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明慧법회| 수련 중의 매일을 소중히 하다

글/ 허베이 대법제자 석수(石修)

[밍후이왕]

위대하시고 자비하신 사존 안녕하십니까!수련생 여러분 안녕하십니까!

십여 년 동안 위대하시고 자비로운 사존의 보호 하에 비틀거리면서 걸어왔다. 마음속으로 사존의 자비로운 구도의 은혜에 감사드리는데 말로는 다하지 못한다. 제9회 중국대륙 대법제자 수련심득교류회를 맞이해 특히 나의 10여 년 수련을 한번 정리해 사존과 수련생 여러분에게 말씀드리겠다.

법을 얻다

나는 교사다. 1997년 봄, 인생에서 길을 헤매던 나는 이미 주역(周易), 점치는 일을 힘들게 6년 동안 연구했다. 6년간 고금의 모든 점치는 서적, 기공서적, 찾을 수 있는 것, 접촉할 수 있는 것이라면 모두 섭렵했다. 한 상자 가득 책을 모았고 오랫동안 힘들게 읽었지만 입문의 길을 찾지 못했다.

우연한 기회에 나는 ‘전법륜(轉法輪)’ 한권을 얻었다. 책을 펼치자 책속의 많은 이치는 마치 세차게 흐르는 장강의 대하(大河)처럼 나에게 왔고 인생의 아주 많은 혼란이 단번에 없어졌는데 천만 언어를 써도 내 마음속 감격을 설명하지 못했는데 정말 보배를 얻은 것 같았다. 돌이켜 다시 주역 및 각종 기공을 보니 정말 너무나 미미하고 부족했다. 하루 종일 나는 보서(寶書)를 받들고 수업하는 외, 밥 먹는 시간에도 내려놓기 아쉬웠다. 원래 수련은 천년에도 만나기 어려운 것인데 지금 사회에는 아무 곳이나 모두 있구나! 나는 전혀 아깝지 않게 이 몇 년 동안 연구한 무거운 한 상자 점치는 책, 기공 테이프 등을 모두 처리하고 태워버렸다. 나는 ‘깨끗하게 수련하겠다!’라고 마음먹었다.

대법수련의 초기, 나의 그런 기쁨과 행복감을 속으로만 간직할 수 없어 눈으로 흘러넘치고 얼굴에 가득 찼다. 일하는 외에 법공부하지 않으면 열심히 연공했고 하루 밤에 두 번 동공(動功)을 할 때도 여러 번 있었다. 비록 법공부도 했지만 그다지 마음에 닿지 않았고 주의하지 않는 사이에 연공을 수련으로 생각했다. 아마 근기(根基) 때문인지 생활 중 심성(心性)적인 고험은 보통 깨달을 수 있었고 비교적 쉽게 관을 넘을 수 있었다. 인생의 방향이 서자 마음속으로 착실했고 대법의 은혜로 충만 됐으며 신체는 활기찼다.

얼마 지나지 않아 사부님께서는 계속해서 ‘홍음’, ‘파룬따파의해’, ‘북미 제1기 법회설법’ 등을 발표하셨다. 내가 수련의 수승(殊勝)과 엄숙함을 몰랐고 다른 이론을 배우는 마음으로 법공부를 대했기 때문에 배운 후 마음속에 한때 천박한 인식이 생겼다. 사부님의 저작은 ‘진선인(眞善忍)’, ‘안을 향해 찾는 것(向內找)’을 반복으로 말씀하시는 것을 벗어나지 못한다고 생각했다. 한번은 교류 중 수련생이 “뭘하러 왔어요? 당신은 문제가 있으면 꼭 나를 찾아와 교류하려고 하는데 설마 제 말이 사부님 말씀보다 똑똑하겠어요?”라고 했다. 이 말은 정수리에 일침을 가한 것처럼 머리가 똑똑하지 않는 나를 일깨워줬다. 나는 매우 부끄러웠고 자신의 천박과 무식에 대해 사부님께 깊이 참회했다. 경사경법(敬師敬法)의 이치를 알았으니 이전의 법공부 태도를 고치고 꼭 법공부를 많이 하고 법공부를 잘하겠다고 단호히 결심했다.

