简体 | 正體 | 대법서적

明慧법회| 무장부장이 대법 수련을 한 일부 경험

글/ 헤이룽장대법제자

[밍후이왕] 하루는, 을 협조 수련생이 나보고 자기가 총 협조인을 하겠으니 나더러 하지 말라는 것이었다. 협조원 회의를 할 때 그가 주도적으로 회의를 주최하고 나에게는 말 못하게 하였다. 나는 침묵을 지키면서 변명을 하지 않았다. 나의 마음은 충격을 받았고 몹시 불편하였다. 돌아간 후 왜 괴로운지 생각해 보았다. 답은 체면을 잃었다는 것이다. 그건 명리심이 아닌가? 수련을 한다면 이런 마음을 모두 닦아 버려야 하고 무슨 일이든 법을 크게 보고 법에 책임져야 한다. 마음이 조금 불편하긴 했지만 정념이 이미 주도를 했다. 그럼 나는 곧 협력을 잘 해야겠다……- 본문작자

* * * * * * *

법을 얻기 전에 나는 기공, 체육 애호가였고 또한 세계 비밀, 우주탐색, 특이공능 등에 대해 강렬한 흥미가 있었다. 기공 열풍 중에서 나도 여러 가지 기공을 연마하였지만 모두 내가 찾는 것이 아니라고 여겼다. 나는 한 때 기회를 봐가며 창춘에 가서 명 사부를 모실 생각도 다 해봤다.

1996년에 나에게는 우리 현지 서점에 가서 책 한 권을 사야겠다는 강렬한 염두가 있게 되었고 후에 나는 ‘전법륜’을 갖게 되었다. 책 속의 법리는 나의 시야를 활짝 열어 주었고 내 마음 속의 우주, 자연, 인체, 인생의 참뜻에 대한 해답을 단번에 해 주었다. 후에 나는 또 신기하게 대법 책 몇 권을 갖게 되었다. 이때부터 나에게는 인생의 목표와 동력이 있게 되었고, 나는 마치 대자연의 비밀을 통찰한 듯 더는 대자연에 대한 신비감, 우주탐색에 대한 흥미가 없어졌고 더는 서점, 도서관에 가지 않았다. 왜냐하면 대법은 나에게 일체 해답을 주었으므로 나는 업무외의 많은 시간을 법 공부와 연공에 쓰게 되었고 아울러 대법의 표준으로 엄격히 자신을 요구하여 심성은 자신도 모르는 사이에 제고되었고, 신체도 갈수록 좋아져 길을 걸으면 나는 것 같았다. 아래에 나의 십여 년 동안의 수련 여정을 사부님께 회보하고 수련생들과 교류하고자 한다.

1. 마음을 닦아 선을 향하고 부정부패를 거절하다

1999년 ‘7·20’ 박해 전, 나는 모 직장의 무장부(武裝部) 부장이었다. 매번 징병 시기면 군대에 가는 것으로 출로를 찾으려는 청년과 보호자들은 모두 사람들에게 청탁하여 길을 찾았는데 손님을 초대하고 선물을 증정하는 방식으로 나를 찾아왔다. 나는 속으로 생각했다. 나는 대법 중에서 수련하는 사람이고 마음을 닦고 선을 향하는 사람이며 곳곳에서 남을 배려하여 무사무아(無私無我), 선타후아(先他後我) 하는 생명이므로 나는 반드시 이익을 탐내는 마음을 닦아 버려야 한다. 동시에 잃지 않으면 얻지 못한다는 우주 법리를 깊이 새기고 심성을 지켰다. 그들이 나에게 돈과 선물을 가져오면 나는 즉석에서 거절하였고 어떤 땐 선물을 돌려보낼 수 없게 되면 현금으로 계산하여 몇 십리 밖이라도 보내주었다. 징병 시기면 나와 무장부 인원을 식당으로 청하는 사람들이 날마다 줄을 서서 순번을 기다리기에 문도 열 수 없었지만, 나는 모두 좋은 말로 권하면서 완곡하게 거절하였다.

