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明慧법회| 젊은 제자 어깨에 중대한 소임

글/대륙 대법제자

[밍후이왕]

자비하시고 위대하신 사존 안녕하십니까!

수련생 여러분 안녕하십니까!

오늘 ‘밍후이왕 제9회 중국대륙대법제자 수련심득교류회’를 통해 지난 어린 시절 대법을 얻어 13년간 수련한 경력을 사존께 보고하려고 하니, 법에 맞지 않은 부분은 아저씨 아주머니 수련생들께서 자비로 시정해주시기 바랍니다.

1. 법을 얻다

나는 1999년 3월말 어머니와 함께 법을 얻었고, 그 당시 나는 고등학교에 다니고 있었다. 비가 보슬보슬 내리던 오후, 하교시간이 되자 나는 언제나 마찬가지로 급히 집으로 달려갔다. 급히 집에 도착하여 문에 들어서자마자 나는 눈앞의 정경에 놀라 멍해졌다. 중병을 앓고 있던 어머니가 주방에서 밥을 짓고 있었는데 밥은 이미 다 되어 있었다. 급히 달려가서 어머니를 마루에 부축해서 앉히면서 원망조로 말했다. “내가 돌아와서 밥을 할 것인데 왜 기다리지 않고 밥을 지었어요. 누가 엄마에게 밥을 지으라고 했어요? 그러다 넘어지면 어쩌려고요?” 어머니는 웃으면서 말했다. “그러지 말고 어서 빨리 밥을 떠오렴, 밥을 먹고 나는 아파트단지로 가서 연공해야 해.” “뭐요? 뭐요? 밥 먹고? 연공을?” 나는 더욱 놀랐다. 더는 할 말을 잃었다. 어머니는 오랫동안 심한 위장병을 않고 있었다. 무엇을 먹기만 하면 토했는데 어떤 때는 그냥 물 한 모금을 마시고 나서 반나절 토하기도 했다. 차와 물도 마음대로 마시지 못할 정도여서 다만 약물에 의존하고 있는 상태였다. 나는 이런 어머니 때문에 반년 동안 늘 마음을 조이는 나날을 보내고 있었다. 점심에 어머니가 약을 먹고 나서 약까지 토하는 참상을 보고 놀란 마음을 아직도 진정시키지 못하고 있었다. 그런데 그랬던 어머니가 오늘은 식사하겠다고 하니 놀라지 않을 수 없었다. 어머니는 웃으며 밥을 먹겠다고 고개를 끄덕였다.

나는 급히 주방으로 가서 밥상을 차렸다. 어머니가 이미 마련한 반찬은 용수면(면발이 가는 국수)에 계란을 볶은 것이다. 나는 작은 공기에 밥을 반 정도 담고 머뭇거리다가 한 숟가락 더 담아 반 그릇이 넘었다. ‘이걸 다 먹을 수가 있을까?’라고 생각했는데 어머니는 자연스럽게 밥을 먹으면서 “너도 빨리 먹어라, 그리고 같이 연공장에 가자. 남들에게 우리를 기다리게 하면 안 된다.”라고 재촉을 했다. 나는 “네, 네,” 하면서 급히 식사했다. 어머니는 반 그릇이 넘는 면을 전부 먹었는데 토하려는 기색이 없었다. 놀라움에 할 말을 잃었다. 나는 더 먹을 겨를도 없어 급히 어머니에게 쌍지팡이를 집어주었다. “지팡이는 필요 없어, 필요 없어. 6시 정각에 만나기로 했으니 지각하면 안 돼!“라고 말하고 먼저 대문을 나섰다. 할 수 없이 어머니가 1년 넘게 짚고 다녔던 쌍지팡이를 집어던지고(어머니는 1997년 구정 전날 교통사고 요추2번 압축성골절을 당해 신경 압박) 급히 어머니를 부축하며 말했다. “천천히 해요, 넘어지면 안 돼요.” 그러자 어머니는 나의 손을 가볍게 만류하며 “그냥 둬, 나 좋아졌어, 괜찮아!” “좋아졌어요?” 하고 묻고 어머니가 계단을 내려갈 때 안정적으로 발걸음을 옮기는 걸 보고, 나는 ‘내가 꿈꾸는 것이 아닌가?’ 하고 의심했다….

이런 어머니의 변한 모습이 너무나 갑작스럽게 발생하여 처음에는 정말로 믿어지지 않았다. “엄마, 내가 지금 꿈꾸고 있는 것 아니죠?” 어머니는 “아니야.”라고 했고, 나는 또 참지 못하고 물었다. “엄마 내가 정말로 꿈꾸는 것 아니죠?” “진짜 아니라니까!” 또 한참 걸었다. 나는 정말로 더 묻고 싶은 것이 많았는데 연공장에 이미 도착했다. 한 아저씨가 어머니를 보더니 “공법 배우러 오셨나요?”라고 물었고, 어머니는 “그래요.”라고 답했다. 그래서 그 아저씨는 어머니에게 공법을 가르쳐주었다.

