은 가족들이 나서서 파룬궁수련생과 함께 박해자를 고소했고, 갈수록 많은 변호사가 압력을 무릅쓰고 파룬궁수련생을 위해 무죄변호하고 파룬궁수련생을 협력해 박해자를 고소했으며, 갈수록 많은 국민들이 진상을 알고 나서서 중공의 폭행을 비평했고 파룬궁수련생을 보호하고 구원했으며, 적지 않는 경찰과 관리들이 진상을 명백히 안 후에 박해를 중단했을 뿐만 아니라 파룬궁수련생을 보호했다….

14년간 반(反)박해 노정은 옛날부터 변하지 않는 하나의 진리- ‘악은 정의를 이길 수 없다’는 것을 증명했다.

본문에서는 다만 시간적 순서에 따라 간단하게 14년간 정기가 끊임없이 발양된 일부 사례를 정리했고 이 위대한 역사를 위해 증거를 남기며 여전히 박해에 참여하는 자에게 교훈으로 삼게 제공한다.

1999년

1999년 7월 20일, 중공은 파룬궁에 대해 전면적인 박해를 발동했다. 한동안 정말로 천지가 거꾸로 섰고 강산의 색깔이 변했으며 바람 속에는 피비린내가 났고 사악은 기세등등했으며 당대에 자신이 제일이라고 뽐냈다.

광풍과 폭우를 직면하고 파룬궁수련생은 잇달아 청원의 길에 들어섰고 평화적인 반박해 노정을 시작했다. 파룬궁수련생의 청원 인원은 매우 많아 역사의 최고기록을 갱신했다. 예들 들어 1999년 7월 22일 중공 사당이 공개적으로 파룬궁을 박해한다고 선포하자 당일 즉시 수십 만 파룬궁수련생이 정부에 평화적인 청원을 했다. 1999년 10월 25일, 중공 사당 두목 장쩌민은 ‘파룬궁은 ×교다’(중공이야말로 진정한 사교임)라고 모함하자 수백 명 파룬궁수련생은 TV를 본 후 천안문 광장 및 인민대회당에 가서 청원했다. 이튿날 약 천명의 파룬궁수련생이 천안문 민원부에 가서 청원했다. 27일 또 약 600명 파룬궁수련생이 천안문에서 현수막을 내걸었고 17명 파룬궁수련생은 천안문 성루에서 파룬궁 현수막을 내걸었다.

1999년 10월 28일, 약 30명 파룬궁수련생이 베이징 교외에서 비밀리에 기자회견을 가졌는데 실명과 진실한 모습으로 베이징 주재 AP통신, 로이터, AFP, ‘뉴욕타임스’ 등 서방주요 언론 기자의 인터뷰와 촬영을 받아들였는데 이는 최초로 중공의 파룬궁 박해를 상세하게 중국 내륙에서 서방 언론에 발표한 것이다. AP통신 및 로이터 통신은 당일 바깥으로 소식을 전했고 ‘뉴욕타임스’, ‘사우스차이나모닝포스트’와 유럽 수십 개 언론 매체는 이튿날 기자회견 보도와 사진을 대폭 게재했다.

당시 국내에 깨어나고 명석한 사람들도 적지 않았다. 일찍이 1999년 중공이 파룬궁을 막 박해하기 시작했을 때 허베이 탕산 산악지역에는 한 마을이 있었는데 중공이 광적으로 ‘진선인(眞善忍)’을 연마하는 사람들을 박해했지만 촌민들은 파룬궁수련생들이 박해를 받을 이유가 없다고 느꼈다. 마을에서 시멘트 도로를 깔 때 이 마을 촌장은 전문적으로 이전에 단체 파룬궁수련생들이 연공했던 곳에 시멘트를 깔고 “파룬궁을 다시 연마하게 한다면 여기는 마을에서 가장 중심지역이 될 것”이라고 말했다.

2000년

2000년 중공 악당의 ‘3개월 내에 파룬궁을 소멸한다’고 떠들어댔던 것이 실패했지만 죄악의 장쩌민 집단은 뉘우치고 고칠 줄 몰랐으며 오히려 본래보다 더욱 심하게 박해했으며 사악의 기세는 더욱 날뛰었고 잔인무도했다.

하지만 파룬궁수련생은 뒷걸음질 치지 않았고 청원자는 오히려 더욱 많아졌으며 파룬궁수련생은 각종 방식으로 국내외에 진상을 알리는 동시에 파룬궁수련생은 또 압력을 무릅쓰고 단호히 중공의 박해 주범의 범죄를 고소했다.

