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마음속엔 오직 믿을 ‘신(信)’ 한 글자뿐이었다

글/ 허베이(河北) 대법제자

[밍후이왕] 나는 악당 장 씨 망나니집단이 발동한 파룬궁(法輪功)에 대한 박해 중에서 신문방송 등 그들의 언론매체들이 대법을 비방하고 요언을 날조하며 모독할 때도, 노동교양소에서 악경(사악한 경찰)들로부터 장시간 머리에 전기고문을 당할 때도, 잔혹한 박해로 불구가 되어 고통스러운 나날을 보낼 때도, 사악한 ‘610’과 직장 상사들이 돌아가며 믿음을 포기하라고 핍박을 할 때도, 그 외 어렵고 어렵던 나날에도 사부님과 대법만을 굳게 믿으며 처음부터 끝까지 동요하지 않았는데 마음속에는 오직 믿을 ‘신(信)’의 단 한자뿐이었다.

나는 1999년 1월에 법을 얻어 대법을 수련한 지 10여 년이 된다. 10여 년간 수련 노정에서 믿을 信 한 글자에 의해 대법을 믿고 사부님을 믿으면서 오늘까지 걸어왔다. 굳게 믿는 이 한마음에 의존하고 자비하시고 위대하신 사부님의 보호 속에서 층층으로 마의 난을 돌파하였고 하나하나의 고비를 뚫고 나갔다. 아래에 수련생들과 교류하려고 하는데 만약 합당하지 못한 곳이 있다면 수련생들의 자비한 시정이 있기를 바란다.

1. 법을 얻다

나는 법을 얻기 전 직장염을 앓고 있었는데 온갖 치료를 다 받아봤으나 아무런 효험을 보지 못했다. 그러나 생활을 유지하기 위해 나는 병이 있는 몸으로 어렵게 직장을 다녔다. 회사가 개혁한 후 병으로 휴직하는 사람에게는 50위안(약 8,700원)의 생활비를 지불 하였지만 나는 두 아이가 학교에 재학 중이라 내가 출근하지 않으면 가족의 생계를 유지할 수가 없었다. 남편이 회사에 출근하고 있었으나 여건이 좋지 않아 급료가 매우 낮았다. 그러므로 나는 병고의 시달림과 궁핍한 경제적 상태로 오는 생활상의 괴로움을 당했는데 말로는 형언할 수 없는 어려운 상태였다.

내가 병원이나 한의원 또는 그 무슨 민간요법으로도 병을 치료할 수 없는 막다른 골목에서 절망에 빠졌을 때 직장의 한 동료가 나에게 파룬궁을 소개했다. 나는 병 치료를 하겠다는 일념으로 휴가를 냈다. 우선 서점에서 ‘전법륜(轉法輪)’ 책을 사왔다. 한 번 보고 나서 몹시 놀랐다. 사람들을 수련하게 하여 반본귀진(返本歸眞)하도록 하는 책이라는 것을 똑똑하게 알게 되었다. 그때로부터 나는 수련의 길을 걷게 되었다.

나의 몸은 병마의 시달림으로 몹시 야위어 있었다. 매일 수차례씩 설사를 하는 바람에 허리를 제대로 펼 수조차 없었는데 나의 이런 병고의 정황을 직장동료도 모두 알고 있었다. 그런데 파룬궁수련을 겨우 며칠 했을 뿐인데 그런 고질병이 전부 나았다. 그뿐만 아니라 몸에 생기가 넘치는 사람으로 변했다. 휴가를 끝내고 출근하니 직장 동료가 내 병이 정말 나은 것을 보고 모두 깜짝 놀라는 것이었다! 모두 앞다투어 “어떻게 나았느냐? 어떤 치료를 받고 나은 거야?”라고 물었다. 나는 그들에게 파룬궁을 수련하여 나았다고 알려 주었다. 그리고 그들에게 홍법하였는데 그 당시 우리 회사에서 매우 큰 반향을 불러일으켰다. 매우 많은 사람이 ‘전법륜(轉法輪)’을 모셔 읽었으며 어떤 사람들은 이를 계기로 법을 얻게 되었다.

