글/ 대륙 대법제자
[밍후이왕] 밍후이왕 제9회 중국대륙 대법제자 수련심득교류회가 개최된다는 공고를 보고 나는 매우 격동했다. 매년 한 번씩 진행되는 대규모의 인터넷 교류법회는 자비하고 위대하신 사존께서 중국 대륙의 특수한 상황에서 대법제자에게 개척해주신 환경으로, 매년 대륙 대법제자가 더욱 비학비수(比學比修)할 수 있도록 기대하는 곳이다. 절대로 이 보기 드문 기연(機緣)을 놓쳐서는 안 된다. 그러므로 나는 수련을 시작해서부터 지금까지 수련한 역정을 위대하고 자비하신 사존께 보고하고 수련생들과 교류하려 한다.1995년, 친구가 파룬궁을 소개했을 때 당시 기공(氣功)에 대한 나의 인식은 다만 병을 치료하고 신체를 건강하게 하는 얕은 견해에 머물러 있었다. 사존의 지난(濟南)에서의 설법녹음을 듣고 파룬궁에 대한 인식이 천지를 뒤엎는 듯한 변화가 생겼으며, 진정한 기공은 역사가 오래고 박대 정심(精深)하다는 걸 알게 됐다. 기공은 병을 치료하고 신체를 건강하게 하는 것뿐만 아니라 수련하는 것이고, 사람이 신이 되는 길이고, 사람이 존재하는 목적-반본귀진(返本歸眞)이라는 것을 알게 되었고, 금후에 사람됨이 어떻게 해야 하는지 알게 됐다.
나는 수련한지 얼마 되지 않아 천목이 열려 다른 공간의 일부 사람, 물건, 영상을 볼 수 있었고 특히 포륜(抱輪)을 할 때 파룬이 두 팔에서 회전하는 것을 뚜렷하게 느낄 수 있었다. 신체의 변화도 사존의 설법 중 “하지만 당신은 온몸이 가벼움을 느끼고, 길을 걸어도 바람에 나는 듯 할 것이다. 과거에는 몇 걸음만 걸어도 힘들었지만 현재는 아무리 멀리 걸어도 매우 가뿐함을 느끼고, 자전거를 타면 마치 누가 당신을 밀어 주는 것 같으며, 계단을 오르면 얼마나 높이 올라도 힘들지 않은데, 보증코 이러하다.”[1]라고 말씀하신 것처럼 변화가 매우 컸다.
수련시간의 변화에 따라 인식도 끊임없이 제고되었는데, 후에 이렇게 좋은 사부님, 이렇게 좋은 공법을 혼자만 혜택 받아서는 안 되고 모든 사람에게 알려서 혜택을 받도록 해야 한다고 생각했다, 그래서 우선 친구, 친척, 동료들에게 파룬궁을 선전하기 시작했다. 대법의 아름다움과 대법에서 혜택을 받은 진실한 감수를 그들에게 알려줬다. 그 뒤로 많은 인연 있는 사람이 대법 수련의 길에 들어섰고 수련을 통해 부동한 정도로 대법의 혜택을 받았다. 기억하건데 한 암 말기 환자가 파룬궁을 연마해 매우 빨리 건강을 회복했다. 그럼에도 그의 가족은 마음이 놓이지 않는지 병원에 데려가 재검사를 받게 했는데 모든 게 정상이었다. 이는 당시 대법을 널리 전하는데 적극적인 작용을 일으켰고 파룬궁의 초상적인 과학을 실증했다.
주임은 “우리 제품의 양과 질이 왜 이렇게 좋으냐?”라고 물었다
직장, 가정, 사회 등 여러 환경 속에서 모두 ‘진(眞), 선(善), 인(忍)’의 표준에 따라 일하고 사람됨을 이루었다. 예를 들어 일상생활 속에서 무슨 물건을 사든지 까다롭게 굴지 않았고, 다른 사람과 승부를 겨루지 않았고 언제나 상대방의 각도에서 문제를 생각하고 타인을 선하게 대했다. 직장에서도 마찬가지로 더러운 일은 주동적으로 했고, 상사가 무슨 일을 분배해도 돈을 따지지 않았으며 동료, 상사와 지금까지 말다툼을 하지 않았다. 모순 앞에서 자신을 찾았고 상사가 있든 없든 마찬가지로 책임을 다했으며 이전에 직장에서 가져간 물건을 다시 직장으로 가져왔다. 이전 같으면 이런 것은 해내기 어려운 것이다. 이전에 나를 아는 사람은 모두 나보고 입이 칼날 같다면서 일리는 있지만 너무 지나치게 군다고 했다. 하지만, 지금은 모두 파룬궁을 연마한 후부터 완전히 다른 사람으로 변했고 신체가 건강해졌을 뿐만 아니라 젊어졌으며 더욱 중요한 것은 내심세계의 변화로 사람을 잘 이해해준다고 했다.