위에서 서술한 행위는 상급의 표창을 받기 위한 것이 아니고 허세를 부리기 위한 것도 아니며 그것은 파룬따파(法輪大法)를 수련한 후 생명의 착한 본성의 진실한 면이 자연스럽게 표현된 것이다. 물론 물욕이 흘러넘치고 부패한 중공(중국공산당) 통치하의 사회에서 좋은 사람이 되는 것 역시 쉽지 않은 것이다. 상급은 당신이 그들에게 선물을 보내주지 않으면 당신에게 압력을 줄 것이고, 동료와 부하는 당신이 청렴결백함으로 인해 이익을 얻지 못해 불만이 있을 것이고, 일가친척은 당신이 그들에게 일을 처리해 주지 않는다고 좋아하지 않을 것이다. 또한 당신이 술을 마시지 않고 담배를 피우지 않으며 선물을 받지 않는다고 하며 사는 게 무슨 의미가 있느냐, 이 벼슬을 당신은 헛되게 하는 게 아니냐 하는 말도 늘 들었다. 이런 일에 부닥치던 초기에는 좀 괴롭긴 했지만 후에는 점차 심태가 안정되었다.

2. 5년 동안의 불법 수감, 노동교양 박해 중에 확고히 법을 수호하다

1999년 7.20, 장씨 깡패 범죄 집단은 광적으로 파룬궁을 박해하였고, 나도 확고하게 법을 수호하고 박해를 반대하는 고난의 길을 걷게 되었다.

1) 명리정을 내려놓고 확고히 법을 수호

나는 현지에서 비교적 명망이 있는 무장부장이고 또한 자원한 현지의 파룬궁 보도소 소장이기 때문에 1999년 9월 현지 사당 당위는 전문적으로 나를 전향시키는 ‘학습반’을 설립하였다. 그들은 날마다 두 사람이 나를 찾아 대화했는데 나더러 파룬궁을 이탈하라면서 파룬궁과 사부님을 ‘폭로비판’하고 중공사당을 따르라고 하였다. 나는 도리 있게 있는 힘껏 변론하면서 마음을 닦고 선을 향하며 병을 제거하고 몸을 건강하게 하는 파룬궁의 신기한 효과를 그들에게 이야기 해주었으나 그들은 임무 완수를 위해 듣기 싫어하였다. 하지만 또 나의 도리 있는 사실적 반박에 할 말이 없었으므로 그들은 나에게 파룬궁을 모욕하는 신문을 끊임없이 읽어주었다. 그들이 내가 파룬궁 수련을 견지하면서 ‘전화’하지 않는 것을 보고 상부에서 공산당원은 파룬궁 수련을 하지 못한다는 문건이 있다고 하였다. 그러면 나는 파룬궁 수련은 나로 하여금 더욱 좋은 사람이 되게 하였고, 나로 하여금 더욱 나의 사업을 잘 감당할 수 있게 하였다고 말했다. 그들은 그건 절대로 안 되는 일이며 두 가지 중에서 한 가지만을 선택할 수 있다고 했다. 나더러 한 가지를 선택하라 한다면 그럼 나는 공산당에서 탈퇴하고 무장부장의 직무를 사직할 수밖에 없다고 말하였다. 파룬궁 수련을 위해 이튿날 나는 진지한 고려를 한 후 고통스런 선택을 하고 공산당에서 탈퇴하고 무장부장 직무에서 사직한다는 성명을 발표하였다(박해를 부정하지 않았다).

나의 거동은 현지 당정기관을 놀라게 했고 적지 않은 파문을 일으켰으며, 한 때 사람들이 곳곳에서 거론하는 화제로 되었다. 며칠 후 내가 소속한 당 지부는 전체 회의를 열었는데 퇴직한 노 간부들마저 다 왔다. 사실 그들은 모두 나와 여러 해 동안 좋은 감정을 지닌, 관계가 괜찮은 사람들로서 모두 나보고 파룬궁 수련을 위해 탈당과 직무를 사직하여 자신의 전도를 망치지지 말라고 솔직하게 권고하였다. 그들은 나 때문에 격동되고 애석해 했으며 분노하였고, 어떤 사람은 눈물을 흘리며 타일렀고, 어떤 사람은 책상을 두드리고 분노하며 꾸짖었다. 하지만 나는 이미 대법을 확고히 끝까지 수련할 뜻을 세웠던 것이다.

2) 생사를 내려놓고 확고하게 법을 수호하다

2000년 1월 27일, 우리 지역에서 전문 파룬궁 박해를 책임진 사당 서기는 나를 구치소에 수감하라는 명령을 내렸고 동시에 나의 아내(수련생)도 구치소에 수감하였다. 며칠 후 우리 지역에서 많은 파룬궁 수련생들이 법을 수호하러 베이징에 갔다가 납치되어 돌아와 구치소에 수감되었다. 우리는 서로 고무격려 하였다.

