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明慧법회| 추위가 오고 더위가 가도 게을리 하지 않고 착실히 수련하다

글/ 동북(東北) 대법제자

[밍후이왕] 나는 여성 대법제자로서 올해 57살이다. 1998년 8월 10일에 대법을 수련하기 시작했는데 지금까지 꼬박 15년이 됐다. 15년 동안 추위와 더위, 기쁨과 슬픔이 함께 섞였는데 사존의 자비로우신 가호와 수련생들의 사심 없는 도움 하에 줄곧 평온하게 대법수련의 길을 걸을 수 있었다. 이 대법제자 법회 마당을 빌어 나의 15년 수련여정과 심득체득을 자비로우신 사존께 보고하고자 하는데 수련생께서 자비로 지적해 주시기 바란다.

1. 온 몸의 질병이 사라져 몸소 대법의 탁월함을 실증하다

나는 늘 사람들에게 만약 대법을 배우지 않았더라면 내 이 몸으로 절대 오늘날까지 살 수 없다고 말한다. 어머니 말로는 나는 어머니 뱃속에 있을 때부터 병이 있었는데 나를 임신했을 때 어머니는 기침이 그치지 않았다고 했다. 그 기억이 있은 후로 나는 신체가 줄곧 좋지 않았고 나중에는 늘 온몸이 아팠다. 이유 없이 고열이 나고 현기증이 났으며, 가슴이 두근거리고 인두염, 기관지염, 꽃가루 알레르기, 자궁 대출혈, 유선 통증, 다리와 허리가 아픈 등 머리부터 발끝까지 거의 모든 곳에 병이 있었다. 다른 사람은 하루 옷을 한 번 입으면 그만이지만 나는 하루에 여러 번 바꿔 입어야 했는데 한참을 추웠다 한참을 더웠다하면서 어떻게 하든 편하지 않았다. 게다가 젊었을 때에는 허리에 부스럼이 나서 비만 오면 진물이 나왔는데 법을 학습하고 연공한 후 부스럼이 자기도 모르게 붙어버렸고 더 이상 물도 나오지 않았다. 유방에 난 뾰루지도 꿈속에서 기적적으로 부서져서 더 이상 아프지 않았다.

더욱 신기한 것은 나는 직접 두 차례나 사존께서 다른 공간에서 나를 위해 ‘수술을 해 주신 것을’ 느꼈는데 나의 직장(直腸)의 업을 제거해주셨고, 나에게 완전히 건강한 신체를 주셨다. 처음에는 비몽사몽한 가운데 한 무더기 창자(腸子)를 보았는데 한 쪽이 잘라져 나갔다. 내가 마침 ‘이건 누구의 창자지?’하고 궁금해 할 때 갑자기 바로 나의 창자라는 것을 깨닫게 됐고 이 질병 때문에 내가 시달림을 받고 있었다는 것을 알게 됐다. 두 번째는 법을 학습할 때 또 한 쟁반에 과일 깎는 칼과 한 토막 잘라져나간 창자를 보았는데 나는 사존께서 나를 위해 신체를 청리해주셨다는 것을 깊이 깨닫게 됐다. 그렇지 않으면 속인의 의학이론으로 나는 바로 직장암이었다.

지금 대법 속에서 수련한 후 나는 갈수록 더 건강해지고 있는데 15년 동안 약 한 알도 먹지 않았고 병원에 한 번도 간 적이 없었다. 내 신체의 크나큰 변화는 대법은 초상(超常)적인 과학이고 파룬궁에는 병을 제거하는 특별한 효과가 있다는 것을 실증한다.

2. 수련인은 안으로 찾아야 하는데, “진정한 제고는 버리는 것”[1]

대법은 나에게 건강한 신체를 주었을 뿐만 아니라 나의 심성도 끊임없이 승화되고 제고돼 올라왔다. 금방 법을 배웠을 때 심성은 여전히 속인의 표준에 머물러 있었고 문제에 부딪히면 안으로 찾지 못했다. 하루는 연공장에 가서 사존의 설법 영상을 보고 집으로 돌아오는데 한 젊은이가 뒤에서 자전거를 타고 왔다. 마침 내가 큰 길을 횡단하고 있었기에 그는 피하지 못한 채 자전거로 내 발을 눌러놓았고, 나는 즉시 그에게 “좀 보고 다니세요. 눈이 멀었어요?”라고 말했다. 법공부가 깊어짐에 따라 나는 더 이상 이렇게 문제를 대하지 않았다. 한 번은 친척 결혼식에 참가하고 오는 길에 ‘펑’하는 소리와 함께 소형버스에 치여 땅에 넘어졌다. 같이 있던 사람들은 모두 놀라 멍해졌지만 나는 즉시 땅에서 일어나 신체에 묻은 흙을 털어버린 다음 한마디 원망도 없이 떠났다.

