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진상을 알려 사부님은혜에 보답
[밍후이왕](윗글 4편에 이어서)
1. 창춘 파룬따파의 날
2001년 12월 22일, 이 날은 창춘에서는 특별한 날이다. 바로 ‘창춘 파룬따파(法輪大法)의 날’
2001년 12월 22일, 이 날은 창춘에서는 특별한 날인데 바로 ‘창춘 파룬따파(法輪大法)의 날’이다. 이 날은 동짓날이어서 음양이 교차하는 시기로 점차 검은 밤이 짧아지고 밝은 낮이 길어지기 시작하여 역대로부터 천지가 이때부터 소생한다고 전해지고 있다. 이 날을 선택한 것은 사악한 기운이 끝나고 광명이 인간세상을 두루 비추기 시작한다는데 의미를 부여한 것이다.
중국 창춘제자들은 2001년 12월 21일 밍후이왕에 ‘파룬따파의 날’ 설립을 위한 한편의 특별 보도내용을 발표했다.
‘창춘 파룬따파의 날’의 창의와 관련된 행사는 수많은 대법제자들의 지지와 주목을 받았다. ‘창춘 파룬따파날의 날’ 제정의 취지문이 발표된 후 수련생들이 연이어 관련 원고, 의견, 건의문 등을 보내왔다. 이 활동은 제자들의 융합을 촉진시켰고 사악이 조성한 수련생들 간의 허다한 장애를 타파했으며 동시에 모두들 이 속에서 수많은 속인의 관념들을 돌파했다. 창춘 대법제자들은 모진 비바람을 맞으며 안정적 성숙의 길로 나아가 점차적으로 하나의 파괴되지 않는 진정한 정체를 형성했으며 이로써 정법 속에서 정체의 홍대한 힘을 펼쳐내어 함께 참신한 단계를 구축하며 걸어 나갔다. ‘창춘 파룬따파의 날’은 비로소 창춘 제자들에게 더욱 광범하고 더욱 심도 있고 더욱 세밀하게 진상을 알리는 하나의 계기가 되었다.
이 같은 내용이 보도되자 제일 먼저 미국서부 파룬따파학회가 미국 서부 전체 대법제자들을 대표하여 12월 21일 ‘창춘 파룬따파의 날’에 대한 축하를 보내오면서 대법의 날 당일 전 세계 지역으로부터 경축문이 답지 되었는데 이탈리아, 북 유럽, 오스트리아, 미국, 신 잉글랜드, 호주, 캐나다, 프랑스 등 각국의 대법제자들이 대법 불학회, 협회, 대법제자의 명의로 창춘 대법제자 앞으로 축하문을 보내왔다.
“국내에서 아직도 이렇게 험악한 환경 속에서 수련생들은 사악의 박해를 두려워하지 않고 간난신고를 돌파했다. ‘창춘 파룬따파의 날’의 설립은 추악하게 대법을 박해하는 사악한 세력의 앞에서 타격을 가한 것이다! 이는 대법제자의 휘황한 위상을 수립한 것으로 대서사시를 써서 칭송할만한 일이다. 해외 수련생들은 진심으로 축하한다!”
‘창춘 파룬따파의 날’ 전날인 2001년 12월 21일 새벽, 창춘시 몇 개의 주요한 거리의 양편과 일부 주민 거주지역, 그리고 일부 대학교 캠퍼스 등 중요 장소에 파룬따파 현수막이 걸렸는데 현수막의 내용은 ‘파룬따파는 좋다’, ‘파룬따파는 정법이다’, ‘파룬따파의 결백을 돌려라’, ‘나의 사부님께 결백을 돌려드려라’, ‘천고기원 파룬궁’, ‘파룬궁 박해를 멈춰라’ 등등의 내용이었다. 현수막의 모양은 다양했는데 길고 짧은 것이 1천여 개나 걸렸다. 이는 창춘 대법제자들이 다시 한 차례 단체로 대법을 실증한 것이며 또 다음 날인 ‘창춘 파룬따파의 날’을 맞아 창춘시민에게 주는 또 하나의 선물이었던 것이다.
거리 옆 가게 문 밖의 현수막
|
현수막이 바람에 춤춘다(멀리서 다른 현수막도 보임)
|
새벽과 현수막(1)
|
새벽과 현수막(2)
|
‘나의 사부님께 결백을 돌려드려라’
|
‘파룬따파의 결백을 회복시켜라’
|
캠퍼스 내의 현수막
|
창밖의 현수막
|
창밖의 현수막이 멀리서 보이는 정경
|
고층에 현수막이 걸렸는데 걸작이라 불리다
|
고층에 걸린 현수막 |
그 시기에 대법제자들이 현수막을 걸고 표어를 적고 수소풍선을 날리고 전단지를 붙이고 스피커로 방송하는 등의 형식으로 진상을 알렸고 동시에 정법에서 세인을 구도하여 점차적으로 성숙으로 나아갔다.