내가 다니는 직장은 국유기업이고 노동자가 1,000여명이며, 작업장이 5군데다. 내가 있는 작업장은 주조(鑄造) 작업장으로 100여명의 노동자가 있다. 가짜 물건이 횡행하는 지금 연대에 품질 보장이 어려웠고 완제품 비율은 더욱 뜻대로 되지 않아 동업자들이 모두 골머리를 앓았지만, 우리 작업장은 완제품의 질과 양이 언제나 80%~90% 유지했다. 임금도 적지 않고 장려금도 적지 않았으며 모두 일할 때도 많은 노력을 했고 유쾌하게 했는데, 이런 현상에 대해 좀 이상하다고 생각했지만 왜 그런지는 몰랐다. 어느 날 일을 마치고 이야기할 때 갑자기 작업장 주임이 매우 기뻐하며 모두에게 “야, 알겠냐? 우리 완제품의 질량은 왜 이렇게 좋은지?” 라고 물었다. 모두들 한순간 어떻게 대답해야 할 줄 몰랐다. 주임은 기뻐서 “내가 당신들에게 알려주마. 모모와 모모가 파룬궁을 연마하기 때문이다.”라고 했다. 모두들 무엇에 명백해 진 듯 하하 웃기 시작했고 우리 둘을 바라보며 인정했다. 나와 다른 한 수련생도 한순간 무엇을 말해야 할 줄 몰라 함께 웃었다. 그 후에 주임이 왜 이런 말을 할 수 있었을까? 라고 생각해봤다. 자비하신 사부님께서 주임의 입을 빌려 나와 수련생이 진짜로 착실하게 수련하고 용맹 정진함을 격려해주시고 또한 중생이 파룬궁이 좋다는 것을 인정하여 복을 얻은 것이라고 느꼈다.
후에 공장에서는 독립 채산제로 운영하게 되었다며 개혁해야 하고, 자립 생산물도 판매해야하기 때문에 일부 직원에게 권고사직을 하려 했다. 공장장은 직원들과 얼굴이 빨개지도록 상담하면서 쟁론해도 누구도 떠나려 하지 않았다. 후에 나에게 상담하자고 하여 공장장이 말하기도 전에 “오늘, 말하려는 내용을 알아요, 알다시피 저는 파룬궁을 연마하는 사람이에요. 우리 사부님께서는 저희들보고 ‘진(眞), 선(善), 인(忍)’에 따라 생활하고, 일에 부딪히면 우선 남을 생각하고 타인을 선하게 대하라고 가르쳐주셨어요. 이해해요. 공장장도 우리에게 권고사직에 대해 말하고 싶지 않지만 이후에 자동생산 라인이 가동되면 일은 적어지고 사람이 많으니까 별다른 방법이 없어서 그런다는 것을 알아요. 내일부터 출근하지 않겠어요. 공장과 공장장을 위해 부담을 덜어주겠어요.”라고 했다. 공장장은 나의 말에 감동하여 연속 “고맙다. 나를 생각해줘서 공장을 생각해줘서 너무 고맙다.”라고 했다. 나의 그런 행동은 공장에서도 영향이 매우 컸다.
