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연설하는 것은 난법이다.’는 문장에 대한 인식
글/ 허난 대법제자
[밍후이왕] 밍후이왕 편집부에서 5월 4일에 발표한 문장 ‘연설하는 것은 난법이다.’는 아주 시기적절하였고 좋았다. 유력하게 법을 보호하였고 우리 더 많은 대법제자가 수련의 길을 더욱 평온하고 더욱 바르게 걸을 수 있도록 도와주었다. 아래에 이 문장의 감수를 얘기하고자 한다.
문장에서 제기한 난법 현상은 우리 지역에도 존재하는데 아주 비슷하였고 아주 엄중하였다. 작년부터 지금까지 우리 지역의 몇몇 자칭 협조인이라고 하는 사람들은 빈번하게 ‘법회’를 조직하였는데 대형, 중형이 모두 있었고 거의 주마다 모두 한 번씩 열었다. 한, 두 사람을 조직하여 도처로 돌아다니면서 연설하였는데 늘 이른바 오성이 높고 법을 잘 외우며 말재간이 좋은 사람이 말했고 또 자칭 천목이 열렸다는 사람도 따라서 자신이 본 것을 말했다. 수련생이 소업하면서 관을 넘는 일도 그를 청해 봐달라고 하면서 일부분 수련생은 그를 숭배하였다. 사실 그는 우리 현지 사람이 아니라 3, 4년 전에 우리 지역으로 왔다. 수련생들은 대부분 그를 이해하지 못하고 있고 지금도 그의 진실한 신분이 무엇이고 집이 어디에 있는지 모른다. 그는 스스로 와서 우리 지역 수련을 지도한다고 하면서 도처에서 자신을 과시하고 지도자 시늉을 한다. 무슨 ‘법회’를 열거나, 발정념을 하는 것은 모두 그의 말대로 해야 하는데 밍후이왕에 투고하는 것을 포함하여 그가 먼저 원고를 심사하고 그가 동의해야 밍후이왕에 보낼 수 있다. 무슨 항목이든 모두 그가 동의해야 하는데 우리 지역 자료점에 대해 그는 똑똑히 알고 있었고 주변 현성과 도시 협조인의 휴대폰 번호도 그는 속속들이 알고 있었으며 그는 또 외지 수련생을 요청하여 연설하였다.
이 2년 동안, 이러한 몇몇 이른바 ‘협조인’은 늘 표면적으로 우리 지역 수련상태를 부정하면서 우리 지역이 흩어진 모래알과 같고 정체를 형성하지 못했다고 여겼다. 사실 우리 지역은 7.20 이후 대부분 수련생이 모두 아주 잘했는데 북경에 가서 상방 한다거나, 혹은 진상을 알려 사람을 구하는 데서 찬양할만하고 사람을 감동시키는 일들이 아주 많았다. 자료점도 도처에 꽃을 피웠고 대부분 수련생이 모두 단체 법 공부에 참가하여 무형 속에서 정체를 형성하였다. 다만 그들이 생각하는, 그들이 희망하는 그러한 기세가 드높고 허영을 좋아하는 표면형식이 없었을 뿐이다.
우리 지역에서 몇십 리 떨어진 어느 농촌에서 늘 ‘법회’를 여는데 참가한 인원수는 많을 때에는 2, 3백 명, 적을 때에는 백여 명 된다. 듣건대 현지 파출소의 일부 경찰들도 와서 참가하고 또한 매월 정기적으로 대형법회를 연다고 한다. 우리 지역에서는 사람을 파견하여 ‘경험’을 배워오기도 하였는데 ‘경험’을 배워온 사람들은 “그들이 얼마나 기세 드높이 하는지 보라. 몇백 명이 법회에 참가하고 차량이 가득 세워져 있는 그 장면은 얼마나 사람을 감동시키는가.”라고 말했다. 어떤 사람은 “거기는 환경이 바르게 되어 하나도 두려워하지 않고 스피커를 크게 하면 십몇 리 밖에서도 들을 수 있다.”라고 말했다. 원래부터 착실하게 못 했던 일부 수련생의 마음은 모두 이끌렸고 파장이 아주 컸으며 비교하는 마음마저 나왔다. 특히 시간에 집착하는 그러한 수련생들은 이제 끝나고, 이제는 역경에서 벗어날 수 있겠다고 여기면서 아직도 이것저것 무엇을 두려워하는가 한다. 일부 수련생들은 당시 가지 않은 것을 후회하기도 한다.
법회를 열 수는 있지만, 너무 빈번하게 열어서는 안 된다. 빈번하게 법회를 조직하여 여는 데는 어떠한 마음이 작용한 것인가? 예를 들면 과시심, 비교심 등이 아닌가. 법회는 누가 열고 싶으면 열 수 있는 것이 아니라 반드시 절대적인 안전을 담보할 수 있는 전제하에서만 열 수 있다. 원고 의뢰, 원고 심사, 회의장과 참가자 등 방면에서 모두 요구가 엄격한데 엄숙하고 진정으로 수련을 촉진할 수 있는 장엄한 법회여야 한다. 도처에서 연설하는 사람들은 늘 자기는 수련이 잘되고 오성이 높으며 다른 사람들이 모두 자신보다 못하다고 여기면서 잘난 척하고 머리를 치켜든다. 그가 얼마나 높게 말하고 얼마나 말을 잘하던지 법의 함의와는 차이가 너무 난다. 우리는 자신의 수련체득 과정을 교류하고, 수련생이 법을 많이 학습하고 걸어 나올 수 있도록 독촉하며, 세 가지 일을 잘한 일부 체득을 서로 교류하고 서로 토론할 수 있는데 이것들은 모두 제대로 된 것이다. 이것이 바로 사부님이 우리에게 남겨주신 수련형식이다. 교류는 서로 제고하는 과정이지 자신이 이해한 대로 다른 사람을 지도하는 과정이 아니다. 사부님께서는 왜 이 방면에 대해 요구가 그렇게 엄하셨는가? 왜냐하면, 이것은 대법을 엄중히 파괴하는 것이고 말하는 사람들은 모두 자신이 깨닫고 느낀 점을 말하는 것이기에 이러면 쉽게 대법의 원래 것들을 개변할 수 있기 때문이다.