주커밍(朱柯明)

2000년 8월 29일, 홍콩 파룬궁수련생 주커밍(朱柯明)과 베이징 파룬궁수련생 왕제(王傑)는 중국 최고검찰원에 장쩌민, 중공 사당의 조직부장 쩡칭훙(曾慶紅), 중앙정치국 비서 뤄간 세 사람이 법률을 위반하고 파룬궁을 박해한다고 고소했으며 또 리훙쯔(李洪志) 사부님에 대한 지명 수배령을 철거하고 공안부의 헌법을 위반하는 ‘6금지’ 공고문을 철거하며 불법 수감한 파룬궁수련생을 석방하고 장, 쩡, 뤄 등 세 사람을 법률 및 형사책임 등 6가지 죄명으로 기소할 것을 요구했다. 이 소송은 파룬궁수련생의 정의롭고 위엄 있는 정기를 확실히 보여줬고 중공 악당이 매우 두려워했다.

2001년

2001년 중공은 국내외에 파문을 일으킨 ‘천안문 분신자살’ 사건을 조작했고 이 핑계로 박해운동을 한층 더 추진하고 승급시켰다.

파룬궁수련생은 즉시 전 세계에 ‘천안문 분신자살’ 사건 진상을 폭로했다. 국내에서 파룬궁수련생은 중점으로 광대한 사람들에게 진상을 똑똑히 알리는 것으로 전향했고 동시에 파룬궁수련생은 세계 각지에서 계속 중공 박해자의 범죄를 고소했다.

2001년 4월 6일 저녁, 우한 파룬궁수련생 펑민(彭敏)은 중공의 박해로 사망했다. 22일 후인 2001년4월 29일, 펑민의 어머니 리잉슈(李瑩秀)는 같은 곳에서 중공의 박해로 사망했다. 2001년 7월 17일 펑민의 형 펑량(彭亮)은 동생 펑민과 어머니 리슈잉이 학대를 받아 사망한 억울한 사건을 인터넷을 통해 두 미국 인권 변호사에게 위탁해 뉴욕에서 법률소송을 했고 당시 마침 뉴욕에서 방문하던 중국 후베이성 공안청장, 후베이성 ‘610사무실’ 부책임자 자오즈페이(趙志飛)를 암살, 고문죄 및 비인간적이고 모욕적인 학대, 반인류죄와 불법 수감 등 9가지 죄명으로 고소했으며 미국 연방 뉴욕남부지방법원(S.D.N.Y.) 당일 고소장을 자오즈페이의 손에 보냈다. 2001년 12월 21일 미국 연방 법원에서는 ‘결석판결’ 방식으로 자오즈페이의 학살죄가 성립된다고 판결했다.

같은 해 저우융캉(당시 쓰촨성 서기)은 고문으로 파룬궁수련생을 박해하고 암살했다고 미국에서 고소당했다.

2001년 1월 4일, 전문적으로 파룬궁 박해 사건과 책임자를 폭로하는 사이트 ‘법망회회(法網恢恢)’가 정식 운영을 시작했다.

2001년 12월 6일, 캐나다 파룬궁수련생은 몬트리올시 중문주간지 ‘화교시보(華僑時報)’가 파룬궁을 비방한다고 고소했는데 법원에서 12월 10일 보호령을 하달했고 ‘화교시보’에게 파룬궁을 헐뜯는 언론을 정간할 것을 요구했다. 중공이 해외로 수출한 박해는 좌절당했다.

2001년 1월 10일, 캐나다 국적 파룬궁수련생 장쿤룬(張昆侖) 교수는 중국에서 중공 사당에게 불법 3년 노동교양 선고를 받아 약 2개월 수감 후 캐나다 정부의 관여로 앞당겨 석방됐다. 이것은 국제사회가 성공적으로 파룬궁수련생을 구출한 사례였다.

2002년

2002년 중공 언론은 대규모로 또는 공개적으로 파룬궁을 감히 비방하지 못했고 원흉 장쩌민은 직무에서 물러났다(소위 ‘군사위 주석’ 직무만 보류했음).

2002년 10월 22일, 장쩌민은 미국 시카고에 머물러 있는 기간, 파룬궁수련생들은 고문죄와 집단학살죄 등 죄행으로 그를 미국 일리노이주 북부연방법원에 고소했다.

같은 해 10월 17일, 파룬궁수련생은 연대서명하여 장쩌민, 쩡칭훙과 뤄간을 유엔 반고문죄위원회, 유엔 인권위원회에 고소했고, ‘610사무실’ 두목이자 중국 부총리 리란칭(李嵐淸)은 프랑스에서 고소당했고, 베이징시 시장 류치(劉淇), 랴오닝성 부성장 샤더런(夏得仁)은 미국에서 고소당했다.

