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사부님의 자비와 수련의 기연을 소중히 하자
글/대륙 대법제자
[밍후이왕] 밍후이편집부 ‘연설하는 것은 난법이다’라는 글이 발표된 후 나는 연속 몇 번 보았다. 몇 년 전 우리 지역에 동북의 한 수련생이 찾아와 연설한 적이 있다. 그러나나중에 우리 현지의 협조인은 사당의 광범위한 박해를 당했고 많은 협조인은 중형 선고를 당했으며 연설은 중지됐다.
편집부의 문장이 발표된 후 몇 가지 정황이 나타났다. 일부 수련생은 꿈에서 소스라쳐 깨어나듯 연설이 난법이라는 위해성을 깨달았고,줄곧 연설하는 것을 저지시키던 그러한 수련생은 존사경법(尊師敬法)에, 법공부하고 착실한 수련을 하는 신심이 더욱 확고해졌다. 일부 연설을 듣는 것에 미련을 두고 있던 사람들은 각자 이유를 대며 저촉하는 정서가 있었고 자신과 마주하는것을 꺼려했고 그 속에서 도를 깨우치려 하지 않았다. 연설을 듣는 것 역시 난법임을 받아들이기 싫어했다.
연설하는 사람에 대해 오체투지로 탄복하고 마치 연설하는 자가사부님보다 더 높은 듯이 대했으며 그들이 하는 말이 법보다 더욱 오묘한 줄로 알았다. 말겁시기에 오직사부님께서 정법하고 계시며 대법이 사람을 제도하고 있다. 각종 종교마저 모두 안 되는데 하물며 수련중에 있는 사람은 어떠하겠는가. 연설을 듣는 사람이 이다지도 이끌려가다니, 역시 난법에 참여한 것과 같지 않겠는가? 교란에 마주하여 우리는똑똑히 파악하지도, 저지하지도 못했고 오히려 숭배하고 부채질했다. 난법형세를 격화되게 해, 연설을 듣는 것을 난법이라 할 수 있는 게 아니겠는가?
‘연설하는 것은 난법이다’는 밍후이 편집부의 글로 발표됐고문제에 관련하여 매우 확고하고 엄숙하게 의심할 여지없이 말했다. 무엇 때문인가? 사부님께서는 전에 우리더러 중대한 문제는 밍후이왕의 태도를 보라고 하셨는데 이는 중대한 문제가 아니겠는가? 난법하는 일보다 더 중대한 문제가 있겠는가? 밍후이 글에서 이렇게확고하고 엄숙히 문제의 실질을 지적했음에도 우리를 각성하게 하는데 부족하단 말인가?
제자로서 우리는 사존의 자비와 고심한 제도를 얼마만큼 알수 있겠는가! 사존께서는 우리에게 깨달아 돌아오고 수련해 돌아올 기연을 남겨주셨다. 사존께서는 제자 한 명도 떨어뜨리려 하지 않으시며 제자 한 명도 훼멸되게 하지 않게 하려 하신다. 자비로운 사존께서는 줄곧 오랫동안 고심하게 제자들이 스스로 깨달아 돌아오기를 기다리셨고, 그래도 깨닫지 못하자 밍후이 편집부에서 문장을 발표했다. 그러나우리는 아직도 각종 구실을 대며 고치려 하지 않는다. 그 원인을 살펴보면 연설을 듣는 것에 깊이 빠진사람은 대다수가 각종 원인으로 법공부가 깊지 못하고 법리가 명백하지 못하며 진위를 가리는 능력이 차하다. 연설하는것을 숭배하는 사람 대다수는 고심한 수련과 착실한 수련을 하지 않으려 하면서 또 첩경을 찾으려는 사람이다. 마치사부님께서 ‘전법륜’에서 말씀하신 “수련하는 사람이 자신을 파악하지 못하면 제도(度化)하기가 무척 어려우며 곧 자신을 망치기 쉽다.”와 같다.