99년 ‘7.20’, 베이징 민원에 파룬궁의 진실한 정황을 반영하러 갔다가 본지 경찰에게 불법으로 잡혀왔다. 공장의 지도자는 여러 번 경찰국에다 나를 놔주라고 했고, 공장장은 상급의 압력을 무릅쓰고 어떠한 환경 속에서도 당당하게 이치에 맞게 “파룬궁을 연마하는 것이 어떻다는 건가, 내가 보기엔 파룬궁을 연마하는 사람은 매우 좋다. 공장 노동자 모두 파룬궁을 연마하면 내 일이 쉽게 될 것이다.”라고 했다. 후에 불법 노동교양 3년을 받았을 때도 공장의 지도자는 또 그곳까지 나를 면회 오기도 했다. 집에 돌아온 후 공장에서는 아주 빨리 내게 퇴직 수속을 밟아 주었는데, 실업했을 때부터 노동교양 기간의 모든 복리대우를 하나도 빠뜨림 없이 전부 내게 보충해줬다. 어떤 직원은 농담으로 “모모가 감옥에 돌아와서 공을 세웠다.”라고 했다. 그러나 이 모든 것은 사부님께서 제자를 보살펴주신 것임을 똑똑히 알고 있다. 어떤 수많은 말로도 사부님께 대한 감사의 뜻을 다 말할 수 없다. 오직 진짜로 착실하게 수련하고 용맹정진해야 만이 사부님의 은혜에 보답할 수 있는 것이다.
“형님과 이혼해서는 안되요. 형님은 좋은 사람이에요!”
가정환경에서도 마찬가지로 ‘진(眞), 선(善), 인(忍)’의 표준대로 생활하고 일에 부딪히면 남을 생각하고 타인을 선하게 대하면서 모순 앞에서 자신을 찾았다. 시가집에 형제 셋이 있는데 우리 집은 큰 집이지만 외지에서 일하면서 살았고 두 동생은 고향에 있었다. 셋째 일가는 노인과 함께 살았다. 외지에서 일하고 산다는 핑계로 효도하지 못했다. 언제나 한동안 지난 후 집에 한 번씩 가서 시어머니를 씻겨드리고 이발해주고 집안을 정리해줬다. 시부모님은 매우 소박했고, 생활방식은 비교적 전통적이어서 손으로 만든 옷이 편안하다고 좋아했다. 나는 될수록 시부모님을 만족시켜 드리려고 겨울에는 솜옷을 직접 지어 드렸고, 봄가을에는 털옷을 만들어 드렸다. 제수가 시어머니와 함께 살고 있기 때문에 작은 모순은 면할 수 없었다. 쌍방 모두 나에게 몇 마디씩 했지만 좀처럼 중간에서 이간질시키지 않았고 매번 대법의 법리로 선해해 줬다.
하늘에는 예측할 수 없는 풍운이 일어 날 수 있고, 인생의 화복은 헤아릴 수 없는 것이다. 시어머니가 조심하지 않고 걷다가 넘어져 무릎 분쇄성골절이 되어 입원을 했다. 의사에게 치료받았다고는 하나 이전처럼 힘을 줄 수 없다고 했다. 남편에게 “어머니가 퇴원하면 우리 집에서 살게 합시다. 앞으로 어머님을 보살펴 드려야 할 텐데 옆에 사람이 없으면 안 되잖아요. 시동생 부부는 일하고 있지만 나는 퇴직해서 시간이 비교적 많아요.”라고 했다. 남편이 시동생부부에게 내 말을 전해주자 그들은 매우 기뻐하면서 감사하다고 했다. 아쉽게도 시어머니는 퇴원하기 전에 심장병이 도져 세상을 떠났다. 시아버지는 오래도록 시어머니를 그리워하면서 우울해하다가 2년 후 세상을 떠났다. 시부모가 세상을 떠난 후 유산 상속 문제에 부딪혔다. 그래서 나는 남편에게 “재산을 조금도 가지지 말아요. 부모님이 살아있을 때 시동생과 함께 살았기 때문에 물을 부어준 것이 우리보다 많아요. 게다가 시동생은 다른 사람도 아닌데 동생이 잘 지내면 우리도 마음이 놓이잖아요. 그들이 잘 못살면 형과 형수인 우리가 신경 써야 하지 않겠어요?”라고 했다. 그런데 둘째 시동생의 생활조건이 우리 집보다 훨씬 좋아 우리가 가지지 않는 것을 보자 그들도 가지지 않았다. 그래서 모든 재산을 셋째 시동생에게 줬다. 셋째 시동생부부는 기뻐서 어쩔 줄 몰라 하며 감동했다. 그래서 노인이 생전에 장사할 때 몰래 2만 위안을 벌어 준 사실을 우리에게 알려줬다. 둘째는 퇴직간부였기 때문에 돈이 좀 있었다. 99년 내가 불법 노동교양을 당했을 때 시동생부부는 나에게 많은 관심을 쏟으며 면회하러 왔고, 돈도 보내고 물건도 보내줬다. 셋째 동생은 남편에게 “형, 형수와 이혼해서는 안 되어요. 형수는 좋은 사람에요. 다시 말해서 형수는 개인 신앙이고 법을 위반하지 않았어요.”라고 했다.