어머니가 공법을 배우고 있는 장소와 좀 떨어진 곳에서 편안하고 우아한 음악소리가 들려왔고 많은 아저씨 아주머니가 연공을 시작했다. 나는 한참을 보고 있었다. 그러나 나는 다시 학교로 가서 저녁 자습시간에 참가해야 했다. 어머니에게 공법을 가르쳐주는 아저씨에게 “아저씨, 저는 학교에 가야 해요. 감사합니다.”라고 말했다. 그 아저씨는 “나에게 감사하다고 하지 말고 사부님께 감사드려야 한다. 이것도 다 너의 어머니가 대법과 인연이 있는 것이란다.”고 말했다.

나는 학교 방향으로 걸어갔다. 그러면서 그 아저씨의 말을 이해할 수가 없었지만 알고 있을 것 같았다. 어머니의 그렇게 위중하던 병이 순식간에 나아진 것, 이는 너무나 신기하지 않은가! 참으로 너무나 신기해! ‘무슨 공법인데 현대의학보다 더 발달했지? 직장 병원장은 우리의 오랜 고향 사람으로 위장병 전문의인데, 나에게 신신당부한 적이 있다. “너의 어머니의 병은 아주 위중한데 약을 단 한 번이라도 멈추면 안 된다. 내가 처방한 이 약을 다 먹고 바로 병원에 와야 한다. 세밀한 관찰이 필요하다.”라고 했었다.

그런데 어머니의 그렇게 위중한 위장병은 현재 나았고, 식사하고도 토하지 않는다! 내가 직접 본 것이다! 나는 더는 마음을 졸일 필요가 없다! 나도 나의 친구들과 같이 걱정 없이 공부에만 전념할 수 있는 생활을 할 수 있다! 나는 기쁜 마음에 껑충 뛰었다. 그 아저씨의 말을 기억해내며 ‘사부님을 만나면 반드시 감사드려야지! 물론 이 공법에도 감사드려야지.’ 하고 생각했다.

2. 선택

어머니가 연공을 시작한 후 더는 약을 먹지 않았다. 일주일 동안 식사는 완전히 일반인과 다를 바 없는 정상적인 식사를 했다. 어머니는 한 달 뒤 회사를 다니기 시작했다. 가정은 또 즐거움으로 넘쳤다. 어머니가 연공을 일주일 한 후 아주머니들의 도움으로 보서인 ‘전법륜(轉法輪)’을 모셔왔다. 나는 주말이면 어머니를 따라 연공장에 가서 연공하고 연공이 끝난 후 아주머니들과 같이 ‘전법륜(轉法輪)’을 읽었다. 그 책은 나의 시야를 열어주었고 나의 흉금을 넓혀주었으며 사람이 되는 도리를 가르쳐주었는데, 나에게 ‘실과 득의 관계’와 ‘진선인(眞善忍)’이 우주의 최고 법리라는 것을 알게 해 주었다. 나에게 신과 부처님의 진실한 존재를 알게 했고 근본적으로 중공사당(中共邪黨)이 나에게 주입시킨 ‘무신론’의 독소를 제거해주었다.

그러나 좋은 날은 길지 않았는데 한 달이 안 되어서 ‘4.25’사건이 발생했다. 3개월 뒤인 ‘7.20’ 에 사당은 파룬궁(法輪功)에 대한 전면적인 박해를 시작했다. 이 갑작스러운 적색공포는 우리에게 많은 것을 생각하게 하였다. 어머니는 대형에너지원회사인데 중공정부의 적색문서에는 이런 규정이 있었다.“파룬궁을 연마하는 자녀는 군에 입대할 수 없고, 일자리를 배정받을 수 없고, 대학을 졸업해도 일자리를 마련해주지 않는다.” 그때 어머니는 이렇게 말했다. “너는 학업에만 열심히 노력해라. 대학에 합격하면 된다. 우리 되돌아가지 않을 것이다. 그들의 취업도 바라지 않는다. 능력이 있게 되면 우리 스스로 하면 된다. 아마 출국해서 중국에 있지 않을 수도 있다.” 그래서 우리는 대법을 택하기로 결정했다. 그 후 얼마 지나지 않아서 깊은 밤에 큰 파룬(法輪)이 우리 집 거실에서 나는 듯이 돌고 있었다. 어머니는 “이는 사부님께서 우리를 격려해 주시는 것이다.”라고 말씀하셨고 나와 어머니는 집에서 법 학습과 연공을 견지했다.

3. 악을 제거하다

내가 고등학교 3학년에 진학했을 때 겨울방학이었는데 집집마다 설을 쇠려고 분주하게 준비하고 있었다. 그래서 어머니도 바빴지만 나는 혼자서 TV를 보고 있었다. 그런데 갑자기 TV보도가 나오면서 화면에 천안문광장에서 큰 불이 일어나는 장면이 나타났다. 보도에 의하면 “파룬궁 수련생이 천안문에서 분신자살했다.”고 했다. 나는 놀라서 급히 어머니를 불러 보게 했다. 어머니는 반나절이나 계속 TV를 시청하고는 아무 말이 없었다. 어머니의 마음이 아주 무거워 보였다. 저녁에 어머니는 밤늦도록 보도되는 이 뉴스를 계속 시청했다. 설 명절 기간 내내 어머니는 아주 말수가 적어졌다.