미망(迷茫)

눈 깜박할 사이에 98년 겨울이 됐다. 대법에 대륙에서 홍전(洪傳)됨에 따라 아직 없어지지 않았던 사람들의 양심은 갈수록 깨어났으며 더욱 많은 사람이 수련하게 됐다. 수련하는 사람들이 끊임없이 확대되자 마침내 사당의 두려움을 일으켰고 수련 형세에 미묘한 변화가 생겼다. 우리 원래의 연공장-직장 강당은 폐쇄됐다. 위에서 파룬궁(法輪功)에게 연공 장소를 제공하지 말라는 지시가 있었다고 했고 국가요원은 파룬궁을 연마해서는 안 되며 이 지시는 아주 빨리 모든 공무원에게 전달됐다. 이 ‘위’는 어느 급인지 알 수 없었다. 정치에 둔한 우리는 곧 닥치려는 폭풍우를 의식하지 못했고 다만 미망과 이해하지 못하는 중에서 자신의 개인 수련을 계속했다.

99년 ‘4.25’이후, 수련환경이 점점 악화됐고 대법제자는 보편적으로 크고 작은 문제를 겪었다. 7월, 우리 현(縣) 일부 대법제자는 성 정부에 가서 청원하고 정상적이고 합법적인 연공 환경 및 권리를 요구했다. 그러나 성 정부의 대답은 “당신들은 베이징에 가라, 우리는 관할 수 없다”는 것이었다. 그리고 동시에 다른 소식이 전해왔다. ‘베이징으로 가는 모든 역전, 도로, 버스, 기차 등 모든 것이 공안에 봉쇄, 감시됐고 베이징에 가지 못하게 한다는 소식이 전해왔다.’ 최고 당국에 대한 신임과 자신의 합법적인 권리를 보호하기 위해 많은 대법제자들은 뒤도 돌아보지도 않고 자전거를 타거나 걷는 등 각종 방법으로 베이징을 향해 대법을 수호하는 길을 나섰다. 그러나 당시 나는 법리가 똑똑하지 못해 각종 사람의 마음이 섞여있어 우물쭈물하고 앞으로 나아가지 못했다.

이틀 후, 사당은 TV방송을 통해 전 세계를 향해 대법의 박해를 선포했다. 일시에 먹구름이 머리를 내리눌렀고 폭우가 심하게 불었으며 모든 수련자의 마음을 건드렸다. 이와 동시에 직장의 변화가 생겼다. 나는 국립 중학교로부터 현 사립중학교로 이동해 새로운 직장으로 왔다.

새로운 직장에 온 나는 내 파룬궁 수련생 신분을 공개하지 않았다. 한 방면으로 스스로 노력해 직장에서 성과를 좀 거두고 입장을 확고하게 한 후 하려 했고, 다른 한 방면으로 대법이 박해당한 형세를 고려하는 원인도 다소 있었다. 그러나 대법은 옳고 진선인(眞善忍)은 옳다는 것은 틀리지 않다고 생각했다.

몇 개월 후, 전국 각지에서 세뇌반을 만든다는 것과 대법제자가 폭력을 당해 사망했다는 소식이 잇따라 전해왔고 동시에 끊임없이 대법제자가 각종 방식을 통해 상부에 정황을 반영하기 위해 더욱 많은 사람이 베이징에 가서 청원한다는 소식이 전해왔다. 나는 속으로 줄곧 모순이 있었다. 대법이 오해당하고 있다는 것은 틀림없지만 대법제자가 끊임없이 청원하는 것을 이해하지 못했다. 나는 완전히 이 한차례 사악이 대법에 대한 박해를 사람이 사람에 대한 박해로 여겼다. 그리고 한동안 사부님께서 신경문을 발표하시지 않으셨다. 나는 어떻게 대해야 할지 몰랐다. 모순 중에 이렇게 법공부와 연공을 중단했다가 계속했다가 하는 중에 하루하루를 망망하게 보냈다.

사람에서 걸어나오다

1년이 지났다. 2000년 7월 나의 인식은 새로운 변화가 생겼다.