2002년 11월 6일, 미국 시카고시 시장급 회의에서 파룬궁 결의안을 통과시켰고 파룬궁에 대한 박해와 범죄를 비난했으며, 미국 정부가 중국 정부 및 다른 외교관이 파룬궁을 연마하는 미국인에 대해 교란을 피우는 불법 행위를 조사할 것을 요구하고 법률에 의해 고소하거나 국외로 쫓아낼 것을 요구했다.

2002년 10월 초, 유엔 난민위원회에서는 일본에 6명 파룬궁난민 신청자를 유엔 난민으로 허가하고 인정했다. 이후로 유엔에서는 이런 형식으로 파룬궁수련생을 구조하기 시작했다. 2002년 7월부터 박해받는 파룬궁수련생을 구원하는 전 세계 활동은 세계 16개 국가와 지역에서 전개됐고 이후에 중국에 수감된 수십 명 파룬궁수련생은 유럽, 호주와 북미로 구원됐다.

중국 내 사람들도 갈수록 진상을 알게 됐다. 예를 들어 2002년 중공이 유언비어를 날조하고 파룬궁을 모욕하는 것이 한창 떠들썩했다. 어느 날, 한 달리고 있는 기차에서 두 젊은 여성이 거짓말에 속아 격렬하게 파룬궁수련생을 비난하고 있었다. 그녀들 맞은편에 앉아있던 한 여성은 그녀들에게 “당신들에게 알려주지요, 내 직업 때문에 진정으로 파룬궁수련생의 인품을 알게 됐어요. 그들이 정말로 ‘진선인(眞善忍)’의 법리를 믿는 것은 확실히 감동적입니다”라고 말했다. 이 여성은 젊은 여자들에게 파룬궁은 전혀 여론이 먹칠한 것과 다르다고 알려줬다. 마지막에 그녀는 자신의 증명서를 꺼냈는데 사복 경찰이었다.

2003년

2003년 11월 14일, 파룬따파 밍후이왕은 중국 대륙 파룬궁수련생이 대륙 매체가 파룬궁에 대해 유언비어를 날조하고 비방한 물증 및 파룬궁수련생이 박해받은 물증을 수집하고 보존하며 아울러 물증을 해외로 전하라고 통지했다.

2003년, 원흉 장쩌민은 스위스, 벨기에, 독일, 스페인, 한국, 대만 등 지역에서 고소당했고 뤄간과 리란칭도 여러 개 국가에서 동시에 고소당했다. 뤄간은 또 아이슬란드, 핀란드, 아르메니아, 몰도바공화국 4개 국가에서도 고소당했다. 우관정(吳官正-중공 사당 정치국 상무위원, 산둥성 서기)은 사이프러스에서 고소당했다.

2003년 3월 20일, ‘법망회회’조직은 유엔 인권 비밀감찰기구에 총 4000여 페이지의 파룬궁 박해상황 보고서를 두 세트 제출했는데 11,000여 명의 중국 경찰, 각급 관리 및 다른 구체적으로 파룬궁 박해에 참여한 책임자 명단 및 그들의 범죄가 포함돼 있었다.

2003년 1월 20일, ‘파룬궁박해추적국제조직(WOIPFG)’이 미국에 세워졌고 ‘천안문 분신자살’ 사건이 첫 번째 조사 대상이라고 선포했다.

2003년 9월 30일, ‘장쩌민 심판 세계대연맹’은 미국 워싱턴DC에서 창립을 선포했고 11월 26일 장쩌민 심판 세계대연명은 헤이그 국제법원 수석 판사에게 세계 각국 파룬궁수련생이 장쩌민을 기소한 서면자료를 건네고 장쩌민을 재판하라는 요구를 제출했다.

2003년 12월 8일, 본부를 미국에 설립한 ‘파룬궁 박해에 대한 국제특별법정준비위원회’가 창립됐는데 목적은 ‘파룬궁 박해에 대한 국제특별법정’ 성립을 추진하려는데 있다.

2003년 중국 각계 시민들은 더욱 더 진상을 알게 됐고 어떤 사람은 자각적으로 파룬궁수련생을 보호했다. 예를 들어 2003년 연말 기차를 타고 베이징 공항에 가서 딸을 마중하려는 파룬궁수련생이 차량 안에서 파룬궁 진상을 알리고 있었다. 당시 중공은 이미 전국 철도부에 베이징행 기차에서 파룬궁을 선전하는 사람이 있으면 즉시 붙잡고 승무원이 파룬궁수련생을 고발하면 5천 위안의 보너스를 준다고 했는데 그녀는 몰랐다. 한 젊은 남자 승무원은 그녀가 파룬궁수련생인 것을 발견하고 몰래 차량 사이 문 앞에서 철도 경찰의 동정을 살피고 암암리에 그녀를 보호했다. 기차가 역전에 들어선 후 이 승무원은 또 자발적으로 그녀에게 이 기차의 돌아가는 시간을 알려주고 또 이 기차를 타라고 그녀에게 건의했으며 동시에 어떻게 이 기차표를 살 수 있는지 알려줬다. 딸과 만난 후 이 파룬궁수련생은 승무원이 가르쳐준 대로 순조롭게 돌아가는 표를 샀고 또 그 승무원을 만났다. 이때야 이 승무원은 파룬궁수련생의 딸에게 자신이 이렇게 한 것은 파룬궁수련생이 위험에 빠지지 않게 하기 위해서였다고 말했다.