구정을 쇠고 나서 어느 날 어머니는 자전거를 타고 집을 나갔다가 돌아올 때는 붉은 종이 한 묶음, 가위, 먹, 붓, 연필을 갖고 왔다. 어머니의 안색을 보니 기분이 좋지 않은 것 같아 나는 감히 뭘 물어보지 못했다. 어머니가 종이를 펴더니 책 정도의 크기로 절단한 다음 앉아서 글을 썼다. 글을 쓰고 난 후 나에게 건네주었다. 내가 읽어보니 “천안문 분신자살사건은 허위 날조이다. 거짓을 위해 살인하는 것은 천리가 용납 못한다!”라고 적혀 있고, 그리고 파룬궁(法輪功)을 모함함을 폭로하는 시 한 수가 적혀 있었다. 나는 조심스럽게 어머니에게 물었다. “천안문 분신자살사건이 정말로 날조에요? 이렇게 큰 집권 정당이 이 정도로 비열하다니!” 어머니의 분노는 자제할 수 없는 정도에 도달했다.

어머니는 “장 모모가 파룬궁을 박해하는 것은 마오 모모가 문화혁명을 발동한 것보다 그 수법이 더욱 악랄하다! 마오는 중국전통문화를 훼멸시켰고, 장은 전 국민의 도덕을 훼멸시켰어! 한 국가나 한 민족의 도덕이 붕괴될 때, 이 국가 이 민족은 철저히 끝장난다! 만약 ‘진선인(眞善忍)’이 잘못 되었다면 세계에는 하나도 바른 것이 없다! 그것들이 이런 짓거리를 만약 바로 중지하지 않는다면 장 모모는 내부에서 XX당을 훼멸시킬 것이다.”라고 말하고 한숨을 쉬고 나서 계속해서 말하기를 “남에게서 한 방울 물의 은혜를 받았으면 솟구치는 샘물과 같이 보답해야 한다고 했다. 파룬궁이 나의 목숨을 구해주었으니 나는 보답할 길이 없구나. 공산당정부가 이렇게 마구잡이로 대법을 모함하고 사부님을 모함할 때 나는 반드시 일어나서 사람으로서의 가장 최소한의 양심으로 이 무치한 거짓말을 폭로해야 한다. 그것들은 손에 국가기구를 전부 장악했지만 우리에게는 두 손이 있다. 우리는 가장 원초적인 방법으로 백성에게 ‘천안문 분신자살사건은 가짜’라는 것을 알려줘야 한다. 우리는 온 힘을 다해서 해야 한다. 비록 아주 보잘것없지만 할 수 있는 데까지 다 해야 한다.”고 했다. 어머니는 정말로 노 운동원이었다. 어머니가 자주 하는 한마디 말은 “우리 이 세대가 겪은 것은 너무나 많다.”이다. 나는 어머니를 이해할 수 있었다.

바로 이렇게 어머니가 하얀 면에 글을 적으면 나는 붉은 면에 예서체로 ‘쩐싼런하오(眞善忍好-진선인은 좋습니다)’를 적었다. 어머니가 얼마를 쓰면 나도 얼마를 썼다. 그리고 붉은 종이로 감싼 후 어머니는 갖고 나가서 배포했다. 바로 이렇게 이틀 동안 글을 적었고 하루 동안 이를 배포했는데, 나는 학교가 개학할 때까지 계속했다.

개학 후 고등학교 졸업시기를 맞게 되어 기숙사에서 학교생활을 했다. 그래서 일요일이면 집으로 가서 어머니와 함께 적었는데, 고등학교를 졸업할 때까지 계속했다. 후에 꿈을 꾸었는데 우리가 적은 진상자료 하나하나가 모두 위풍당당한 어린 요정으로 변해 손에 긴 창을 들고 수많은 악마를 죽이는 것을 보았다.

4. 사부님께서 나에게 전공을 선택해주시다

나는 수능시험이 끝난 후, 모든 정력을 투입하여 어머니와 함께 진상자료를 쓰고 배포했다. 나는 전공을 지원할 때가 됐음을 알고 지원서를 갖고 집으로 돌아왔다. 어머니는 쓰던 것을 멈추고 진지하게 나의 전공 지원을 생각했다. 1, 2차 지원을 적은 후 어머니가 말했다. “제3 지원은 네가 적어, 생각나는 대로 적어 봐.” 나도 그렇게 생각했다. 이미 어머니의 많은 시간을 빼앗았는데 세 번째 지원은 대충 숫자를 맞추면 된다고 생각했다. 그러나 생각은 그랬어도 무엇을 택해야 할지 생각이 나지 않았다. 그러다가 지원하는 학교마다 모두 ‘토목 전공’에 체크했다. 그 해 각 대학교 토목학과가 미달된 것을 알게 되었고, 더는 나의 앞날을 생각하지 않아도 자연히 알 수 있었기 때문에 그렇게 했다. 지원서 쓰기를 마치고 나니 마음이 홀가분하여 그것에 대해서는 아무런 생각도 하지 않고 본격적으로 어머니를 도와 ‘진상자료’ 적는 데만 전념했으며 그렇게 개학할 때까지 썼다.