나는 연공을 하면서 쩐싼런(眞善忍)에 따라 행동할 것을 스스로 요구하였다. 우선 3,000여 위안(약 52만 원)의 약값 영수증을 모두 찢어 버렸다. 회사는 개혁 후 사원들의 약값은 전부 자부담으로 한다고 제도를 바꿨다. 그러나 어머니의 회사는 업종이 달라서 치료나 약값을 회사가 부담하고 있었다. 그래서 그동안 치료를 받을 때마다 치료비 영수증을 모두 어머니 이름으로 썼다. 수련 후 이런 행동이 모두 ‘쩐싼런(眞善忍)’에 부합되지 않는다는 것을 깨닫게 되어 그 의료 영수증을 모두 없애 버린 것이다. 또 한 번은 그전에 일하다가 손님이 잃어버린 매우 큰 금목걸이 메달을 습득했는데 주인이 누군지 알 수 없게 되자 내가 가진 적이 있다. 연공 후에 나는 회사의 수련생과 상의한 후 그 목걸이 메달을 회사 상사에게 제출했다.

나는 직책은 매표원이다. 그러므로 매일 많은 돈을 만지게 되는데 늘 위조지폐로 표를 사려는 고객들이 있었다. 그럴 때 나는 받은 가짜 돈을 찢어버리고 내 돈으로 보충시켰다. 동료 직원이 나의 이 같은 일을 알고는 “당신이 파룬궁을 수련하니 밖에서 가짜 돈을 발견할 수가 없네요. 그 가짜 돈을 나에게 주세요, 내가 당신이 보충한 돈을 찾아 줄 터이니. 왜, 당신이 그걸 배상합니까?”라고 말했다. 나는 그에게 우리 연공인은 그렇게 할 수 없다고 말해 주었다. 직장에서 나는 그들과 화목하게 지내면서 이것저것 따지지 않았다. 자신이 당연히 해야 할 매표 일을 잘하였을 뿐만 아니라 대합실과 문 앞 주차장이 지저분하면 자발적으로 청소하곤 했다. 나는 매일 행복하게 대법수련에 푹 빠져 있었다. 대법이 나를 구해 주었고 나를 개변시켰으니, 나는 대법의 아름다움을 나의 실제 행동으로 사람들에게 펼쳐 보여주었던 것이다. 이 일체는 후일 회사동료에게 진상을 알리고 3퇴를 권할 수 있는 매우 좋은 기초를 닦아 놓은 것이었다.

2. 굳게 믿다

99년 ‘7.20’ 이후 장 마두가 파룬궁에 대해 하늘땅을 뒤덮을 듯한 박해를 가하기 시작한 후 회사 사장도 사악에게 복종하였다. 나는 북경으로 상방[陳情]하러 갔다가 많은 수련생과 함께 체포되어 현지 유치장에서 한 달간 감금당했다. 나는 2000년 여름 혼자서 다시 한 번 베이징으로 가서 법을 실증하다가 천안문 앞에서 악경에게 납치되었다. 회사 책임자는 내가 북경으로 갔다는 보고를 받고 차를 몰아 나를 찾아 베이징까지 따라왔었다. 나는 악경에게 현장에서 납치되어 강제로 차에 실려져 현지 구류소로 끌려간 후 불법적인 노동교양처분을 받았다.

나는 노동교양소에서 악경들에게 잔인무도한 박해를 당했는데 참혹한 고문 박해로 하체를 다쳐 걸을 수 없게 되었다. 악경은 고압 전기몽둥이로 온몸을 충격하고 때린 후 팔을 비틀고 허벅지를 밟아 꿇어 앉혀 협박과 공갈로 욕설을 퍼부으면서 고압 전기 몽둥이로 머리, 얼굴, 목 뒤 목덜미 부분을 전기 충격을 가하고 때렸다. 얼굴도 사정없이 가격을 당하여 순식간에 제 모습을 잃고 말았다. 구타와 충격으로 머리통은 모두 상처투성이로 변했고, 얼굴은 퉁퉁 부어 물집이 생기고 눈과 입술도 모두 심하게 부어올라 눈은 아무것도 보이지 않았다. 한 달 넘게 누울 수가 없었다. 눕기만 하면 전신이 쑤시고 물집이 눌려 터져 진물이 흘러내렸다. 후에 얼굴 전체의 한 층 껍질이 모두 벗겨졌다.

