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明慧법회| 법공부팀을 소중히 여겨 서로 지지하다

글/ 대륙 대법제자

[밍후이왕]

존경하는 사부님, 안녕하십니까!

수련생 여러분, 안녕하십니까!

우리 법공부팀은 1997년에 만들어졌는데, 당시는 바로 우리 집이었다. 1999년 ‘7﹒20’ 중공(중국공산당) 사당이 대법을 박해한 뒤, 법공부팀은 부득이 잠시 중지하는 수밖에 없었다. 2004년에 이르러 수련생이 우리 집으로 와서 법공부팀을 회복하라고 건의해서야 비로소 그때부터 다시 시작해, 우리 집의 이 법공부팀이 정식으로 회복되었고, 9년 동안 비바람 속에서 오늘까지 걸어왔다.

우리 집 문은 항상 열려 있다

1997년, 우리 집의 법공부팀에는 20여 명의 수련생이 있었다. 우리는 단체로 법공부를 하고 사부님의 설법 녹화, 공법을 전수하신 비디오 테이프를 보았다. 단체 법공부를 한 뒤에는 모두 각자가 심성관을 넘기는 중의 제고를 교류했는데, 사람마다 모두 아주 이로움을 얻었으며 제고가 매우 빠른 감을 느꼈다. 단체 법공부를 하고 녹화를 본 이외에, 우리 법공부팀의 수련생은 또 단체 연공장에 가서 연공을 했다. 나의 아내(남편), 큰 아들, 큰 며느리도 모두 연이어 대법수련에 들어섰고, 우리 집 법공부팀을 매우 소중히 여기게 되었다.

하지만 1999년 7월, 중공(중국공산당) 사당이 파룬궁수련생에 대해 박해를 가함으로써 우리는 평화로운 수련 환경을 잃었고, 우리 집 법공부팀도 중지되었다.

2004년에 나의 큰 아들, 며느리가 납치당했다. 우리 현지의 많은 수련생은 모두 참여해 들어와 그들을 구출하는 것을 도왔다. 우리도 수련생들과 협력하면서 걸어 나와 아들, 며느리를 구출한다는 이유로, 정의를 수호하는 변호사를 선임해 공안, 검찰, 법원을 향하여, 또 감옥, 구치소, 노개국 등 부서를 포함해서 그들에게 진상을 알려 석방을 요구하면서 세상 사람의 양심과 정의를 일깨워주었다. 비록 아들은 맨 마지막에 불법적으로 무거운 판결을 당했으나, 나는 이 결과에 집착하지 않았다. 이 과정 중에 많은 수련생들과 나는 모두 진상을 우리가 예전에 알리지 못했던 곳까지 알렸다. 수련생들도 정체로 협력하는 환경을 형성해, 그 후 우리 집에서 다시 법공부팀을 회복하고 평온하게 오늘까지 걸어 나올 수 있는 기초를 다졌다.

2004년부터, 우리 법공부팀은 수련생들의 제의 하에 새롭게 회복되었다. 오늘까지 약 10년 동안 걸어오는 과정 중에, 비록 일부 교란도 있었으나 우리는 지금껏 다시 중지한 적이 없다

어느 한 해 우리 법공부팀으로 온 한 수련생이 납치당했던 일이 기억난다. 예전에 우리 팀의 삼퇴명단은 모두 그녀에게로 보냈다. 그날 내가 그녀의 집으로 가서 그녀를 찾을 때, 밖에서 마침 경찰이 그녀 집에서 불법적으로 가택수색을 하는 것을 보았는데 그 후 그 수련생은 납치를 당했다. 다른 수련생이 나에게 말을 전했는데, 말로는 내가 그녀의 집으로 갔을 때 사진을 찍혔다며 나에게 조심하라고 했다. 나는 마음속으로 좀 동요되었다. 그때 우리 법공부팀은 매주 주말이면 한 차례씩 법공부를 했었고 온 수련생은 모두 고정된 것이 아니었다. 우리 법공부팀을 알고 있는 수련생도 매우 많았는바, 성, 현의 수련생을 포함해 모두 오고 싶으면 왔다. 만약 일이 있거나 하면 오지 않는 상황도 있었다. 그러나 우리 집을 말하자면, 매주 법공부를 하는 고정시간은 보장해야 했다. 때문에 수련생이 나에게 좀 조심하라는 말을 들었을 때, 나는 여전히 두려운 마음이 있었다.