후에 아버지의 친구인 어느 부현장급 사람으로부터 말을 듣고 알게 되었는데 ‘토목과 전공’이 현재 5가지 인기학과 중에 한 과라는 것을 알게 되었다. 사부님께서 좋은 전공과를 선택해 주신 것에 대해 진심으로 감사를 드립니다!

5. 사존의 보살핌

사존께서 나에게 좋은 전공학과를 선택해주시는 등 시시각각 모두 나를 보살펴 주셨다. 사존께서는 정말로 항상 우리 곁에 계셨다. 이것은 진짜이다!

내가 대학교 3학년 과정을 거의 마치던 그 해 5월 4일 어머니는 진상자료를 배포하다가 악경(사악한 경찰)에게 납치되었다. 나는 생활의 대책이 없게 되었다. 심적으로 아주 큰 충격을 받았다. ‘천안문 거짓분신자살사건‘에서 사당의 악독성에 대해 이미 초보적으로나마 알고 있었으므로 어머니가 검은 소굴에서 어떤 혹심한 고초를 겪을지 몰라 정말로 걱정되었다. 학교에서 이런 일에 관해서는 가장 친한 친구에게도 말할 수 없었는데 더욱 큰 고통은 그걸 마음속 깊이 숨기는 것이었다. 낮에는 억지로 정신을 차렸지만 밤이면 어쩔 수 없어서 이불 속에서 사부님께 빌었다. ‘사부님, 저의 어머니는 그렇게 위중한 병중에서 수련을 하자마자 순식간에 나았어요. 이번에도 사부님께서 저희 어머니를 보호주시길 바라오니 빨리 나올 수 있게 해주세요.’ 마음속으로 이렇게 생각하면서 아주 달게 잠을 잤는데 자신도 신기할 정도였다.

여름방학 때 그것들은 어머니를 또 ‘세뇌반’으로 보냈다. 어머니는 여전히 집에 돌아오지 못했다. 그것들은 나에게 어머니가 수련을 포기하도록 설득하라고 요구했다. 이는 어머니의 목숨을 앗아가는 것이 아닌가? 내가 어찌 이렇게 하겠는가. 그것들이 나에게 어머니를 만나게 한다면 나는 물론 만날 것이다. 나는 자신에게 말했다. ‘어머니를 만나면 울지 말아야 해.’ 어머니를 만나던 그날 나는 정말로 울지 않았고 울지 않았을 뿐만 아니라 또 어머니에게 “나에 대해 걱정하지 말아요. 나는 이미 다 컸어요.”라고 말했다. 어머니가 나에게 학비와 생활비를 어떻게 마련하느냐고 물었을 때도 “나는 괜찮아요. 장학금을 받으니까 걱정 없어요.”라고 대답했다. 내가 어머니와 만날 때 악경은 시종 곁에서 입회 감시했다.

어머니의 면회를 끝내고 검은 소굴 대문을 걸어 나가면서 돌아서서 웃으면서 어머니 손을 잡고 흔들었다. 그런데 뜻밖에도 나의 그런 태도와 그런 웃음이 악경을 화나게 했다. 집에 돌아오는 길에 그들은 나를 위협했다. “네가 우리에게 협조하지 않았으니 우리는 너의 어머니가 파룬궁을 수련한다는 사실을 학교에 통보하겠다.” 나는 화나서 말했다. “당신들은 정말로 수치심도 없는 사람이다! 차를 세워요! 나는 내릴 거예요!” 그들은 정말로 차를 멈췄고 나는 차에서 내렸으며 그들은 가버렸다. 나는 사방을 둘러보았으나 정말로 여기가 어딘지를 분간할 수가 없었다. 길옆에 서서 냉정을 찾았다. 버스 한 대가 나의 곁에 멈추더니 물었다. “모모 곳에 가나요?” 내가 보니 정말로 우리 그곳으로 가는 버스였다. 나는 가벼운 마음으로 차에 올랐고 그렇게 무사히 집에 도착했다. 나는 길에서 마음속으로 사부님께 감사드렸다.

개학하면 나는 대학교 4학년이 된다. 카드에 있던 돈은 갈수록 적어져서 이제는 학비는 물론 식사하는 것도 어렵게 되었다. 어찌할까? 그런데 이 절박한 시기에 누가 알았으랴, 개학하자마자 좋은 일이 생겼다. 내가 연속 3년 동안 성적이 우수하여 최고의 장학금을 받은 것이다. 이렇게 한 학기의 식사문제는 기본적으로 해결되었다. 이어서 ‘전 시 대학생강연대회’, ‘대학생웅변대회’ 등등이 있었는데 무릇 그런 경연대회가 있으면 모두 나에게 참가하라고 알려주었고 참가하기만 하면 나는 대상을 받았다. 나는 정말로 좋은 일이 연속 일어났다. 그러므로 그토록 조급해했던 나의 마음은 이렇게 홀가분하게 변했는데 사부님께서 모두 풀어주고 계셨던 것이다. 그러나 이런 것들은 아무것도 아니다. 더 신기한 일은 뒤에 있었다.