나의 두 다리는 통증이 좀처럼 낫지 않아 제대로 걸을 수가 없어 매우 불편했다. 무수한 바늘로 찌르는 듯이 고통스러웠는데 너무 고통스러워 밤이면 잠들 수가 없어서 졸음에 시달리기도 했다. 당시는 추운 겨울이라 얼음처럼 찬물을 대야에 담고 거기에 두 발을 담가 냉기로 마비시켜 고통을 잊게 한 후 잠시 눈을 붙이고 잠을 자다가 냉기가 가시면 다시 통증으로 잠을 깨곤 했다. 정말 사는 것이 죽는 것보다 못하였는데 말로는 표현할 수 없는 정도였다. 후에 나는 악경 대장과 나에게 불법적으로 노동교양처분을 한 현지 공안 2처에 연락하여 내가 나갈 수 있도록 하라고 강력하게 요구했다. 그러자 악경이 말했다. “당신이 전향하지도 않고 나가려고 생각하는가?”라고 빈정거렸다. 그들은 근본적으로 인성이 없는 사람들이었다. 그들은 나에게 고문 박해를 가해 불구로 만들어 놓고도 여전히 나에게 전향하라고 핍박과 기만으로 보증서를 쓰라고 했다. “당신이 북경에 다시 들어가지 않겠다고만 쓰면 된다.”라고 했다. 나는 그런 악경들을 마주하면서 마음속에 오직 ‘信’ 한 글자만을 떠올렸다. 오직 사부님을 믿고 대법을 믿었기에 그들이 요구하는 그 어떤 것도 쓰지 않았다.

2001년 5월 내가 감금되어 있는 감방의 열 몇 사람이 이질 병을 앓기 시작했다. 내가 전향하지 않았다는 이유로 우리 모두를 감방 밖으로 나가지 못하게 했다. 문 뒤에 플라스틱 통 하나를 놓고 모두 그 통 하나에 용변을 처리하도록 했다. 나도 설사를 하기 시작했다. 고문 후유증으로 하체가 부실해서 걸을 수 없는데다 고열에 수차례씩 설사까지 하게 되니 그 고통은 이루 말할 수 없었다. 그때 한 동수가 내가 몹시 고통스러워하는 것을 보고 내게 말했다. “당신은 죽는 것이 두렵지 않아요?” 나는 “이 지경이 되었는데도 두렵지 않네요.”라고 대답했다. 그녀는 나에게 먹을 수 없어도 억지로라도 먹어야 한다며 끓는 물은 없어 미지근한 물에 가루를 풀어 나에게 먹으라고 주었다. 나는 조금 먹었다.

후에 어머니가 나의 소식을 듣고 노동교양소 초대소에서 20여 일간 머물면서 매일 노동교양소를 찾아가 딸을 내놓으라고 요구했으나, 노동교양소 측은 온갖 수단과 방법을 동원하여 내가 석방되는 걸 차단했다. 어머니는 불편한 몸으로 생명 위험을 무릅쓰고 나의 석방을 요구하다가 심장병 발작을 일으켰다. 어머니는 악경들에게 말했다. “내가 죽더라도 그 애를 나오게 하겠소. 내 나이 60이 넘었으니 40이 되는 딸의 명과 바꾸더라도 나는 꼭 딸이 나오도록 하겠소.”라고 했다. 이런 모친의 끈질긴 구원으로 나는 11개월간 혹독한 박해를 받던 그곳 소굴에서 나오게 되었다.