가정에서든 사회에서든 모두 사존의 말씀대로 진정으로 착실하게 수련하는 대법제자가 되려고 노력했다. 20년 전, 우리집과 시동생 집은 시아버지, 시어머니와 함께 한 저택에서 살게 됐는데 나와 남편이 돈을 내어 시부모 집을 산 것으로 시 동생은 얹혀사는 셈이었다. 게다가 창고 다섯 칸을 지을 때 모두 우리집에서 돈을 냈기에 시아버지는 공개적으로 그들이 살고 있는 집과 창고 하나를 더해(약 60평좌우 되는 면적) 우리 집 소유로 했고, 그의 집 주인이름을 우리 남편 이름으로 바꾸었다. 이후에 시어머니가 세상을 뜬 후 시아버지는 새 부인을 찾아 집을 떠났다. 우리집도 이곳을 떠나갔기에 시아버지는 떠날 때 급히 집 계약서를 동서에게 주었다.

작년 시 부모네 단층집을 철거하고 이주했는데 1:1.25 비율로 아파트를 주었다. 동서는 나에게 전화를 걸어 남편 신분증을 요구했는데 왜냐하면 집 계약서가 남편 이름으로 되어있기 때문이다. 신분증이 없으면 명의 변경을 할 수 없는데 나는 두말없이 신분증을 보내줬다. 이렇게 하여 그들 가족은 순리롭게 원래 우리가 들어가야 할 철거방(拆遷房)에 살게 됐다. 사실 우리 집 경제상황도 넉넉하지 않는데 아들이 외지에서 아파트를 사서 은행 대출금만 30만 위안이 있었다. 만약 내가 대법을 배우지 않았고 늘 사부님이 말씀하신대로 “속인은 속인이 추구하는 것이 있지만, 우리는 추구하지 않고; 속인에게 있는 것을 우리는 귀하게 여기지 않으며; 우리에게 있는 것은 속인이 가지려 해도 가질 수 없다”[2]는 법리로 안을 향해 찾지 않았다면 나와 남편에게 속한 집을 나는 절대 무상으로 다른 사람에게 주지 않았을 것이고 평온하게 개인이익을 포기하면서 마음이 움직이지 않았을 것이다.

이번 해 상반기, 시아버지가 나중에 얻은 부인은 시아버지를 손위 시누이 집에 보내면서 시아버지의 나이가 많아 그를 돌볼 수 없기에 자식들이 데려가라고 했다. 시아버지는 퇴직한 노 간부로서 집을 떠날 때 70여세였지만 이후에 얻은 후처는 고작 50여세밖에 안 됐다. 아들딸들은 그가 고생을 할까봐 그가 이렇게 하는데 모두 동의하지 않았지만 그는 단호하게 아파트를 새로 샀고 모든 집안 재산과 몇 십만 위안의 저축을 갖고 나갔다. 그 후 몇 년간 그는 아들딸만 보면 돈을 요구했는데 양로비, 의료비, 난방비를 요구했고 설을 쇠거나 생일 때마다 축의금과 각종 비용들이 끊임없었지만 가족들이 보러 갈 때면 늘 자기는 돈이 없다고 말했다. 자식들은 정말 가슴이 아프고 화나기도 하며 또한 안타깝기도 했다. 지금 십년이 지나갔는데 시아버지는 80세가 됐고 신체도 나빠져 층계를 내려가기조차 아주 어려웠다. 모은 돈마저 다 써버려서 정말 바람 앞 등불처럼 여생이 얼마 남지 않은 노인이 되어버렸다.

