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明慧법회| 모든 것은 사부님께서 결정하신다(1)

-사악한 소굴에서 서면 형식으로 진상을 알리다

글/ 대륙 대법제자 정페이(正非)

[밍후이왕] 사부님께서 “매 사람이 무엇을 하는가 하는, 그것은 모두 원인이 있다”[1]라고 말씀하셨다. 이제야 내가 학교에서부터 부대에 들어가 10여년 선전보도를 하고 제대해 지방으로 돌아와 10여년 편집을 한 것은 모두 이번 생에서 조사정법을 위해 준비하고 있었다는 것을 깨달았다.

특히 2000년 말부터 2003년 2월까지 나는 사악한 소굴에서 고소편지, 가정편지, 사상보고 등을 이용해 지혜롭게 사악을 상대하면서 진상을 알리고 대법을 선전했다. 자신이 조사정법하는 대법제자라는 것을 잊지 말고 일사일념이 법에 있으면 사부님 법신의 보호를 받을 수 있고 관문을 돌파하고 적진을 격파할 수 있으며 대법의 신기함, 사부님의 위대함, 무량한 자비를 보여줄 수 있다. 사부님께서 말씀하신 것처럼 “이처럼 큰 법이 있으며, 정념 중에서 대법과 당신들은 같이 있는바, 이는 거대한 보장이다.”[2]

다음에 몇 가지 방면을 말해보고 수련생들과 나누겠다. 정확하지 않는 곳은 수련생 여러분이 자비롭게 지적해 주시기 바란다.

1. 튼튼한 젊은이가 급사하고 사악한 소굴은 인명을 초개처럼 여기다

그것은 2000년 11월의 일이었다. 나는 소위 ‘불법집회’ 때문에 잡혀 모 시 제3 구치소에 수감됐다. 어느 날 오전 10시 쯤, 두 경찰이 수갑과 족쇄를 낀 튼튼한 신체를 가진 한 젊은이를 끌며 데려 왔다. 그들은 수갑만 풀어줬고 족쇄는 풀어주지 않았으며 그를 다섯 번째 줄 중간에 배치했는데 나와 그 사이에 두 사람이 있었다. 원래 튼튼한 신체를 가진 이 젊은이는 38세에 미혼이고 막 실업급여 수속을 다하고 베이징에 법을 실증하러 왔으며 법을 바로 잡지 않으면 돌아가지 않겠다고 결심했다.(당시 적지 않는 수련생이 이런 생각이 있었다.) 베이징에 오기 전에 스스로 한가득 진상자료를 복사하고 공원 부근에서 행인에게 배포하다가 경찰에게 붙잡힌 것이었다. 그는 맞아서 코가 멍들고 얼굴이 부었지만 이름이나 주소를 말하지 않아 구치소로 보내졌다고 한다.

한 수련생은 앞으로 다가가 작은 소리로 “뭘 도와줄 것이 있어요?”라고 하자 그는 수련생을 한번 보더니 “감사합니다! 사부님께서 계시고 법이 있어 아무것도 필요 없어요”라고 했다. 금방 박해초기 이런 신사신법하는 말을 할 수 있다는 것은 매우 귀한 것이므로 여러 사람은 많은 탄복하는 눈빛을 보냈다.

저녁이 되자 당번 경찰이 그 젊은이를 가장 사악한 6반에 배치했다고 들었다. 바로 내 옆방이었다. 6반 반장(반의 두목)은 장려 점수를 많이 얻고 빨리 집으로 돌아가기 위해 적지 않는 수감자를 때렸는데 그 중 수련생도 있었다. 그의 수하에는 3명 졸개가 있는데 모두 그의 조수였다. 중공의 구치소, 노동교양소에서는 이런 쓰레기 죄수를 이용하는데 얼마나 암흑한 곳인지 가히 짐작할 수 있다. 저녁이 되자 6반 반장은 문을 닫아걸고 새로운 수감자를 심문하기 시작했는데 먼저 졸개보고 이 젊은이를 엉덩이를 들고 허리를 굽히며 두 손을 뒤로 내밀고 위로 뻗어 비행기 모양(체벌 중 한 가지)으로 만들게 했다. 그리고 반장은 “이름이 뭐냐? 집이 어디냐?”라고 물었으나 젊은이는 상대하지 않았다. 3명 졸개는 한바탕 주먹으로 때리고 발로 차다가 좀 휴식하고 또 물어봤는데도 여전히 말하지 않았다. 6반 반장은 “이렇게 완고한 자는 처음인데! 이 자식 정말 좀 강한데! 그에게 피를 좀 보여줘라. 그래도 버틸 수 있을까?”라고 하자 졸개들은 침대 밑에서 곤봉을 꺼내 잠깐 사이에 젊은이의 아랫다리 하나와 늑골 두 개를 부러뜨렸다. 젊은이의 비명소리는 간과 허파가 찢어지는 것 같았으며 얼마 안 되서 쓰러져 위생실에 실려가 처치했다. 젊은이는 밤새 앓는 소리를 했고 나도 밤새 눈을 감지 못했다.