작년 우리 지역에는 자칭 성도(省城) 책임자라고 하는 두 사람이 와서 이른바 교류를 하였는데 말하기 시작하면 2, 3시간 말한다. 그 중 한 사람은 “나의 사명은 바로 뛰고 뛰고 또 뛰는 것이다!”라고 하였다. 이래서 적지 않은 수련생의 숭배를 불러일으켰는데 어떤 사람은 “저 사람이 말을 얼마나 잘하는가 보세요. 말한 것들은 모두 법에 있고, 연속하여 몇 시간이나 말할 수 있다니 정말 수련이 잘됐네요.”라고 했다. 어떤 사람은 “저 사람은 오성이 정말 좋고 사명도 정말 높네요. 도처로 다니면서 연설을 하는데 너무 많은 것들을 이바지하고 있으니 우리도 응당 많이 따라 배워야겠네요.”라고 했다.
지금의 대륙 내에서 비록 이 2년간 상황이 조금 좋아지기는 했지만, 사악의 박해는 여전히 발생하고 있고 늘 수련생이 악경에게 납치되어 박해를 받고 있다. 우리는 절대 대수롭지 않게 여기면 안 되는데 응당 수련생의 안전을 위해 책임져야 하고 응당 이지적이어야 한다. 법을 벗어난 이지적이지 못한 일체 과격한 행위는 모두 사심과 마성의 노출과 폭발이다. 게다가 조직자는 도처로 뛰어다니기에 마음을 조용히 하고 법을 학습하지 못한다. 빈번하게 ‘법회’를 조직하여 여는 이것은 과시심이 아닌가? 이것은 법을 어긴 것이 아닌가? ‘법회’에 몇 번 참가한 수련생은 매번 법회에 가보면 모두 그 한, 두 사람이 말하기에 법회도 아니고 교류도 아니므로 작용이 별로 없다고 말하였다. 게다가 매번 참가한 사람들은 모두 얼굴을 익힌 사람들로서 비교적 정진하거나 금방 걸어 나온 사람들이 많지 않아 효과가 이상적이지 못했다고 했다.
‘연설하는 것은 난법이다’는 이 문장이 발표된 후 일부 사람들은 들은 체 만 체하면서 여전히 제멋대로 행동하였다. 특히 이른바 몇몇 협조인은 자신이 한 것이 옳다고 고집하면서 도처에서 “이 문장에 우리 이름을 지적하지 않았기에 우리에게는 이러한 현상이 존재하지 않는다.”라고 말하였다. 자칭 책임자라고 하는 사람은 “우리 지역의 정법 진척을 원용하려면 우리는 더 크게 해야 한다.”라고 큰소리치기도 하였다. 요 며칠 또 대형법회를 열려고 하면서 다만 법회라고 하지 않고 이름만 바꿔 교류절차회의라고 한다고 한다. 또한, 다른 수련생들보고 지금은 마지막까지 왔는데 아직도 이것저것을 두려워하는 가고 꾸짖기도 하고, 그들 지시대로 하지 않는 수련생들에게 발정념을 하라고 시키기도 한다.
구세력은 마지막까지 매 하나의 대법제자를 고험하고 있다. 조그마한 부주의, 조그마한 집착도 모두 구세력이 박해하는 구실이 될 것이다. 이 방면의 교훈은 너무 크다.
수련생들은 절대 일시적인 가상 때문에 우리의 정상적인 수련 환경과 형식에 영향을 주면 안 되고 표면에 치우쳐서는 안 된다. 누가 말을 잘하거나 오성이 높거나 법을 잘 외우거나 대법을 많이 실증했는가를 보는 것이 아니라 우리는 법대로 따라야 하고 사람을 따라서는 안 된다. 한 사람의 수련이 어떠한가는 그가 법에 대한 진술과 이해로 보는 것이 아니라 그의 심성과 언행이 법에 있는가를 보아야 한다.
우리 지역 일부분 수련생은 매일 반나절을 단체 법 공부를 하고, 반나절은 나가서 진상을 알린다. 그들은 무슨 법회에 참가하지 않았고 또 법회를 여는데 집착하지도 않는다. 다만 조용히 자신이 응당 해야 할 세 가지 일을 하고 있고 모두 그렇게 잘 하고 있다. 이러한 수련생들이 정진하지 않는다고 말할 수 있겠는가?
우리는 법을 많이 학습하여 청성을 유지해야 한다. 일시적인 충동으로 방향을 잃거나 하고 싶은 대로 해서는 안 된다. 수련은 엄숙한 문제로서 어떠한 집착이든, 어떠한 변동이든 모두 우리가 수련 원만하는 하나의 장애가 될 것이다.
문장발표: 2013년 5월 20일
문장분류: 수련마당
원문위치:
http://www.minghui.org/mh/articles/2013/5/20/274184.html