집안 형제자매들은 잇달아 서로 모실 수 없는 이유를 설명했다. 남편이 걱정 때문에 엎치락뒤치락 하면서 잠을 자지 못하자 나는 “시아버지가 돌아오고 싶다면 돌아오게 하세요. 다른 사람들이 모시지 않으면 제가 모실게요. 집을 떠난 지 10년이 됐으니 돌아올 때도 됐네요”라고 말했다. 시아버지는 듣고 나서 눈물을 흘렸다. 속인으로 놓고 말하면 이렇게 노인을 받아들이기가 쉽지 않았기에 그는 아주 놀랐다. 나는 속으로 이것은 우리 연공인으로 놓고 말하면 무슨 대단한 일도 아닌 것으로 다만 사존의 요구대로 했을 뿐이고, “높은 표준, 더욱 높은 표준으로 자신에게 요구해야 한다”[2]는 것대로 했을 뿐이다. 나는 생명의 깊은 곳에서부터 진정한 제고는 얻는 것이 아니라 포기라는 것을 깨닫게 됐다.

3. 해이해지지 않고 집안사람에게 홍법하고 주위 인연 있는 사람을 구도함을 견지하다

내가 금방 법을 학습하고 연공한지 1년도 되지 않았을 때 중공사당(中共邪黨)의 박해가 시작됐다. 부모와 가족들은 내가 박해를 받을까봐 걱정돼 처음에는 모두 반대했다. 특히 아버지는 노 간부이고 사당(邪黨) 당원으로서 무신론에 미혹됐기에 평생 조상에게 종이를 태운 적이 없었다. 내가 연공하는 것을 보고 그는 한숨을 쉬면서 “멀쩡한 사람이 어찌 이런 것에 미혹되지?”라고 말했다. 작은 남동생은 내가 고생을 겁내지 않고 원망도 없으며 개인득실을 따지지 않는 것을 보고 “연공하여 멍청하게 됐다”고 말했다. 사존께서는 “들어도 듣지 못한 듯이 하니 그 마음 혼란하지 않도다”[3]고 말씀하셨는데 다른 사람이 뭐라고 하든 나는 모두 마음이 움직이지 않았다. 10여 년 동안 끊임없이 발정념하여 가족의 공간마당을 청리했고, 배후에 있는 공산사령, 사악한 마귀와 난귀의 통제를 해체했으며, 끊임없이 홍법하고 진상을 똑똑히 알렸다. 자신의 모습으로 대법의 초범함과 아름다움을 실증했는데 나와 가족 수련생의 견지와 노력 하에 지금 집안사람들은 거의 모두 삼퇴를 했고 대법이 좋다는 것을 승인했으며, 몇 사람은 이미 연공하기 시작했고 어떤 사람은 막 책을 보기 시작했다.

특히 어머니는 혜택을 많이 봤는데 대법 수련한지 7년이 된 여든이 거의 됐을 때 생리가 왔고 피부는 뽀얗기도 하면서 붉은 빛이 돌았다. 그는 지식수준이 높기에 ‘밍후이간행물(明慧期刊)’에서 대법제자가 박해받은 문장을 보면 나보고 많은 사람들이 죽었기에 안전에 주의하라고 일깨워주었고, 내가 대법 일을 하는 것을 지지해 주었으며 가끔은 주위 이웃 노인들에게 홍법하기도 했다. 7년 동안 어머니는 병업관을 여러 번 넘었고 마지막 팔순이 된 해에 세상을 떴다. 어머니에게 나는 유감도 있었고 기쁨도 있었다. 유감스러운 것은 어머니는 늘 나와 함께 사존께서 귀국하시는 것을 보고 싶어 했고 사존을 기다려서 사존을 한 번이라도 뵙고 싶다고 했지만 끝내 기다리지 못했다. 안심되는 것은 어머니는 만년에 결국 법을 얻었는데 80여세가 되는 사람이 아주 젊고 예뻤으며 머리도 모두 새까매졌고 세상을 뜨기 전에 고통도 받지 않았다.

가족에게 홍법하는 것을 통해 나는 자신의 가족을 구도하려면 반드시 대법제자가 주도적인 역할을 하겠다는 정념이 있어야 하고, 속인의 표현에 이끌려서는 안 된다는 것을 확실히 깨닫게 됐다. 게다가 정법수련 중에서 수련해낸 고상한 품성으로 정행하고, 장기간 해이해지지 않고 끊임없이 체현해 낸 바른 기풍과 행동들은 모두 정념정행으로 가족들을 감화시킬 수 있다. 오랫동안 견지하면 반드시 수확이 있을 것이고 동시에 대법은 원용하기에 각종 각도, 각종 방식으로 기회를 놓치지 말고 가족들에게 대법의 아름다움을 보여줄 수 있는데 모르는 사이에 감화를 시켜야지 강제로 하면 안 된다.

