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明慧법회| 사부님을 존경하고 마음을 닦으면서 중생을 구도하다

글/ 대륙 대법제자 지견(志堅)

[밍후이왕] 내가 자료를 전할 때 사부님께서는 시시각각 나를 가호해 주셨다. 나는 비교적 멀고 교통이 불편한 농촌으로 자전거를 타고 자료를 가져다주었는데 무더운 여름날 매번 내가 도착할 때까지 항상 다양한 크기의 구름이 태양을 가려주었다. 겨울에는 날씨가 비교적 맑고 따뜻해서 바람을 맞은 적이 없었다. 여동생은 “정말로 대법이 사람을 개변시켰네요. 1986년 아버지가 돌아가실 때만 해도 오빠는 50몇 살 나이에 돌아올 때 스스로 걷지 못하고 차로 데려다 주어야 했는데 지금은 70여세인데 스스로 자전거를 타고 이렇게 멀리 다니다니, 정말로 불가사의해요”라고 말했다. -본문 작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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존경하는 사부님 안녕하십니까.수련생 여러분 안녕하세요.

나는 1996년 4월에 기쁘게 법을 얻었고 올해 81세다. 나는 수많은 고생을 겪었고 비바람 속에서 곤두박질하고 비틀거리면서 16년 넘게 걸어왔다. 그 사이 법을 얻은 기쁨도 있었고 박해를 반대하는 가운데 꿋꿋함도 있었으며, 사악한 마에게 고통 받은 고난도 있었고, 잘못을 한 적도 있었으며, 고생한 적도 있었지만 사부님과 법을 확고하고 확실하게 믿은 후 사부님의 자비로우신 가호 하에 하나하나의 관을 넘어 오늘까지 오게 됐다. 수련 과정을 되돌아보면 사부님께서 줄곧 나를 가호해 주셨다. 나는 오직 법을 잘 학습해야만 자신을 잘 닦을 수 있고 자신을 잘 수련해야만 비로소 세 가지 일을 잘하고 중생을 더 많이 구도할 수 있다는 것을 깨달았다. 나는 이 만고의 기연을 소중히 여겨 법을 더 많이 학습하고 법을 더 잘 학습하며 발정념을 잘 해야겠다고 결심했다. 얼마나 고달프고 얼마나 힘들든지 나는 견지하여 진심으로 사부님을 믿고 법을 믿으면서 정진하고 착실하게 수련할 것이다.

1. 법을 얻다

나는 가난한 농촌가정에서 태어나 책을 잘 읽지 못했다. 어려서부터 승부욕이 강했고 직장을 다닌 후에 사당 문화를 받아들여 온 몸이 나쁜 습관으로 가득했다. 허영심, 질투심, 과시심이 아주 심했고 승부욕이 강했으며 아량이 좁았다. 일생동안 다투어 온몸이 병으로 가득했다. 위궤양, 신장결석, 류머티즘, 신경쇠약, 관상동맥 경화증이 있었고 팔다리가 아팠으며 심장이 갑자기 멈추기도 했다. 각종 약들이 몸에서 떨어질 날이 없었다. 나중에는 정상적으로 출근하지도 못했다. 퇴직한 후 수입이 없었기에 병을 치료하려 해도 돈이 없었고 의지할 곳도 없었다. 갈 길이 없이 여러 가지로 막막할 때 나는 기쁘게 대법을 얻었다.

1996년 4월 26일, 저녁식사 후 다른 사람이 내 등에서 6,7개의 부항을 뽑고 있을 때 기공 애호가인 이웃이 함께 기공 비디오를 보러 가자고 해서 나는 아내와 함께 보러갔다. 사부님께서는 마침 ‘실과 득’, ‘업력의 전화’를 말씀하고 계셨다. 방에 들어서자 한 갈래 뜨거운 열기가 얼굴을 스쳤고 법을 말씀하시는 사부님을 뵙자 어디선가 뵌 듯했지만 어디에서 보았는지는 생각나지 않았다. 하지만 아주 친절함을 느꼈다. 무슨 느낌이라 할 수 없이 온 몸이 편안하고 두뇌가 명석해졌는데 비디오를 보고나니 어느 사이에 눈에 눈물이 가득 고였다. 무엇이 ‘실과 득’인가? 무엇이 ‘업력의 전화’인가를 돌아오는 길에 생각했고 밤새 별로 자지 앉으면서 이 두 가지 문제를 생각했다.

이튿날 아침 나는 아내와 연공장에 가서 연공을 배웠고 보도원에게 ‘전법륜’을 구해달라고 도움을 청했다. 단숨에 다 읽고 나서 나는 이것이 내가 일생동안 찾던 것이고 대법을 수련하는 것이 내가 마땅히 걸어야 할 길이라는 것을 확실히 깨달았다. 나는 초보적으로 무엇이 ‘실과 득’, ‘업력의 전화’라는 것을 인식하게 됐고 ‘진선인(眞善忍)’이야말로 근본이라는 것을 깨닫게 됐다. 나는 기공을 연마한 적이 없었지만 아내는 각종 기공을 배웠다. 나는 아내에게 기공을 연마하지 말고 나와 같이 이 파룬궁을 배우자고 했다. 아내는 기뻐하면서 동의했다. 우리는 단체 학습에 참가했고 설법 동영상을 보았으며 아침 단체연공에 참가했다.

나는 처음에 가부좌를 틀지 못해 아파서 눈물과 땀이 범벅이 됐다. 겨울 날씨가 어떠하든 나는 매일 녹음기를 갖고 가서 견지했고 비가 오는 날에는 우산으로 녹음기를 보호했다. 수련생들은 비바람을 무릅썼고 겨울에 얼마나 큰 눈이 내리든 얼마나 춥든지 그만둔 적이 없었다. 어떤 때에는 연공을 마친 후 손가락이 얼어서 얼음과자처럼 됐다. 서로 웃으면서 연공장을 나갔는데 얼마 지나지 않아 모두 녹아버렸고 집에 와서 일을 하는데 아무런 지장도 없었다. 법을 학습한 지 한 달도 되지 않아 나도 모르는 사이에 몇 년 동안 끊지 못했던 술, 담배를 끊었고 온 몸에 가득했던 병들이 온데간데없이 사라졌다. 사부님께서 신체를 청리해 주셔서 나는 아무런 병도 없이 몸이 홀가분해졌고 이후 16년 동안 병원에 간 적도 약을 먹거나 주사를 맞은 적도 없다. 대법은 내 깨끗하지 못하던 마음을 씻어 주었고 반본귀진(返本歸眞)하는 한 갈래 수련의 길을 가르쳐 주었다. 또한 나에게 건강한 신체와 진정한 생명을 주었으며 일을 할 때 먼저 다른 사람을 생각하고 다른 사람을 수용해주어야 한다는 것을 깨닫게 했다.