법공부를 통해 나는 법공부팀은 사부님께서 남기신 수련 형식으로, 이것은 결코 잘못된 것이 아님을 깨달았다. 우리 개인수련 중의 부족함과 빈틈으로 말하면, 모두 사악이 박해하는 구실로 될 수 없으며, 또 더욱 우리가 인위적으로 잠시 법공부팀을 중지하는 구실로 될 수 없었다. 때문에 이 일을 나는 앞당겨 어느 수련생과도 말하지 않고, 그 주일 법공부를 하는 날을 기다렸다. 수련생들은 여전히 제때에 법공부를 하러 왔다. 법공부를 한 뒤에 나는 그제야 이 일을 말했다. 대부분 수련생들은 모두 견지해야 한다고 인정했다. 당연히 또 ‘바람소리를 피하라’고 다르게 인정하는 사람도 있었다. 맨 마지막에 나는 “우리 집 문은 항상 열려 있습니다!”라고 말했다. 나를 감동케 한 것은, 많은 수련생이 바로 “당신 집의 문이 열리기만 하면 우리는 오겠습니다!”라고 말한 것이었다.

바로 이러했기에 우리 집 법공부팀은 비로소, 한 길에서 비바람을 경험하고 사악의 공포적인 압력이 얼마나 크든지 막론하고, 매주 법공부를 하는 그날을 여태껏 지체한 적이 없다.

모두 진상을 들으러 온 인연이 있는 사람이다

이른바 사당의 ‘회의기간’에 우리 집 건물 밑에는 파출소의 사복 경찰이 지키고 있었다. 이 여러 해 동안 여러 차례나 되었다. 그 중에 가장 오래 지킨 시간은 보름 정도였는데, 매일 아침 8시에 와서 지키고 있다가 저녁 10시가 되어서야 갔다. 집으로 찾아와 미행한 이들 사복 경찰에 대해, 나와 아내(남편)는 그들을 악독한 경찰이나 나쁜 사람으로 간주하지 않았다. 우리는 그들도 모두 와서 진상을 듣고 구도를 받을 인연이 있는 사람으로 여겼다.

나의 아내(남편)는 자발적으로 내려가서 그들과 인사를 하고는, 직접적이지만 또 아주 온화하게 “당신들은 우리 집을 지키러 온 사람들이죠?”고 물었다. 늘 이 선의적인 물음에 상대방은 매우 쑥스러워서 우물우물하며 맞다고 대답했다. 이어서 아내(남편)는 그들에게 “누가 당신들을 여기에 오게 했어요? 당신들은 무엇 때문에 당신들이 여기에 오게 되었는지 아시는지요? 우리는 모두 파룬궁을 수련하는 사람입니다.”라고 말했다. 이렇게 이 사람들에게 진상을 알렸다. 맨 마지막에 진상을 똑똑히 이해한 사람은, 우리에게 감사를 했을 뿐만 아니라, 어떤 이는 심지어 지키지 않거나, 혹은 와서 잠깐 얼굴을 내밀고 다시는 사당이 대법제자를 박해하는 일에 최선을 다하지 않았다.

아주 묘한 것은, 매번 와서 우리 집 문 앞을 지키는 사람이 다 다르다는 것이다. 이것은 사부님께서 이 방식으로 진상을 들으러 오게 배치하신 것임을 우리는 깨달았다. 사실 그들마저도 무엇 때문에 불려와 우리 집 앞을 지키게 되었는지를 몰랐다.

어느 한 번, 나는 건물 아래에 몇 사람이 미행하고 있는 것을 보았다. 나는 과일을 가지고 내려가서 이 사람들에게 주었다. 그들이 먹을 때 나는 물었다. “당신들은 파룬궁에 대해 얼마나 알고 있나요? 우리가 바로 파룬궁을 연마하는 사람입니다. 파룬궁은 너무 좋아요. 너무 좋아 공산당을 두렵게 했어요. 그래서 ‘천안문(天安門) 분신 가짜사건’을 꾸며내 사람을 속이게 되었어요.” 이어서 나는 또 그들에게 삼퇴(三退)를 알렸는데, 어떤 이는 또 탈당까지 했다.