2003년 우한시 훙산구의 ‘610’은 주펑(九峰)향에서 세뇌반을 만들었는데 파룬궁수련생 한 명을 붙잡아 세뇌반에 보내면 정부에서 6천 위안을 지급했다. 인원을 채우기 위해 4월 10일 저녁에 훙산구 화산진 파출소와 진(鎭) ‘610’요원들은 차량 3대를 출동시켜 현지 수련생 리주란(李九蘭)을 불법체포하려 했다. 리주란은 이치에 근거해 강력히 논쟁하고 협조하지 않았다. 그의 남편(파룬궁을 수련하지 않음)은 경찰과 크게 다투면서 사람을 데려가지 못하게 했고 아이는 엄마의 다리를 끌어안고 가슴이 찢어질듯 울어대자 주민들은 놀랐다. 분개한 주민들은 계속해서 나쁜 사람을 비난했고 어떤 주민은 앞으로 나아가 놀랍게도 경찰차에서 파룬궁수련생 리주란을 빼앗아왔는데 사건은 전후 30분이 걸렸다.

2003년 3월 중순, 지린성의 한 파룬궁수련생이 집에서 사악한 경찰에게 납치돼 직접 노동교양소로 보내졌는데 신체검사 시 혈압이 높아 노동교양소에서는 수감하지 않겠다고 거절했지만 이후에 경찰이 무슨 수단을 썼는지 또 다시 이 파룬궁수련생을 노동교양소로 보내 불법 수감했다. 이 파룬궁수련생의 아들(20여 세)도 수련생이었는데 이웃 마을에 가서 박해 진상을 알리고 아버지를 구원하기 위한 서명운동을 했는데 그는 1000여개 집을 다니면서 합계 668명의 서명을 받았다. 한 사람은 “그가 파룬궁을 연마하는 사람이기에 서명한 것이지 파룬궁을 연마하는 사람이 아니면 서명하지 않았을 것이야!”라고 말했다.

2004년

2004년 중공의 사기는 한층 꺾였는데 주요 사건은 2004년 말 대기원시보에서 시리즈 사설 ‘9평공산당’을 등재한 것이었다. 곧 ‘삼퇴’ 열조가 일어나기 시작했고 중공악당은 그로부터 해체를 향해 걸어갔다.

2004년 원흉 장쩌민은 최후의 권력 ‘군사위원회 주석’을 잃었다.

2004년, 장쩌민, 뤄간, 류징, 저우융캉, 리란칭, 자칭린(賈慶林), 리창춘(李長春), 황쥐(黃菊), 보시라이, 천즈리(陳至立, 교육부장), 쑨자정(孫家正, 문화부장), 왕마오린(王茂林, 중앙610두목) 등 중공 고위관리는 동시에 혹은 각각 캐나다, 볼리비아, 그리스, 네덜란드, 호주, 뉴질랜드, 남아프리카, 탄자니아, 한국, 오스트리아, 스페인, 미국, 영국, 폴란드, 러시아, 프랑스, 아일랜드 등지에서 고소당했고 중국 반(反)사교(중공이 진정한 사교임) 협회 부이사장 왕위성(王渝生), 안후이성 당위 서기 왕타이화(王太華), 헤이룽장, 베이징, 산둥, 지린 등 4개 성의 610사무실 두목 장샤오광(張曉光), 장셴린(張憲林), 둥쭝팡(董宗方), 가오쿠이셴(高奎先) 등 박해 살인범들도 잇따라 국외에서 고소당했다.

2004년 중공 베이징시 당위서기 류치는 미국 북부 캘리포니아 지역 법원에서 유죄 판결을 받았고, 같은 해 중국 전 교육부장이자 현임 국무위원 천즈리는 탄자니아에서 고발당했으며, 천즈리는 소환되자 직접 법원에 응소했다. 이것은 파룬궁수련생이 중국 고위관리를 기소한 사례 중 처음으로 피고인이 직접 법원에 출석한 것이다. 같은 해 전 우한시 라디오영화TV국장, 우한 TV방송국 국장 자오즈전(趙致眞)은 미국에서 고소당했는데 자오즈전은 미국 코네티컷주 뉴헤이븐시 연방법원에 응소 연기를 신청했다. 이것은 파룬궁수련생의 해외 기소 안 중 또 다른 법원 출석인이었다.