“당신이 살인 방화하는 것마저 상관하지 않는다면 당신은 무엇을 상관할 것인가?”(전법륜) 여러 번 베이징에 가서 청원했던 수련생이 돌아온 후 마음이 아파서 말했다. “파룬궁을 수련한다는 이유로 그렇게 많은 대법제자가 무고하게 잡히고 판결을 받으며 재산을 몰수당하고 심지어 매 맞아 죽으며 사부님마저 악독하게 중상모략을 당하고 있는데 수련생으로서 정말로 앉아있을 수 있겠는가!” 수련생의 말은 귀머거리도 들을 수 있을 정도로 쩌렁쩌렁 했다. 한 순간 자신이 정말로 틀렸다고 의식했다. 그때 수련생은 꿈에서 사부님께서 톈안먼(天安門) 성루에 계시고 베이징으로 가는 기차는 오직 하나만 남았고 이미 움직이기 시작한 것을 봤으며 베이징에 가지 않으면 막차를 놓칠 수 있어 ‘원만할 수 없다’고 했다.

나는 마땅히 베이징에 가서 대법이 공정한 평가를 받게 해야 하며 반드시 가야 하지만 원만하는 문제와 관계가 없다는 것을 알았다. 물론 베이징에 가면 자신의 적지 않는 집착심을 없앨 수 있으나 가슴에 손을 얹고 스스로 반성해보면 자신이 10번 베이징에 가도 자신의 모든 집착을 없애고 원만의 표준에 이를 수는 없는 것이다. 다만 원만을 위해 베이징에 가는 것은 내가 베이징에 가는 동력과 동기가 아니었다.

집으로 돌아온 후 고향 수련생과 함께 ‘정진요지’를 배웠다. 아마 사부님께서 내가 베이징에 가서 법을 수호하려는 마음을 보셨는지 나를 포기하지 않고 지혜를 열어주셨다. 이전에 여러 번 배워도 명백하지 못했던 법리를 하나하나씩 내게 보여주셨다. 대법 법리는 무거운 망치처럼 나를 강하게 진동시켰다. 특히 ‘누구를 위해 수련하는가(爲誰而修)’, ‘뿌리를 캐다(挖根)와 ‘대법은 이용당할 수 없다(大法不可被利用)’ 등 경문이었다. 나는 명백했다. 어떻게 해야 할지 알았다. 자신의 원만을 위한 것이 아니라 자신의 집착을 없애기 위한 것이 아니라 오직 사부님의 결백, 오직 대법이 공정한 평가를 받기 위해, 지금 박해받고 있는 수련생을 위한 것이었다. 나는 반드시 뒤돌아보지 않고 나서야 한다. 만약 여러 사람이 모두 나설 수 있어 함께 반대한다면 이 한 차례 박해는 애당초 발동하지 못했을 것이다.

한차례 교류한 후 우리는 더욱 명백했고 더욱 확고했다. 기다리지 않고 의지하지 않으며 다수가 떠들썩하는 것이 아니라 설사 나 하나라도 베이징에 가서 대법을 위해 나의 미력을 다 하겠다고 생각했다.

결심을 내리자 떠나기 전에 집으로 돌아가 나이 많은 부모님을 한번 보고 아내, 아들, 금방 태어난 딸과 이별하고 조용히 학교로 돌아왔다. 간단히 정리하고 열쇠를 집안에 넣고 문을 걸고 이 문을 떠나면 다시 돌아오려는 생각을 하지 않겠다는 호기를 품고 의연하게 베이징으로 가는 기차에 올랐다.

이틀 후, 나는 현지 공안국 요원에게 납치당해 소위 ‘치안조례를 위반’했다고 15일 동안 구치를 당했으며 3천 위안을 강탈당했다. 이후 내 신분은 공개됐으며 온 분야의 ‘유명인사’가 됐으나 자신이 어떤 길을 걷고 있는지 알고 있었다. 대법에 긍지를 느꼈고 자신이 대법제자라는 것이 자랑스러웠다.