2. 홍법(洪法)

법학습 소조에서 우리는 이렇게 좋은 대법을 우리 십 몇 명만 학습하고 연공하고 있는데 마땅히 광범위하게 전파하고 널리 전해 더욱 많은 사람들이 이익을 얻게 해야 한다고 교류했다. 우리는 중학교 운동장에서 하던 아침 연공을 역전 광장에서 하기로 했다. 그곳은 신체를 단련하는 사람들이 많아서 대법을 널리 전하는데 편리했다. 1년 넘는 시간에 우리 학습소조 열 몇 명은 3개 학습 소조로 확대됐다. 매일 아침마다 연공하는 사람이 우리 소조만 해도 백여 명이었다. 우리는 주말마다 다른 연공 소조와 연계하여 함께 기차역에 가서 단체 연공하고 홍법했는데 연공 음악소리만 울리면 2,3백 명이 모였다. 이후에 수련하는 사람이 점점 많아져 우리 시에서는 만인 법회를 열게 됐다. 우리는 도시 홍법을 기초로 또 교외 농촌 지역에 가서 단체연공하고 홍법을 하여 처음의 20여명에서 60여명이 됐다. 3,40리 떨어진 교외 농촌에서도 점차적으로 연공장과 학습소조가 만들어졌다.

나는 아내와 함께 도시, 교외 농촌 홍법에 참가했을 뿐만 아니라 친척들이 살고 있는 200여리 떨어진 이웃 도시 두 현의 세 마을에 가서 홍법했다. 그들에게 대법책을 가져다주었고 법학습 소조와 연공장을 설립하도록 도와주었으며 연공을 가르쳐 주었다. 일 년 넘는 노력으로 세 마을 가운데 가장 적은 곳은 열 몇 명이 연공하고 다른 마을은 스물 몇 명이 됐다. 촌장의 아내와 제수도 와서 연공에 참가했다. 촌장은 매우 지지하면서 촌 정부 마당을 정리해서 연공장으로 사용하게 했고 단층집 한 칸도 내주어 단체 학습 때 사용하라고 했다. 그때는 정말 도시와 농촌 모두 대법의 행복에 잠겨 있었다.

3. 자료를 전하다

1999년 7월 20일, 중공사당(中共邪黨)이 대법을 박해하는 사악하고 음산한 바람이 하늘땅을 뒤집을 듯 몰려왔고 일부 보도원은 납치되어 박해를 받았다. 사람들은 긴장해 어떤 지역 수련생들은 서로 연계가 되지 않았고 사부님의 새로운 경문과 자료를 얻지 못했다. 날카로운 바람이 휘몰아칠 때 나는 자료를 전달하는 임무를 짊어지게 됐다. 멀게는 200여리 밖에 세 도시, 두 개 현 농촌까지이고 시내에 있던 본래 세 연공장 수련생들의 집과 교외에 있는 두 연공장에도 보내야 했다.

자료를 전할 때 사부님께서는 시시각각 나를 가호해 주셨다. 나는 비교적 멀고 교통이 불편한 농촌으로 자전거를 타고 자료를 가져다주었는데 무더운 여름날 매번 내가 도착할 때까지 항상 다양한 크기의 구름이 태양을 가려주었다. 겨울에는 날씨가 비교적 맑고 따뜻해서 바람을 맞은 적이 없었다. 한번은 농촌에 있는 여동생 집에서 자전거를 타고 50리 떨어진 곳까지 자료를 가져다주었는데 왕복 백여 리였다. 나는 아침 7시에 떠나 오후 3시에 돌아왔다. 그때 나는 비록 70여세였지만 피곤함을 느끼지 못했다. 겨울 농촌 길은 울퉁불퉁한데다 눈이 내린 길은 미끄러워 넘어져서 바짓가랑이에 구멍까지 났다. 자전거를 더 이상 탈 수 없어서 일어나 자전거 수리점을 찾았다. 수리를 마친 후 집에 도착해서 바지에 구멍이 났다는 것을 발견했지만 감각이 없었다. 여동생은 “정말로 대법이 사람을 개변시켰네요. 1986년 아버지가 돌아가실 때만 해도 오빠는 50몇 살 나이에 돌아올 때 스스로 걷지 못하고 차로 데려다 주어야 했는데 지금은 70여세인데 스스로 자전거를 타고 이렇게 멀리 다니다니, 정말로 불가사의해요”라고 말했다.

자료를 전할 때 위험에 부딪힌 적도 있었지만 모두 정념으로 지나갔다. 한번은 비교적 먼 교외지역 법학습 소조에 자료를 가져다주었는데 돌아올 때 버스를 탔다. 차에 오르자 젊은 사람이 맞은편에 앉아서 나를 주시하고 있었다. 그는 마치 사복경찰 같았는데 별로 경험이 없는 것 같았다. 나는 속으로 발정념을 하면서 두 눈으로 그를 정시했다. 그는 두려워하며 눈을 피했고 몇 번이나 휴대폰을 꺼내 전화를 하려 했다. 나는 의념으로 그가 전화를 걸지 못하게 했다. 그는 여러 번 시도했지만 전화를 하지 못했고 전화기를 다시 주머니에 넣었다. 30분 후에 그는 차에서 내리면서 고개를 돌려 나를 쳐다보았다. 나는 두 정거장을 지나 차에서 내린 후 반대 방향으로 가는 차를 30분 타고 차를 두 번 환승해서 안전하게 집에 도착했다.

작년 10월 1일, 나는 밍후이주간과 진상자료를 지니고 버스를 기다리고 있었다. 지역 경찰은 급히 나에게 달려왔다. 나는 그가 오는 것을 보고 발정념을 했다. 그는 내가 아무것도 들지 않은 것을 보고는 어디로 가냐고 물었다. 나는 그를 거들떠보지도 않으면서 산보하면서 놀러 간다고 했다. 그가 아직도 연마하느냐고 묻자 나는 “당신이 보기에는요?”라고 반문했다. 그는 “나는 당신이 이로움을 얻어 내려놓지 못한다는 것을 알고 있어요. 집에서 연마하세요. 나가서 집회를 열거나 표어를 붙이는 것은 하지 마세요”라고 말했다. 내가 그에게 본 적이 있냐고 묻자 그는 난처해하면서 일이 있다면서 사회구역 방향으로 걸어갔다.