졸업할 때 동료들은 모두 취업을 준비했다. 모두 중국의 상황을 잘 알 것인데 대학교를 졸업한다고 해도 취업이 무척 어려운 실정이라 실업자나 다른바 없는 경우가 허다하다. 나는 취업에 앞서 세 가지를 선택할 수 있었다. 첫 번째 나는 우수한 학력에 따라 우리 원 회사로 가서 취업할 수 있었다. 두 번째는 성의 어느 한 교각회사를 선택할 수 있다. 세 번째는 아주 먼 대서북의 한 교각회사다. 학생들은 모두 나를 부러워했다. 나는 사부님께서 나를 도와주심을 알고 있었다. 수련의 자유를 감안하고 급여의 대우를 고려하여 대서북을 택했다. 사실 이것 또한 사부님께서 순서 있게 배치해 주신 것이다. (이때 어머니와는 1년 넘게 연락이 닿지 않았다.)

대서북에 도착한 후의 경과에서는 업무 방면에서는 말하지 않고 사존께서 보살펴주신 것만을 말하려고 한다. 서북교각회사에 도착한 지 반년이 안 되어 사부님께서는 어머니와 연락이 닿도록 배치해 주셨다. 나의 기쁨은 생각만 해도 다 알 것이다. 어머니는 늘 나를 격려해주셨다. “사부님의 말씀을 듣고 사부님의 요구에 따라 해야 한다.” (나는 어머니와 특별한 연락방식이 있었는데 전화상으로는 그렇게 자세하게 말할 수 없었다.)

서북에 온 지 일 년이 넘어서 고향에 갔다. 어머니와 거의 3년 동안 만나지 못했으니 마음은 정말로 조급했다. 어머니의 곁으로 돌아갔을 때는 12월 29일 점심때였다. 나는 어머니와 20일도 채 안 되게 함께 있었는데 이 기간 동안 어머니와 함께 법 학습하고 ‘9평’을 보고 같이 자료와 진상 접착테이프를 붙였으며 함께 얼굴을 마주하고 사람에게 3퇴를 권했는바 아무튼 매일 하루가 모두 충실하고 즐거웠다.

정월 보름, 회사로부터 빨리 돌아오라는 독촉을 받았다. 정주나 신양에 친분이 있는 동료 등, 통할 수 있고 움직일 수 있는 모든 사람을 동원하고 부탁해서 열차표를 구하려고 했지만 구할 방법이 없었다. 할 수 없이 다음 차를 예약할 수밖에 없었다. 그렇게 해서 내가 늦게 회사에 도착해서 알게 되었는데 우리 회사와 멀지 않은 곳에서 태풍으로 11량의 열차가 탈선 전복되는 사고가 발생하여 많은 사람이 죽었다. 바로 사고당한 그 열차가 내가 그렇게 애를 쓰며 표를 구입하려고 했으나 구입하지 못했던 열차였다. 나는 어머니에게 전화를 걸어 이 같은 사실을 말하였는데 우리는 사부님께서 또 한 번 나를 보호해주셨음을 알았다.

6. 사부님께서 배치하신 길을 걷다

대서북에 3년 반 동안 근무하면서 환경도 비교적 안정되고 또 일정하게 저축도 할 수 있는 형편이 되어서 어머니를 모셔오려고 했다. 다음해 새해에 정주의 친구에게 부탁하여 두 장의 열차표를 구입했다. 어머니도 반대하지 않으면서 “사부님의 배치이면 나는 가게 될 것이고, 사부님의 배치가 아니라면 너도 나를 데려가지 못한다. 그러니 이 일을 사부님께 여쭤보자.”라고말했다. 나는 “그럴 필요 없어요. 딸이 자기 엄마를 모시겠다는데 사부님께서 반대하시지는 않을 거예요. 그곳 한 동료의 셋째 이모도 연공자라 엄마가 그곳에 가게 되면 그들과 함께 어울릴 수 있고 또 수련환경을 이탈하는 것도 아닌데 사부님께서 반대하시지 않을 거예요.”하고 말했다. 이 일에 대해 나는 특별히 자신이 있었다.

나는 정주역에 도착하여 어머니가 사전에 준비해 놓은 진상편지를 우편함에 넣었으며 마음은 담담했다. 열차시간이 아직도 몇 시간이나 남아서 가방을 보관소에 맡기고 어머니와 함께 쇼핑하려고 생각했다. 그래서 보관 장소에 도착했는데 그곳에서 검사원들이 모든 가방을 전부 검사하며 가방 안을 샅샅이 뒤졌다. 나는 갑자기 불안해져서 작은 소리로 어머니한테 물었다. “엄마, 가방에 무엇을 넣지 않았죠?” 어머니는 “없어, ‘전법륜(轉法輪)’은 내가 항상 몸에 지니고 다니는 것이라 이 작은 가방에 넣어뒀으니 따로 보관할 필요가 없다.”고 했다. 그래도 왠지 내 맘 한 구석이 여전히 불안했으며 갈수록 불안한 느낌이 커졌다. 나는 멍하니 서서 마음속으로 사부님께 여쭈었다. ‘사부님, 제가 엄마를 모시고 가야 합니까? 만약 제 의견이 옳다면 밖에서 두 명의 여성이 들어오게 하시고, 만약 내가 엄마를 모시고 가지 말아야 한다면 밖에서 남자 한 명 여자 한 명이 들어오게 해주세요.’라고 청을 드렸는데 이런 생각을 하자마자 바로 밖에서 남자 한 명 여자 한 명이 들어왔다. 내 눈에서는 눈물이 줄줄 흘러내렸다. 나는 어머니 어깨에 얼굴을 기대고 울면서 말했다. “엄마, 내가 잘못했네요. 엄마를 모시고 가지 말아야 했어요.” 라고 말하며 사부님께 청하고 답을 받았던 과정을 어머니에게 말해주었다. 어머니는 “울지 마라 울지 마, 사부님께서 우리에게 가지 말라고 하시면 가지 않으면 되는 거야, 환불하자.” 나는 열차표를 환불했다.