말하고 보면 또 재미있었다. 미행하던 이들 사람은 번갈아 당직을 섰는데, 진상을 들은 적이 있고 삼퇴를 한 사람은 보이지 않았다. 그리고 이후에 다시 만나면, 어떤 곳이든지 막론하고 모두 자발적으로 나와 아내(남편)에게 인사를 했는데 마치 오랜 친구인 듯 했다. 진상을 듣지 못한 사람은 줄곧 문 앞에서 지키면서, 우리가 외출하거나 다른 일을 하느라 아래층으로 내려가지 않으면 그들은 교대를 하지 않았고 꼭 우리가 내려가서 진상을 알려서야 떠나갔다.

법공부를 하러 온 수련생은 조금도 적지 않다

이들 미행하는 사람은 우리 이 법공부팀에 대해 거의 무슨 영향이 없었다. 우리 집 옆에서 몇 십 미터이면 바로 파출소였다. 그 후 구역 경찰과 국가보안대대를 포함해서 모두 우리 집이 법공부 장소임을 알았다.

이곳에는 드러나는 요소가 없다. 나도 극력으로 안전에 주의했다. 그러나 나는 줄곧 안전을 위하는 구실로 수련생을 집으로 들어오지 못하게 하지는 않았다. 많은 수련생도 예전에, 우리 이 법공부팀을 몇 개 팀으로 나누자고 건의해 말한 적이 있었다. 나는 사부님께서 배치해 주시라고 빌었다. 나와 나의 아내(남편)는 모두 이 사람의 마음을 내려놓았다. 우리 집 법공부팀으로 온 수련생도, 이런 교란을 아주 적게 받았다. 건물 아래에서 미행하고 잠복감시를 하는 사람이 있다 해도 여전히 위층으로 와서 법공부를 했는데, 이 여러 해 동안 중단한 적이 없다. 지금까지 나의 마음속에는 이미 사람이 많고 적음에 대한 개념이 없다. 나는 늘 사부님께서 수련생을 우리 집으로 보내셨다고 여겼다.

작년 5월 어느 하루, 나는 집에서 이 여러 해 동안 가장 심각한 한 차례의 박해를 당했다. 국가보안대대, 공안국, 파출소 등 모두 합쳐서 7명이 우리 집에 들이닥쳐 불법으로 가택수색을 했다. 큰 아들은 이미 감옥에서 돌아와 우리와 함께 살고 있었다. 그 무리 사람들은 우리 집안의 모든 사부님 법상, 대법서적, ‘파룬따파하오(法輪大法好-파룬따파는 좋습니다)’가 찍힌 인민폐 만여 위안(약 180만원)을 강탈해갔다.

당시 우리는 그들에게 진상을 알렸다. 다만 두 사람만이 손을 써서 가택수색을 했을 뿐, 다른 사람은 모두 거실에 앉아 조용히 우리가 말하는 것을 들었다. 그러나 그때 우리는 여전히 많은 대법 진상자료에 손실을 보았고 우리 집도 충격을 받았다. 나와 나의 아내(남편), 나의 큰 아들은 사람마다 모두 두려운 마음, 원망하는 마음, 쟁투심 등 자신의 마음이 있었다. 첫날 가택수색을 했는데, 셋째 날이 바로 단체 법공부를 하는 시간이었다. 나는 예전에 미리 수련생에게 우리 집이 수색당한 일을 알려 주려고 생각한 적이 있었다. 나는 단지 이 일을 말하려 했을 뿐, 수련생에게 우리 집으로 와서 법공부를 하지 말라고 통지하려 한 것이 아니었다. 나는 모든 수련생은 자신의 상황에 근거해야 한다고 여겼다. 어쨌든 우리 집 문은 늘 열려 있었다. 그러나 내가 지금껏 어느 수련생이든 전화번호를 남기지 않았기에 알려줄 방법이 없었다. 이렇게 법공부를 하는 그 날까지 기다렸는데, 뜻밖에 그날 오는 사람이 여전히 아주 많았다.