집에 돌아온 후 박해로 불구가 되어 걸을 수 없는 상황인데도 현지 ‘610’과 회사의 국급(單位局級), 공사급(公司級), 소급(站級) 등의 부서 요원들이 돌아가며 우리 집을 찾아와 나를 교란하였는데 특히 시의 정법위(정치법률위원회)는 나를 중점 대상 인물로 정하고 전향을 위한 협박과 공갈을 일삼았다. 심지어 그들은 직권을 남용하여 남편 회사 상사에게 압력을 가해 해직시키라고 했다. 그러자 그 상사는 남편에게 “당신 부인이 전향하지 않는다면 그럼 당신은 이혼하시오.”라고 말했다. 그러면서 정법위와 관련 악당들의 협의가 끝날 때까지 남편에게 출근하지 말고 집에서 부인을 감시하라고 압박을 가했다. 이는 남편으로서는 감당하기 어려운 거대한 정신적 압력이었다. 압력이 너무 커서 제정신이 아닌 남편은 전기밥솥에 전선이 연결된 것도 보지 못하고 밥솥을 뒤집어엎으려고 하면서 격분하기도 했다. 악인들은 매일 사람 하나를 우리 집에 고정 배치하여 나를 지키게 하였다. 이런 고압적인 압력과 박해로 나는 거의 붕괴 작전에 이르렀다. 나는 두 손으로 머리를 감싸고 사부님께 “사부님, 사부님! 저는 전향하지 않겠습니다. 전향하지 않겠습니다. 죽어도 전향하지 않겠습니다!” 그리고 소리쳤다. “파룬따파하오(法輪大法好–파룬따파는 좋습니다)!” 순식간에 마음속에는 사부님과 대법에 대한 굳은 믿음이 더욱 증가 되었다.

악당 요원들은 정신적 박해로는 나를 동요 시킬 수 없다는 것을 보고 방법을 바꾸었는데 경제적 방법의 박해로 나를 굴복시키려고 했다. 회사에서 사원들이 모두 일정액의 돈을 내어 기간이 지난 후 큰돈이 모이면 그 돈을 그동안 돈을 낸 직원들에게 모두 나누어 주는데 나에게 돌아올 그 돈을 압수하고 주지 않는 것이다. 또한, 그동안 밀린 월급도 지급하지 않았다. 두 아이가 학교에 다니기 때문에 매달 남편이 타오는 300위안(약 5만 2천 원)의 월급으로는 생활할 수가 없었다. 하지만 나는 심성을 지키면서 속인에게 돈과 물건을 요구하지 않았다.

그때는 정말 어려웠다. 하지만 어떻게 어려워도 나는 사악을 향해 머리 숙이지 않았고 아무것도 쓰지 않았다. 아무리 어려워도 사부님과 대법에 대한 굳은 믿음만은 원래 동요치 않았고 사부님께서 무엇을 말씀하시면 무엇을 믿고 다른 일체 요언과 비방은 믿지도 않았고 듣지도 않았다. 생활 중에서는 다른 사람을 생각했다. 비록 나는 두 발로 걸을 수는 없지만, 아침에 일어나면 그날 아무리 힘들어도 침대에 올라가지 않았다. 매일 집안에서 방석에 앉아 있으면서 침대도 깨끗하게 정돈하였다. 남편이 출근하고 애들이 학교에 간 후에 바늘로 찌르는 뜻한 아픔을 참으면서 막대기를 짚고 다니며 집을 청소하고 밥을 짓고 하여 가족이 집에 돌아오면 식사를 할 수 있도록 준비했다.

3. 지팡이를 짚고 다니면서 진상을 알리다

나는 한 수련생 언니에 대해 감격해 마지않는다. 내가 집에서 감시당하는 나날에 그녀는 자신의 안위도 생각하지 않고 나를 보살펴주려고 계속 왔었다. 그 언니는 나에게 사부님의 ‘신경문’과 ‘명혜주간(明慧周刊)’ 등을 가져다주었고 나를 위해 교류를 하곤 하였다. 그녀는 말했다. “자네 어머니에게 지팡이 한 쌍을 사오게 하여 그걸 사용하면서 사람들에게 악경이 어떻게 자네를 구박하여 불구로 만들었는가를 말해줘야 하네.”