이튿날 6반을 관리하는 경찰이 출근하자 6반 반장이 문 밖에 불려나왔는데 마침 내 문 앞에 있었다. “그 파룬이 교대했는가?” “아직입니다. 그 자식이 좀 강합니다. 나중에 수하들이 아랫다리와 늑골 두 개를 부러뜨렸습니다.” 경찰은 예사롭지 않게 여기면서 “방법과 책략을 좀 주의해야 한다. 그러나 정말 온순하지 않아 실수로 때려 죽여도 방법이 있다. 여기에 매년 두 명의 사망지표가 있는데 아직 사용하지 않았다”고 하자 6반 반장은 알아듣고 머리를 끄덕였다.

그 중 하루 저녁은 젊은이가 교도실로 불러갔는데 옆방에 있던 수련생이 말하는데 교도실에서 곤봉으로 사람 몸을 내리치는 소리가 들렸고 처음에 비명소리가 있었지만 나중에는 없어졌다고 했다.

이 며칠 동안 젊은이는 괴롭혀 끊임없이 신음 소리를 냈고 저녁 식사도 침대에 그대로 놔두고 건드리지 않았다. 의사는 “벌써 나흘 동안 음식을 먹지 않았다. 계속 먹지 않으면 저녁에 음식물 주입할 것이다. 잘 생각해봐라!”라고 했다. 저녁 9시가 되자 의사는 6반의 3, 4명을 불러내 도와서 음식물을 주입하라고 했다. 의사가 없는 틈을 타서 3명 졸개와 6반 반장은 많은 소금을 부어넣었고 3명 졸개는 그 젊은이를 누르고 방장은 의사와 협력해 주입했다. 젊은이가 “숨 막혀 죽겠어! 짜서 죽겠어! 이 한 무리 악귀들아 좋은 결과가 없을 것이다!”라고 외치다가 말소리가 없어지고 마른기침만 했다. 의사는 다급히 “누구 짓이냐? 이것은 나를 해치는 건데?”라고 하자 6반 반장이 황급히 의사 귀가에 몇 마디 했다. 그러자 의사는 말하지 않았다. 한밤중이 되자 젊은이의 마른기침 소리를 들 수 없었다. 이후에 사람을 들고 가는 발걸음 소리 밖에 듣지 못했다. 생생하던 사람이 이렇게 세상을 떠났다.

정말로 듣는 사람을 놀라게 하는 것이다. 단지 2박2일 만에 사람을 박해해 죽였다! 너무 무섭다! 사당(邪黨) 통치 하에 소굴에서 사람을 아예 사람 취급하지 않았고 개미 한 마리를 밟아 죽이는 듯 했다. 나는 울려고 해도 눈물이 나오지 않았고 속이 답답했다. 구치소에서는 긴급회의를 열고 대책을 연구했다. 6반 반장은 이미 형기가 만기돼 석방했고 3명 졸개도 이감했다. 이 일을 아는 모든 사람은 자신의 이익과 안전을 위해서라도 비밀을 엄수할 것이다. 모든 것이 또 정상을 회복했고 아예 젊은이가 나타나지 않는 것 같았다.

튼튼한 신체를 가진 젊은이의 비참한 죽음을 내가 보고 들은 것은 우연이 아니고 폭로하라는 것이며 가족을 위해 고소할 근거를 기록하라는 것이다. 하지만 이 사악한 소굴에 24시간 감시를 받고 있고 펜과 종이를 갖고 있음을 허락하지 않는다! 어떻게 쓰겠는가? 펜과 종이가 있다고 해도 어떤 시간에 쓰겠는가? 같은 방에 퇴직한 교사가 있었는데 내 생각을 알아차리고 그는 “악인이 아무리 사악해도 그를 처리할 사람이 필요합니다. 만약 결심을 하고 쓰려고 하면 혹시 내가 좀 도와줄 수 있어요”라고 했다. 나는 기뻐서 “정말 감사합니다! 참으로 하늘이 무너져도 솟아날 구멍은 있네요!”라고 했다.

