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거침없고 사심 없으니 진견(眞見)이 나오는구나

― ‘제9회 대륙법회’ 글을 읽고 법리에서 제고되다

글/ 대륙 대법제자

[밍후이왕] 모르지만 익숙한 한명, 또 한명의 수련생은 평화롭고 순박하며 순정한, 또 실제적인 언어로 나에게 정법수련 중에서의 이야기를 들려주었다. 나는 읽으면서 일부 법리 방면에서 인식이 부족했던 것을 느낄 수 있었고 일부 방면에서 다소 제고를 가져왔다.

모른다고 함은 이런 수련생들과 나는 만나본 적이 없고 익숙하다고 함은 글마다 인물성격이 제각각이지만 살아있는 듯 내 앞에 펼쳐져 마치 내 주변 수련생과 같았기 때문이다. ‘4.25’청원에 갔던 수련생, ‘7.20’ 때에 함께 법을 수호해 나섰던 수련생, 간수소, 감옥에서 반박해하고 있는 수련생의 모습과 같았다. 내용에서 볼 때 개인수련이 있고 정법수련이 있으며 대법을 수호하고 대법을 실증하며 세상 사람을 구도하는 여러 방면이 있다. 작자의 신분은 또 대륙 각 계층의 사람들이다. 개인적으로 글마다 아름다웠다고 생각된다. 대법제자마다 자신의 길을 걷고 있으며 정념과 자비로 자신의 맑은 하늘을 열어가고 있었다!

전반적으로 구세력을 부정하며 그것들의 존재마저 인정하지 않는다

사부님께서는 ‘2004년 시카고법회 설법’에서 이렇게 말씀하셨다. “우리는 구세력 자체의 출현과 그것들의 배치한 일체마저 모두 부정하는 것으로, 그것들의 존재마저 승인하지 않는다. 우리는 근본적으로 그것의 이 일체를 부정하며, 그것들을 부정하고 배제하는 중에서 당신들이 행한 일체야말로 위덕이다. 그것들이 조성한 마난 속에서 수련하는 것이 아니라, 그것들을 승인하지 않는 가운데서 자신의 길을 잘 걷는 것이며, 그것들 자체를 제거하는 마난의 표현마저도 승인하지 않는다. (박수) 그럼 이 각도에서 볼 때, 우리가 마주한 일은 바로 구세력에 대한 전반적인 부정이다. 그것들이 최후로 발악하는 표현을 나와 대법제자들은 모두 승인하지 않는다.”[1]

전에 이 단락의 법을 공부할 때 단지 표면에서 이해했다. 사상과 행위에서 협조하지 않고 승인하지 않으면 되는 줄로만 생각했다. 그것들의 존재마저 승인하지 않는다는 것과 그것들 자체를 제거하는 마난의 표현마저도 승인하지 않는다는 점에 대해서는 조금 의혹이 있었고 잘 이해되지 않았다. 이번 법회의 글에서 이렇게 말했다. “누군가가 마난에 봉착했거나 박해를 당했다고 들었을 때 이렇게 생각했다. ‘만일 내가 이 일에 봉착했다면 어떻게 할 것인가….’ 실제로는 구세력의 박해를 인정한 것이다.” 사실 이 글을 읽기 전에 제9회 법회의 기타 문장을 읽으면서 이러한 염두가 나타났었다. ‘만일 내가 이런 일에 봉착하면 어떻게 할 것인가….’ 이런 사유방식은 사실 구세력의 존재를 승인하는 것임을 의식한 후 나는 법회 글을 읽을 때 이런 염두가 다시 나타나면 나는 제때에 ‘그것을 틀어쥐고’ 정념으로 깨끗이 제거했다.

그 외에 나는 또 자아의식을 발견했다. 수련생의 글을 읽으면서 늘 “나는 무엇을 해보았는가, 또 무엇을 해보지 못했는가…”라는 염두가 나타나면서 사람 마음으로 대했다. 내가 이 점을 의식한 후 이러한 염두에 대하여 제때에 깨끗이 제거했다. 아무것도 생각하지 않고 단지 조용히 읽었더니 마치 그 경지에 처한 것 같았고 수련생이 펼쳐낸 정경 속에 용해되어 수련생의 정념정행, 법리에서의 제고를 느낄 수 있었으며, 또 세간에서의 대법의 홍대한 법력을 느낄 수 있었다. 혹은 자신의 마음의 매듭이 갑자기 깨달음이 있도록 계발을 받았고 혹은 감동되어 눈물이 흘렀고 혹은 회심의 미소를 지었다….