2004년 중공 간쑤성 당위서기 쑤룽(蘇榮)은 잠비아에서 기소당해 구류돼 소환 심문을 기다렸다. 이것은 파룬궁 박해 사건 고소 중 처음으로 피고인이 구류된 사건으로 이후 쑤룽은 기한 안에 법원에 출석하지 않아 잠비아에서 출국금지를 받았고 잠비아 경찰은 또 지명 수배령을 내려 쑤룽을 체포하려 했다. 쑤룽은 이후 국경을 넘어 중국으로 도망쳤다.

2004년 2월 3일 캐나다 온타리오 고등법원은 토론토 주재 중국 부총영사 판신춘(潘新春)이 토론토 파룬궁수련생 조엘 치프카(Joeal Chipkar)를 비방한 사건에 대해 유죄 판결했고 손실을 배상하라고 했다. 이것은 파룬궁수련생이 해외에서 파룬궁을 박해한 중국외교관을 최초로 기소한 것이고 또한 승소한 사건이었다. 중공이 해외로 수출한 박해는 재차 큰 좌절을 당했다.

2004년 3월 5일, 유엔 ‘불법체포 공작팀’은 중국 대륙 파룬궁수련생 리링(李淩), 페이지린(裴繼林)이 파룬궁을 연마해 체포당한 사건에 대해 판결을 내렸는데 파룬궁은 마땅히 세계 인권선언의 보호를 받아야 하고 중국 정부는 마땅히 리링과 페이지린의 판결을 수정해야 하며 세계인권공약을 지켜야 한다고 지적했다. 유엔의 이 판결은 중궁 사당의 파룬궁 박해 위법성에 대한 최후의 결정이라고 말할 수 있고 이후 중공의 사악한 관리들의 법률적 책임을 추궁하는 중요한 참고가 됐다.

2004년 국내의 고소는 계속 타나났다. 예를 들어 이해 11월 241명 중국 대륙 파룬궁수련생의 가족은 전국인민대표대회, 최고검찰원, 사법부 및 후난성 고급검찰원, 사법청, 후난성 각급지방시 검찰원, 사법국에 고소편지를 제출하고 후난성 위안장(沅江) 츠산(赤山) 감옥의 교도관이 고문으로 가족을 괴롭힌다고 고소했으며 살인범을 처벌할 것을 요구했다.

2004년 말, 가오즈성(高智晟) 변호사는 ‘전인대 상무위원회 및 우방궈(吳邦國) 위원장에게 보내는 공개편지’를 썼고 그 후에 또 중공 고위층에게 두 편의 공개편지를 썼다. 그는 불법적인 파룬궁 박해를 멈출 것을 강렬하게 호소했다. 이것은 중국 변호계에서 최초로 파룬궁에 대한 성원과 지지를 정식 표명한 것이었다.

2004년 중국 시민들이 파룬궁수련생을 보호하는 사건은 계속 나타났다. 예를 들어 8월 8일 오후, 후베이성 시수이(浠水)현의 6명 경찰이 시수이 주뎬진 주핑촌의 파룬궁수련생 야오왕라이(姚望來) 집에 쳐들어와 납치하려 했다. 그의 가족은 이치에 근거해 강력히 논쟁하고 그들의 납치행위를 제지하자 몹시 화난 경찰들은 폭력을 사용해 주핑촌 촌민들을 놀라게 했다. 사람들은 논밭에서, 두렁에서, 집에서 야오왕라이의 집으로 뛰어갔고 촌장마저 경찰에게 좋은 사람을 붙잡지 말라고 권했으나 경찰들은 매우 강경해 그 자리에 있던 100여명 촌민들을 격노시켰다. 사람들은 잇달아 나서서 불법 경찰과 맞선 결과 불법 경찰들은 할 수 없이 수련생을 붙잡는 계획을 포기하고 황급히 달아났다.

2005년

2005년 ‘9평공산당’이 계몽한 ‘삼퇴’ 열조는 폭풍처럼 거세게 일어났고 ‘삼퇴’인원은 매일 급속히 증가했다. 이 같은 거동은 중공의 급소를 가격한 것이었지만 중공은 감히 대답하지 못했고 대답할 힘도 없었으며 앉아서 해체만 기다렸다.