십 몇 년 동안 진상자료를 전하는 가운데 나는 어려움을 극복했고 봉쇄를 돌파했다. 기차나 자동차에 타거나 자전거를 타면서 여러 차례 우여곡절을 겪었지만 확고하게 신사신법하고 정념정행을 견지했으며 사부님의 자비로우신 가호 하에 여태껏 중단한 적이 없었고 아무 일도 없었다.

4. 법학습 소조를 만들다

단체 법학습 소조는 사부님께서 우리에게 남겨주신 수련 형식이다. 사당의 미친 듯한 ‘7.20’박해가 정점에 달했을 때 공개적인 장소에서 법을 학습하고 연공하지 못했다. 시, 성정부에서 청원(上訪)하고 돌아온 후 나는 자발적으로 수련생을 찾아 산에 가서 연공을 하자고 했고 동시에 가두에 가서 진상을 알렸다. 구치소에 납치됐다가 돌아온 후 나는 수련생을 찾아가 가정 법 학습 소조를 설립해 단체학습을 하자고 건의했다.

처음 2년간 소조 성원들은 단체로나 혹은 각각 여러 번 구치소, 간수소, 노동교양소에 납치되어 박해를 받았지만 돌아온 후 여전히 함께 학습을 했다. 우리는 가끔은 분산하고 가끔은 집중적인 방법을 선택해 늘 주소와 시간을 변경했다. 비록 흩어져서 적지 않은 자원의 손실이 있었지만 여전히 견지했다. 이렇게 사부님의 자비로우신 가호 하에 수련생들은 법속에서 정념이 족했고 정념정행하면서 비교적 좋은 환경을 수련해냈다. 최근 몇 년간에는 흩어진 적이 없었는데 몇 년 동안 법학습 소조는 원래의 한 개 소조에서 두 개 소조로 변했고 해마다 늘어나서 지금은 ‘7.20’ 이전의 큰 연공장 세 곳과 교외농촌 세 곳을 포함해 열 몇 개 소조가 됐다.

법학습 소조가 처음 만들어진 당시에는 오직 5, 6명뿐이었고 기본적으로 모두 지금의 70세 이상인 ‘7.20’ 이전에 법을 얻은 노수련생들이었다. 그들은 수련 전에 오랫동안 병에 시달렸고 학력이 낮았으며 몇 명은 ‘전법륜’도 전부 읽지 못했다. 이후에 단체학습을 통해 그들은 모두 법을 읽을 수 있게 됐고 심성도 제고되어 비교적 정진하고 성숙해졌으며 세 가지 일을 잘 견지하고 있었다. 어떤 사람은 오랜 기간을 매일처럼 자료를 전하는 것을 견지했고, 어떤 사람은 겨울, 여름, 비, 눈을 불문하고 전단지를 나누어 주거나 진상을 알려 사람을 구도하는 일을 지체하지 않았다. 예를 들어 70여세 되는 여 수련생은 지식이 없어 다른 것을 할 수 없자 혼자서 겨울밤에 험준한 산길을 넘어 20여리 밖 농촌에 가서 전단지를 나누어 주었는데 집에 돌아오자 이미 한밤중이었다. 그는 소조에서 “걸음이 홀가분해서 조금도 피곤하거나 두렵지 않았어요. 전단지를 모두 나누어 주고 집에 오니 한밤중이었지만 마음은 아주 기뻤어요”라고 말했다.

5. 옛 수련생을 찾다

사부님께서는 “내가 보건대 이 일체 역시 모두 최후의 마무리 중에 있다. 다만 많은 사람이 이 현실적인 일보 일보의 펼쳐짐을 감히 승인하지 못하고 있을 뿐이며, 최후의 시각이 오기 전에 구도해야 할 중생의 숫자에 아직 도달하지 못했고, 대법제자 일부분이 아직 따라오지 못했는데, 이것이 바로 아직 최후의 이 일을 완성할 수 없는 관건 원인이다”[1]라고 말씀하셨다.

‘20년 설법’에서 나는 과거의 수련생을 일깨워주는 것 역시 중생을 구도하는 것이라는 것을 깨닫게 됐다. 왜냐하면 우리 모든 대법제자 역시 모두 사부님께서 정법하실 때 구도해야할 중생이기 때문이다.

매 대법제자마다 모두 하나의 천국이 있고 그 속의 무수한 중생들이 구도되기를 기다리고 있다. 나는 일부 걸어나오지 못해 정진하지 못하거나, 사오한 적이 있거나, 전향된 적이 있는 옛 수련생 집으로 갔다. 우리는 함께 법을 학습하고 교류를 했으며 공동으로 법에서 제고되어 올라오면서 매듭을 찾았다. 나는 걸어나오지 못한 수련생은 주로 두려운 마음 때문이라는 것을 발견했다. 교류하는 가운데 법의 기점에 서서 평등한 심태로 안으로 향해 찾는 법보(法寶)를 이용해 자신을 분석하고 순정한 마음으로 교류를 해야만 수련생의 정념을 일깨워줄 수 있고 진정으로 그를 도와줄 수 있었다.

나는 그들과 법을 학습하고 진지하게 교류했다. 당시 나는 여러 번 납치되어 박해를 받은 후 두려운 마음이 있었기에 초기에는 조그마한 변화만 있어도 집을 떠나 농촌 친척집에 가서 피했다가 평온해지면 다시 돌아왔다. 대법에 대해 먹칠을 했기에 친척과 속인들을 도와 삼퇴를 시킬 때 일정한 장애를 조성했다. 이후에 사부님의 ‘두려울 것 뭐냐’를 학습한 후 법 학습소조에서 교류하면서 법리에 대한 인식을 제고했고 신사신법(信師信法)하는 신념을 확고히 했다. 나는 매번 납치되어 박해를 받을 때 시시각각 법을 외우면서 사부님께 나를 구해 내보내 달라고 빌었다. 내가 악인에 협조하지 않으면 사부님께서는 나올 수 있게 나를 보호해 주셨다. 사악은 나에게 불법적인 2년 노동교양 판결을 내렸는데 사부님께서는 가상을 만들어 나에게 뇌혈전 증상이 나타나게 하셨다. 스스로 생활할 수 없었으므로 노동교양소에서는 받지 않았는데 집에 돌아오자 바로 나아졌다. 하루도 법을 학습하고 자료를 나누어 주는 것을 지체하지 않았다. 나는 두려운 마음을 내려놓고 공개적으로 진상을 알렸는데 실제 경험을 예를 들어 친척과 친구를 설득했다. 그들 모두 삼퇴를 했고 구도를 받았다.