나는 감옥을 지키는 경찰에게 편지를 쓰겠다고 했지만 그는 줄곧 태도를 표명하지 않았다. 퇴직교사가 그와 관계가 좋았기 때문에 이후에 중간에서 몇 마디 하자 경찰은 승낙했다. 나는 편지를 쓰는 척 하며 매우 빨리 글을 썼다. 퇴직교사는 이미 대책을 다 생각해 놓았다. 나는 밤새 솜바지에 기워 숨기고 입고 기뻐서 가슴을 두드리며 “마음을 놓으세요. 이것이 죽은 사람에 대한 위로입니다. 젊은이는 안심하게 떠날 수 있겠어요!”라고 말했다.

나는 매우 빨리 구치소를 떠났다. 젊은이의 억울한 사건은 어떻게 처리됐는지 상세한 것은 잘 모르지만 구치소는 오랫동안 정돈했고 지도자, 감옥을 지키는 경찰도 많이 바꿨다는 것을 들었다. ‘인과응보’의 이치로 봐서라도 악인을 가만둘 수 없을 것이다.

2. 국내외를 진동시킨 ‘3.14’학살 사건

2001년 설 전에 나는 불법적으로 2년 노동교양을 받아 지린시 환시링 노동교양소에 수감됐다. 당국에서 5개 대대에 분포되어 있는 파룬궁수련생을 집중해 한 곳에 모아놓았고 전문적으로 파룬궁수련생 수감 대대를 만들었기 때문에 이 노동교양소 수련생은 갑자기 200여명으로 불어났다. 그리고 보통관리, 중간관리, 엄격관리 3개 중대를 설치했는데 보통관리 중대는 2층에 있고 엄격관리 중대는 3층에 있고 중간관리는 4층에 있었다. 3월 10일 3층의 한 수련생이 감옥을 지키는 당직 경찰에게 맞아 코와 입에서 피가 났고 한쪽 눈을 뜰 수 없었으며 3일 동안 감금처벌을 받았다. 엄격관리 수련생들은 상의하고 아침부터 단식하겠다고 결정했고 2층부터 4층까지 함께 행동하자고 했다.

나흘째 뚱뚱보 소장은 각 중대에서 6명 대표를 뽑아 회의를 하러 오라고 했다. 나와 30여세 수련생은 엄격관리 중대 대표이었는데 우리는 3가지를 제출했다. 1. 즉시 감금처벌을 받는 수련생을 풀어줄 것, 2. 사람을 때린 경찰이 사과하고 이후로 다시는 사람을 때리지 않겠다고 보증할 것. 3. 의자에 앉는 처벌을 폐지할 것. 그리고 어떤 대표는 매일 1시간 자유시간을 줄 것, 2시간 법공부하고 연공하는 시간을 줄 것 등을 제출했다. 수련생이 발언을 아직 다하지 못했는데 뚱뚱보 소장은 책상을 내리치며 “여기는 독재 정권의 기구다! 해산!”이라고 외쳤다.

닷새째, 즉 3월 15일 9시쯤, 전 노동교양소 남자 경찰과 남자 인원이 전기봉, 낭아봉(狼牙棒-몽둥이에 날카로운 칼날 등을 촘촘히 박음), 납주머니(이것은 가장 악독한데 내상을 입히지만 외상은 남지 않으며 국제적으로 이미 사용금지 됐지만 중국에서는 여전히 사용하고 있음) 등을 들고 3, 40명은 흉악스럽게 보통관리 2층으로 달려갔다. 손에 흉기를 들고 파룬궁수련생에게 “밥을 먹겠는가, 먹지 않겠는가? 먹지 않는 사람은 앞으로 나와라”라고 했다. 10여명 수련생이 앞으로 나오자 교도실로 끌고 가 각종 형구로 고문을 가했고 주먹으로 때리고 발로 차 몇 명 수련생은 며칠이나 스스로 옷을 입지 못했다. 그들은 또 4층에 올라갔는데 절반 이상이 배고프지 않다고 했다! 배고프지 않다고 말해도 때렸다. 또 한바탕 미친 듯이 때렸다.