악한 경찰은 그들 눈속의 이 ‘가오량 화쯔(高梁花子)‘를 관리하지 못한다.
99년 7.20, 내가 베이징 민원에 파룬궁의 진실한 정황을 설명하러 갔다가 그 지역 경찰에게 잡혀 단독으로 정부 보위과에 갇히게 됐다. 나는 노 수련생이고 또 보도원이라 사당이 주로 타격하는 대상이었다. 그리하여 나를 겨냥해 전문적으로 전화시키려는 조를 만들었고, 두 사람이 한 조씩 나를 재우지 않고 수갑을 의자에 잠그고는 파룬궁 조직과 연락인을 대라고 협박했다. 크고 작은 관원을 만날 때마다 나는 “파룬궁은 조직이 없고 느슨하게 관리한다. 연마하고 싶으면 연마하고, 연마하고 싶지 않으면 갈수 있고, 명단이 없고 모두 사회의 일원이다. 파룬궁은 바로 ‘진(眞), 선(善), 인(忍)’에 따라 생활하라고 가르쳐주는 것이다. 그래서 병을 고치고 신체를 건강하게 하는 신기한 효과가 있다.”라고 했다. 3일 후 그들은 인력을 보강했는데, 어디서 왔는지 일남일녀 깡패가 졸개들도 데리고 왔다. 이번에는 그들이 미리 써놓은 사부님, 대법을 모욕하는 선전 자료를 읽으라고 하고는 녹화하려고 했다. 녹화한 후 TV방송국에 가서 방송으로 내 보내어 내가 반성하고 있다면서, 사부님을 적발하고 대법을 적발하려는 것이었다. 나는 단호하게 협조하지 않았다. “이것은 거짓을 만드는 것”이라고 했다. 나는 협조하지 않고, 읽지 않고, 녹화하지 않았다. 깡패가 한번 또 한 번 협박하면서 마구 욕하고 주먹으로 때리고 발로 차고 대나무로 폭행하면서 잠도 못 자게 했다. 매일 아침, 저녁 작은 만두 한 개씩 두 끼만 주었고 물 한모금도 못 마시게 했다. 그러나 나는 또렷또렷한 정신으로 사악을 대면했다. 파룬궁을 박해하는 그 주관 경찰국 국장은 몹시 화가 나서 “공산당이 설마 이 ‘가오량 화쯔(高梁花子-공인, 농민, 사회지위가 비교적 낮은 사람)를 관리하지 못하겠니?”라고 했다. 7일이 지났다. 사악은 아무런 수확도 없어서 시시하게 끝내고는 나를 또 불법으로 구치소에 가두었다.
말하자면 그 7일간의 시간은 길지 않지만 만약 사부님의 자비로운 보호가 없고 법의 위력이 없었다면 걸어나오는 것은 불가능한 것이었다. 그 7일 동안 매일 대량으로 법을 외우는 외에 사부님께서 시시각각 옆에 계시다는 것을 느낄 수 있었다.