4. 적극적으로 정체에 협조하면 각종 환경에서 모두 법을 실증할 수 있다

‘7.20’ 이후 먹구름이 머리를 짓눌러서 한 동안 어떻게 해야 할지 몰랐지만 밍후이 수련생들 문장은 나에게 자신감과 방향을 주었다. 처음에 우리 현지 수련생들은 스스로 현수막을 만들어 밤이나 새벽시간을 이용해 주요 거리, 시정부에 걸어 놓았고, 스티커를 도시구역과 시골에 붙였으며, 진상자료를 집집마다 나누어 주었다. 그때 공포적인 분위기가 아주 숨 막혔기에 남편은 거듭 나에게 “위에서 파룬궁 자료를 나누어 주는 사람을 붙잡으면 현장에서 총살할 수도 있다”는 지시가 있다고 경고하면서 “집에서 남몰래 수련하라”고 거듭 설득했다. 하지만 그때는 진상자료 얻기가 너무 힘들었고 수련생들은 모두 생명의 위험을 무릅쓰고 하고 있는데 나는 어찌 숨어있기만 할 수 있겠는가? 수련을 계속 하겠단 말인가? 나는 자신의 정념을 강화했고 두려움의 요소는 갈수록 적어졌다. 한 번은 한꺼번에 현수막이 80여 개 왔는데 나는 하루저녁에 나가 모두 걸어놓았다. 이후에 끊임없이 법학습을 하고 제고하는 것을 통해 수련생들은 천천히 협력하는 것을 배웠고, 점차 정체를 형성했으며 여러 항목에서 모두 성장하고 성숙됐다. 모든 사람들은 부동한 환경에서, 부동한 방식으로 법을 실증하고 있었다.

2003년 좌우, 나와 한 여 수련생은 함께 한 상가를 세 맡아 장사를 시작했는데 그때 우리 지역에는 아직 진상화폐를 인쇄하는 사람이 아주 적었다. 우리는 이 가게를 진상을 알리는 하나의 창구로 여기면서 매일 물건을 팔면서 남은 시간에 돈에 도장을 찍었고, 진상표어를 인쇄했다. 매일 평균 1천 위안 가까이 되는 진상화폐가 우리 가게를 통해 세인에게로 갔는데 세인들은 모두 진상화폐를 아주 좋아했고, 매일 장사에서 입출금이 모두 아주 순리로웠다. 진상을 모르는 개별적인 속인들이 돈을 쓰지 못할까 봐 나를 찾아와 바꿔달라고 하면 나는 “나가서 돈을 쓰세요. 만약 당신이 쓰지 못한 돈이 있다면 언제든지 나에게로 갖고 오세요!”라고 말한다. 상대방도 듣고는 안심하고 진상화폐를 다시 갖고 돌아간다. 또 어떤 속인들은 진상 화폐를 보고는 자발적으로 찾아와서 “어디에 가면 ‘9평공산당’을 찾을 수 있나요? 우리는 어디에 가서 찾아봐야 하나요?”라고 묻기도 한다. 여기에 대해 우리는 제때에 협조인과 상황을 피드백 했고, 저녁에 수련생들이 나가 ‘9평공산당’을 배포함으로서 중생들이 진상을 보도록 했다. 몇 년 후 가게를 그만뒀을 때 나는 여전히 매일 진상화폐를 썼는데 늘 마트, 쌀가게, 과일 가게에 가서 진상화폐를 바꾸었다. 계산대에서 나는 늘 한 묶음 진상화폐를 갖고는 출납원에게 돈을 지불했고, 동시에 그들에게 잔돈으로 환전하지 않겠냐고 묻기도 했다. 간혹 출납원이 자발적으로 나에게 “당신의 이 한 묶음 돈을 저하고 바꿀 수 있나요?”라고 묻기도 한다. 정법이 오늘날까지 왔을 때 진상지폐를 쓰는 것은 이미 우리 지역 수련생 가운데서 모든 사람이 다 쓰고 매일 모두 쓰는 상황이 되어 버렸다.