단련

신분이 공개됨에 따라 일련의 박해도 잇따라 왔다. 당시 수련환경은 가혹했다. 교육국, ‘610’은 수시로 직장과 세뇌반을 이용해 박해했다. 당시 나는 아직 당원이었기 때문에 현에서도 소위 ‘조직’ 명의로 이야기했고 직장과 개인에게 압력을 가했다. 살고 있는 곳은 감시를 당해 주거와 행동은 제한을 받았고 그들은 함부로 수업시간에 나를 불러내 이야기했으며 정상적인 수업은 이유 없이 중단되고 구치와 벌금으로 자주 협박을 받았으며 학교도 매일 상부에 내 행방을 ‘보고’해야 했다. 그러나 사부님께서 “사람이 일단 진리와 생명존재의 진정한 의의를 알았을 때 그것을 위해 목숨을 바쳐도 아까워하지 않는다는 것을 알아야 한다.”(정진요지-나의 약간의 소감)이라고 말씀하신 것처럼 고층차의 생명을 저층차에서 부정하려는 것은 헛수고다. 한 동안 나는 자신의 일을 잘하는 외에 시간을 다그쳐 법공부를 했고 법으로 자신을 충실하게 했으며 정법 노정을 따라감에 있어서 끊임없이 밀려오는 사악의 박해를 막았다.

2002년 여름, 사악은 나를 세뇌반에 가뒀다. 박해를 반대하기 위해 내가 9일 동안 단식하자 사악한 610은 나의 부모, 형과 형수, 아내와 아들딸 및 일부 친척까지도 세뇌반에 불러놓고 그들에게 친지의 정과 폭력으로 나를 전향시킬 것을 독촉했다. 그날 태양이 이상하게 강렬했고 무더웠다. 백발이 된 부모, 무릎 꿇은 아내, 고통스러운 형과 형수, 우는 아들, 세상 일을 모르고 아빠가 박해를 받고 있는지를 모르고 오빠가 숙제를 하지 않았다고 나에게 일러바치는 3살 딸 등 모든 것을 대하고 온 몸이 나른해졌고 마음은 칼로 에이는 듯이 아팠다. 며칠 간의 단식, 하루 종일의 괴롭힘, 게다가 날씨가 무더워 내가 토해낸 것에는 모두 피가 섞여있었다. 고통과 놀라움에 아버지가 갑자기 넘어져 의식을 잃자 긴급하게 산소호흡을 받았고 어머니는 온 몸이 경련을 일으켜 혈압이 230까지 올라가서 두 분 다 응급 처치를 받았다. 그러나 사악은 여전히 그만두지 않았다. 몇 십 명 직원은 한꺼번에 나를 받쳐 들고 뜨거운 태양 아래에서 그들이 이미 다 써놓은 결렬서에 서명하라고 협박했다. 당시 비록 나는 안정하게 설 수는 없었지만 두뇌는 이상하게 청성했다. 사부님께서 바로 내 곁에 앉아계시고 나를 바라보시고 계신다. 내 눈앞에 있는 것은 모두 가상이다. 사부님께서는 정말 부모님께 무슨 일이 발생하게 하지 않으실 것이다. 이것은 구세력이 설치한 나를 고험하려는 관이라고 생각했다. 나는 갑자기 벗어나 결렬서를 단번에 갈기갈기 찢고 힘을 내어 앞으로 뛰어갔다. 즉시 사악한 직원들은 함께 달려와 나를 땅바닥에 눌러 놓았다. 곧 한 차례 악독한 박해를 피할 수 없는 상황이었데 뜻밖에 610 두목은 오히려 “그는 추하고 완고하다. 됐다. 그를 놔줘라”라고 말했다. 사부님의 보호로 나는 한차례 박해를 받지 않았다.

이전에 정공(靜功)할 때 매번 결가부좌(雙盤)를 하면 20분을 넘을 수 없었는데 이번 마난을 겪은 후 아주 수월하게 결가부좌를 1시간동안 할 수 있었다. 나는 사부님께 감사드렸다!