후에 불법 노동교양 3년을 받았다. 3년 불법 노동교양기간 동안 노동교양소를 3군데 바꿨다. 그곳에서 나와 수련생들은 정체적으로 협조해 법을 실증하고 반박해를 했다. 기억에 2000년 노동교양소에서 소위 ‘전화’ 교육대회를 열었다. 그곳에는 시 공안국, 시 정부의 관리들이 참가하고 사오자와 일부 관리자가 발언하려 했다. 그들은 그런 기회를 이용해 사부님을 모함하고 대법을 모욕하려한다는 것을 알고는 나와 수련생들은 정체적으로 협조하여 그 대회를 저지했다. 회의할 때 우리는 연이어 일어나 큰 소리로 ‘파룬따파하오!(法輪大法好-파룬따파는 좋습니다!)’, ‘파룬따파는 정법이다!’라고 외쳤다. 악한 경찰들은 우리를 하나하나 바깥으로 끌어내 테이프로 입을 막았지만, 뒤에 있던 수련생이 끊임없이 연이어 외쳤다. 그리하여 결국 그 사악한 회의는 계속 진행하지 못하고 해체됐다. 또 한 번은 노동교양소에서 우리를 협박해 녹화를 보게 했는데, 사전에 뭘 보는지 알려주지 않았다. 우리는 그 곳에 가서야 비로소 파룬궁을 비방하는 것과 사오자의 소위 자신의 경험에 비추어 이야기를 하는 내용이었다. 그래서 나와 수련생은 그것을 거부하고는 일어서서 사부님의 ‘홍음’을 외웠다. 오후 3시부터 오후 8시까지 악한 경찰들은 우리에게 입을 닥치라고 했지만 우리는 그들의 말을 듣지 않고 계속 외웠다. 마지막에 남자 대대에서 사악한 경찰을 불러왔다. 5, 6명의 전기봉을 든 남자 경찰과, 거기에다 여 경찰, 보통 교관, 대개 15, 16명이 마구 우리를 폭행했다. 뺨을 때리고 목을 죄이고 입을 막고 발로 차고 주먹으로 때리는 것도 있었고, 어떤 것은 전기봉으로 찔렸다. 마지막에 우리를 수갑 채워 큰 간판에 매달아 놓기도 했고, 어떤 사람은 복도에 매달아 놓았다. 며칠 동안 계속해서 녹화를 보라고 협박했지만 우리는 보지 않았다. 마지막에 사악은 물러서고 TV를 껐다. 이렇게 수련생에 대한 사악한 ‘전화’는 해체됐다.
“ ‘전화율 100%’? 내 보기엔 한 사람도 전화하지 않았다.”
2001년에 나는 모 노동교양소에 있었다. 이 노동교양소는 소위 ‘제2마싼자(馬三家)’라고 불렸는데, 소장은 건달이었고 중앙과 정법위의 뤄간과 직접 결탁해 파룬궁수련생을 ‘전화’하는 전화율이 100%라고 했지만, 내 생각엔 한사람도 믿지 않을 것이다. 어느 날 그들의 상급 관리가 노동교양소를 시찰했다. 실상은 주로 파룬궁을 박해하는 정황을 검사하러 온 것이었다. 그들은 우리에게 한 줄로 서서 관리가 누구에게 물어보면 누가 대답하라고 했다. 그가 나에게 파룬궁에 대한 태도를 물어봤을 때 나는 ‘파룬따파하오!(法輪大法好!)’라고 대답했다. 당장 노동요교양소의 ‘100%전화율’이 거짓임을 폭로한 것이다. 후에 또 몇 명의 수련생이 ‘’파룬따파하오!(法輪大法好!)’라고 대답했다. 그 관리는 “가자, 무슨 ‘100% 전화율’? 내가 보기엔 하나도 ‘전화’하지 못했다.”라고 말했다. 후에 사악한 소굴의 악한 경찰들은 정말로 우리 몇 명은 감히 건드리지 못했고 이 일에 대해서는 말도 꺼내지 못했다.
2010년 또 불법 노동교양 1년을 받았다. 어느 날 노동교양소에서 모든 파룬궁 수련생을 대청에 집합시켜 놓고는, 파룬궁 박해를 주관하는 사악한 대장이 대법을 모욕하는 사악한 자료를 읽었고 주위에는 다른 대장이 에워싸고 있었다. 책상 앞에는 수갑, 전기봉이 놓여 있었는데 보기에도 매우 거만했다. 하지만, 당시 다만 어떻게 사부님을 보호하고 대법을 보호하려는 생각뿐이었다. 몇 명의 어릿광대가 사부님을 모함하고 대법을 모욕했다. 나는 그때 큰소리로 ‘입을 다물라! 우리 사부님과 대법을 모함하는 것을 허락하지 않는다!”라고 했다. 내 뒤에 서있던 몇 명의 대장은 대뜸 올라와 내 머리를 누르고 입을 막으면서 머리카락을 잡아당겼다. 좀 지나 나를 풀어줬지만 나는 또 다시 “입을 다물라! 우리 사부님과 대법을 모함하는 것을 허락하지 않는다!”라고 했다. 주위의 대장은 당장 또 몰려들어 입을 막으면서 머리카락을 잡아당겼다. 그들의 그 사악한 기세를 보니 이 일은 쉽게 끝나지 않을 것이라고 생각했는데 뜻밖에도 흐지부지 끝났다. 내가 말하려는 것은, 신사신법하고 정념이 확고하면 사악은 우리를 어떻게 할 수 없다는 것이다.
노부인, 안전에 주의하세요!”