무더기로 인쇄한 대형 현수막들이 사악의 간담을 서늘케 했다
|
주민 거주 지역에 ‘파룬따파가 세인을 구도한다’란 작은 현수막 이 곳곳에 보인다
|
‘파룬따파가 중생을 구도한다’는 정교한 현수막
|
사악한 박해 속에서 이 대법제자는 홀로 자신의 마음 속 소리를 써냈다
|
이는 대법제자가 자체로 제작한 권선 스티커
|
이는 대법제자가 날린 수소 풍선
|
2002년 3월 5일 저녁 7시 30분경 전체 창춘시 4개 지역의 일부 주민들은 8개 채널의 TV 유선방송으로 삽입된 방송내용을 시청했는데 ‘파룬따파가 전 세계에 널리 전해지다’, ‘분신인가 아니면 사기극인가’등의 VCD 비디오테이프를 시청할 수 있었다. 첫 번째는 5분, 두 번째는 7시 55분에서 8시40분까지 무려 45분 동안 지속적으로 방송됐다.
TV화면에서 대법진상이 나타날 때 모든 사람들이 깜짝 놀랐다. 그 시각 수백만에 달하는 창춘 시민들이 분신사건의 진상을 알았고, 파룬궁이 세계에 널리 전해지는 정황을 알 수 있었다. 많은 사람들은 친척 친구들에게 전화를 걸어 얼른 TV를 보라고 알려주었다. 사람들은 한 가지 공통적인 반응을 보였는데 ‘파룬궁(法輪功)이 누명을 벗었다!’였다. 삽입방송이 있은 다음 날 창춘시는 온통 들끓었다. 그 백성들은 모두 톈안먼분신자살 사건을 논하면서“TV 방송에서 ‘그것은 공산당이 파룬궁을 모함하기 위해 조작한 하나의 사기극’이라고 보도했다.”라고 모두 떠들었다. 또 “파룬궁이 전 세계에서 널리 전해지고 모든 국가에서 연마하게 하는데 박해하지 않던 그전과 같다.”고 말하고 일부에서는 “파룬궁이 좋기 때문에 전 세계 수많은 국가에서 모두 수련하고 있고 정부도 지지하고 있다.”고 말했다. 그러면서 “파룬궁은 정말로 대단하다. 그들을 두렵게 만들지도 못하고 무너뜨리지도 못했다.”고 했다. 그 TV 방송 보도를 시청하지 못한 사람들은 모두 아쉬워했다.
사당이 가장 두려워하는 것은 바로 그것들의 거짓말이 폭로되는 것이었다. 장쩌민이 밀령을 내려 “삽입방송을 한 수련생은 사면하지 말고 죽이라!”고 했다. 이런 밀명이 떨어지자 곧 전 도시에서 발광적인 수사가 대대적으로 펼쳐져 1년도 안 되는 기간에 창춘지역에서 5천여 명에 달하는 파룬궁수련생이 체포되고 또 헤아릴 수 없이 많은 사람들이 핍박으로 집을 떠나 떠돌이 신세가 되었다. 창춘삽입방송의거에 참여한 15명 파룬궁수련생들은 4년에서 20년에 달하는 중형을 각각 선고 받았으며 이들 중 최소한 8명이 고문 박해를 받고 사망했다.
‘305’삽입방송 후 3일 째 되는 날, 사부님께서는 일부 사람들이 이 사건을 이해하지 못하는 것에 대해 ‘정념으로 문제를 보다’란 경문을 발표하셨다. 사부님께서는 TV 삽입방송을 통해 진상을 알린 방법에 대해 긍정의 말씀을 하셨다. “현재 대륙 대법제자들이 텔레비전을 이용하여 인민들에게 진상을 알리는 것은 사악의 박해를 폭로하는 것이고 사악에 기만당하여 중독된 중생을 구도하는 것으로서, 이는 자비롭고도 위대한 행동이다.”
이후에 대륙의 각 지역에서는 대법제자들이 TV를 이용하여 진상을 알리는 의거가 한 건 또 한 건 이어져 일어났고 그러므로 더욱 광대한 지역의 많은 민중들에게 진상을 알게 했다.
그 후 5년 뒤 아태인권기금회는 TV 삽입방송으로 진상을 전달하고 중공에 체포되어 고문 박해를 당하다가 사망한 파룬궁수련생 류청쥔에게 ‘단심한청상(丹心汗青獎)’을 수여했다.
2011년 미국 ‘표준주간’에서는 장문의 특집 기획보도를 통해 ‘세밀함으로 들어간 전파 ―사람들에게 알려지지 않은 몇 사람의 중국 열사들이 전 세계의 자유사업을 어떻게 도와주었는가?’라는 제호로 “이 장거는 중국인이 자유세계의 소식을 얻을 수 있도록 도와주었다.”라고 찬양했다.