내가 박해받는 기간 사회에 대한 반향은 아주 컸다. 여러 학부모들이 동정과 관심을 표했으며 학교에서도 여러 방면의 압력을 무릅쓰고 나를 계속 고용하겠다고 했다. 내가 학교에 돌아갔을 때 학생들은 교실 흑판에 빽빽하게 겹겹이 ‘선생님, 사랑합니다!’ ‘우리는 선생님께서 돌아오시기를 바랍니다!’라는 그들 마음속 말을 가득 써놓았다. 아이들의 순진한 마음을 보고 아이들에게 빼곡히 둘러싸여 나는 속으로 아주 오랫동안 평정을 유지할 수 없었다……

정법의 홍세가 진행됨에 따라 수천만 수련생들이 희생을 무릅쓰고 용감히 앞으로 나아가고 아무것도 두려워하지 않고 중생을 구도하고 박해를 반대하는 장거 중에 하나하나 감동적이고 장엄하고 화려한 문장을 이뤘다. 동시에 나도 정법의 홍류 중에 끊임없이 영향을 받고 단련해낸 각종 관념이 조금씩 제거됐다. 머지않아 나는 일찍이 사부님께서 법정인간의 그날을 맞이해야 하고 다시는 인위적으로 자신 환경의 제약을 받아서는 안 되며 마땅히 학교에서 잘하는 외에 학교 외의 수련생과 함께 맥이 없고 혈(穴)이 없는 정체를 형성해야 한다는 것을 깨달았다. 이후로 현수막을 걸고 자료를 배포하고 편지를 쓰고 대면하여 진상을 알리는 각종 방식을 이용해 여러 방면의 인연 있는 사람을 구도했다. 수련생들과 함께 조사정법하고 중생을 구도하는 각종 항목을 협조하는 중에 자신의 경지도 크게 승화됐고 사는 것도 충실했다.

학교 일상수업과 생활 속에서 나는 엄격하게 법으로 자신을 바로 잡았고 엄격하게 자신을 다스리고 사람을 선하게 대했고 자신의 일언일행으로 대법의 결백, 선량과 아름다움을 실증했으며 중생 머릿속에서 사당에게 주입된 독해를 제거했다. 우리 벽보의 내용은 ‘홍음-사람 되기(做人)’이고 반의 구호는 ‘진선인’으로부터 ‘자비 선량 순정 대인(大忍), 이성 지혜 인자 위엄’으로 진화됐다. 매일 노래를 시작할 때 꼭 이구동성으로 높이 불렀고 매일 하루 세 번 이렇게 했다. 한 무리 한 무리 학생들은 진상을 명백히 알고 사회로 나가거나 진학했다.

한번은 내 반에 있었던 옛날의 ‘단(團)서기’가 돌아와 새로운 고등학교(高中)에서는 학생 일동이 공청단에 입단해야 한다고 요구했지만 그가 단호하게 거절해 이틀 동안 휴강하게 했고 결국 반주임은 반 간부를 통해 억지로 단 휘장을 주고 일을 맡겼다고 했다.

또 한 번은 내 반 학생이 진상을 명백히 알고 삼퇴를 하고 이미 입단했는데 다시 단에서 탈퇴했다. 학교에서 입단하는 사람이 없자 분배된 목표를 완성할 수 없었다. 학교 공청단 서기는 비록 진정한 진상을 분명히 알지 못했지만 이후에 다시는 독촉하거나 따지지 않았다고 한다. 몇 년이래 대법제자는 박해를 반대하고 중생을 끊임없이 구도하는 중에 대량의 사악을 제거했다. 갈수록 많은 세인이 사고하고 있고 갈수록 많은 중생이 각성했다. 진상을 알고 구제된 중생을 위해 나는 진정으로 기뻤다.

성숙

정법홍세가 계속 추진됨에 따라 대법제자의 수련도 갈수록 이성적이고 성숙해졌다. 2010년 내 직업은 또 변화가 생겼다. 이웃 현의 외딴 초등학교로 이동한 것이었다.

외딴 곳에 있어 현지 환경은 아주 좋지 않았고 진상을 알지 못한 사람이 많았다. 학교에는 선생님 7명과 경비 1명이 있었으나 그다지 진상을 명백하게 알지 못했다. 나는 그들을 위해 대법 서적 및 진상자료를 숙소 침대 곁 및 사무실 테이블 위에 놓았으나 그들은 마치 손가락 하나도 대지 않는 것 같았다. 이런 장면을 보고 중생구도가 더욱 절박함을 느꼈다. 나는 반드시 대법의 지혜와 자비로 자신의 수련환경을 개척하고 학교 안팎에 나와 인연 있는 모든 중생을 구도해야 한다는 것을 알았다.