나는 옛 수련생들을 법학습 소조에 참가하게 하여 법학습을 통해 법리에 대한 인식을 제고했고 정념을 강화했으며 수련에 대한 자신감을 확고히 하게 했다. 자발적으로 그들을 도와 인터넷에서 성명을 발표하고 조사정법의 수련의 길로 돌아오게 했다. 일부 옛 수련생들은 나와 접촉하기 좋아하는데 어떤 사람들은 우리집에 와서 ‘전법륜’과 신경문을 구해달하고 청했고 mp3, mp5, 녹음기, VCD 플레이어를 사달라고 했으며, 사부님 설법 테이프, 연공테이프와 CD를 만들어 달라고 하면서 사용법도 가르쳐 달라고 했다.

옛 수련생을 찾는 가운데 나는 힘든 것을 두려워하지 않고 반복하는 것을 두려워하지 않았다. 70여세 되는 한 수련생은 ‘7.20’이 시작된 후 두려운 마음이 강했는데 불교 인사의 선동 하에 사부님의 법상과 대법책을 모두 태웠고 문밖으로 나가지 못했다. 젊었을 때 문화대혁명 시기에 그는 사당에게 너무 많이 당했고, ‘7.20’때 유일한 아들마저 감옥에서 판결을 받았으며, 남편은 연로하고 병이 많았다. 그까지 일이 생기면 집안이 망하기에 그는 매우 두려워하면서 누구와도 감히 만나지 못했다. 2009년 말에 나는 시장에서 그를 만난 후 여러 번 그의 집에 찾아가서 법리에서 교류했다. 이후에 그는 자신이 죄를 범하여 사부님께서 그를 요구하지 않는다고 여러 번 눈물을 흘린 것을 누구에게도 말하지 못했고, 다른 사람이 얕잡아 볼까봐 두려워 수련생만 보면 피했다고 했다. 이번에 그는 “사부님의 안배 같네요. 나는 당신을 피할 수가 없고 당신에게 모든 것을 다 말했어요. 당신은 처음부터 학습소조를 한 노수련생이고 나이도 나보다 많은데 나를 얕잡아 보지 마세요”라고 했다. 나는 그에게 사부님께서는 “이번 박해 중에서 반면으로 나아갔거나, 더하여 아주 좋지 못한 일을 한 사람까지도, 내가 여러분에게 알려주는데, 사부는 그들을 버리고 싶지 않다”라고 말씀하셨다고 알려주었다.[2]

나는 그와 함께 법을 학습했고 그에게 법학습 소조를 소개해 주었다. 그의 염려를 없애준 후 보따리를 내려놓게 했고 자신이 저지른 잘못의 심각성을 똑똑히 인식하게 한 다음 성명을 발표하게 했다. 그는 다시 돌아왔고 지금 아주 정진하여 열심히 세 가지 일을 잘하고 그의 친척들도 모두 삼퇴를 하게 됐다. 그는 또 걸어나오지 못한 옛 수련생들을 찾는 일도 하고 있다.

작년 봄, 그는 요리를 하다가 끓고 있는 국자 기름을 그만 왼손에 쏟아버리고 말았다. 온 손에 물집이 생겼지만 그는 두려워하지 않았고 사부님을 부르면서 구해달라고 청했다. 그 결과 아무 일도 없었고 약도 쓰지 않았는데 며칠 후에 다 나았고 아무런 흉터도 없었다. 그는 사부님께서 그를 구해주셨다고 말했다. 올해 여름, 그의 집에 법학습 소조를 하나 만들었는데 그의 남편은 반대하지 않았고 대법진상자료를 보기 시작했다. 매번 새로운 자료가 올 때마다 그는 먼저 한번 보았다.

또 우리 소조에 70여 세 되는 여 수련생은 노동교양소에서 불법으로 3년 노동교양을 판결 받고 2년 반 동안 갇힌 후에 사오(邪悟)하여 전향되어 돌아왔다. 그 후 그는 우리와 접촉하지 않았고 고향으로 돌아가 먼 변두리 산간지역으로 이사했다. 여러 번 그를 찾아갔지만 그는 매번 우리를 만나지 않았고 쫓아내기까지 했다. 우리 소조에서는 교류 후 수련생들이 순서대로 그의 집에 속인 형식으로 놀러가서 천천히 인내심 있게 그를 법학습으로 인도하자고 했다. 법리에서 인식을 제고한 후 그의 매듭을 풀어주었다. 특히 반복해 ‘북미 순회 설법’과 ‘2003년 정월대보름 설법’을 학습한 후 그는 깨우침이 아주 컸다. 일 년 넘는 시간이 지난 후 그는 마침내 깨달았고 조사정법하는 수련 행렬로 다시 돌아왔다. 그는 엄정성명을 발표한 후 열심히 홍법을 했고 진상을 알렸으며 삼퇴를 권했다. 그의 남편과 도시에 있는 언니, 딸, 생질녀가 모두 법학습을 회복했을 뿐만 아니라 그의 마을에서 6명의 신 수련생들이 들어올 수 있게 인도해 주었고 그의 집에 법학습 소조를 설립했다. 그는 나에게 “사부님이 나를 구해주셨으니 나도 많은 중생을 구해야죠”라고 했다.

지금 그의 마을의 3,40 가구 사람들이 모두 삼퇴를 했고 모두 대법이 좋다는 것을 믿었는데 남녀노소를 불문하고 모두 호신부를 지니고 있다. 처음에는 내가 그들에게 자료를 가져다주었지만 이후에는 그가 도시로 가지러 왔고 지금은 이미 자료점을 설립했다. 가정 자료점의 작은 꽃은 이미 이 산골마을에서 피어났다. 농촌에서 어떤 사람들은 컴퓨터를 샀고 신탕런(新唐人)을 설치했다.

이런 것을 경험한 후 나는 진일보로 사부님의 정법노정을 바싹 좇아 사부님이 말씀하신대로 해야 한다는 것을 체득하게 됐다. 오직 법을 잘 학습해야만 비로소 자신을 잘 닦을 수 있고 자신을 잘 수련해야만 비로소 세 가지 일을 잘 할 수 있으며 더욱 많은 중생을 구할 수 있다. 옛 수련생을 찾는 과정에서 우리가 내보내는 것은 법을 원융하고 중생을 구도하겠다는 정념이다. 또한 인내심이 있어야 하는데 난관에 봉착하는 것을 두려워하지 말고 일에 부딪치면 낙심하지 말아야 한다. 성심성의로 법의 위력을 믿어야 하는데 이 과정이 바로 자신을 착실하게 닦는 과정이고 법리에서 제고하는 과정이다.