법공부를 잘 하고 자신을 연마하는 기초위에, 조사정법하고 진상을 알리고 사람을 구하기 위해 직접 만나서 ‘9평’과 션윈 CD를 배포했고, 인터넷 돌파 소프트웨어, 진상자료, 소책자를 배포했으며, 직접 만나 진상을 알리고 사람을 구했다. 친구, 친척뿐만 아니라 지역 주민들에게도 진상을 알리는 외에 또 수련생과 협조하여 일정한 시간을 내어 외딴 농촌에 가서 진상을 알리고 사람을 구하고 진상자료를 배포했다. 계산해보면 그 몇 년 동안에 40여 마을, 3개 향진에 다녀왔다. 주로 자전거를 타고 다녔는데 가장 많을 때는 4명 수련생이 함께 갔고 적을 때는혼자갔다. 어쨌든 수련생의 시간에 따라 정했다.
농촌에 가는 것은 비록 고생하지만 힘든 줄을 몰랐고, 매우 자유롭고 매번 달콤했다. 신기한 일도 자주 발생했는데, 더구나 시시각각 제자 옆에 사부님께서 계시다는 것을 체득했다. 예를 들어 한번은 나와 수련생이 농촌에 션윈CD를 배포하러 갔더니 큰 시장에 오가는 사람이 매우 많았다. 어떻게 하겠는가, 나도 모르게 큰소리로 말했다. “여보세요, 션윈만회를 보려면 여기로 오세요.”라고 했다. 그러자 단번에 나와 수련생을 둘러싸고 서로 손을 내밀고는 하나 달라, 두개 달라, 3개 달라고 했다. 바로 그때 신기하게도 한 사람이 걸어 나와 큰 소리로 “혼잡하니까 줄을 서요. 한 사람에 하나씩.”이라고 했다. 그리하여 그들 모두 스스로 줄을 섰다. 또 한 번은 나와 수련생이 중생을 구도하기 위해 농촌에 진상자료를 배포하러 갔을 때였다. 어느 골목에 갔을 때 제일 안쪽 집의 개가 짖고 있었지만, 마음에 두지 않고 진상자료를 배포하고 사람만 구도하려고 했다. 그 집 문 앞에 도착하니까 큰 개가 정원에서 달려 나와 나를 향해 짖어도 나는 두려워하지 않았다. 그 개는 내 손에 있던 진상자료를 물고는 뒤돌아가서 따라 나오던 여 주인에게 갖다 주었다. 그 후에 생각해보니 좀 두려워졌다.
그 몇 년 동안 간난신고의 조사정법을 하면서 우리는 얼마나 많은 길을 걸었고 얼마나 많은 사람을 구했는지도 모른다. 하지만 10리 8향의 민중은 우리와 좋은 친구가 되었고, 우리를 만날 때마다 열정적으로 인사를 하면서 어떤 사람은 수고했다고, 어떤 사람은 안전에 주의하라, 어떤 사람은 집에 들어와 물 좀 마시고 쉬어라, 어떤 사람은 매일 ‘파룬따파하오(法輪大法好)’를 읽어서 허리가 아프지 않고 다리도 아프지 않다고 했다.
또 한 가지가 있다. 비록 몇 년이 지나갔지만 매번 이 사건을 회상하면 언제나 감개무량하다. 2008년 어느 날, 나가서 ‘9평’을 배포했는데 젊은이 몇 명이 걸어오는 것을 보고 앞으로 다가가 “젊은이들, ‘9평’을 본 적이 있는가?”라고 물었더니 그들은 동시에 사방을 둘러보고는 엄지손가락을 들고 “노부인 정말로 위대해요, 많은 사람들 앞에서 ‘9평’을 배포하다니요.”라고 했다. 어떤 젊은이는 안전을 주의하라고 했다. 그들은 모두 본 적이 있다고 하면서 떠나기 전에 “노부인 꼭 안전에 주의해야 해요!”라고 신신당부했다. 그들은 가다가 뒤돌아서서 다시 인사했고, 이미 멀리 갔는데도 한 젊은이는 여전히 손을 저으면서 큰 소리로 “노부인 안전에 주의하세요!”라고 외쳤다. 떠나가는 그들의 등을 바라보면서 나는 오랫동안 떠나기 싫었다. 매번 그 일을 회상하면 언제나 마음이 뜨거워졌다. 중생 하나의 사랑, 하나의 축복, 하나의 걱정은 이미 사부님께서 설법 중 말씀하신 “진념(眞念)이 온 하늘을 용해하여 맑구나”[2]라는 것을 실증했다.