우리는 평소대로 법공부를 했다. 법공부를 한 뒤에, 나는 곧 수련생들에게 우리 집이 가택수색을 당한 일을 말했다. 어떤 수련생은 당시에 표정이 변했고 어떤 수련생은 말을 하지 않았으며, 또 어떤 수련생은 정념으로 가지했다. 총괄적으로 말하면, 수련생의 모든 표현은 나, 아내(남편)와 큰 아들에 대해 모두 고험이었는바, 우리의 마음이 어떻게 움직이는지를 보았다. 나는 당시 심정이 매우 평정했다. 동시에 나는 그날 온 이렇게 많은 수련생에게 감사를 드렸다. 나는 우리 집 법공부팀은 여전히 계속할 것이며 오기를 원하는 사람은 오라고 말했다. 역시 그 한마디 “우리 집의 문은 여전히 열려 있습니다.”라는 말을 했다. 나를 감동시킨 것은, 그 다음 주 법공부를 하는 그날 법공부를 하러 온 수련생이 조금도 적지 않은 것이다.

수련생과의 연분을 소중히 여기다

이 여러 해 동안, 우리 집 법공부팀은 수련생들에게 고정된 법공부와 교류하는 환경을 제공한 것 외에, 수련생 사이에 진상 자료, 대법 서적이 필요하게 되어도 모두 나를 통해서 가서 찾게 했다.

나는 나의 마음이 바로 이 법공부팀을 수호하는 중에서 끊임없이 관용이 생겨났음을 감각했다. 다양한 부류의 수련생들은 여러 가지의 표현이 모두 있을 수 있었기에, 늘 수련생 사이에서 오는 심성 마찰에 맞닥뜨릴 수 있었다. 법공부를 견지하겠다는 보장이 없고, 끊임없이 제고하고 용량을 넓히는 흉금이 없이는, 우리 집 법공부팀을 수호하기가 매우 쉽지 않았다. 이 과정 중에, 수련생인 나의 아내(남편)는 나를 매우 지지했고, 나를 협력하고 우리 집의 법공부팀을 원용했다. 나의 큰 아들이 출소해 집으로 돌아온 후 우리와 함께 살았는데, 법공부팀에 대해서도 모두 적극적으로 협력했다.

차츰 우리 집은 법공부시간 외에, 또 많은 수련생이 와서 이 일 저 일을 말했다. 수련생이 우리 집에서 밥을 먹는 것은 늘 있는 일이었다. 이 여러 해 동안 나는 싫어한 적이 없다. 그리고 아내(남편)도 끊임없이 제고 중에서 자아를 내려놓았고, 개인의 습관 심지어 애호를 내려놓고 매번 모두 묵묵히 밥을 하고 반찬을 만들어 접대했다. 이 일은 보기에는 평범한 것이지만 한 번, 두 번, 열 번에 이르면 모두 어떠하지 않을 수 있다. 그러나 다년 간 매 주마다, 심지어 매일 모두 있게 되어 시각마다 고험이었는데, 이것은 그리 쉽게 내려놓을 수 없었다. 심지어 우리는 되도록 여행하고 외출하는 시간을 많이 내려놓았는데, 수련생이 무슨 일이 있어서 집으로 와도 사람이 없으면 안 될까 봐 두려웠던 것이다. 우리는 바로 이렇게 수련생들이 우리 집으로 오는 연분을 소중히 여겼다.

서로 지지하며 공동 제고하다

우리 법공부팀에는 노년, 중년 수련생이 모두 있었다. 매 주마다 법공부를 다 한 뒤 다들 진상자료를 나눠 가졌다. 막 시작한 몇 해 동안, 모두 사람마다 5~6부의 진상자료를 가졌는데, 가장 많이는 10여 부였다. 법공부를 깊이 함에 따라서 차츰 진상자료, 션윈CD가 부족한 상황이 타나났다. 많은 수련생들은 진상자료가 없을까 걱정되어, 모두 법공부를 하기 전에 서둘러 우리 집으로 와서, 진상자료를 미리 다 넣었다. 나도 지금껏 사람들에게 얼마를 가져가라고 강요하지 않았고, 수련생들도 모두 자원적이었다. 잘하는 수련생은 많이 가져갔고, 처음에 감히 하지 못하는 사람은 몇 부를 가져갔는데 역시 돌파해 맨 마지막에는 또 많이 가져가 배포했다.