6. 반(反) 박해를 하는 동시에 중생을 구도하다

2000년 3월, 나와 아내는 기차표를 사서 베이징으로 가려했지만 전날 저녁에 납치되어 구치소로 가게 됐다. 우리 방에는 5명의 대법제자가 있었는데 우리는 함께 법을 학습하고 연공했다. 교도관은 옥졸을 시켜 우리를 지키면서 연공을 못하게 했다. 우리는 그에게 진상을 알리고 홍법했다. 그에게 ‘진선인(眞善忍)’에 따라 하려면 더는 죄를 지어서는 안 된다고 알려주었다. 그는 명백히 안 후 파룬궁을 배우겠다고 했고 ‘진선인’에 따라 좋은 사람이 되겠다고 하면서 더 이상 흐리멍덩하게 살지 않겠다고 했다. 그는 우리를 지키지 않았을 뿐만 아니라 우리와 함께 가부좌하여 정공을 연마했다. 교도관이 그를 다른 방 옥졸로 바꾼 후 새로 온 옥졸도 이틀 후 우리와 함께 연공을 했기에 교도관은 자신이 직접 우리를 연공하지 못하게 지켰다. 나는 “나는 좀 있으면 70이 되는데 온 몸의 병이 연공한 후 다 없어졌고 신체가 이렇게 좋아졌어요. 당신은 아직 쉰 살도 되지 않지만 신체가 왜 그런가요? 당신도 ‘전법륜’을 보세요”라고 말했다. 그는 아무 말도 하지 않았고 나중에는 그도 지키지 않았다. 15일 만기가 되어 우리가 서명하지 않자 구치소에서는 우리를 다시 시 노동교양소에 보내 학습반을 만들었다.

학습반에서 나는 법을 학습하고 연공했으며 진상을 알리고 홍법을 하면서 노동을 하지 않았다. 부대장은 나를 찾아와서 “당신은 좀 있으면 70이 되고 또한 노 당원이므로 연마하지 않는다는 세 글자만 쓰면 집으로 돌려보낼게요”라고 했다. 나는 그에게 홍법을 하고 진상을 알려주었다. 그는 “나도 다 알아요. 하지만 방법이 없어요. 위에서 이렇게 시키니까요. 나는 당신들이 모두 각성한 좋은 사람들이고 층차를 제고한다는 것을 알고 있어요”라고 했다. 그가 서랍을 열어 담배를 꺼낼 때 나는 ‘전법륜’한 권을 보았다. 나는 “당신도 ‘전법륜’을 학습하네요. 왜 우리는 학습하지 못하게 하면서 남몰래 보고 있나요”라고 묻자 그는 “공개적으로 배우면 당신들처럼 붙잡히지 않겠어요?”라고 말했다. 우리는 서로 웃었다. 그는 “당신은 그냥 이렇게 계세요. 그들이 당신을 감시하지 않게 해줄게요”라고 말했다.

우리는 같은 방에 있는 수감자들에게 진상을 알리고 대법을 널리 전해주었다. 그들에게 TV에서 나오는 것은 모두 사람을 속이는 거짓말 이라는 사실을 알려주었다. 소대의 몇몇 수감자는 우리와 아주 잘 지내고 있었는데 저녁에 우리가 가부좌를 하고 ‘논어’를 외울 때 그들도 파룬궁을 연마하겠다고 표시했다. 경찰학교에서 금방 졸업한 젊은 교도관은 이유를 몰라서 나에게 “할아버지, ‘진선인’을 수련하는데 무슨 잘못이 있나요? 나는 이해가 안 되네요”라고 물었다. 나는 그에게 장쩌민이 개인적인 분노와 질투 때문에 대법을 박해하고 대법제자를 박해했으며 거짓선전을 만들어 내 진상을 명백히 모르는 국내외 사람들을 속인 사실을 알려주었다. 나는 그에게 ‘전법륜’을 잘 보기를 건의하면서 잘 생각해 보면 어떻게 해야 인생을 확실히 살게 되는지 알게 된다고 했다. 그는 ‘전법륜’을 본 후 우리를 감시하지 않았을 뿐만 아니라 가끔 우리와 교류를 하기도 했다.

한 달 후 내가 떠날 때 부대장과 젊은 교도관들은 나를 배웅해 주면서 몸조심하라고 했다. 나는 그들에게 ‘전법륜’을 많이 보고 방향을 잃지 말라고 했다. 소대 수감자들도 모두 와서 인사를 하면서 건강에 주의하라고 했다. 나는 그들에게 자주 ‘파룬따파하오(法輪大法好-파룬따파는 좋습니다), 쩐싼런하오(眞善忍好-진선인은 좋습니다)’를 읽고 진선인 표준에 따라 좋은 사람이 되라고 했다. 나는 그들이 파룬궁의 아름다움을 깨닫고 아름다운 미래를 선택한데 대해 기쁘고 안심이 됐다.

2000년 8월, 나는 납치되어 마약 중독자 재활원에 보내져 네 명의 중독자와 한 방에 있게 됐다. 그들은 나를 할아버지라 불렀다. 나는 성심으로 파룬궁을 연마하면 아주 빨리 마약을 끊을 수 있고 주사를 맞거나 약 먹는 고생을 하지 않아도 된다고 알려주었다. 나는 그들에게 대법의 아름다움을 알려주었다. 네 사람은 아주 기뻐하면서 연공을 가르쳐달라고 했다. 그들은 나와 함께 앉아서 정공을 했다. 그들은 ‘논어’를 외울 수 있게 알려달라고 했다. 주사를 맞지 않아도 마약 중독 발작이 일어나지 않았고 조용히 하루 밤을 자게 됐다. 이튿날 그들은 밥을 주문할 때 내 몫도 같이 주문했다. 내가 먹지 않자 그들도 먹지 않았다. 한 여경 간호사가 그들에게 “파룬궁을 수련하는 사람들은 다른 사람 물건을 건드리지 않는데 너무 좋아요”라고 알려주었다. 그는 “할아버지, 드세요. 그들 몇몇은 집 조건이 좋고 마음도 착해요. 할아버지가 드시지 않으면 그들도 가만있지 않을 거예요”라고 권했다. 그들은 3일이나 주사를 맞지 않았고 약을 먹지 않았지만 마약 중독 발작이 일어나지 않았다. 의사가 어찌된 일인지 묻자 그들은 할아버지가 우리에게 연공을 가르쳐주었고 파룬궁은 정말 영험하다고 알려주면서 그들도 연마하겠다고 했다. 나는 경찰 의사에게 대법의 아름다움과 파룬궁이 박해받은 진상을 알려주었다. 소장과 의사들은 모두 “너희들은 할아버지를 따라 연마해. 그럼 주사를 맞거나 약을 먹을 필요가 없겠네”라고 말했다. 의사는 파룬궁이 정말 대단하다고 했다. 그들은 모두 나았다면서 너무 좋아했고 소장과 의사도 아주 기뻐했다. 나는 자신은 마땅히 집에 돌아가야 한다는 생각이 들었다. 다섯째 날 나는 뇌혈전 증상이 나타나 집으로 돌아갔다. 내가 그들에게 진심으로 견지하면 반드시 좋아질 것이라고 알려주자 그들은 절대 포기하지 않을 것이라고 표시했다.