며칠 전 밍후이왕에 게재된 수련생의 글이 생각난다. 누군가 연설을 들은 후 이렇게 말했다고 한다. “사부님께서 학생을알게 가르치지 못했으나, 학생이 학생을 알게 가르쳤군요.”이 구절을 보고 나는 깜짝 놀랐다. 이는 얼마나 황당하고 이지가 없는 말인가! 사부님께서 우리에게 얼마나 많은 것을 해주셨고, 얼마나 많은 것을감당하셨으며, 얼마나 많은 대가를 지불하셨는지 누가 똑똑히 말할 수 있을 것이며, 그 불은호탕(佛恩浩蕩)의은혜에 우리는 어떻게 다 감사드릴 수 있겠는가! 이런 몇 마디 난법의 말에 그렇게 오체투지로 탄복하다니정말로 가련하고 가소롭다. 이 말에서 평소에 착실히 수련하지 않고 법에 있지 않았음이 족히 드러난다. ‘연설하는 것은 난법이다’의 글은 조금도 과한 게 없으며 곧바로 핵심을 찔렀고 연설을 듣는 사람 역시 난법임을지적했다. 그리고 지금까지 각종 구실로 논쟁하고 책임을 회피하려는 사람, 다른 의도가 있고 배경이 복잡한 사람을 제외한 사람은 더는 사람의 관념을 안고 집착스레 놓지 않으려 하지 말자. 우리의 경지가 제고되고 심성이 승화되게 할 수 있는 것은 오직 법이지 않는가.
우리는 수련자이며 잘못이 있는 게 두려운 게 아니라 품에안고 고치려 하지 않으려는 게 두렵다. 관건은 우리가 정념으로 착오를 대할 수 있는지, 그것을 인식하고, 포기하며, 즉시정확한 길로 바로잡을 수 있는지 이다. 수련자마다 마땅히 자신과 법의 관계를 바르게 해야 하며, 자신과 사부님의 관계를 바르게 하여 법을 스승으로 모시는 것을 익혀내야 한다.오직 법에서 안으로 찾아 수련하며 법에 동화해야 비로소 법의 표준에 도달할 수 있으며 비로소 높은 층차로 승화할 수 있다.
이렇게 오랫동안 연설하고 연설을 들은 난법 행위에 대해 우리는전혀 모르고 있었다. 자비로운 사존께서는 이렇게 오랫동안 기다리셨고 수련생 스스로 깨달아 돌아오기를기다리셨다. 그러나 일부 사람 마음을 놓지 않는 사람은 갈수록 더욱 멀리 가고 있다. 현재 어떤 사람은 또 ‘연설하는 것은 난법이다’는 편집부의 글이며 사부님께서 말씀하신 법이 아니라며 자신을위해 책임을 회피하려 한다. 편집부의 글임에는 틀림없다. 그러나만일 사부님께서 경문의 방식으로 ‘연설하는 것은 난법이다’라고 말씀하시면 사람들은 다 알 것이나, 그건우리 스스로 깨달아 돌아온 게 아니다. 그렇게 심한 죄과이기에, 우리는영원히 깨달아 돌아올 기연을 잃어버리는 게 아니겠는가? 잃게 되는 것은 수련이다!
얼마나 엄숙한가. 사부님께서는중대한 문제는 밍후이왕의 태도를 보라고 하셨다. 오늘 밍후이 편집부에서 문제를 이렇게 확고하게 엄숙하게말했는데 우연한 일일 수 있겠는가?
사람 마음과 집착을 내려놓자. 마음을 조용히 하고 관념과 사람의 정을 지니지 말고 밍후이 편집부의 ‘연설하는 것은 난법이다’라는 이 글을잘 읽어보자. 연설하는 것과 듣는 이는 모두 그 속에 있는 것으로 사부님의 법에 따라 자신을 바르게닦고 대법 속으로 회귀하며 사부님을 따라 정법의 길을 끝까지 가도록 하자.
작고 얕은 인식으로 법에 부합되지 않는 곳은 수련생들이 자비로지적하길 바란다.
문장발표: 2013년 5월 30일
문장분류: 수련마당>정법수련마당>이성인식
원문위치: http://www.minghui.org/mh/articles/2013/5/30/274620.html