이렇게 되어 나는 그의 말대로 지팡이를 짚고 다니면서 진상을 알리기 시작하였고 사악이 대법제자들에 가한 박해를 폭로하였다. 먼저 내가 거주하고 있는 작은 구역부터 알리기 시작했는데 사람을 보기만 하면 진상을 말해주어 내가 거주하고 있는 구역 부근의 주민은 모두 내가 사악의 노동교양소에서 전기 몽둥이 전기 고문당하고 구타당하고 박해를 받아 불구가 되었다는 것을 모두 알게 되었다. 내가 거주하는 지역 사람들이 모두 진상을 알게 되자 나는 지팡이를 짚고 더 멀리 가기 시작하였다. 오늘 1리를 가면 내일은 2리를 가면서 사람을 보기만 하면 진상을 알렸는데 사람들로 하여금 진상을 알게 하려고 하는 마음 하나뿐이었다.

여름에는 매우 덥고 입은 옷이 얇아 양쪽 겨드랑이가 모두 닳아서 상처가 생기고 땀에 절어 매우 쓰리고 아팠다. 진상을 알릴 때 수많은 사람이 나에게 말한다. “너무 안됐네요. 너무 불쌍하네요. 안전에 유의하세요.” 구도 된 하나하나의 생명을 볼 때면 나는 고생과 어려움을 느끼지 못한다. 나는 수없이 “대 각자는 고생을 두려워하지 않거늘 의지는 금강으로 만들었구나, 생사에 집착이 없으니 정법의 길은 평탄하여라.” (홍음2–정념정행)를 암송하였다. 대법제자의 의지는 곧 금강으로 만들었는데 무슨 고생과 난이 막을 수 있단 말인가?

어느 날 집으로 돌아올 때 화단을 지나게 되었는데 매우 많은 사람이 앉아 있었다. 그 중 한 노인이 “좋은 사람, 좋은 사람이 왜, 그 곳(노동교양소)엘 갔는가?”라고 말했다. 나는 마음을 움직이지 않았고 화도 내지 않고 그를 원망하지도 않았다. 또 사람을 만나게 되어 몇 사람에게 진상을 알리려고 하는데 아까 그 노인이 큰 소리로 말하는 것이었다. “네가 또 여기서 말하려고 하는가? 말하지 마!”라고 다소 격앙된 태도로 내게 말하는 것이었다. 나는 마음을 움직이지 않고 천천히 말하였다. “아저씨, 서두르지마세요, 우리 두 사람은 서로 알지도 못하는 사인데 아저씨는 왜, 그렇게 화를 내나요? 저분들이 나에게 ‘왜, 지팡이를 짚고 다니는가?’라고 묻기에 내가 지금 그들에게 그 경위를 말하고 있지 않았나요?”라고 말해주었다. 그 후 나는 우리 지역에서 늘 그 사람을 만났지만, 그는 더는 그전처럼 그렇게 하지 않았다.

또 한 번은 내가 지팡이를 짚고 영화관 앞으로 가게 되었다. 여름방학 철이어서 학생들이 무척 많았다. 천천히 걷고 있는데 그 중 한 남자애가 “이모는 왜, 지팡이를 짚고 다녀요?”라고 묻는 것이었다. 나는 악경이 어떻게 나를 박해하여 불구가 되었는가를 말하고 있었다. 갑자기 그 애 엄마가 달려오면서 말하는 것이었다. “당신, 지금 여기서 파룬궁을 말하고 있단 말이오! 당신 내가 누구인가 알아요? 나는 기자요. 내가 110(범죄신고 전화번호)에 신고하겠소!”라고 말했다. 나는 즉시 “당신의 애가 나에게 묻기에 대답했습니다. 110에 알리지 마세요!” 그녀는 처음부터 나의 말은 듣지도 않고 휴대폰으로 110에 신고를 했다. 나는 이미 손쓸 여지가 없다고 생각되어 아예 길옆에 앉아서 마음속으로 사부님께 청하고 발정념을 하면서 한 번 또 한 번 정법구결을 외웠다.

