글/ 무순 대법제자
[밍후이왕] 며칠 전 꿈을 꿨는데 꿈에 내가 학생들을 위한 음악회에 참가한 것을 보게 되었다. 대륙의 유명한 가수가 노래를 마친 후 내가 노래를 불렀는데, “좋은 사람 일생은 무사하다네.”란 노래를 부른 것을 아주 분명하게 기억하였다. 프로그램이 끝난 후에 나는 학교 공청단 지부 서기를 찾아가 그녀에게 이번 음악회 활동을 공청단 조직에서 하는 활동으로 치고 벽보를 만들라고 하였다. 게다가 벽보 내용은 ‘희망’이라고 하라고 했다. 깨어나서 자신이 너무나 형편없다는 것을 느껴 괴롭기 그지없었다. 어찌하여 꿈에 아직도 사당에게 일을 해 준단 말인가? 그러지 말아야 하는데, 스스로는 사당의 사악한 본질을 진작 간파했다고 여겼는데 왜 꿈에서 고험을 넘기지 못했는가? 마음을 조용히 하고 곰곰이 이 꿈을 깨달아보니 사부님께서는 더욱 깊은 것을 늘 나에게 점오해 주시는데, 표면상에서 사당을 위해 일하는 그런 간단한 일이 아니다. 하지만 도대체 무엇인지는 아무리 어찌해도 알 수가 없었다.
법 공부팀에서 수련생과 교류했는데, 수련생도 내 수련 중에 문제가 있다고 느꼈으나 역시 분명히는 말할 수 없었다. 그러나 수련생과 교류한 후에 나는 갑자기 이 꿈이 나에게 무엇을 점오해 주었는지 알게 되었다. 그것은 바로 아직도 사당에 희망을 품고 있는 것이다! 회상해 보니 이 한동안 나는 속인의 뉴스를 보면서 사당의 새로운 지도자 등에 대해 호감을 갖게 되었고, 노동 교양소를 없애고, 노동 교양소 내부 사악을 폭로하는 등 내용에 아주 흥취를 느꼈으며, 대법의 누명을 벗겨 주는 데 대해 은근히 희망을 갖게 되었던 것이다. 곰곰이 생각해 보니 자신에게 아직도 이 엄중한 문제가 정말로 존재했던 것이다.
우리는 법 중에서 사당에게 어떠한 희망도 품지 말아야 한다는 것을 알게 되었는데, 왜 아직도 사당에 희망을 품고 있는가? 이건 사부님을 믿지 않는 게 아닌가? 그런데 왜 믿지 않는가? 사상 심처의 어떤 것이 믿지 않고 있는가? 나는 그것의 존재를 느낄 수는 있지만, 그것이 무엇인지는 정말로 알 수 없었다.
오늘 2008년 션윈 공연 녹화를 본 후 이런 문제가 또 머릿속에 떠올랐다. 나는 생각하고 생각하다가 갑자기 이것이 무엇인지 알게 되었다. 그것은 관념으로서, 사당 사회에서 형성된 일종의 특유한 정형화된 사유였다. 사당이 통치한 60여 년 이래, 항구 불변한 선악 표준이 없었고 고정된 가치관이 없었으며, 그것이 가장 제창하던 것이 순식간에가장 반대하는 것으로 변할 수 있었고, 그것이 가장 반대하던 것이 홀연 그것이 가장 제창하는 것으로 변할 수 있었다. 그것의 유일하게 변하지 않는 것이라면 바로 그 반(反) 인류의 본성인데, 그것이 하는 일체는 모두 그 자신의 이익을 수호하기 위해서이다. 그것은 잔혹하게 일부 사람을 탄압하고 그런 다음에는 정치, 권력의 필요를 위해 그것에게 누명을 벗겨주며, 그런 다음에 다시 탄압하고 다시 누명을 벗겨주는데 한 바퀴 돌고 다시 시작하는 격으로서 중국 백성에게 일종의 변이적인 관념이 생기게 하였는데, 공산당이 탄압하는 대상은 언제인가는 누명을 벗을 날이 있으리라는 것이다. 이 변이적인 것은 이렇게 여러 해 동안 통치해 온 사당의 행위에서 총화해 낸 일종의 경험일 뿐만 아니라 이런 경험은 이젠 일종 완고한 관념으로 변했다. 공산 사당이 한 모든 행위는 정상적인 사회라면 60년은 말하지 않더라도 그저 일 년 안에도 그것은 몇 번이나 실각했을 것이지만 중국의 백성은 이미 그것의 착오(사실은 죄질이 너무 큰 죄악)에 습관이 된 듯할 뿐만 아니라, 매 번의 ‘착오’ 후에는 모두 사당이 자아 수정(修正)을 한 것처럼 느끼는데, 이것이 바로 이런 관념이 일으킨 결과이다. 생각해 보라. 사당에 희망을 품고 있는 민주인사, 이의(異議)인사, 일부 대법제자를 포함하여 이 후천적인 관념이 작용한 것이 아니라고 할 수 있겠는가!
만약 이상에서 말한 이 관념이 우리로 하여금 피동적으로 사당에 희망을 품게 한다면, 나에 대해 말하면 또 한 가지 물건이 주동적으로 사당에 희망을 품게 하는데, 그것은 바로 ‘자아보호’이다. 이렇게 여러 해 되는 사당의 폭정 통치로 매 중국 사람은 모두 사당의 뜻을 위배한 후과가 무엇인지를 잘 알게 되었다. 하지만 대법제자로서 믿음을 견지하고 중생을 구도하는 것이 바로 사당의 뜻을 위배한 것이었으므로 잔혹한 박해에 직면한 것이다. 이때, 이 ‘자아보호’에게는 어떻게 하면 사부님 요구대로 중생을 구도하는 동시에 사당의 포학함을 건드리지 않고 자신이 상해를 받지 않을 수 있을까 하는 교활한 사상이 생겨나는데, 유일한 방법은 바로 사당이 좋게 변하여 대법에 누명을 벗겨 주는 것이다. 이것이 바로 ‘자아보호’라는 이 위사(爲私)적인 것이 주동적으로 사당이 좋게 변하기를 희망하는 원인이다. 하지만 어찌 가능할 수 있겠는가? 사당은 곧바로 중생을 해치러 왔는데, 이는 그것이 세간에 온 근본적인 목적이다!
꿈에서 보아낼 수 있는바, 자신은 몹시 사람을 구하고자 하고 좋은 사람이 모두 무사하기를 바랐다. 그러나 도리어 사람을 구하는 희망을 사당에 맡겼으니 자신 수련의 차이와 사부님의 요구와 얼마나 먼가를 보아낼 수 있다! 그야말로 부끄럽기 그지없으며, 사부님께서 지불하신 대가와 고생스런 구도에 죄송스럽다. 나와 같은 생각이 있는 수련생에게 조금이라도 거울이 될까 하여 써내는 바이다. 층차의 제한으로 부족한 곳이 있을 테니 수련생께서 자비로 지적해 주기를 바라는 바이다!
문장발표: 2013년 4월 20일
문장분류: 수련마당
원문위치: http://www.minghui.org/mh/articles/2013/4/20272281html