외할머니 댁으로 돌아가서 어머니에게 말했다. “사부님께서 어머니에게 가지 말라고 하시니 나도 안 가겠어요. 나는 집에서 엄마랑 같이 수련할래요.” 어머니는 “사부님께서는 나보고 가지 말라고 하셨지 너까지 가지 말라고 하시지 않았잖아?” 나는 “열차표를 모두 환불했어요. 10일 동안은 다시 열차표를 구매할 수 없어요.” 그러자 어머니는 “만약 사부님께서 너에게 가라고 하시면 비행기를 타고서라도 너는 가야 한다.”고 했다. “나는 회사에서 그럴만한 대우를 받지 못해요.” 그러자 어머니는 사부님의 배치를 두고 보자고 했다.

하루가 지나자 회사에서 전화가 왔다. 나에게 급히 오라고 연락했다. 내가 “10일 동안은 열차표를 구입할 수 없는데 어떻게 빨리 돌아가요?”라고 했더니 상사의 말이 “그럼 너 빨리 비행기 타고 와라.”고 했다. 어머니가 옆에서 듣고 웃었다. 나도 덩달아 웃었다. 나는 인터넷 사이트로 들어가 항공권을 예매하면서 어머니에게 말했다. “항공권 예매가 잘 될지나 몰라요.” 어머니는 “사부님의 배치이시면 마지막 한 장이라도 너를 위해 남겨뒀을 것이다.”고 했다. 우리는 그날 밤차를 타고 공항으로 갔다. 다음날 아침 8시 반에 예매소에서 항공권을 받을 때 직원으로부터 들은 말은 “우루무치로 가는 마지막 한 장입니다.”였다. 나는 어머니와 함께 웃었으며 마음속으로 사부님께 감사드렸다.

나는 이 일을 통해 아주 깊은 감촉을 받았다. 대법제자로서 오로지 사부님께서 배치하신 길을 걸어야 비로소 갈수록 더 넓어지는 것이고 그렇지 않으면 정말로 한 걸음도 떼기 어렵다는 것을.

금년 섣달 그믐날 서남의 한 교각회사에서 고액 연봉으로 나를 스카우트하려고 했는데 나는 바로 거절했다. 왜냐하면 나는 어머니와 함께 수련하고 싶었기 때문이다. 어머니는 “너는 잠시 생각도 해 보지 않고 거절했는데 만약 그것이 사부님의 배치였다면 넌 또 잘못한 것이야.” 이 말을 듣고 마음이 조급해졌다. “이미 거절했는데 어떻게 할까요?” 어머니는 “걱정하지 마라. 만약 사부님께서 배치하신 거라면 그들은 또 전화를 걸 것이다. 사부님께서는 자비하시어 너에게 화를 내지 않으셔. 그러나 이후부터는 어떤 일에서든지 부딪히게 되면 반드시 먼저 사부님께 여쭤보는 것이 습관이 되어야 한다.”라고 알려주었다. 나는 어머니의 말을 기억하고 있었는데 오후에 그들은 정말로 또 전화를 걸어왔다. 나는 허락했다. 이것이 사부님께서 배치하신 것이기 때문이다.

7. 지난 날 어린 대법제자가 오늘날 중임을 어깨에 짊어지다

13년간의 수련의 길을 돌아보면 나는 사존의 자비로움과 수련의 엄숙함, 대법제자의 사명을 깊이 느낄 수 있었다. 나와 어머니는 모녀지간이지만 또한 같은 수련생지간이다. 그러나 수련의 길은 엄연히 각기 다르고 모두 자신의 사명이 있다. 그러므로 사존께서 배치하시는 것은 상당한 순서가 있었다. 어머니는 늘 나에게 이런 말을 한다. “사부님께서 너에게 이렇게 고액의 수입을 안배해서 배치하셨는데 그건 너보고 인간세상에서 복을 누리라는 것이 아니야.” 나는 “저도 알고 있어요.”라고 말했다.

금년 새해에 ‘명혜주간’에서 한 수련생의 글을 보았다. 내용은 ‘구세력의 경제적 박해를 부정하다’이다. 한 자료점이 운영과정 중에 자금이 부족해서 곤란을 겪는 문제였다. 나는 즉시 1만 7천 위안이 들어 있는 현금카드를 어머니에게 맡겼다. “이 돈은 엄마가 보관하고 있다가 어느 자료점에 비용이 부족하여 여의치 않다면 거기에 보태세요. 나중에 돈이 모자란다면 내가 다시 마련해서 보내지요. 나는 곧 만기가 되는 카드가 또 있어요. 어머니는 ‘우리의 목숨은 사부님께서 주신 것이고 사부님의 구명 은혜에 보답할 길이 없다.’라고 늘 말하지 않으셨나요? 나는 정중하게 선포하는데, 엄마 딸이 번 돈은 전부 대법의 자원입니다.” 어머니는 그런 말을 선포하고 만족해하는 내 모습을 보고 활짝 웃었다.

