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구세력이 배치한 ‘생활 곤경’에서 벗어나자

글/ 대륙 대법제자

[밍후이왕] 주변의 많은 수련생은 다 생활이 비교적 어렵고 소수 수련생은 돈을 빌려 장사를 하다 결과 장사가 잘 되지 않아 빌린 돈을 또 갚지 못했다. 어떤 수련생은 막노동을 해 가정을 꾸려나가는데 매일 밤낮없이 일을 해도 생활은 아직 빡빡하다. 어떤 수련생은 몇 년이나 아끼고 옷 한 벌도 아쉬워서 구입하지 않는다. 일부 속인은 역시 말한다. “당신들 대법을 수련하는 사람은 왜 생활에서 부유한 사람이 몇이 없는가?” 더욱 중요한 것은 수련생이 이런 생활고에 빠진 상태에서 항상 인식상 잘못된 인식에 빠질 수 있다. “우리 수련의 길은 바로 이런 것일 것이다. 마땅히 이런 고생을 해야 한다.” 나는 자주 일부 수련생이 이렇게 말하는 것을 보았다. 이런 인식은 구세력의 배치에 대한 일종 인정이 아닌가? 이것도 역시 구하는 것이 아닌가?

한번은 과거 생활에서 비교적 곤란한 수련생이 나에게 말했다. “몇 년이나 나는 바로 이런 생활 상태에 처해 있었고, 가장 어려울 때 3개월간 우리 온가족은 콩기름 한통(5근)을 먹었으며 밥상에는 장아찌 위주로 끼니를 때웠고 장을 볼 때 나쁘고 싼 채소를 골라 산다. 막노동하여 힘들게 돈을 벌었지만 1년이 지나면 계속 돈이 부족하다. 돈이 부족할수록 집의 노인이 병이 들고 아이가 학교에 가야하고 당신을 향해 손을 벌린다. 당신이 말해보라, 어려운가 어렵지 않는가?” 이후에 나는 생각했다. ‘대법제자는 복이 있는 사람이다. 이것은 무슨 복인가? 이것은 사부님이 배치한 길인가?’ 안으로 찾고 나는 단번에 깨달았다. 몇 년간 나는 구세력의 배치한 길을 걸었고 구세력을 인정했다. 이런 곤란한 생활 상태에 수련해야만 비로소 그들이 당신을 인정하고 비로소 당신이 표준에 도달한다고 생각한다. 그리하여 나는 발정념을 해 그것을 부정했다. 인식상에서 단번에 뛰쳐나온 후 이런 상태가 맞지 않다는 것을 느꼈다. 우리 수련인은 마땅히 가난해야 한다는 이런 상태를 인정하지 말아야 하고 사부님이 배치한 길을 걸어야 하고 사부님이 결정해 주기를 바라야 한다. 매번 발정념을 할 때 나는 모두 이런 요소를 부정하고 제거했다. 그 후 생활에서도 갈수록 좋아지고 작년에 나는 4만 위안을 벌었다. 가족과 친구는 다 나를 위해 기뻐했다. 비록 맞게 깨달았지만 몇 년간 굽은 길을 걸었다.

이전에 수련생과 교류를 할 때 자주 일부 수련생이 말한다. “좀 곤란하고 고생해도 괜찮다. 우리는 과거 수련인보다 더 낫지 않는가? 그런 떠돌아다니는 수련생보다, 그런 감옥에 있는 수련생보다, 교도소에서 박해당하는 수련생보다 낫지 않는가?” 나는 수련생의 이런 인식이 맞지 않다고 생각한다. 만약 당신이 생활에서 좀 곤란한 것이 ‘마땅하다’고 생각하고 심지어 이런 상태에 만족하면 그것도 역시 일종 구함이 아닌가? 대법제자는 가장 기본적인 생활수요를 위해 힘들게 바쁘게 보내면 이것이 정상인가? 이것이 사부님의 배치인가?