2년 전, 우리 지역에서는 위성안테나 설치 항목을 시작했는데 많은 속인 가족들이 이해하지 못했기에 널리 보급하는데 어려움이 아주 많았다. 얼마 지났지만 우리 지역에 위성안테나를 설치 한 사람이 한 명도 없자 나는 나부터 앞장서 협조인 업무를 해야겠다는 생각이 들어 우리집부터 먼저 설치하려고 준비했다. 당시 남편과 의논하지 않았기에 심리적 압력이 아주 컸는데 처음에 설치했을 때 위치가 비교적 낮았다. 우리집은 단층집인데다 파출소와 불과 3백 미터 거리밖에 되지 않아 늘 경찰차가 길옆에 세워져 있었기에 정말 가슴이 두근거렸다. 이후에 이웃과 의논한 후 그의 집 2층에 설치했는데 속인의 이치로 볼 때 위치가 조금 높아지면 더욱 안전하다고 여기겠지만 사실 이 몇 년 간 우리 집 주위에 부동산을 개발한 관계로 빌딩이 빼곡하게 들어서서 절대적인 안전요소는 없었다. 제자에게 법을 실증하려는 마음이 있었기에 사존께서 제자를 보호해주신 것이고, 일체 안전하지 못한 요소를 제거해 없애주신 것이다. 이번 해에 와서 파출소까지 모두 이사해 가버렸는데 큰 위성안테나는 지금 우리집에 설치된 채 줄곧 좋은 작용을 발휘하고 있다.

재작년 설날 이후, 협조인은 사존의 요구대로 사방에 꽃을 피우자고 했고 우리 집 역시 한 떨기 꽃을 피우게 됐다. 금방 컴퓨터, 프린터를 받았을 때 어디에 선을 꼽는지도 몰랐고 어떻게 사용하는지도 모두 몰랐지만 기술 수련생의 사심 없는 도움 하에 나는 열심히 배웠고 심혈을 기울여 적었다. 꿈에서도 이런 기계들이 나를 데리고 앞으로 나가는 것을 보았는데 조금씩 노력한 결과, 지금은 동시에 프린터 몇 대를 사용할 수 있게 됐다. 나와 같은 육순에 가까운 사람이 젊은 사람처럼 정력과 지혜로 가득차고, 수많은 아름다운 진상자료를 제작해 낼 수 있도록 가지해주신 사존께 정말 감사를 드린다. 비록 나의 이 한 떨기 꽃은 늦게 피어났지만 그가 일으킨 작용을 절대 작지 않다. 특히 명절이나 여러 기념일 때가 되면 자료가 특별히 많아 나와 수련생은 밤을 꼬박 새우며 바삐 보냈는데 바빠서 밥 먹을 시간도 없었고, 지쳐서 침대머리를 붙들고 섰으며, 눕기도 전에 이미 잠들어버렸다. 효과적으로 진상자료가 제때에 공급되도록 담보했고 수련생이 진상을 알리는 환경을 원용해 주었다. 정법은 한 해, 또 한 해 지나갔고, 나 또한 단련 속에서 더욱 성숙해졌으며 이지적으로 됐다. 사존, 시름 놓으세요. 나는 이후에 꼭 더 심혈을 기울여 물을 주고 이 한 떨기 꽃을 잘 키워 그로 하여금 더욱 아름다운 꽃을 피우도록 할 것입니다.

5. 신사신법(信師信法)하여 여러 차례 고난에서 모두 안전하게 되다

법을 실증하는 방면에서 마음을 놀라게 하는 관과 난을 겪었지만 신사신법을 하고, 정념을 확고히 한 결과 사존의 보호 하에 매번 모두 위험이 없었고 무사하게 되어 불법수련의 특수함과 신기함을 체현했다.