진상에 명백해진 중생이 복을 얻다
우선 큰 언니부터 말하자. 큰 언니가 밥 할 때 부주의하여 손에 화상을 입어 형부와 함께 화상 병원에 갔다. 의사는 피부를 이식할 필요가 있으니 입원하고 1만 위안의 보증금을 내야 한다고 했다. 형부가 나에게 전화를 걸어 언니를 좀 돌봐달라고 부탁했다. 나는 큰 언니에게 몇 년 동안 진상자료를 그렇게 많이 보지 않았는가, ‘파룬따파하오(法輪大法好)’를 성심으로 읽어 재난을 당해도 상서로운 조짐을 나타낸 실제 사례도 적지 않게 보지 않았는가, 만약 파룬따파를 믿는다면 병원에 입원하지 말고, 믿지 않거나 마음이 놓이지 않으면 병원에 입원하든지 스스로 선택하라고 했다. 큰 언니는 좀 생각하더니 “병원에 가지 않겠다. ‘파룬따파하오(法輪大法好)’를 믿는다.”고 했다. 이튿날 나와 큰 언니는 병원에 가서 손의 썩은 피부와 썩은 살을 처리하고 집으로 돌아왔다. 의사는 우리에게 손가락에 입은 화상이 심해서 잘못하면 절제해야 한다고 했지만 큰 언니는 동요하지 않았다. 저녁 9시경 막내 여동생의 친구가 큰 언니를 보러 왔다. 그녀는 전문적으로 화상을 치료하는 의사였다. 붕대를 풀어보고 “신기하다. 평평한 분홍색 살이 자라났다. 다만 24시간만 지났는데 신기하다! 신기하다! 신기해 불가사의하다! 그렇게 하여 큰 언니의 손은 다 나았다. 이것은 큰 언니가 대법을 믿고 대법을 지지하고 끊임없이 ‘파룬따파하오(法輪大法好)’를 읽고 얻은 복이다.
또 변호사 친구가 있는데, 그는 진상에 명백한 후 기회만 있으면 파룬궁은 법률을 위반하지 않았고, 신앙은 자유고, 공산당이 그들을 박해하고 있다고 말했다. 그는 나를 보면 언제나 “이 몇 년 동안 무엇을 하면 무엇이 순조로워서 지금 집도 사고 자가용도 샀다. 이 모든 것은 대법의 복을 얻은 것이다.”라고 했다. 또 친구의 아이는 나를 보고 “이모, 대학 시험치는 전날 저와 어머니는 천 번 ‘파룬따파하오(法輪大法好)’를 읽어 이튿날 시험 칠 때 원기가 왕성하고 머리가 명석했어요. 그래서 실력을 충분히 발휘하여 국가 명문 대학에 붙었어요. ‘파룬따파’에 너무 감사해요!”라고 했다.
대법을 믿어 복을 얻은 실제 사례는 너무 많다. 이것은 다만 몇 가지 사례일 뿐이다. 그들 모두 진상을 명백하게 알았고, 또 다른 사람에게 자신은 이미 ‘삼퇴’했다고 알려주었다. 또한 집에 있는 마오쩌둥 마귀의 상을 전부 다 깨끗하게 청리해 복을 얻은 것이다. 특히 큰 언니는 어떤 때 아침 새벽 3시, 4시에 일어나 진상자료를 배포하고 사람을 구했다.
나의 수련 여정을 회상해보면 비록 자비로운 사부님의 보호 하에 확고하게 걸어왔지만, 정법시기의 대법제자로서 사부님께서 요구하신 것과는 아직 멀고, 정진하는 수련생과 비하면 아직 일정한 거리가 있다. 그렇지만 반드시 되도록 빨리 따라갈 수 있을 것이라 믿는다.
주:
[1] 리훙쯔(李洪志) 사부님의저작: ‘전법륜’
[2] 리훙쯔사부님의저작: ‘감개(感慨)’
(밍후이왕 제9회 중국대륙 대법제자 수련심득교류회)
문장발표: 2012년 11월 28일
문장분류: 수련마당>정법수련마당>제9회밍후이법회
원문위치:http://www.minghui.org/mh/articles/2012/11/28/264520.html