2005년 10월 9일, 파룬따파학회에서 다음과 같은 내용을 공고했다. 각 성시 주요관리 및 중공사당의 두목이 파룬궁 박해에 참여하거나 지속함을 즉시 중단할 것을 요구했으며 그렇지 않으면 형사와 민사적 책임을 추궁할 것이라고 경고했다. 또 이전에 죄를 졌지만 뉘우치고 고치고 싶은 관리는 보증서와 시말서를 밍후이왕 혹은 각지 파룬따파학회에 보내 보존하게 했다.

2005년 10월 16일, ‘파룬궁박해추적국제조직’은 전면적으로 ‘전 세계 감시추적 시스템’을 가동하고 중국 대륙에서 적극적으로 파룬궁 박해에 참여하는 중공 사당 각급 당정(黨政) 관리를 감시하고 추적해 파룬따파학회와 협력해 공고한 후 해외에서 고소한다고 선포했다.

2005년 원흉 장쩌민 및 공모자 리란칭, 쩡칭훙, 뤄간, 저우융캉, 류징, 보시라이, 딩관건(丁關根), 쉬융웨(徐永躍-국가안전부장), 샤더런(夏德仁-다롄 시장) 등은 동시에 혹은 각각 영국, 스웨덴, 일본, 페루, 벨기에, 한국, 미국, 캐나다, 스페인 등에서 고소당했다.

같은 해 또 중공의 한 무리 공모자들이 국외에서 고소당했는데 칭화대학 교장 구빙린(顧秉林), 중국 외교학원 원장 우젠민(吳建民), 중국과학원 부원장 천주(陳竺), 서우강그룹 회장 왕칭하이(王靑海), 후베이성 상무위원이자 후베이성 대외문화교류협회회장 장창얼(張昌爾), 후베이 TV방송국장 탕위안타오(唐源濤), 허베이성 당위서기 현임 중국정보산업부부장 왕쉬둥(王旭東), 지린성 당위서기 왕윈쿤(王雲坤), 랴오닝성 링원감옥 관리분국장이자 610사무실 총두목 리위안웨이(李元偉), 허난성 당위서기 쉬광춘(徐光春), 최고인민검찰원검찰장 ‘610사무실’ 부주임 자춘왕(賈春旺), 광둥성 성장 황화화(黃華華), 지린성 당위부서기 린옌즈(林炎志), 광둥성 당위서기 장더장(張德江) 등이 포함돼 있었다.

2005년 2월 23일, 중국과학원 ‘파룬궁문제처리지도팀’ 부팀장이자 중국과학원 당조직 부서기 궈촨제(郭傳傑)가 뉴욕에서 파룬궁수련생에게 고문죄와 집단학살죄로 고소당했고 6월 2일 미국 연방 남부지방법원에서는 궈촨제에 대해 결석재판을 했으며 피고인 궈촨제가 원고에 대한 상해 및 경제적 손실을 배상할 것을 요구했다.

2005년 중국 대륙의 많은 가족과 시민들은 공개적으로 박해를 반대했다. 예들 들어 2005년 9월과 2006년 3월, 후난 주저우(株州)시 1610명 파룬궁수련생 가족은 연대서명으로 국제 인권기구에 주저우시 바이마룽(白馬壟) 노동교양소가 파룬궁수련생을 박해하는 내막에 관심을 기울일 것을 호소했다. 2006년 12월 9일, 2500명의 파룬궁 가족은 두 번째 연대서명으로 유엔에 바이마룽 여자 노동교양소가 불법 수감한 파룬궁수련생들을 잔혹하게 박해하는 것을 중단시켜 달라고 호소했다. 당시 고소 규모가 컸고 박해 정보는 보기만 해도 잔인했기 때문에 국제 사회의 깊은 관심을 받았다. 이 거동은 더욱 많은 지역에서 일반 군중이 나서서 파룬궁을 위해 억울함을 하소연하게 선도했다. 이것은 대륙 형세의 변화, 인심의 향배를 상징한 것이었다.

2006년

2006년, 중공이 파룬궁수련생의 장기를 생체 적출하는 특별히 큰 죄행이 처음 폭로됐고 국제사회를 매우 크게 놀라게 했으며 ‘이 행성에서 여태껏 없었던 죄악’이라고 불렸다.

2006년 원흉 장쩌민의 심복이자 장쩌민의 ‘상하이방(上海幇·상하이 관료출신 집단) 주요성원, 중공 상하이시 당서기, 중공 중앙정치국 위원회 천량위(陳良宇)가 보응을 받아 처벌을 받았다. 이것은 장쩌민 범죄집단 세력의 급속한 추락을 상징했다.

2006년 장쩌민 및 그의 공범자 뤄간, 리란칭, 류치, 자칭린, 보시라이, 천즈리, 예샤오원(葉小文-종교국장) 등은 동시에 혹은 각각 오스트리아, 우크라이나, 스웨덴, 캐나다, 미국 등에서 고소당했다.