2001년 9월 말, 나는 아내와 함께 간수소로 납치되어 박해를 받았다. 그날 저녁 간수소에 들어서자 5,6명의 젊은 수감자들이 나를 둘러쌌다. 옥졸은 아무도 움직이지 말라고 하면서 모두 앉아서 내가 어떻게 파룬궁을 연마했는지 들어보자고 했다. 나는 그들에게 파룬궁을 연마한 좋은 점과 방법에 대해 알려주었다. 병을 제거하는 파룬따파의 가장 얕은 방면의 법리에 대해 조금 얘기했고 어떻게 하면 좋은 사람이 되는지를 알려주었으며 진심으로 ‘진선인’ 표준에 따라 자신을 엄격히 요구하면 좋은 사람이 될 수 있다고 알려주었다. 나는 가부좌를 시범 보이면서 정공을 연마했다. 당시 누군가가 다리를 올리려고 했지만 올리지 못했다. 옥졸은 “그는 70여세인데도 이렇게 다리를 잘 올리고 정신도 이렇게 맑으니 이 공이 정말로 대단한 것임을 말한다. 모두들 그를 따라 배우고 누구도 그에게 손대지 말라”고 했다. (나중에 나는 이것은 사부님께서 나를 보호해 주신 것임을 깨달았다.)

방안의 스물 몇 명 가운데 나만 파룬궁을 연마했는데 어떤 사람은 신체가 좋지 않았고 어떤 사람은 죄를 범한 후 아주 후회했다. 나는 그들에게 대법을 알려주면서 ‘진선인’에 따라 좋은 사람이 되고 파룬궁을 연마하면 심신에 이익을 얻을 수 있다고 알려주었다. 인생이 무엇이고 어떻게 해야만 비로소 좋은 사람이 될 수 있는지, 늘 성심으로 ‘파룬따파하오’, ‘쩐싼런하오’를 외우고 ‘진선인’ 표준에 맞는 사람이 되면 심신이 건강한 좋은 사람이 될 수 있다고 알려주었다. 어떤 사람은 나에게 가부좌하는 것을 배웠고 어떤 사람은 논어를 외우게 가르쳐 달라고 했다. 판자에 앉으면 나를 중간에 가부좌하게 앉히고는 나를 에워싸며 앉았다. 처음에 14,15살 되는 청년이 내가 가부좌할 때 나를 한번 때렸는데 나를 그를 상대하지 않았다. 끝난 후 나는 그에게 “나는 네 할아버지보다 나이가 더 많아. 너는 이렇게 어린 나이에 죄를 범해 여기까지 왔는데 나를 때리는 것은 할아버지를 때리는 것과 마찬가지야. 이것이 옳은 것이니? 네 할아버지는 사랑하는 손자가 이렇게 사람을 때리는 것을 알게 된다면 얼마나 가슴이 아프겠느냐”라고 말했다. 나는 또 그에게 대법의 법리와 사람이 되는 도리를 알려주었다. 모두들 조용히 듣고만 있었고 어떤 사람은 아주 후회하면서 이후에는 파룬궁을 배워 제대로 된 사람이 되겠다고 말했다.

한번은 우리 감방을 책임진 교도관이 나를 찾아와 이야기할 때 나는 그에게 홍법을 했다. 파룬따파는 고덕대법(高德大法)이고 부처수련으로서 수련이고 신앙이며 헌법에 부합된다고 했다. 우리는 정치와 관계가 없으며 다만 사람으로 하여금 ‘진선인’ 표준에 따라 좋은 사람이 되고 도덕을 제고하며 사람의 소질을 증강해 죄를 적게 범하게 하기에 사회치안에 유리하다고 말했다. 그는 처음에는 나에게 반론했지만 내가 천안문 분신자살은 거짓이고, 수련자는 살생을 해서는 안 되며, 자살을 해서도 안 되는데 자살도 살생이라고 지적해 주었다. 나는 대량의 사실로 그가 진상을 명백히 알도록 했다. 나는 그에게 ‘전법륜’을 몇 번 읽어볼 것을 건의했다. 며칠 후 그는 ‘전법륜’을 보았다고 하면서 내가 나이도 많고 좋은 사람이므로 잘 보살펴 드리라고 옥졸에게 말했다. 자신은 다만 관리자 역할만 한다면서 여기에서 아무 일 없이 안전하게 왔다가 안전하게 가라고 했다. 처음에 나는 가부좌하면서 정공만 연마했지만 이후에는 동공도 연마했는데 수감자들이 문을 지켜주었다. 가끔 나를 따라 배우기도 했는데 전체 공간마당은 나에 인해 바로잡혔다.

49일 후 사부님께서는 나를 집으로 돌아가도록 안배해주셨다. 삼서(수련 포기 각서 따위: 역주)를 쓰지도 않았고 서명도 하지 않았다. 떠날 즈음에 소장은 나에게 “할아버지, 계속 연마할 건가요?”라고 물었다. 나는 연마한다고 했다. 그는 “정말 잘 하시네요. 파룬궁은 정말 대단합니다”라고 했다.

7. 환경을 창조하여 정정당당하게 수련하다

13년의 반(反)박해 가운데서 나는 여덟 번이나 악경에게 납치되어 박해를 받았지만 매번 정정당당하게 뛰쳐나왔다. 2000년 여름, 우리 몇몇 수련생들이 산에서 연공을 할 때 진상을 모르는 사람에 의해 제보되어 구치소로 납치되어 박해를 받았다. 신체검사를 할 때 나는 여기에 있어서는 안 되고 돌아가서 계속 홍법을 해야 하며 수련생들을 이끌어 연공을 해야 한다는 생각이 들면서 사부님께 가지(加持)를 빌었다. 그때는 아직 발정념이 무엇인지 몰랐지만 내가 이렇게 생각하자 엄중한 심장병 때문에 신체검사에서 불합격이 됐고 박해를 받지 않았다. 사당의 가도 서기와 소장은 나를 집까지 다시 데려다 주어야 한다면서 하루 동안 헛수고를 했다고 화를 냈다.