우선 학교 내에서 나는 자신이 대법제자란 신분을 숨기지 않았고 대법을 영광으로 여겼다. 대법수련 중에 정정당당하게 사람을 인자하고 자비롭게 대했고 대법의 저작, ‘밍후이주간’, 여러 가지 ‘밍후이 정기간행물’, CD, 정교한 달력, 탁상용 달력 등 각종 진상자료는 숙소 사무실 밝은 곳에 놓았다. 그리고 우리의 숙소 사무실은 쉬는 시간에 선생들의 휴식공간이었다. 바로 자신의 순정, 자비, 언행으로 세인에게 대법진상을 이해하게 하는 창구를 만들어주었다.

평소 일할 때 나는 부지런하고 성실했고 동료와 유쾌하게 협력했으며 생활에서 선타후아(先他後我) 했으며 일에 부딪히면 안을 향해 찾았고 자발적으로 다른 사람을 생각하고 도왔으며 모든 기회를 이용해 중생에게 대법 진상을 소개하고 삼퇴를 권했다. 내가 집과 멀리 떨어져있고 동시에 현지에서도 모두 나와 인연 있는 중생이기 때문에 비록 일찍 퇴근하지만 보통 주말 외에 평소에는 집에 가지 않고 학교에서 먹고 잤다. 퇴근한 후 나는 남은 시간과 저녁시간을 이용해 학생과 동료 집을 방문하고 현지의 많은 인연 있는 사람에게 진상을 알리고 삼퇴하게 했다.

더욱 좋고 오랫동안 사당의 독해를 숙청하기 위해 이후에 기계를 사서 학교에 신탕런(新唐人) TV를 설치해 교사들에게 단번에 사당의 내막, 세계의 초점과 대법 진상을 선명하게 보여주었다. 신탕런 TV를 보고 진상CD 및 진상자료 등을 통해 교사, 교장을 포함해 점차적으로 각성하고 대법에 대한 태도에 뚜렷한 변화가 생겼다. 지금 학교 동료는 기본적으로 모두 삼퇴를 했다.

또 학생들은 비록 어리지만 마찬가지로 내가 구도하려는 대상이었다. 수업시간에 수업을 하는 것을 통해 ‘진선인(眞善忍)’ 이념을 학생들에게 알려주었고 생활 중 학생을 자신의 아들딸처럼 대했다. 나는 엄격하게 한 가지만 준수했다. 자비롭게 매 학생을 대했고 절대 학생을 체벌하지 않았으며 대법으로 자신의 일언일행을 바로 잡으려 노력했고 모든 일에서 대법의 아름다움을 체현했으며 ‘진선인’의 씨앗을 그들 어린 마음에 심어주고 싹 트게 했다. 한번은 수업할 때 내가 빗자루로 잘못을 한 학생을 놀라게 해주려고 했으나 빗자루를 들자마자 뜻밖에 그 학생은 내 손을 붙잡으면서 “‘진선인’은 사람을 때리지 않는다!”라고 외쳐 학생들은 모두 웃었다.

지금 내 수련환경은 상당히 좋고 학생들도 나에 대해 아주 웃어른으로 존대한다. 학생들은 머리가 아프고 배가 아프면 모두 ‘파룬따파하오(法輪大法好-파룬따파는 좋습니다), 쩐싼런하오(眞善忍好-진선인은 좋습니다)’를 묵념할 줄 알았다. 당연히 그들도 이것으로 혜택을 봤으며 대법의 아름다움과 신기함을 알게 됐다.

그리고 또 현지 수련생과 협조하는 방면에서 금방 여기에 왔을 때 설령 사부님께서 나를 여기에 배치해주셨더라도 나는 마땅히 나가서 현지 수련생과 하나가 되어야 한다고 생각했다. 그러므로 온지 얼마 안 되어 현지 수련생과 연락했다. 원래 현지에 확실히 두 수련생이 있었는데 속인이 몰랐을 뿐이었다. 비록 그들은 한 마을에 있었지만 함께 단체로 법공부하지 않았고 3가지 일도 적게 했다. 우리 세 사람은 교류한 후 정법 노정을 따라가기 위해 우리는 반드시 진정한 정체를 형성해야 하며 앞으로 매일 단체 법공부하고 일에 부딪히면 안을 향해 찾고 정법 중 얼마 남지 않는 시간을 아끼고 노력해서 3가지 일을 잘하고 진정한 대법제자가 되겠다는 공통 인식을 달성했다.