3층은 소위 ‘엄격관리’ 중대였고 모든 파룬궁수련생은 2층, 4층의 때리는 소리, 비명소리를 들었기 때문에 일치해서 큰 소리로 “사람을 때리는 것은 법을 위반하는 것이다! 사람을 때리는 것은 파쇼행위다! 당신들은 법을 알면서 법을 고의로 범범하여 죄가 더욱 크다! 당신들은 국장을 등에 업고 파쇼가 하는 죄악을 저지르고 있다!”라고 했다. 또 서로 손을 잡고 힘껏 내리뛰며 소리를 내며 항의했다. 악인들이 3층까지 온 것을 짐작하고 나는 다급히 여러분과 “어제 날이 밝아올 때 꿈에서 온 하늘에 있는 아름다운 노을을 봤는데 한 마리 2미터짜리 큰 잉어가 빛을 내면서 큰 소리와 함께 서북방향으로 날아가는 것을 봤어요”라고 했다. 수련생은 “깊이 깨달을 필요가 없어요. 분명해요. 잉어가 용문에 오르는 것이죠. 뛰어 오르면 당신은 신이고 뛰어넘지 못하면 당신은 작은 잉어일 뿐이죠. 사존께서 우리에게 이 고비를 잘 넘기라고 점화해주는 것입니다”라고 하자 수련생들은 실제행동으로 대법을 보호하겠다고 결심했다.

악경(惡警-악한 경찰)들이 3층으로 올라오자 선두의 대장은 한발로 문을 차 고 “외쳐라! 어찌 외치지 않느냐?”라고 했고 지도원도 따라 올라와 “그들과 쓸데없는 말할 것 없다. 먹지 않는 사람은 한쪽으로 서라!”라고 하자 일치하게 전부 일어났다. 대장은 화가 나서 “대단한데, 엄격관리 중대답다”라고 했다. 그는 두 경찰을 지휘해 한 수련생을 교도실로 끌고 가라고 했다. 한 경찰이 누르고 다른 한 악경이 전기봉으로 때렸다. 미친 듯이 어디나 마구 때렸으며 용서를 빌었는데도 멈추지 않고 계속 때렸으며 쓰러지고 쇼크해서야 멈췄다.

한 27세 대법 수련생[수란현의 뉴쥔후이(牛俊會)]은 처음에 비명을 지르지 않았는데 계속 때려 두 늑골이 부러졌어야 작은 소리로 “안 된다, 죽을 것 같다”라고 했다. 악경은 통제력을 잃은 것처럼 여전히 눈코를 가리지 않고 때렸다. 그는 처음에 두 손으로 머리를 막았지만 결국 두 손이 다 풀리고 쓰러졌는데도 악경은 낭아봉으로 그의 왼쪽 머리를 내리쳐 구멍이 났다. 피가 흘러나오는 것이 아니라 분출했다. 한 악경은 우리 방에 들어와 휴지를 달라고 하고 두 통 잡아들고 분출하는 구멍을 막았다. 수련생은 오직 심장만 미약하게 뛰고 있었다. 응급조치해도 살려낼 수 있을지 모르지만 구급차로 실려 갔다.

엄격관리 중대 한곳만 해도 때려서 쓰러지고 쇼크한 것이 8명이었고 시 제4병원(노동교양소 지정 병원)으로 응급조치로 실려 간 것이 3명이었으며 전 대대에서 중상 65명, 경상 105명이었다. 그 중 응급조치를 했어도 1명은 결국 살려내지 못했다. 또 한 수련생은 납주머니에 맞아 폐엽이 깨져[시 수송대의 허우잔하이(侯占海)] 고열이 내리지 않았고 외지로 이감해갔는데도 고열이 내리지 않았다. 투시해보자 두 폐가 전부 깨졌고 이미 썩어 수시로 사망 위험이 있자 현지 사법국에서는 그날 밤 집으로 보냈는데 사흘째 사망했다.

노동교양소의 모든 대법제자는 밀접하게 협력했기 때문에 소식은 매우 빨리 전해나갔다. 바깥의 대법제자는 전력으로 구원하고 박해를 폭로했으며 제1시간으로 ‘3.14’학살 사건을 국내외 언론에 전했으며 어떤 사람은 인민대표대회와 정치협상협의에 상황을 반영했고 면회하고 가족을 조직해 면회하고 사람을 석방하라고도 했다. “노동교양소에 사상자가 생겼다! 맞아서 수많은 사람이 상처를 입었다!”, “병원으로 실려 간 것도 적지 않다!”, “이게 어디 경찰이냐? 국민당 군인들도 이런 일을 해내지 못한다. 너무 비참하다”라고 매일 날이 밝지도 않았는데 교외에 있는 노동교양소에 택시를 타거나 걸어와서(몇 백 미터까지 버스가 통하지 않기 때문이다.) 소식을 알아보는 사람이 있었다. 노동교양소의 높은 담장 밖에, 강철막 밖에 사람으로 가득했다. 어떤 젊은 여성은 자신의 가족이 잘못될까 봐 아이를 안고 울었다.