2000년 8월, 내가 마약 중독자 재활원에서 박해받고 돌아온 지 4,5일이 지난 후 파출소에서는 또 나를 시 노동교양소로 납치해 2년 노동교양을 시켰다. 나는 차 안에서 반복하여 이곳은 내가 있어야 할 곳이 아니므로 사부님께 도움을 빈다고 생각했다. 노동교양소에 가서 신체검사를 받았는데 원장은 내가 엄중한 뇌혈전이 있어서 혼자서 생활할 수 없으므로 받지 않겠다고 하면서 집으로 가게 했다. 공장 사람들과 이웃들은 모두 아내에게 나를 병원에 데려가라고 했지만 나와 아내는 “우리는 파룬궁을 연마하는 사람으로서 사부님이 보호하고 계시기에 아무 일도 없을 겁니다”라고 했는데 그 결과 아주 빨리 나아졌고 정상으로 회복됐다. 법학습, 연공과 자료를 나누어 주는 것을 지체하지 않았다. 공장 사람들은 모두 놀라고 신기해했고 이웃들은 모두 파룬궁은 정말 대단하다고 말했다. 70여세 되는 사람이 뇌혈전에 걸렸는데 치료하지 않고 이렇게 빨리 나아졌으며 아무런 후유증도 없다면서 정말 대단하다고 했고 파출소 사람들은 모두 믿지 않았다.

13년의 반박해 가운데서 나는 부단히 제고됐고 점차 성숙해졌는데 도시부터 농촌까지 홍법하고 진상을 알렸으며 정정당당하게 세 가지 일을 했다. 우리 동네와 아들이 사는 동네 아파트 이웃들은 모두 우리 늙은 부부가 파룬궁을 연마한 후 신체가 좋아졌다는 것을 알고 있었다. 사회구역, 가도, 파출소, 공안국, 정법위, 안전국에서는 모두 우리가 파룬궁을 연마한다는 것을 알고 있었다. 나는 농촌으로 돌아간 후 고향에 1년 반 동안 있었는데 마을 사람들 역시 우리가 파룬궁을 연마한다는 것을 알고 있었다. 우리가 어디로 가든지 80여 세인데도 신체가 이렇게 좋다면서 공개적으로 파룬궁을 수련한다는 것을 승인했다. 우리는 진상을 알리면서 사람을 구하고 착실하게 세 가지 일을 했는데 누구도 우리를 교란하지 못했다. 예를 들면 정법위 서기, 파출소 소장, 사회구역 주임, 농촌 촌장 등은 나에게 “당신이 파룬궁을 연마해 신체가 좋아진 것을 우리는 모두 관계하지 않아요. 다만 우리에게 시끄러움을 가져다주지 말고 집회를 하지 말며 베이징에 가지 마세요. 당신이 당신 집 지붕이 망가질 정도로 뚫어도 우리는 관계하지 않아요. 그것은 당신 집이니까요”라고 말했다.

한번은 아내와 시장에 옥수수 가루를 사러 갔을 때 우리를 책임지는 구역 경찰도 옥수수 가루를 사러 왔다. 그는 “연공인들도 밥을 먹나요?”라고 물었다. 나는 “당신 경찰들도 옥수수 가루를 먹네요?”라고 하면서 만날 때마다 몇 마디씩 했다. 한번은 나와 아내가 농촌 이웃집에 놀러 갔다가 돌아올 때 구역 경찰이 아래에서 다른 사람과 수다 떠는 것을 보았고 나는 그에게 집에 올라가 놀다 가라고 했다. 그는 “오늘은 바쁘니 시간이 있을 때 당신 집에 놀러갈 게요”라고 말했다.

2010년 여름, 온 가족이 다른 성으로 이사를 가고 혼자 살고 있는 젊은 여 수련생(온 가족이 수련하고 박해를 받았음)이 돌아와 볼 일이 있어 수련생을 찾았지만 찾지 못했다. 밤 열시가 넘어 아래층에서 한 노인을 만나서 여기에 파룬궁을 연마하는 사람이 있는지 물었다. 이 노인은 여자 아이 혼자서 책가방까지 멘 것을 보고 나쁜 사람 같지 않아서 이 층에 파룬궁을 연마하는 사람이 있다고 알려주었다. 젊은 수련생은 며칠 있으면서 일을 마친 후 안전하게 돌아갔는데 진상을 명백히 안 사람들이 모두 우리를 보호해 주었다. 올해 설을 쇤 후 우리가 농촌 여동생 집에 놀러 갔을 때 매점 주인은 “이 할아버지는 80여세이지만 길을 걷는 것을 보면 다리가 가벼운 것이 마치 젊은 사람 같네요”라고 했다. 촌 간부를 지낸 적이 있던 70살도 되지 않는 한 노인은 “저 사람은 파룬궁을 연마하는 사람이에요. 나를 보세요. 70살도 안 됐는데 길을 걷기가 이렇게 힘드네요”라고 했다.

우리는 신의 길을 걷는 사람으로서 사부님께서는 시시각각 우리를 가호해주신다는 것을 나는 깨달았다. 우리의 경험은 사실 하나의 살아있는 진상으로서 수없이 많은 말보다 더 좋다. 우리가 정정당당하게 가서 수련만 한다면 사부님께서는 우리에게 좋은 수련환경을 개창해 주실 것이다.

8. 컴퓨터를 배워 가정 자료점을 꽃피우다

자료점은 제때에 사부님의 새로운 경문과 국내외 수련생들의 교류심득체험, 반박해, 중생구도, 정보를 제때에 전달해주는 정법노정을 나타내주는 유력한 플랫폼이다. 나는 몇 년 동안 오직 몇몇 큰 자료점에만 의거해 자료를 제공받았고 멀든지 가깝든지 모두 가져다주었다.

편하게 자료 전달을 하도록 우리는 자료점을 꽃피우기 위해 노력했다. 우리 7,80여세 세 노인은 노트북 3대를 사서 각각 나가서 배운 다음 돌아와서 다시 서로 도와주면서 서로 배웠다. 기술 수련생이 인내심을 갖고 도와준 후 우리 지역의 첫 번째 가정자료점이 설립되어 한 떨기 작은 꽃이 활짝 피었다. 3년 동안 거의 매 소조마다 모두 컴퓨터를 준비해 가정자료점만 이미 5개가 됐다.(그 가운데 두 곳은 교외 농촌지역에 있음) 우리 이 지역 법 학습소조에 오는 자료(사부님 설법과 신경문은 하지 않았다)는 거의 스스로 공급할 수 있게 됐다. 과거에 기다리고 의지하며 요구하는 것을 바뀌어 편리해졌을 뿐만 아니라 대법 자원도 절약할 수 있었다. 그리고 큰 자료점의 업무량이 많고 요구받는 자원들이 많아 자료를 하는 수련생들이 바쁘고 피곤해 법학습을 할 시간도 없는 것을 해결해 주었다. 그렇지 않으면 그들의 수련제고에 영향을 줄 뿐만 아니라 쉽게 틈이 생기게 된다.