같은 해 중국 우한 퉁지병원의 장기이식 연구원 원장 천중화(陳忠華), 상하이 중산병원의 장기이식센터 연구실 주임 주퉁위(朱同玉), 동방장이식센터 주임 선중양(瀋中陽)은 파룬궁수련생의 장기를 생체 적출했다는 이유로 고문죄를 심각하게 범했다고 미국에서 고소당했다.

2006년 12월 14일, 파룬궁수련생이 캔버라 중국대사관 앞에서 평화적으로 시위하는 것을 제한하게 하는 중국공산당의 증서에 호주 외무장관 알렉산더 다우너가 직권을 남용해 서명한 사건에 대한 호주 파룬궁수련생의 소송 안건이 1년 만에 종결됐다. 호주 재판부는 피고인 다우너에게 다시는 중공에게 증서를 서명하지 말 것과 원고인 파룬궁수련생에게 소송비 2만 호주달러를 지불하게 했다. 중공이 해외로 박해를 수출하려는 시도는 재차 큰 좌절을 당했다.

2006년 5월 경, 중공은 사법계통(사법부로부터 말단 사법국까지) 내에서 층층으로 문건을 내려 보내 ‘전국 400여명 변호사가 공개적으로 파룬궁을 위해 누명을 벗겨주기로 요구했다’는 일을 통보했다. 문건은 비록 파룬궁수련생을 위해 용감히 변호하는 변호사들을 협박하기 위한 것이지만 중국 법률계 인사들이 응집해 중공의 폭행을 억제하는 힘을 반영하기도 했다.

2006년 중국 시민들이 파룬궁수련생을 보호하는 이야기는 계속 나타났다. 예를 들어 이해 9월 17일 저녁, 칭다오시 청양구 훙다오 동사무소 파출소는 치안 연방대 인원들을 지휘해 훙다오 시다양촌 파룬궁수련생 자오위췬(趙宇群)을 납치하려 했다. 소식을 들은 주민들은 뛰어와 불법 요원들을 겹겹이 에워싸고 자오위췬이 지혜롭게 벗어나게 했으며 주민들은 단호하게 악인들이 자오위췬의 아내를 인질로 삼는 행위를 저지함으로써 그들의 납치 음모를 포기하게 만들었다.

2007년

2007년 1월 3일부터 5월 16일까지, 파룬궁수련생을 주체로 한 미국 션윈(神韻)예술단은 미주, 유럽, 아태 등 33개 도시에서 ‘신전문화(神傳文化)’의 주제로 한 전 세계 중국인 신년만회를 81차례 공연했고 20여만 명의 각 민족 관중들이 현장공연을 봤다. 이때부터 ‘션윈’은 전 세계를 풍미했고 ‘세계 최고의 쇼’라고 불렸다.

2007년 중공 장쩌민 집단 세력은 옛날과 달리 점점 상황이 나빠졌고 6월 2일, ‘상하이방(上海幇)’의 다른 한 중요한 구성원이자 중공중앙 정치국상무위원인 황쥐가 베이징에서 병사했는데 겨우 69세였다. 황쥐는 한 차례 ‘상무위원’도 다 하지 못한 채 보응을 받아 병사했다. 이것은 장쩌민 집단의 또 하나의 큰 흉조였다.

2007년 장쩌민, 뤄간, 리란칭과 류치는 오스트리아에서 기소됐고 자칭린은 일본에서 고소당했다.

2007년 보시라이는 호주에서 고소당해 법원에서 결석 판결했고 패소를 선고받았다.

2007년 11월 18일, 스페인 헌법 법원은 파룬궁수련생이 장쩌민, 뤄간을 고소하는 사건을 정식 접수했고 모든 박해자가 제공한 자료를 받아들였으며 2호 법정의 모든 판사들은 ‘스페인 사법부는 반드시 중공 사당이 파룬궁수련생에 실시한 집단학살 범죄를 조사하고 장쩌민, 뤄간은 반드시 스페인 법원의 그들에 대한 집단학살죄, 고문죄와 반인류죄 조사를 받아야 한다고 했다.

2007년 6월 28일, 주커밍과 다른 한 홍콩 파룬궁수련생 푸쉐잉(傅學英)은 홍콩 고등법원에 민사 고소장을 건네주고 장쩌민, 리란칭, 뤄간 등 세 사람을 고소했다. 8월 9일 홍콩 고등법원에서는 고문죄로 장쩌민, 리란칭과 뤄간을 고소한 원고 파룬궁수련생 주커밍과 푸쉐잉에게 ‘사법관할구외에서 전달하는 허가령장’을 준다는 서면 판결을 내렸고 중국 대륙에서 피고인에게 법률서류를 보내주는 것을 허락했다. 이것은 반박해 소송의 또 하나의 큰 돌파구였다.