우리는 과거 위풍당당한 왕과 주가 세간에 내려온 것이고 대덕, 대근기의 사람이다. 어찌 오늘날 가정을 돌보는 가장 기본적인 생활요구도 이렇게 어려운가?

다시 말하면 과거의 그런 수련형식은 구세력이 배치한 것이 아닌가? 역사상 모든 수도인, 심산에 있든 아니면 절에 있든 매우 가난하다. 대법제자는 어찌 그들 그런 사람이 신으로 되는 ‘길’을 인정할 수 있는가? 더욱 오늘의 참고로 할 수 없다. 고층차의 법이 지도하지 못하고 고생만 하면 또 어떻게 높게 수련할 수 있을까? 모두 다 삼계를 벗어나지 못한다. 우리는 그들을 본받으면 안 된다.

또 많은 수련생이 떠돌이 생활을 하고 혹은 감옥에 있고 교도소에서 박해를 당하는데 역시 구세력의 배치이고 사부님의 배치가 아니다. 사부님께서는 우리에게 이런 길을 걷게 하지 않을 것이다. 우리는 그들과 비교하면 안 된다. 그들은 강제적인 박해이고 만약 우리와 그들을 비기면 우리가 밖에 있어 자유롭다고 생각하고 배불리 먹을 수 있다고 생각하면 그것은 스스로 생활의 질을 낮춘 것이 아닌가? 이것은 구하는 것이 아닌가?

만약 우리가 인식상에서 철저히 자신의 이런 빈곤상태를 부정하지 않으면 구세력은 이렇게 말한다. “보라. 이런 사람은 우리의 배치에 아직 만족하니 그러면 더 심도를 높여 그들로 생활에서 더욱 곤란하게 하자. 그들은 그렇게 위덕을 수립하려 하지 않는가?” 그러므로 우리는 마음에서 강대한 일념을 발해 “구세력이 우리 생활에 대한 일체 배치를 철저히 부정하고 사부님이 배치한 길만 가고 구세력이 우리에게 배치한 빈곤의 축을 해체하고 이런 기제를 해체하며 사부님이 결정하기를 바란다.”

“당신들이 일을 더욱 크게 할수록, 당신들이 돈이 더욱 많을수록 나는 그야말로 기뻐할 것이며, 당신들이 하지 못할까 봐 걱정이다. 당신들이 모두 큰 경제 능력이 있다면, 그럼 당신은 얼마나 큰 능력으로 대법제자가 법을 실증하는 일을 할 수 있겠는가? 그건 더없이 좋은 것이 아닌가? 나는 여태껏 당신들에게 그런 산 속에서 수도하는 사람들처럼, 돈을 한 푼도 가지지 말라고 한 적이 없는데, 왜냐하면 속인 사회 중에서 하는 수련 또한 이럴 수 없기 때문이다. 나는 당신들에게 이렇게 하라고 하지 않았으며, 나는 대법수련은 최대한도로 속인 사회의 형식에 부합해서 수련하는 것이라고 줄곧 말했다.”[1]

물론 우리가 돈이 있으면 ‘사람’의 생활을 하기 위한 것이 아니고 대법의 위력을 실증하기 위한 것이며, 대법의 아름다움을 실증하기 위한 것이고 역시 세인에게 보여주는 것이다. 대법을 배우는 것은 복이 있고 이것은 역시 대법제자의 풍채를 펼치는 것이며 이것은 진상을 알리고 세인을 구하는데도 역시 바른 작용을 한다.

약간의 견해이고 의미는 여러분과 교류하고 법에 있지 않는 점은 수련생이 자비로 시정해 주시기 바란다.

주:[1] 리훙쯔(李洪志) 사부님 경문: ‘따지웬(大紀元) 회의 설법’

 
문장발표: 2013년 2월 15일
문장분류: 수련마당>정법수련마당>심성제고
원문위치: http://www.minghui.org/mh/articles/2013/2/15/270027.html