우리 열 몇 개 법 학습소조는 모두 70여세 되는 노년 제자이고 지식이 낮아 배우려면 비교적 어려웠지만 나와 75세 된 한 노년 수련생이 먼저 배운 후 다시 하나하나씩 가서 가르쳐 주었다. 한편으로 배우면서 한편으로 가르쳐 주었다. 설비에서 해결하기 어려운 문제에 부딪히면 기술을 아는 수련생을 찾아가 도움을 받았다. 우리는 시내에서도 했고 농촌에 가서도 가르쳐 주었는데 지금 교통이 불편한 농촌 두 곳에 각각 자료점 2곳을 설립해 기본적으로 스스로 독립적으로 운영할 수 있게 됐으며 그 소조 수련생들의 사용량을 제공해 주고 있다. 올해 설이 지난 후 나는 또 이웃도시 200여리 되는 농촌(여동생이 거주함)에 있는 한 노년 수련생에게 가르쳐 주었다. 노트북을 산 다음 그의 컴퓨터를 도시로 가져와 사람을 찾아 운영체제를 설치한 다음 다시 그에게 가서 어떻게 사용하는지를 가르쳐 주었다. 그는 지금 이미 입문하여 인터넷, 다운로드 등 일반적인 조작을 할 수 있다. 가정자료점의 작은 꽃은 도시와 농촌에서 모두 피었다.

하루는 내가 75세인 수련생 집에서 ‘밍후이주간’과 자료를 찍고 있을 때 그의 큰 아들이 놀러 왔다. 그는 자료를 쥐고 반복해 여러 번 보더니 “파룬궁은 정말 대단해요. 아무런 지식도 없는 7,80세의 할아버지 두 분이 농사를 짓고 호미를 잡던 손으로 마우스를 잡고 컴퓨터를 사용하고 있으니 말이에요. 자료도 정말 괜찮게 인쇄 됐네요. 정말 놀라워요”라고 칭찬했다. 나는 자료를 만들고 자료점의 작은 꽃이 대법제자들 집에 가득 피는 것 역시 정법의 수요라는 것을 깨닫게 됐다. 우리 모두 와서 대법제자 정체를 원융하고 중생을 구도하자.

9. 신탕런 TV를 널리 설치하자

실천이 증명하다시피 한성 5호 위성접수기를 설치해 신탕런(新唐人) TV를 보는 것 역시 진상을 알리는 효과적인 방법이다. 몇 달 동안 우리 몇몇 사람들은 서로 연계하고 협조하며 지지해 주면서 일부 수련생 가족과 세인들에게 신탕런TV 수신기를 설치해주어 진상을 알리는 좋은 작용을 일으켰다.

한 수련생의 아버지는 고급엔지니어로서 문화대혁명 때 박해를 받은 적이 있었기에 두려운 마음이 강했고 수련생이 납치되어 박해를 받은 적도 있었기에 그가 수련하는 것을 지지하지 않고 신탕런도 설치하지 못하게 했다. 그는 재앙TV만 보면 된다고 했다.(CCTV의 중국어 발음인 ‘央視’와 ‘殃視-재앙TV’ 발음이 같음: 역주) 신탕런 TV를 객실에 설치한 후 그는 무심결에 신탕런 프로그램을 보게 됐고 두 번 본 후에는 매일 보면서 더 이상 사당의 TV를 보지 않았다. 그는 “80몇 년을 살고 나서야 진정한 것을 보게 됐어요. 당신들은 정말 대단해요. 나는 당신들을 지지합니다”라고 말했다. 그는 ‘파룬따파하오’, ‘쩐싼런하오’를 묵념하기 시작했고 호신부를 요구해 걸었으며 ‘전법륜’도 보기 시작했다.

‘7.20’ 이후 수련을 그만 둔 농촌의 한 노년 남자 수련생은 매일 사당 TV만 즐겨 시청했다. 내가 비록 여러 번 그의 집에 찾아갔고 후에 그도 나에게 법학습을 했다고 대강 얼버무렸지만 여전히 TV를 떠나지 못했다. 그의 아내(수련생)가 그에게 말하자 그는 화를 내면서 대법책을 다른 사람(신 수련생)에게 주고는 책도 보지 않았다. 신탕런TV를 설치한 후 그는 매일 신탕런을 보았는데 그만둘 수 없었고 나가서 놀지도 않았으며 더는 사당의 TV도 보지 않았다. 아내는 기회를 빌어 그에게 사부님의 ‘20년 설법’과 ‘2012년 미국수도국제법회설법’을 보여주었는데 그는 자발적으로 그의 아내보고 나를 통해 ‘전법륜’을 청해달라고 했다. 중공사당이 끝장날 때가 됐다고 말하면서 법을 학습하고 수련하여 사부님을 따라 돌아가겠다고 했고 자신도 떨어져서는 안 된다고 말했다. 또한 아내에게 우리집으로 데려다 달라고 요구한 다음 서로 부족한 점을 찾으면서 반드시 사부님의 정법노정을 따르고 사부님을 따라 집으로 돌아가겠다고 표시했다.

또한 우리는 농촌 촌 위 회계(세인)에게 신탕런을 설치해주었는데 그는 아들집에도 설치해달라고 했다. 그는 하루도 신탕런을 떠나지 못했고 더 이상 사당 TV의 거짓말에 속지 않았다. 그는 속인 속에서 영향력이 있는 사람이다.

우리는 도시에서 농촌으로, 평지에서 산간구역까지 신탕런TV를 설치하여 진상을 알리고 중생을 알리는데 일정한 작용을 일으켰다. 이것은 시작한지 얼마 되지 않았지만 부단히 확대되고 있다. 정말로 불법(佛法)은 끝이 없고 널리 중생을 제도하고 있다.

수련 층차의 제한으로 적합하지 않는 부분이 있다면 자비롭게 지적해 주시기 바란다. 감사합니다.

[1] 리훙쯔(李洪志) 사부님 저작 ‘더 정진하자’[2] 리훙쯔 사부님 저작 ‘북미 순회 설법’(밍후이왕 제9회 중국대륙 대법제자 수련심득교류회)

문장발표: 2012년 11월 15일
문장분류: 수련마당>정법수련>제9회 밍후이법회
원문위치: http://www.minghui.org/mh/articles/2012/11/15/265094.html