며칠 전 나는 또 전화를 걸어 어머니에게 물어보았다. “돈을 더 부칠까요?” 어머니는 잠시 후 당장은 필요 없다고 했다.

문장을 여기까지 쓰고 나니 나는 정말로 큰 자부심을 느낀다. 내가 6년 동안 일하면서 첫 해는 말하지 않더라도 어머니와 연락이 닿은 후부터 계속 어머니에게 몇 만 위안씩을 송금했다. 나는 어머니가 이 돈을 모두 대법을 실증하는 곳에 쓴 것임을 알고 있다. 어머니의 말이 옳았다. 사부님께서 이렇게 고액 수익으로 배치해 주셨는데 바로 대법을 실증하는 데 쓰라고 하신 것이다. 사실 이것 또한 사부님께서 어머니의 입을 통해 나에게 점화해 주신 것이다. 나는 반드시 사부님의 말씀만을 들을 것이다!

8. 일과 혼인

사회로 진출하여 일을 시작하면서 나는 곳곳마다 사부님께서 요구하신 표준에 따라 행했다. 서북에 간 지 얼마 안 되어 한 회사에서 나에게 전화를 걸어와 두 배 더 높은 고액연봉으로 채용하겠다고 했지만 나는 거절했다. 나는 이것은 나의 이익을 바라는 마음을 제거하는 것임을 알고 있었다. 나는 상대방에게 이렇게 말했다. “당신의 좋은 제의에 대해 대단히 감사드리지만 저는 받아들일 수 없어요. 내가 지금 당장 이 회사를 떠나면 이곳에는 나를 대신할 적당한 사람이 없기 때문입니다. 또한 지금 입찰 건이 아주 관건적인 시기라서 이곳 사장님이 다른 적합한 사람을 찾는다는 것은 불가능한 일입니다. 나는 내 개인적인 이익만을 생각하고 전반적인 상황을 생각하지 않을 수 없는 입장입니다. 저의 이런 입장을 당신께서 이해하시리라 믿습니다.”

누가 알았으랴, 이 일은 같은 업계에서 아주 빨리 전해졌고 우리 회사 사장에게도 전해졌다. 사장은 아주 감동하면서 “지금도 당신 같은 사람이 있다는 것을 믿을 수가 없네.” 얼마 안 가서 사장은 나에게 업무량이 많고 능률도 좋고 인품 또한 특출하다며 연봉을 올려주었다. 이후부터 해마다 연봉을 올려주었는데 작년에 나는 거의 고위급 엔지니어에 버금가는 대우를 받게 되었다. 회사의 엔지니어들은 출장이 아주 잦다. 어디를 가든지 간에 부수적인 수입은 건져 올릴 수 있었다. 일부 공사현장 책임자는 공개적으로 얼마만큼의 흙과 돌을 비준해주면 나에게 얼마만큼의 이득을 주겠다고 청탁했지만 나는 모두 거절했다. 나는 우주의 최고 법리인 ‘진선인(眞善忍)’이 시종 업무에서 나타나게 했으며, 수련인의 표준으로 자신을 엄격하게 요구했다. 조금이라도 사실과 부합되지 않게 작성하지 않아, 사장은 물론 동료들로부터도 신임과 존경을 받았는데 그렇게 되자 마구잡이식이라고 소문난 현장책임자도 나에게 탄복하며 존중해 주었다. 나는 이것이 대법의 위력임을 알고 있다.

작년에 나는 이미 국가 ‘2급 조가사증(二級造價師證)’과 ‘공정 감리자격증’, ‘공장안전시공감독자격증’ 등 건축 방면의 자격증서를 받았다.

실은 금년에는 어디에도 가지 않고 어머니와 함께 수련만 하고 싶었고 합격한 ‘정법시기 대법제자’가 되고 싶었다. 그러나 예상 외로 나의 이름이 업계에서 유명인으로 전해졌는데 대서북에서 대서남으로 전해지면서 전혀 알지 못했던 사장이 ‘하늘 같이 높은 고액’의 연봉을 제시하며 나를 고용하려고 했다. 이 사장에게 나를 추천했던 동료가 전화로 말했다. “이렇게 하늘처럼 높은 고액 연봉으로 너를 스카우트하려고 하는데 그래도 오지 않을 거냐? 너는 인간세상의 곡식을 먹고 살지 않을 거냐?” 나는 이것이 모두 사부님의 배치임을 알았다.

대서남에 간 후 대서북의 사장이 또 전화를 걸어 돌아오라고 했지만 나는 겸손하게 말했다. “저는 이미 서남회사에 왔습니다.” 대서북의 사장이 아쉬워했다. “당신을 보낸 내가 잘못이야, 이곳의 자리는 당신에게 남겨놓을 터이니 언제든지 와서 일한다면 환영한다.” 나는 또 한 번 감사드렸다.