우리 법공부팀에는 70세 이상의 노년 수련생이 비교적 많았다. 매 주마다 법공부를 마치면 서로 청해서 두 세 사람씩 공원이나 재래시장으로 가서 진상을 알리고 자료를 배포했다. 봄이나 가을이 되면, 공원 안에서 봄 여행과 가을 여행을 하는 학생이 매우 많았다. 노년 수련생들은 그들 초등학생, 중학생에게 진상을 알려주었는데, 아이들은 매우 즐겨들었고 션윈CD를 앞다퉈가며 요구했다. 진상을 알린 외에, 노년 수련생은 시간이 많고 짬이 있으면 감옥, 구치소 인근으로 가서 근거리 발정념을 발해 사악을 해체했다.

우리 법공부팀에는 예전에 외지에서 온 수련생 부부가 있었는데, 남편은 불법 감금을 당한 적이 있고 또 구타를 당했었다. 감옥에서 나온 뒤에 두려운 마음은 줄곧 매우 중했고, 박해당한 흔적이 매우 짙었다. 바로 현지 악인의 교란이 두려웠던 이유로, 비로소 딸의 집으로 피신했던 것이다. 우리 이 법공부팀에서 한 동안 시간을 공부한 뒤, 우리는 그 부부와 교류를 했다. 게다가 수련생의 협력 하에, 먼저 그녀의 남편을 도와 철저히 박해를 폭로했다. 그런 다음에 또 그녀에게 고소장을 써주어, 감옥 측에서 그녀에 대한 고문박해를 고소했다. 외지 수련생 부부는 한 걸음씩 걸어 나온 뒤, 지금 이미 다시는 딸집에 피해 있지 않고 현지로 돌아가서 그들을 박해한 적이 있는 모든 사람에게 고소편지를 보내고 진상을 알려 큰 국면을 열었다.

그리고 한 노년 수련생은 정진하지 않은 이유로, 몸은 매우 심각하게 박해를 당했다. 처음 우리 집으로 와서 법공부를 할 때는, 도우미의 부축을 받고 왔었다. 끊임없이 법공부를 함에 따라 지금 일찍이 보모를 내보내고 스스로 와서 법공부를 하며 또 협력해 진상을 알리는 일을 하고 있다.

이와 같은 사례는, 우리 법공부팀에 또 몇 사례나 있다. 우리 수련생은 한 법문으로, 당연히 서로 지지하고 정념으로 가지해야 한다. 수련생들의 변화를 보면 나는 더욱 법공부팀의 중요성을 느꼈다.

수련생이 불법적인 재판에 마주칠 때면, 우리 법공부팀의 수련생은 모두 먼저 협력하고, 통일적으로 정념을 발했다. 게다가 되도록 재판하는 장소로 서둘러가서 근거리 발정념을 발했고, 법정으로 들어가 방청을 하면서 박해당한 수련생을 가지했다. 외지에서 재판을 받는 사람에 대해서는, 우리 법공부팀의 수련생들 중에서 차를 섭외하는 것을 책임진 사람이 있고 차를 운전해가는 것을 책임진 사람이 있었으며, 갈 수 있는 사람은 극력으로 자신의 시간을 잘 배치해 하던 일을 내려놓고 협력했다. 전체 과정 중에서, 모두 뚜렷한 제고와 승화가 있었다.

신, 노 수련생이 공동으로 정진하여, 사람 구함을 늦추지 않다

법공부를 하는 목적은 단순히 개인수련을 위한 것이 아님을, 우리 법공부팀의 수련생들도 모두 이 점을 알고 있다. 때문에 우리 법공부팀의 수련생들은 중생구도하고 진상을 알림을 모두 늦춘 적이 없다.

나의 아내(남편)는 다년 간 줄곧 얼굴을 맞대고 션윈CD 배포를 견지했다. 우리 집 일대는 매 년 션윈CD가 거의 모두 배포되었다. 무릇 외출해 채소를 사든, 일처리를 하든, 차에 앉든 모두 션윈CD를 지니고 인연이 있는 사람을 만나면 나눠주었다. 나도 나의 아내(남편)와 협력해 션윈CD를 배포했고 삼퇴를 권했으며 진상자료를 배포했다. 우리 두 사람의 직장을 포함해서, 아내(남편)의 직장은 해마다 도착보고를 하러 가야 했는데, 아내(남편)는 션윈CD를 지니고 가서 한 사무실씩 나눠주었다. 아내(남편)는 진상을 알리고 삼퇴를 권고하는 것도 매우 잘했다. 큰 아들은 출소해 집으로 돌아온 뒤에 션윈CD, 인터넷돌파 소프트웨어, 진상자료 배포를 줄곧 중단한 적이 없다. 이런 방면에서 나는 아내(남편)와 아들만 못했다.