2010년, 우리 지역에 대면하여 션윈 CD를 나누어 주는 사람이 없었기에 나는 대면하여 션윈 CD를 나누어줄 수 있도록 사존께 가지를 빌었다. 길에서 장사하는 사람, 물고기 파는 사람, 컴퓨터 수리하는 사람들을 만났는데 누구를 만나든 나는 모두 나누어주었다. 마침 ‘5.1(노동절)’이 되면 운동회, 매장할인 활동들이 있는데 사람이 많을 때는 대량으로 나누어 주었다. 한번은 수련생과 함께 자전거를 타고 가서 션윈을 나누어 주었는데 그야말로 위험한 상황이 계속 발생했다. 나는 자가용을 탄 사복경찰에게 션윈을 주었는데 그는 “당신 이건 뭔가요? 한번 봅시다”라고 하자 나는 “이것은 션윈으로서 중국 전통문화입니다. 우리 백성들은 보고 싶어서 볼 수 없는데 ‘대장금’같은 이러한 연기자들만이 볼 수 있어요”라고 했다. 그는 듣고 난 후 나에게 크게 소리 질렀고 나는 “뭐하는 짓이에요? 보기 싫으면 그만두세요. 당신이 보지 않아도 볼 사람이 많은데 찾고 싶어도 찾기 힘들어요”라고 했다. 그는 끊임없이 나에게 “이것을 누가 만들었지? 어디에서 온 거야?”라고 캐물었지만 나는 아무런 대꾸도 하지 않았고 그가 방비하지 않은 틈을 타서 CD를 빼앗아 온 다음 “싫으면 저에게 돌려주세요”라고 했다. 마침 소상인이 나에게 걸어와 나는 손쉽게 그에게 건네주었다. 이때 나는 사복경찰이 전화를 걸면서 “빨리 와. 여기 파룬궁 두 명이 CD를 나누어 주고 있어”라고 말하는 것을 들었기에 그가 말하는 틈을 타서 즉시 수련생을 불렀다. 번화가이기 때문에 사람이 아주 많아 우리는 즉시 겉옷을 벗고는 사람들 사이에 섞였고, 지혜롭게 빠져나갔다.

얼마 후 우리가 후문으로 나가려고 할 때 그가 후문에서 막고 있는 것을 보고는 사존께 그가 우리를 보지 못하고 알아채지 못하게 해달라고 가지를 빌었다. 그런 다음 우리는 전혀 개의치 않으면서 그의 옆을 지나갔고 택시를 타고 집에 와서 옷을 갈아입은 다음에 다시 자전거를 갖고 왔다.

또 어느 해 겨울은 아주 추웠는데 나는 다리가 너무 아팠다. 한번은 농촌에 가서 진상자료를 나눠 주려고 했는데 차는 여 수련생을 다른 마을로 보내버렸다. 온 마을은 큰 눈에 쌓였고 깊은 밤에 길까지 멀었으며 온 마을의 개들이 끊임없이 짖어 그야말로 가슴이 뛰었다. 나는 이 젊은 여 수련생의 안전이 걱정되어 운전사에게 나도 거기로 태워달라고 했다. 차에서 내리자 나는 다리가 아파 걸을 수 없었지만 ‘이러면 안 된다. 아직도 이렇게 많은 자료를 나누어주지 못했는데’라고 생각했다. 나는 ‘걷지 않고 뛸 것이다’라는 생각이 들었고, 이러한 생각이 나오자 나는 정말로 뛰기 시작했다. 7,8리 되는 마을에 모두 나누어주었는데 수련생은 신기한 듯이 내 다리가 어떻게 이제는 걸을 수 있게 되었냐고 물었다. “그래요. 나는 글쎄 걸을 수 있게 됐고 아프지 않게 됐어요.” 나에게 사람을 구하려는 이 일념이 있었기에 사존께서 나를 도와주신 것이었다. “생각이 바르면 사악은 무너지리라.”[4] 우리가 정념정행한다면 사존의 보호가 있기에 무엇이든 다 해낼 수 있다.

자료를 나눠 주는 과정에서 가끔은 자기 마음을 파악하지 못하기도 한다. 어느 해 추운 섣달에 자료를 나누어 주었는데 깊은 밤 아주 고요했고 눈이 아주 많이 쌓였으며 낯선 마을은 칠흑 같았다. 나와 수련생은 설을 쇠기 전에 자료를 모두 나눠줘야 한다고 벼르고 있었기에 일하는 마음이 나왔다. 그 사이 사존께서는 여러 차례 일깨워주셨고 우리도 여러 번 길을 잃었지만 그래도 깨닫지 못했다. 결국 사악한 경찰이 총을 들고 납치했고 노동교양소(勞教所)에 열흘 갇힌 후 정념으로 뛰쳐나왔다.

추후, 비록 나의 수련에 큰 영향은 없었지만 나와 남편 두 가족에게는 큰 영향을 주었다. 동생들은 원래 모두 삼퇴를 했지만 이번에 610에게 위협과 이용을 당했고 두려운 마음 때문에 나의 권고도 듣지 않은 채 이른바 나의 ‘담보인’이 된다는 것에 서명을 했다. 이것만 생각하면 가슴이 너무 아팠다.