이 두 수련생은 확실히 보기 드물었다. 그들은 대법, 사부님께 대한 마음은 금처럼 순정했다. 이 2년 동안 그들은 대법 중에거나 개인생활에서 나를 끊임없이 도와주었다. 여기에서 그들에게 깊은 감사의 뜻을 표시한다. 동시에 사부님의 깊은 안배에 매우 감사드린다. 우리는 대법 중 맺은 성연(聖緣)을 아주 아꼈고 수련 중에서 너 나 할 것 없이 일에 부딪히면 스스로 안을 향해 찾고 서로 질책하지 않았다. 정진실수(精進實修) 중 모두들 법리적으로 아주 빨리 승화했고 현재 대법제자의 책임과 사명을 더욱 명확히 했다. 사람마다 아주 빨리 자신을 돌파하고 걸어 나왔으며 진정하게 대법제자의 사명을 책임지고 자료를 배포하든, 대면하여 삼퇴를 권하든 사람마다 모두 착실한 수련 중에서 착실히 자신을 제고했다. 2년 동안 우리의 발자취는 주위 10여 개 마을에 골고루 퍼졌고 진상자료, ‘9평’을 향촌 각 구석에 전했다.

지금 외지 수련생의 도움 하에 우리에게도 작은 꽃(자료점)이 피었고 조사정법(助師正法)의 길에서 우리는 더욱 안정적으로 걷게 됐다.

“수련의 길은 같지 않으나 모두 대법 가운데 있도다”[홍음2-가로막지 못하리(無阻)]. 교사로서 1년 중 수업 시간 외에 휴식하는 시간이 비교적 많았다. 그러나 정법의 길에는 누가 느슨할 수 있겠는가? 이틀 연후, 명절날과 휴일 등도 내가 진상을 알리는 좋은 기회였다. 작년 겨울에 수련생들은 미리 정교한 달력, 탁상용 달력, 진상 대련(對聯) 등 진상자료를 만들어놓았다. 나는 고향 수련생들과 팀을 짜서 촌 집집마다 다니면서 이 아름다운 선물과 대법이 구도하는 복음을 인연 있는 중생에게 전했다. 나와 고향 수련생들은 비학비수(比學比修)하고 함께 정진하며 함께 대법제자의 사명을 실현했다.

사부님께서 정법하신지 이미 20년이 됐고 대법제자의 수련시간도 얼마 남지 않았다. 수련인으로서 정법이 곧 종결되려는 지금, 시간의 진귀함을 깊게 알고 있으며 성숙된 대법제자로서 반드시 정정당당하고 자비롭게 사람을 구도하는 각자의 풍채를 연마해내야 한다는 것을 알고 있다. 사람의 요소를 내려놓은 후 수련자의 몸과 마음의 간단함, 유쾌함, 충실함, 대범함, 자유로움을 깊게 느꼈으며 신의 길을 더욱 확고히 했다. 두 달 여름 방학기간에 나는 학습반을 만들어 돈을 벌라는 요청을 거절하고 매일 거리에 나가 인연 있는 사람을 구도했으며 저녁에 돌아와 부족함을 총결했으며 법공부하고 안을 향해 찾고 자신을 동화했다. 현재 인류의 무대 위에서 대법제자는 주역이다. 사부님께서 커다란 감당을 통해 우리를 위해 연장한 매일을 꼭 소중히 아끼고 마음을 써서 3가지 일을 잘하고 자신의 서약을 실현하면서 최후 원만의 길을 잘 가자!

사존께 감사드립니다! 수련생여러분 감사합니다!사존께 허스(合十)합니다!

(밍후이왕 제9회 중국대륙 대법제자 수련심득교류회)

문장발표: 2012년 11월 15일
문장분류: 수련마당>정법수련>제9회 밍후이법회
원문위치: http://www.minghui.org/mh/articles/2012/11/15/263393.html
영문위치: http://en.minghui.org/html/articles/2012/12/2/136499.html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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