우리 팀에는 중년 수련생도 적지 않았다. 어떤 이는 자발적으로 자료를 만드는 것을 감당했는데, 사용할 줄 모르는 컴퓨터, 설비의 고장을 두려워하는 마음을 돌파해 자기 집에서 작은 꽃을 피워 자료를 필요로 하는 수련생에게 공급해 주었다. 어떤 이는 때를 가리지 않고 진상자료, CD를 지니고 사람을 만나면 나눠주었다. 이러한 수련생은 우리 팀에 여럿 있었다.

한 사람은 겨우 수련한 지 2년 넘는 수련생인데, 자신이 일찍이 대법에 들어서지 못함을 후회해 일체 시간을 다그쳐 사람을 많이 구하려고 늘 자전거를 타고 길목, 공공버스, 주차장으로 가서 얼굴을 맞대고 션윈CD를 배포했다. 어떤 때에는 또 그가 션윈CD를 소개하면, 세인은 줄을 서서 션윈CD를 받는 장면이 나타났다. 또 한 수련생은 고향이 인근의 현이었다. 그녀는 늘 혼자서 한 보따리의 진상자료, ‘9평공산당’ 등을 메고 고향으로 돌아가서, 밤새 진상자료를 이 거리 저 골목 돌아다니면서 다 배포하고는, 이튿날에 또 차에 앉아 돌아왔다. 다른 한 수련생은 노래를 잘 부르고 춤도 아주 잘 추는 타고난 재주가 있었다. 자신이 진상자료를 만들고, 혼자 수시로 진상자료를 배포하는 이외에도 그녀는 또 문예광장으로 가서 한 두 개의 대법노래를 불렀다. 광장에는 사람이 아주 많았다. 이렇게 좋은 노래를 듣더니 모두 밀치고 들어와서 “이것은 무슨 노래죠? 왜 이렇게 듣기 좋죠?”라고 물었다. 수련생은 수시로 보따리 안에 지녔던 션윈CD를 꺼내 소개해 말했다. “이렇게 아름다운 노래는 바로 션윈CD에서 왔습니다. 당신들은 빨리 돌아가서 보세요. 또 더욱 듣기 좋은 것들이 있어요!” 매우 빨리 한 보따리의 션윈CD가 몽땅 빼앗기듯 배포되었다. 우리 법공부팀에는 한 수련생이 있는데, 처음부터 우리 집으로 와서 법공부를 했다. 그는 건물 아래에 미행하는 사람, 경찰차가 있는 것을 보면 곧 머리를 돌려서 갔다. 지금에 이르러서는 이미 스스로 진상자료를 배포하고 CD를 배포했으며, 혼자 연회에 참여했을 지라도 모두 션윈CD를 지녀, 인연이 있는 사람에게 선사했다.

이런 이야기는 우리 이 법공부팀에서 근 10년 동안 아주 많았다. 말하기 시작하면, 모든 수련생은 모두 한 권의 책으로, 모두 다 말하지 못하는 이야기이다. 매 단락 이야기는 모두 한 수의 시처럼 의미가 깊고 생각할수록 의미심장하다. 나는 이들 수련생들과의 연분이 얼마나 깊고 얼마나 먼지 모르지만, 사부님의 배치 하에 모두 우리 법공부팀으로 와서 함께 모여 대법을 실증하고, 중생을 구도하기 위해 자아를 내려놓고 정체로 협력했다. 이곳에서 우리 법공부팀의 모든 수련생들과 저는 사부님의 은혜에 감사를 드립니다. 이어지는 나날에, 저희들은 꼭 노력해 정진하고 세 가지 일을 잘 하며, 더욱 많은 중생을 구도하겠습니다.

사부님의 은혜에 공손히 절을 올립니다! 허스.

(밍후이왕 제10기중국대륙 대법제자 수련심득교류회)

문장발표: 2013년 11월 9일
문장분류: 대륙소식> 더욱 많은 박해사례
영문위치 : http://en.minghui.org/html/articles/2013/11/18/143284.html
중문위치:http://www.minghui.org/mh/articles/2013/11/9/281171.html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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