6. 일마다 대조하고 수련생들의 사심 없는 독촉은 나로 하여금 더욱 정진하게 하다

몇 해 동안 수련에서 나는 늘 자신은 세상에서 제일 행복한 사람이라고 감탄한다. 그것은 대법이 널리 전해지는 만고의 기연을 만나게 됐고, 중생을 위해 일체를 버리신 자비롭고 위대하신 사존을 만났으며, 나와 깊은 연원(淵源)이 있는, 나에게 엄청난 도움을 준 수련생들을 만났기 때문이다. 내가 법을 얻기 2년 전, 수련생들은 끊임없이 나에게 홍법을 했고 나에게 공을 배우러 오라고 전화를 걸어왔다. 무신론과 사당(邪黨)문화의 저애 때문에 나는 거듭 거절했고 어물쩍 넘기면서 어떻게든 각종 구실과 이유를 대어 회피했다. 하지만 수련생들은 포기한 적이 없었다. 이후에 나 자신조차 구실을 너무 찾아 민망해졌는데 속으로 “이 사람들은 왜 이렇게 좋지? 내가 구실을 대어 그들을 속이는데도 그들은 짜증내지 않지?”라고 생각했다.

꼬박 2년, 나는 끝내 연공장에 들어서게 됐는데 정말로 수련생들의 홍대한 자비가 속세에 빠져 깊이 잠들고 있던 나를 일깨워준 것이다. 지금 생각해 보면 온 마음은 감동으로 가득 찼다. 이 역시 나로 하여금 자신의 차이를 보아내게 했는데 사존께서는 “법을 배우고 법을 얻어 배움을 견주고 수련을 견주나니 일마다 대조하여 해 내어야 수련이로다”[5]고 말씀하셨다. 수련생과 비교하면 나는 자신에게 이러한 무사무아한 자비가 없는데 대해 정말 부끄럽게 느낀다.

나는 일부 수련생들이 정진하지 않거나, 일을 함에 법에 있지 않거나, 혹은 어떤 수련생들이 병업관을 넘을 때 정념이 없지만 각종 이유를 찾아 병 치료를 구하는 마음을 덮어 감추는 것을 보고는 늘 한편으로 조급하면서 한편으로는 ‘무쇠가 강철로 되지 못함’을 안타까워했다. 속으로 원망을 했지 완전히 ‘상대를 위한’ 마음으로 원용하지 못했다. 수련생들의 무사(無私)는 나에게 생생한 한 차례 수업을 해주었는데 이것은 나로 하여금 더욱 정진하고 착실히 수련하며 정체를 원용하여 진정으로 ‘무사무아’할 수 있도록 독촉해 주었다. 이 밖에 우리 지역 수련생들은 사존의 요구에 따라 세 가지 일을 잘함으로서 신의 길에서 더욱 정진할 것이다.

비바람이 몰아친 15년을 되돌아보니 갖은 고초들이 오랫동안 마음속에서 맴돌았는데 나는 자신의 책임이 중대하다는 것을 잘 알고 있다. “진정한 부처인 그는 우주의 보위자(保衛者)이다. 그는 우주 중의 일체 바른 요소를 책임질 것이다.”[6] 우리는 조사정법의 위대한 사명과 무량한 중생의 구도를 짊어지고 있기에 미래의 길을 반드시 제대로, 바르게 잘 걸어야 한다.

다시 한 번 자비롭고 위대하신 사존께 감사를 드린다!

주:

[1] 리훙쯔(李洪志) 사부님 저작 ‘각 지역 설법2-2002년 미국필라델피아법회 설법’

[2] 리훙쯔 사부님 저작 ‘전법륜’

[3] 리훙쯔 사부님 시사 ‘홍음-도 중에서’

[4] 리훙쯔 사부님 시사 ‘홍음2-두려울 것 뭐냐’

[5] 리훙쯔 사부님 시사 ‘홍음 – 착실한 수련’

[6] 리훙쯔 사부님 저작 ‘도항-미국서부법회 설법’

(밍후이왕 제10기 대륙대법제자 심득교류회)

문장발표: 2013년 11월 9일
문장분류: 수련마당>정법수련마당>제10기 대륙법회
원문위치: http://www.minghui.org/mh/articles/2013/11/9/281998.html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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