몇 분 되지 않아 110차가 도착하였다. 그들은 파룬궁을 수련하는 사람이 누구냐고 물으면서 나에게 여기서 무슨 말을 했느냐고 물었다. 나는 두려워하지 않고 내가 참혹한 박해를 받아 불구가 된 과정을 이야기했다. 그들은 “당신이 한 말이 모두 정말입니까?”라고 물었다. 나는 한 마디 한 마디가 모두 사실이라고 말하면서 내가 일하는 회사와 나의 이름을 알려 주면서 우리 회사에 가서 물어보라고 했다. 그들은 나의 말을 듣고 “당신 정말 불쌍합니다. 차에 오르시오, 우리가 당신을 집까지 데려다드릴게요.”라고 했다. 나는 “감사합니다. 그러나 나는 지금 밖에 나와 신체 단련 중이니 당신들에게 폐를 끼치지 않겠습니다.”라고 말했다. 내 말을 듣고 그들은 몸을 돌려 신고한 사람을 찾았다. 조금 후 그 여인이 노기등등하여 나를 찾아와서 “당신이 110사람들에게 무슨 말을 했기에 그들이 나를 훈계까지 하게 했는가?”라고 따지며 물었다. 나는 차분하게 “나는 그 경위를 말했을 뿐입니다, 내가 당신에게 신고하지 말라고 하지 않았습니까.”라고 말했다. 당시 많은 사람이 에워싸고 있었다. 그 중 한 아주머니가 눈물을 흘리면서 “내가 자네를 부축할 테니 일어나라.”라고 말했다. 그리고 신고한 그 여인을 향해 질책하는 사람도 있었다.

나는 회사에 가서 진상을 알리기 시작하였다. 경제적 방법으로 나에게 박해를 가한 사실을 폭로하였다. 나는 한 번 또 한 번 회사에 가서 그들이 불법적으로 압류한 나의 적립금(分紅錢)과 불법적으로 노동교양소에 감금당했을 때 지급하지 않은 밀린 월급을 지급하라고 요구했다. 처음 내가 회사에 갔을 때 그들은 나를 아는 체도 하지 않고 오히려 파출소에 신고하여 나를 위협하고 협박하도록 하였다. 그들에게 나는 법을 위반하지 않았고 나는 밥을 먹어야 하며 응당 나에게 속하는 나의 것을 달라고 요구하는 것일 뿐이라고 말하였다. 회사 동료는 나를 매우 동정하면서 “돈을 주지 않으면 가지 말고 여기에 있으시오.”라고 말했다. 나는 이 기회를 이용하여 회사 동료에게 진상을 알리면서 파룬궁에 대한 악당의 잔혹한 박해 사실을 폭로하였다. 그들은 모두 진상을 명백히 알게 되었다.

나는 지팡이를 짚고 어디에 사람이 많으면 곧 그곳으로 가서 진상을 알렸다. 여름이면 손님들이 모두 대합실 밖의 광장에서 차를 기다고 있다. 나는 큰소리로 외친다. “당신들을 찾지 않으면 누구를 찾겠습니까? 당신들이 차를 몰아 나를 노동교양소로 보냈습니다. 장쩌민은 변호사들에게 파룬궁수련생들을 변호하지 못하게 하였고, 그런데 내가 고문 박해와 시달림을 받아 불구가 됐는데 나를 도와주는 사람도 관계하는 사람도 없으니 나는 당신들을 찾습니다!” 사람들이 많으면 많을수록 나는 더욱 높은 소리로 외친다. 그러는 나를 에워싸고 구경하는 여행객들이 점점 더 많아지자 회사에서 나에게 빨리 사무실로 들어오라고 했다. 결국, 회사는 나의 적립금과 그동안 밀린 월급에 위로금까지 더해서 전액 나에게 지급했다.