NTD TV에서는 ‘305’TV 삽입방송 10주년이 되는 2012년에 특집으로 ‘영원한 전파’를 제작했는데 프로그램 결말에 다음과 같은 한 단락 독백이 있었다. “8명의 생생한 생명과 15명의 청춘을, 수천수만 가정의 행복을 위해 50분의 진상과 바꾸었다. 그러나 이 50분간의 진상은 그 후부터 몇 십만 창춘시민들의 마음속에서 지워지지 않았고 중공 매스컴은 더는 분신자살이란 거짓사건으로 파룬궁에 먹칠을 할 수 없었다. 창춘인의 마음속에 늘 다른 한 목소리와 화면이 나타났는데 그것은 바로 2002년 3월 5일 ‘나는 파룬궁의 진상을 보았다.’”
이들은 어떤 일을 한 사람들인가?
류청쥔(劉成軍)은 눙한현 사람으로 부친 류창타이는 눙안양식창고에서 주임으로 근무했고, 큰 누나 류린은 방역참의 의사였고, 둘째 누나 류루는 방영공사에서 재무회계 일을 담당하면서 각자 모두 행복한 가정을 이루고 있었다. 대가족이 수련하는 행복한 사람들이었다.
류청쥔은 재무회계 전문학교를 졸업한 후 양식창고에서 일했다. 180cm에 달하는 건장한 체격으로 법공부하기 전에는 왕성한 화기로 늘 싸우며 다녔다. 그러나 수련한 후 ‘진선인(眞善忍)’의 우주대법이 그를 개변시켰다. 사회생활 중에서 시장의 관리인이 그를 깔보고 욕하고 때리기까지 하여 남들이 보기에도 마음이 불편할 정도로 굴욕을 당하는 아주 어려운 상황에서도 그는 참아낼 정도였다. 또한 집에서도 그의 장모가 무슨 영문인지 이유 없이 그를 욕하고 가끔 때리기도 하여 한번은 그가 정말로 참을 수 없는 지경이 되었다. 머리가 터질 것 같이 화가 치밀어 도저히 참을 수 없다는 생각에 심지어 집을 불질러버리고 싶은 나쁜 염두까지 올라왔었다. 그러나 그는 이렇게 참기 어려울 때 ‘자신은 대법제자로 속인 경지를 초월한 수련자인데 어찌 이렇게 화를 낼 수 있는가?’라는 생각을 하게 되었다. 그는 스스로 마음을 안정시키고 작은 의자를 장모 곁에 가져다 놓고 앉아서 아주 냉정한 자세로 말했다. “어머니, 화를 푸세요. 저를 때리고 욕해도 좋아요. 그러나 화가 나서 어머니의 몸이 상하면 안 돼요.” 장모는 이 말을 듣는 순간 ‘피씩’하고 소리 내어 웃더니 그 후부터 더는 욕을 하지 않았다. 그러나 류청쥔은 자기 방에 들어가서 혼자 울었다.
1999년 장쩌민이 제멋대로 파룬궁을 박해하고 대법제자를 박해하기 시작할 때 그는 28세였다. 세인들이 진상을 명백히 알도록 하고, 공산당의 거짓말에 속아 불법(佛法) 앞에서 죄를 범하지 않게 하고, 수련하는 사람을 무시하고 미워하고 악의적으로 해치지 않게 하기 위해 그는 일체의 방법을 다 동원하여 사람들에게 진상을 알렸고 동시에 일반인들은 상상할 수도 없고 감당할 수조차 없는 그런 고통을 각 방면으로부터 받았다.
2002년 3월 24일 류청쥔은 악경에게 체포되었는데 다리에는 총을 맞았고, 전신에 화상을 입어 신체는 엄중한 상태였는데 공안국 악인들은 그를 고문 형틀인 일명 ‘호랑이 의자’에 52일간이나 묶어 놓았다. 그 다음에는 또 수갑을 채워 역시 혹독한 고문기구인 ‘사인침대(死人床)’에 수일동안 뉘여 결박당하는 등 사악한 마귀굴에서 수없이 반복해서 부동한 형식의 혹독한 고문과 매질을 당했다. 바로 그렇게 건장한 사나이는 잔혹한 박해 속에서도 신성한 신념을 고수하며 가장 완강한 의지로 한 번 또 한 번 고통의 시달림을 이겨나갔다. 왜냐하면 그는 우주대법을 얻은 생명으로써 자신이 존재하는 의미를 알았기 때문이다. 그의 그런 의지는 바로 불법(佛法)을 수호하고 진리를 수호하며 사악을 청리하고 중생을 구도하고 자신의 가족을 포함한 모든 생명에게 자비로 대하는 것이었다. 어느 날 류청쥔은 아들 머한(默涵)을 다른 수련생들이 있는 거처로 데려간 적이 있었다. 그 당시 아들의 나이는 5, 6세였다. 저녁에 류청쥔은 아들의 머리를 만지작거리며 잠을 재웠다. 이렇게 어린애도 사악한 박해에서 어른과 같은 마난과 고통을 받았다. 류청쥔의 눈에는 눈물이 가득했고 아버지의 자애로움으로 가득했다.