정념에 대한 이해

나는 16년 수련했다. 정념이 무엇인가에 대해 나는 늘 수련생과 대화한다. 모순에 봉착해 자신을 한 수련인으로 대하는 것이 정념이고, 사부님을 확고히 믿고 대법을 확고히 믿는 것이 정념이며, 일에 봉착해 안으로 닦고 안으로 찾는 게 정념이고, 반박해에서 구세력의 존재를 승인하지 않는 게 정념이며, 많이 다른 사람을 생각하는 게 정념이고, 진상을 알려 세상 사람을 구도하는 게 정념이며…

수련생들의 교류 글을 읽으면서 눈앞에 떠오르는 것은 대법제자가 농촌에서, 거리에서, 슈퍼에서, 국가기관에서, 학교에서, 경찰국에서 진상을 알려 세상 사람을 구도하며 전화로, 편지로, CD 등으로 대법 진상을 전하는 모습이었고, ‘대법도(大法徒)의 사명’이란 단어가 머리에 나타났다. 그렇다. 중생을 구도하는 사명감이 대법도의 정념이다. 이것을 의식하자 한 가닥의 강대한 에너지가 정수리로부터 전신을 관통했다. 사명이 있기 때문에 우리는 비로소 중생에게 자비할 수 있으며 어떤 환경에서든지 첫 일념은 바로 세상 사람을 구도하는 것이며, 이 사람 배후가 어떻게 사악한 요소로 가득하든지 관계없었다. 사명이 있기 때문에 ‘한 마음으로 세상에 내려와’[2] 우리는 완전히 자아를 내려놓을 수 있고 함께 공통된 목적을 위해 서로 원용(협조)할 수 있다. 사명이 있기 때문에 비로소 ‘주동적으로 나서서 환경을 개척했다.’(법회문장 제목) 사명이 있기 때문에 ‘대법제자는 어디에서든지 주인공이다.’(법회문장제목) 이 점을 인식하자 마치 내 앞을 가로막고 있는 담벼락이 제거된 것 같았고 많은 문제에 대해 완전히 새로운 인식을 갖게 됐다.

이로부터 나는 생각하게 됐다. 이 세상에서 대법제자로서 당신은 무엇을 갖고 있는가? 아무것도 없었다.(아마 표면에서는 무엇이나 다 있을 수 있다) 오직 사명뿐이었다. 대법제자 당신은 원래부터 대법의 자원이며 당신이 세상에서 갖고 있는 일체를 포함해서다. 당신의 재산은 대법자원이며 당신의 신체는 자신의 사명을 완성하게 대법이 부여한 법기다. 표면의 기본적인 생활과 대법실증을 위한 외에 당신은 마음대로 낭비할 수 있겠는가? 그럴 수 없다! 당신의 사명을 완성하도록 주어진 법기(신체)에 대해 당신이 잘 간수하지 않고 되겠는가? 어떻게 간수할 것인가, 법공부를 많이 하여 법으로 충실되게 해야 한다. 연공을 많이 하여 고에너지물질로 재빨리 육신을 전화시켜야 한다. 그래야만이 이 법기는 비로소 사용하기에 좋다.

이상은 단지 정념에 관련하여 새롭게 인식된 부분이다. 이 담벼락을 타개한 후 다시 천서 ‘전법륜(轉法輪)’을 펼쳤더니 그 속의 많은 내용에 대해 더욱 넓은 인식이 있었으며 대법은 나에게 다른 한 층차를 펼쳐주었다. ‘수구’, ‘심성을 지키고’, ‘무위’ 등의 내용에 대해 완전히 새로운 인식이 있었으며 다른 일종 사유방식을 갖게 됐다.

수련생들이여, 사부님께서 우리를 위해 만들어주신 대륙제자 법회 교류를 소중히 여기자, 마음으로 읽으며 용맹정진하도록 하자.

개인적인 인식으로서 부당한 곳은 지적해주시기 바란다. 허스.

주:

[1] 리훙쯔 사부님의 저작: ‘각 지역 설법 4-2004년 시카고법회 설법’

[2] 리훙쯔 사부님의 저작: ‘홍음-소원을 풀다’

문장발표: 2012년 12월 2일
문장분류: 수련마당>정법수련>이성인식
원문위치: http://www.minghui.org/mh/articles/2012/12/2/266121.html