내가 지팡이를 짚고 다니면서 진상을 알리던 나날에도 나는 하나 또 하나의 생명이 구원되는 것을 보면서 종래로 고생이라고 생각하지 않았고 반대로 아주 기쁘게 위안을 받는 느낌이었다.

내가 부단히 법 공부하고 연공 함에 따라 자비하시고 위대하신 사부님의 보호로 지팡이를 버리게 되었고, 그다음부터 자전거를 타고 매일 망망한 인해 속을 실 북처럼 드나들며 사부님의 정법노정을 따라 세인을 향해 진상을 알리고 3퇴를 권하였다. 나는 이제는 사용하지 않는 쌍지팡이를 보관하여 두었다. 그 지팡이는 수많은 나날을 수많은 간난과 어려움을 겪으면서 수많은 사람에게 진상을 알리며 걸어왔던 동반자였다. 그 동반자는 나와 함께 진상을 알려 많은 중생을 구도하였다. 후에 많은 사람이 나를 보고 “아주머니, 이젠 나아졌군요. 이젠 지팡이를 짚지 않는가 보네요?”라고 말했다.

3. 사람을 더 많이 구하다

나는 쌍지팡이를 던져버린 후 가정집 일을 하게 되었다. 그때 큰 애는 이미 대학에 진학했고 둘째는 고등학생이었다. 나는 시간을 내어 법을 실증하기 위해 반나절 일을 선택하였다. 반나절 사이에 빨래하고 집 청소하고 점심 준비까지 마쳐야 했기 때문에 매우 고되고 힘들었다. 하지만 나는 심성을 지키며 자신이 수련자라는 것을 명심하고 참답고 착실하게 일을 하였다. 그러니 주인들은 나를 매우 신임하였다. 나는 어느 집에 가면 어느 집에 진상을 알렸고 대법의 아름다움을 어느 집에든지 가지고 갔다. 내가 일을 아주 잘하므로 주인들은 나에게 무슨 물건들을 주었는데 나는 모두 받지 않고 사절 하였다. 무릇 내가 일했던 집 사람들은 모두 진상을 똑똑히 알게 되었고 어떤 사람들은 3퇴까지 하였다… 지금까지도 그들은 나와 연계가 되어 있다.

나는 회사 동료가 자녀혼례식을 치르게 되면 그 기회를 이용하여 진상을 알렸다. 직장 동료는 애들 혼사가 있기만 하면 모두 나에게 알렸다. 그러면 그때마다 나는 제일 먼저 일찍 예식장 홀에서 성심껏 하객들을 접대했다. 그리고 진상을 알리고 3퇴를 권했다. 형식상 겉모습으로는 혼사 댁을 도와 하객의 접대를 하지만 실질적으로는 진상을 알리고 3퇴를 권하면서 중생을 구도하고 있었던 것이다. 매번 적지 않은 사람들에게 진상을 알렸고 3퇴를 시켰지만, 세인들이 볼 때에는 앞뒤로 분주하게 다니며 일을 열심히 해주니 모두 고맙게 생각했다.

나의 아버지는 일찍 타계했고 고향도 너무 멀어서 아버지가 돌아가신 후에는 고향 사람들과는 거의 내왕이 없었다. 그래서 항상 고향에 가서 그곳 사람들에게 진상을 알려 그들을 구도하는 것이 나의 소망이었다. 나는 사부님께 고향에 갈 수 있는 기회가 있도록 해달라는 청을 드렸다. 둘째 딸애가 유학을 가기 위해 면접시험을 보게 되었다. 나는 그 애와 의논하여 면접시험 장소를 고향과 가까운 도시로 선택했다. 우리는 면접이 끝나자 그날 밤으로 열차를 타기로 했다. 차를 기다리며 한 젊은이와 이야기를 하게 되었는데 서로 어디로 가느냐고 묻게 되었다. 그 젊은이는 나와 같은 고향에서 오는 중이라고 했다. 그는 반가워하면서 고향까지 가는 차표를 사다 주었다. 나는 그에게 감사를 표하고 진상을 알려 이름을 지어주고 탈당을 시켜 주었다. 그리고는 정정당당하게 나의 주소와 회사 소재지를 알려주고 초청하니 시간 되고 기회가 되면 놀러 오라고 했다. 그 젊은이는 우리 짐을 들어다 주고 가면서 우리와 헤어지는 것을 무척 서운해 하였다. 우리는 순조롭게 검표하고 차에 올랐다.