압력 하에 성 인민대표는 즉시 사람을 조직해 조사하러 왔다. 노동교양소는 당일 계엄령이 내려졌다. 대문을 닫고 온 노동교양소 경찰과 인원은 전부 바깥에서 숙박했고 외부 사람은 전혀 접대하지 않았다. 뚱뚱보 소장은 바빠서 엉망진창이 됐다. 그는 자신의 공과 사의 인맥을 모두 쓰고 상사에게 손을 내밀어 지금 곤궁에서 빠져나가게 해달라고 빌었다. 위에서는 즉시 방안을 내놨다. 65명 중상자를 분류하고 분산시켜 각 성내 동남부 4개 노동교양소에 안착시키고 우선 성 인민대표 검사단에 대응하기로 했다.

학살 사건이 발생한 닷새째 오전 9시에 긴급 집합 명령이 내려졌다. “대형버스에 오르고 바로 출발한다. 어떤 곳에 가는지 묻지 말라! 누가 남는가는 그때 가서 통지한다. 혼자 걸을 수 없는 사람은 들것으로 차에 올려라. 행동이 불편한 사람은 업어서 차에 올려라. 부축해 올라갈 수 있는 사람은 부축하라. 아무리 괴로워도 몇 시간 참아야 한다. 누구도 큰 소리로 말하고 외쳐서는 안 되고 살아있고 숨 쉬는 사람이라면 모두 가야 한다! 이것은 명령이다!”

사존께서 설법 중 “대법제자로서 지금까지 해온 일체는 모두 대법(大法)과 제자들에 대한 박해를 제압하는 것이다. 진상을 똑바로 알리는 것은 사악에 대한 폭로인 동시에 사악을 억제하고 박해를 줄이는 것이며, 사악을 폭로하는 동시에 민중의 두뇌 속에 있는 사악에 의한 유언비어와 가상의 독해(毒害)를 깨끗이 제거하는 것으로 사람을 구원하는 것이다. 이는 가장 큰 자비이다”라고 말씀하셨다. 그리하여 나는 노력을 다하여 모든 마난을 제거하고 사부님의 요구대로 제때에 써내고 박해를 폭로하겠다고 생각했다. 설령 밍후이왕(당시 ‘밍후이왕’에 접속할 수 있는 것이 너무 적었다)에 접속해 더욱 큰 범위 내에서 사악을 폭로할 수 없다고 하라도 마땅히 비할 바 없이 진귀한 첫 번째 자료를 남겨놔야 한다고 생각했다. 이것은 사부님께서 벌써부터 내게 배치해 주신 역사적 사명이기 때문이다.

수용소에서 글을 쓰는 과정은 기본상 튼튼한 신체를 가진 젊은이가 갑자기 죽은 사건을 쓰는 것과 비슷했지만 더욱 어려웠고 우여곡절이 더욱 많았으며 훼손되어 다시 쓴 것만 해도 두 차례다. 마지막에는 거의 온 숙소 대법수련생의 보호 하에 의자에 앉아있으면서(체벌 중 한 가지) 완성했다.

2003년 2월(설날 3일전)에 나는 노동교양소를 뚫고 나왔다. 수련생은 내게 “‘3.14’학살 사건은 누가 쓴 거죠? 꼭 몸소 겪은 사람이 썼을 것입니다. 아니면 어떻게 그렇게 구체적이고 감동적이겠습니까? 난 눈물을 흘리며 읽었어요”라고 했다.

수련생이 ‘3.14’학살 사건을 말하자 나는 격동을 금치 못했고 또 나를 비장하고 잔인한 그 시절, 수련생의 확고하고 불굴하고 금강처럼 움직이지 않고 대법을 지키는 장면을 회상하게 했다. 본 사람이 있는 것만으로도 만족한다. 헛되게 지출하지 않았고 사부님께서 나에게 주신 위대한 책임에 어긋나지 않았으며 나의 역사적 사명도 실행하고 있기 때문이라고 생각했다.

(계속)

(밍후이왕 제10회 중국대륙 대법제자 수련심득교류회)

주:

[1] 리훙쯔(李洪志) 사부님의 저작 ‘도항(導航)-북미 대호수지구법회 설법’

[2] 리훙쯔 사부님의 저작 ‘각 지역 설법10-맨해튼 설법’

[3] 리훙쯔 사부님의 저작 ‘정진요지2-축사’

문장발표: 2013년 11월 10일
문장분류: 수련마당>정법수련마당>제10회 밍후이법회
원문위치: http://www.minghui.org/mh/articles/2013/11/10/282296.html
영문위치: http://en.minghui.org/html/articles/2013/11/11/143123.html