2007년 4월 27일, 스자좡(石家莊)시 중급 법원은 파룬궁수련생 왕보(王博) 일가에 대한 제2심 재판을 개정했고 베이징에서 온 정의로운 변호사 6명은 중공의 겹겹 포위를 뚫고 무고한 파룬궁수련생을 위해 무죄변호를 했다. 변호사들은 이치가 당당하게 ‘헌법최고, 신앙자유, 인권보호’ 각도로부터 헌법과 입법, 사법절차, 법률사실 등 측면에서 왕보 일가 세 가족을 위해 무죄변호를 했다. 변호사들은 파룬궁을 박해하는 것은 법률적 근거가 전혀 없고 헌법을 위반한 것이며 모든 파룬궁수련자에 대한 재판과 양형은 모두 불법이며 파룬궁수련생을 체포, 구금, 재판에 참여하는 조직과 개인은 모두 죄를 범하고 있는 것이라고 지적했다. 당시 변호사 6명은 출정하여 파룬궁을 위해 무죄 변호를 했는데 정기가 늠름했고 중국 변호사들의 확고한 결심과 용기도 보여줬다. 뒤이어 갈수록 많은 정의로운 변호사들이 용감하게 나서서 파룬궁수련생을 위해 목소리를 냈다.

중공은 줄곧 변호사가 파룬궁수련생을 위해 변호하는 것을 금지했고 변호사 자격증을 말소하고 미행, 협박, 구금, 노동교양, 판결 등 불량배 수단으로 변호사를 위협했지만 변호사들의 양심적 각성을 막을 수 없었고 법률계의 정의와 용기를 억누를 수 없었다.

2008년

2008년, 중공은 올림픽을 거행한다는 명의로 광적으로 파룬궁을 박해했는데 대세가 이미 기울어졌기 때문에 과거의 그런 박해를 가할 수 없었을 뿐만 아니라 오히려 전 세계의 비난을 초래했다.

2008년 1월 16일, 한국에 거주하고 있는 중국 국적 파룬궁수련생은 난민자격 기소 중 승소했는데 이것은 아시아에서 최초 정식으로 파룬궁수련생에게 난민지위를 인정한 판결이었다.

2008년 6월 3일, 이탈리아 로마 형사법정에서는 중문신문 ‘신화시보(新華時報)’가 파룬궁을 비방한 범죄가 성립된다고 선포해 중공이 국외로 수출한 박해는 또 다시 크게 좌절을 당했다.

2008년 중국 대륙의 많은 가족과 시민들이 공개적으로 나서서 박해를 반대했다. 예를 들어 2008년 10월 31일 허베이성 스자좡시 신화구 법원이 여성 파룬궁수련생 왕싼잉(王三英)사건에 대해 불법 개정하고 심리했는데 변호사 두 명은 법에 따라 왕싼잉을 위해 무죄변호를 했고 공소인과 판사도 마지막에 다른 의견이 없다고 했지만 당국은 여전히 왕싼잉을 불법 수감했고 석방하지 않았다. 왕싼잉의 친척 약 40여명은 연대서명하고 스자좡 신화구 법원에게 즉시 석방을 요구했다.

또 예를 들면 후베이 셴닝(鹹寧)시 셴안(鹹安)구의 류서훙(劉社紅)은 과거에 널리 이름난 ‘문제아’였고 마약을 먹고 싸우는 등으로 여러 차례 감옥에 갔다 왔다. 하지만 2006년 말부터 류서훙은 파룬궁을 연마하기 시작했다. 겨우 4개월 만에 몇 년간 흡입했던 마약을 끊었고 신체가 건강해졌으며 얼굴이 불그스레하게 됐고 철저히 모든 나쁜 습관들을 버리고 환골탈태했으며 좋은 사람으로 됐다. 그의 과거를 아는 사람은 신기하다며 칭찬하지 않는 사람이 없었다. 그러나 이런 청년이 중공의 불법 체포와 판결을 받았다. 류서훙이 붙잡혔다는 소식을 듣고 마을 사람들은 너도나도 서명하고 류서훙이 나쁜 사람에서 좋은 사람으로 변했다고 증언했으며 경찰이 류서훙을 석방하길 바랐다.

마을 사람들의 서명한 원본 스캐닝 사진

咸宁市咸安区大桥村村委会的证明

셴닝시 셴안구 다차오(大橋)촌 촌위원회의 증명서

문장발표: 2013년 12월 22일
문장분류: 대륙소식>대륙종합소식
원문위치: http://www.minghui.org/mh/articles/2013/12/22/284334.html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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