나는 이 일체를 모두 사부님께서 주신 것이고, 대법이 준 것임을 알고 있다. 나는 이 일체를 소중히 여길 것이고 나의 주변의 일체 생명을 소중히 여겨야 비로소 나 자신을 소중히 여길 수 있다. 나의 주변의 일체를 선하게 대해야 나 자신을 선하게 대할 수 있다. 짧은 경력에서 나는 ‘진선인, 이 보세의 가치’가 인류에 대한 진정한 뜻임을 느낄 수 있었다.

일에 대한 얘기는 모두 끝내고 다시 혼인에 관한 얘기를 하려고 한다. 나의 결혼관은 아주 간단하다. ‘자연스러움에 따르다’이다. 일체는 사부님의 배치에 맡기는 것이다. 사부님께서는 ‘전법륜(轉法輪)’에서 이렇게 알려주셨다. “우리 수련인은 자연스러움에 따름을 말한다. 당신의 물건이면 잃지 않고 당신의 물건이 아니면 당신 역시 가져오지 못한다.” 혼인도 이렇다. ‘있어야 할 것이면 있을 것이고 없어야 할 것이면 나도 강제로 추구하지 않는다.’이다. 우리 친한 친구들 중에서 나도 나이가 많은 편이다. 매번 집에 가서 설을 쇠면 나에게 남자친구를 소개하는 이들이 항상 있었다.

어느 해 숙모가 지원병 한 명을 소개해주었다. 만나면서 나의 경험과 지혜로 진상을 알렸고 3퇴를 권해서 그는 모두 탈퇴했으니, 생명 하나가 구도되었다. 그러나 나는 이것이 사부님께서 배치해주신 부분이 아님을 발견했다. 단지 이런 형식으로 나에게 그를 구하라고 하신 것뿐이었다.

어머니는 전에 나에게 ‘월노(月老-혼인을 관장하는 신)가 붉은 선을 끌다’란 이야기를 해주었다. “수련하지 않는 속인들도 혼인 대사를 ‘신’이 상관하고 있는데 우리 대법제자의 혼인도 반드시 사부님의 ‘법신’이 안배해 주시지 않겠는가. 우리가 많이 생각하는 것도 집착심이 아닌가? 하물며 우리 모두 ‘하늘에서 온 손님’인데.”

내가 아주 어릴 때 다시 말해서 어머니와 내가 수련하지 않았을 때 어머니는 나에게 이런 이야기를 해주었다. 어머니가 나를 임신했을 때 아주 선명한 꿈을 꾸었다고 한다. 열차 객차 바닥에 은전이 가득 널려 있었는데 사람들이 모두 필사적으로 주우며 서로 돈을 빼앗고 있었다. 어머니는 움직이지 않고 단지 창가에 서서 하늘의 오색찬란한 구름만 응시했다. 갑자기 놀의 가장 밝은 곳에서 큰 공작새 한 마리가 어머니를 향해 날아왔다. 차창 문에 접근한 큰 공작새는 작은 선녀로 변하여 창문을 통과해 어머니의 품으로 들어왔고, 어머니는 깨어났다고 한다. 후에 어머니는 나를 임신했다. 그때 오빠는 단지 한 살 반이고 젖을 갓 뗀 상태인데 당시 ‘계획생육정책’으로 산아제한이 심하여 한 명의 자녀를 더 낳은 것이 발각되면 회사로부터 장려금이 없어지는 때였다. 그렇게 되면 어머니는 회사로부터 면직당하게 되고 심지어 회사사장도 문책당하는 시기였다. 어머니가 한창 걱정하고 있을 때 회사 상사는 어머니에게 타 지역으로 가서 한 1년 동안만 학습하고 오라고 했다. 어머니가 학교에서 나를 낳았으며 학업이 끝났을 때 나는 돌이 지났다. 이렇게 나는 무사히 인간 세상으로 올 수 있었다. 어머니는 처벌을 받지도 않았고 회사 상사는 또 나를 호적에 올리는 것도 도와주었다. 그들은 어머니가 나로 인해 학업에 영향 받지 않았고, 상상할 수 없는 어려움을 극복하고 상사가 맡긴 학업 임무를 원만히 완성했다고 했다.

법을 얻은 후 비로소 알게 되었는데 원래 이 일체는 모두 사부님의 배치셨고 사부님께서 우리에게 이렇게 세밀한 배치를 해주신 것인데 그래 우리에게 속인생활을 하라고 하신 것일까? ‘정법시기 대법제자’의 사명은 바로 ‘사부님을 도와 정법 하고 중생을 구도하다.’이다. 우리는 삼가 ‘사명에 치욕을 입히면 안 된다.’ 사존께서 배치해 주신 ‘세 가지 일’을 잘하고 우리가 세상에 내려온 홍세 대원을 완성해야 비로소 진정으로 합격한 ‘정법시기 대법제자’인 것이다!

층차의 제한으로 법에 맞지 않은 것은 수련생들께서 자비롭게 시정해주기 바란다. 사존께 감사드립니다! 여러분 감사합니다!

문장발표:2012년 11월16일
문장분류 :수련마당 > 정법수련마당>밍후이대륙법회>제9회(2012년)
원문위치 : http://www.minghui.org/mh/articles/2012/11/16/264869.html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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