어느 날 밤, 이곳 공안국은 갑자기 나와 다른 두 명의 수련생을 뒤로 손을 묶고 머리에 검은 두건을 씌우고 목에 매고는 몇 급 수감을 한다면서 비밀리에 압송하여 차에 오르게 했는데 어디로 압송하는지 알 수 없었다. 우리는 그때 정말로 생사의 순간이 온 줄로 여겼고 나는 끊임없이 ‘홍음-무존’ “살아 바라는 것 없고 죽어 애석할 것 없네. 허망한 생각 다 떨쳐버리면 부처 수련 어렵지 않도다.”와 기타 사부님 경문을 외웠다. 우리는 다른 지방의 구치소에 불법 수감되었는데 첫 이틀은 밥을 주지 않더니 그 후에는 날마다 반찬 없이 찐빵 하나만 주었다. 뜻인즉 굶어 죽지 않으면 된다는 것이다.

불법 수감 7개월 후 또 노동교양 1년을 당했다. 노동교양소에서 날마다 강제 세뇌를 당했는데 파룬궁을 중상 모략한 녹음 및 영상물, 서적을 끊임없이 듣고 보게 했다. 경찰의 호통, 밑바닥 불량배의 능욕, 그야말로 우리에게는 하루가 일 년과도 같이 길었다. 우리는 수련인의 상태를 유지하면서 각종 방식으로 그들의 세뇌를 저지하였고 그들에게 파룬궁 진상을 알려 주었다. 우리의 형기가 다 만료되어도 노동교양소는 풀어주지 않았고, ‘전화’하지 않으면 집에 갈 생각을 하지 말라. 너희들을 영원히 감옥에 있게 하겠다고 했다. 그리고는 또 ‘전화’하지 않으면 징역에 처할 것이며 신장 대 사막지역에 파룬궁을 수감하는 대형 감옥을 지었는데 ‘전화’하지 않는 파룬궁 수련생을 그 곳에 보내 그 곳에서 죽게 한다고 하였다. 이런 상황에서 많은 파룬궁 수련생들은 전화했다. 어떤 땐 한 개 중대에 나 혼자 남아서 여전히 견지하고 있었다. 나는 파룬따파(法輪大法)는 정법이고 불법(佛法)이므로 누구도 가로 막지 못할 것이며, 억울한 누명을 벗을 때가 꼭 있으리란 것을 확고히 믿었다.

2001년 7월 초, 나는 수감기간이 반년 초과 되었을 때 갑자기 노교소(노동교양소) 두 경찰에 의해 고향으로 돌아가게 되었다. 나를 호송하는 길에서 두 경찰은 나를 위협하면서 어느 곳에다 너를 파묻으면 누구도 모를 것이라고 하였다. 나는 조금도 겁을 먹지 않고 그들의 몰 인성적 행위를 호되게 질책하자 두 경찰은 아무 말도 못했다. 내 고향의 정법위 610은 내가 여전히 파룬궁 수련을 견지하는 것을 보자 나의 영향이 큰 것이 두려워 여전히 나를 호텔, 외진 시골과 구치소에 구금하다가 2001년 12월 25일에야 겨우 석방시켜 주었다.

2002년 1월 초, 나는 수련생 집에 가서 다른 두 수련생과 만났는데 이 두 수련생도 노교소에서 석방된 지 열흘 남짓하였다. 수련생 집의 전화가 도청당할 줄이야 어찌 알았겠는가. 우리가 집에 들어선 지 십여 분 후에 십여 명의 경찰이 들어와 우리를 납치했는데 불법집회라고 규정하고는 또 악독하게 우리에게 3년 노동교양을 시켰다. 우리 세 사람은 또 불법적으로 내가 일찍 노동교양 당했던 노교소에 수감 당했다.

그 해 이 노교소는 더욱 사악해졌다. 파룬궁 수련생을 ‘전화’시키기 위해 사악한 교도관들은 여러 개의 전기곤봉으로 수련생을 충격했는데 전기가 다 없어질 때까지 때리거나 혹은 여러 경찰이 주먹질과 발길질을 번갈아 해대며 사람이 정신을 잃을 때까지 때렸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