2003년 연말 계속되는 혹독한 고문 혹형으로 류청쥔은 거의 숨을 거두기 직전에 처해 있었다. 가족이 지린시 중심병원에서 그를 만났을 때 몸은 곳곳에 상처였고 사람의 몰골이라고 하기는 어려울 정도로 말라서 말 그대로 피골이 상접하여 처참한 모습이었다. 눈은 움푹하게 꺼졌고 심장과 신장은 극도로 쇠약해져서 말하기도 힘들어하며 거의 소리를 내지 못했다. 그는 가족에게 자신을 도와주는 재소자를 가리키며 말했다. “그가 나를 보살펴주고 있어요. 그가 대소변을 모두 받았어요. 내가 가면 그를 선하게 대하고 그를 구도해주세요.” 그 자리에 있던 사람들이 모두 감동하여 눈물을 흘렸다. 그 재소자도 눈물을 가득 머금고 “내가 한 일은 아무 것도 아니에요. 마땅히 제가 해야 할 일이었어요.”라고 말했다.
2003년 12월 26일 창춘중일연병원에서 가족은 마지막으로 류청쥔을 볼 수 있었다. 그의 몸 7개구멍에서 피가 나와 온 몸으로 흘러내려 온통 선혈이 낭자하였다. 특히 다리 동맥이 파열돼 바닥이 전부 피였다. 바닥에 홍건하게 고인 피를 류청쥔의 옷으로 닦았다. 류청쥔은 이렇게 갔다. 그의 나이는 32세였다. 사악은 죄악을 덮어 감추기 위해 격렬한 가족의 반대를 묵살하고 강제로 화장했다.
량쩐싱(梁振兴)은 1964년생으로 지린성 창춘사람이며 형제 중 셋째다. 그는 전에 난방 기사로 총명하고 재간 있는 선량한 사람이었다. 그는 사람이 착실한 만큼 90년대에 이미 10여만 위안(1750 여 만원)에 달하는 재산을 소유하고 있는 재력가로 자가용 승용차를 두 대씩이나 굴리며 부유한 생활을 누리고 있었다. 속인사회의 큰 염색 항아리에 오염되어 일부 악습에 물들기도 해서 부부싸움이 잦고 가족의 분열로 가정이 원만하지 않아 가정은 위기에 처해 있었다. 그러던 중 1998년 파룬궁을 수련하는 한 이웃이 량쩐싱에게 파룬궁을 소개했다. 량쩐싱은 파룬궁을 배운 후 인생의 의미를 알게 되었고 마땅히 어떤 사람이 되어야 하는지를 알았다.
그는 파룬궁을 배운 후 예전의 악습을 전부 고쳐서 가정은 화목해졌고 생활도 간단해졌지만 아주 행복하고 즐거웠다. 수련 후 거대한 변화를 보게 된 아내와 딸도 함께 파룬궁을 수련하기 시작했다. 그는 가정을 사랑했고 그의 어린 딸을 사랑했다.
중공이 파룬궁을 박해하기 시작한 후 랑쩐싱은 자신의 수련 심득을 통해 가정이 다시 화목해지는 정황을 보고 ‘파룬궁은 진정으로 한 사람을 개변시켜 도덕이 승화되게 한다’는 것을 인식했다. 그리고 중공이 매스컴을 통해 이렇게 좋은 파룬궁을 거짓 선전으로 날조하여 모함하며 세인들을 속이고 있다는 것을 인식하게 되었다. 그러므로 량쩐싱은 줄곧 한 가지 일을 해왔는데 부동한 방법으로 더 많은 사람들에게 진상을 알게 하여 그들이 중공의 거짓말에 속지 않고 구원되도록 했다.
량쩐싱은 ‘305’TV 삽입방송사건과 관련하여 19년 형의 불법 판결을 받고 지린감옥, 창춘테베이감옥, 스핑스링감옥, 궁주링감옥 등으로 전전하며 감금 박해를 당했다. 상상할 수 없는 잔혹한 고문 박해가 날마다 량쩐싱의 몸에 가해졌는데 그는 일반인의 감당 능력을 초월하며 견디어 냈다. 그러면서 그는 그런 고통 속에서 생명이 존재하는 일분일초마다 모든 사람들에게 오직‘파룬따파는 좋다(法輪大法好)’