다음 날 아침이 되자 고향 역에 도착하여 급히 고향 마을로 가는 버스를 이용하여 고향으로 향했다. 도착해서 차에서 내리자 삼촌이 기다리고 있다가 우리를 자기 집으로 안내했다. 나는 삼촌에게 이곳에 오게 된 경과를 말해주고 애가 면접에 합격하여 빨리 집으로 돌아가 송금을 해야 하기때문에 이곳 고향에서 하룻밤밖에 머물 수 없다고 하자 삼촌이 즉시 차를 얻어 우리를 태워 친척 집을 모두 다녀오게 하였다. 나는 친척들에게 진상을 알리고 3퇴하게 하였다. 나의 고모는 80대인데 내 손을 잡고 “나 아직은 멍청하지 않아, 네가 한 말 모두 기억했어.”라고 했다. 친척들은 우리가 그토록 먼 곳에서 고향의 친척을 찾아준 데 대해 아주 고마워 감동했다. 그 후부터 나는 고향 친척들과 정상적인 관계를 유지하게 되었다.

그 다음날 우리는 집으로 돌아오는 열차에 몸을 실었다. 일박 이일 바쁘게 뛰어다닌 우리는 순조롭게 집으로 돌아와서 인터넷을 통해 딸의 입학 통지서를 보게 되었다. 딸은 순조롭게 대학에 입학하였다.

나는 사람을 만나면 진상을 알리고 3퇴를 권하는데, 이것은 사부님께서 우리에게 하라고 하신 것으로 대법제자의 책임이라고 여기면서 더욱 많이, 더욱 빨리 사람들을 구도해야 한다고 생각하였다. 딸이 다니던 대학교에 볼일이 있었는데 우리 회사 여객차로 가게 되었다. 나는 자발적으로 왕복표를 사면서 부당한 이익을 탐내지 않았다. 동료직원들이 오히려 나에게 미안해하면서 표를 사지 말라고 하였다. 나는 이미 퇴직하였고 또 수련자로서 그렇게 할 수 없다고 말했다. 그리고 그들에게 하늘이 공산당을 멸하게 되니 모두 탈당하라고 권하였더니 그들도 모두 탈퇴하였다.

나는 나 자신의 수련 노정을 회고해 보면서 눈물을 많이 흘렸다. 이 눈물은 자신이 금생에 대법을 얻은 것을 기뻐하는 희열의 눈물이었고, 마난 중에서 잘하지 못해 뼈저리게 뉘우치는 눈물이었으며, 특히 위대하신 사존의 은혜에 감사드리는 눈물이었다. 사부님께서 시시각각 제자를 보호하여 주셨기에 나는 비로소 낡은 세력이 안배한 사악한 고험을 부정하는 와중에서 매 하나의 고비 매 하나의 난을 돌파하면서 걸어 나올 수 있었던 것이다. 나는 자신이 아직도 많은 집착이 있다는 것을 알고 있다, 과시심, 환희심, 이기심, 아울러 일에 봉착하면 안을 향해 찾지 못하는 점도 있다. 한 수련생을 만나는 중에서 늘 자신을 보지 않고 상대방을 보며 상대방이 어떠하다고 말한 것으로 하여 그 동수와 간극까지 생기게 되었는데 정말 그 수련생에게 미안하다. 이 일체를 돌이켜 보면 정말 사부님을 뵐 면목이 없다. 금후의 수련 중에서 나는 착실하게 자신의 이 마음을 수련하며 사부님의 말씀대로 문제에 봉착하면 안을 향해 찾으면서 세 가지 일을 더욱 잘하겠다.

문장발표: 2013년 1월 22일
문장분류: 수련마당
원문위치: http://www.minghui.org/mh/articles/2013/1/22/268071.html