글/ 베이징 대법제자
[밍후이왕] 최근 대륙 수련생이 쓴 ‘정체 밖에 서서 정체를 이야기하다(站在整體之外談整體)’ 문장을 보고 마음이 정말 말이 아니었다. 개인이 느끼건대 문장에는 일부 문제가 존재하므로 마땅히 엄격히 지적해야 한다고 생각한다. 우선 부분으로 전체를 평가한 것이다. 이 수련생은 자신이 본 것을 정체라고 말했는데 분명히 편파적이다. 나는 이 수련생이 본 ‘정체’는 사실 ‘상유심생’의 결과라고 이해된다. 사악이 가장 집중된 베이징이라고 하더라도 많은 수련생이 장기간 진상 알리기를 견지했기에 갈수록 많은 중생이 각성하고 있고 일부 독해가 몹시 깊은 속인들도 ‘보시라이-왕리쥔 사건’ 이후, ‘파룬궁수련생 생체 장기적출’ 등 진상을 안 이후 변화가 아주 크다는 것을 느낄 수 있다. 둘째는 생각을 대법에 쓰지 않았다는 것이다. 개별적인 수련생들이 장기간 정진하지 않고 참답게 수련하지 않은 것 때문에 나타난 부정확한 상태에 대해 생각을 정확하지 못한데 두고 있을 뿐 사부님께서 그런 수련생들을 위한 거대한 지불을 하시고 계심을 보지 못했다. 일부 노년 수련생들의 생명은 이미 연장 또 연장됐지만 다만 문장을 쓴 이 수련생은 모르고 있을 뿐이다. 세 번째로는 정념이 부족한 것이다. 구세력이 자신의 일가에 대해 어떠어떠한 안배를 했다고 하는데 이 생각은 터무니없는 생각이며 제거하지 못한 것으로 구세력을 승인하는 표현이다. 네 번째는 일부 것들은 사실이 아니라는 것이다. 예를 들면 어떤 수련생들은 밍후이왕에 문장을 발표하지 않았다는 등등이다.
하지만 이 수련생이 ‘안을 향해 찾지 못한다.’, ‘문제에 부딪히면 어떻게 해야 옳은지 모른다.’ 등 문제를 이야기했는데, 나는 자신이 일부 수련과정을 내놓고 수련생들과 교류하려 하니 여러분의 비평과 시정이 있기를 희망한다.
나의 이해로 진수(眞修)는 반드시 안을 향해 찾아야 한다. 사부님께서는 ‘설법’ 중 여러 번 ‘안을 향해 찾다’를 강조하셨고 안을 향해 찾는 것은 ‘법보(法寶)’라고 하셨다. 사부님께서는 “문제가 있으면 안을 향해 찾아야 하는데 이는 대법제자와 속인의 근본적인 구별이다.”(정진요지-대법 산동 보도소에게)라고 하셨다. ‘싱가포르 법회에서의 설법’ 중에서 말씀하셨다. “우리는 흔히 어떠한 일에 부딪혔을 때 모두 밖으로 보고 있다. 당신이 무엇 때문에 나를 이렇게 대하는가? 마음속에 일종의 공평치 못한 느낌이 들어 자기를 생각하지 않는데 이것이 모든 생명의 하나의 제일 큰 치명적인 장애이다. 지난날 일부 사람들이 수련해 올라가지 못했는데 어떻게 수련해 올라갈 수 있는가. 이것은 하나의 제일 큰 장애이므로 누구도 모순 속에서 자신을 보려 하지 않고 자기가 고통을 받았고 불행을 당했는데 또 자신한테서 찾고 자신이 어느 곳에 잘못됐는가를 찾는다는 것은 정말로 행하기 매우 어려운 것이다. 만약 누가 할 수 있다면 나는 이 길 위에서 수련의 이 길 위에서 당신의 영원한 생명에서 모두 당신을 가로막을 것이 없다고 말하는데 정말 이러하다.”
자신은 안을 향해 찾은 과정 중 몇 가지 체험이 있다.
첫째는 그 어떤 모순, 마난이든지 소중히 여겨야 한다. ‘전법륜’ 중에는 ‘모순’이란 두 글자가 나타나는 빈도가 대단히 높다. 사부님께서는 말씀하셨다. “일부 수련생들은 일단 모순의 충돌, 감정의 충격을 당하면 곧 언짢아한다. 그렇다면 당신은 여전히 수련할 것인가 하지 않을 것인가? 수련하는 사람은 문제를 거꾸로 보는 것으로, 이런 마난(魔難)과 고통을 모두 제고할 좋은 기회, 좋은 일로 보면서 그것으로 하여금 많이 오고 빨리 오게 해서 자신을 빨리 제고하게 한다.” (2005년 샌프란시스코 법회에서의 설법) 모순은 수련인으로 놓고 말하면 좋은 일이다. 왜냐하면, 모순은 당신의 집착과 부족함을 폭로할 수 있기 때문이다. 만약 모순 중에서 자신을 찾을 수 있다면 곧 제고할 수 있다. 그러므로 자신이 다른 사람과 모순이 생겼거나 혹은 자신이 다른 사람의 모순을 보았다면 모두 소중히 여기면서 이 모순을 이용하여 자신을 제고해야 한다.
두 가지 사례를 들겠다. 하나는 아이를 관리하는 문제다. 우리 집엔 어린이 대법제자가 한 명 있다. 아이는 정말 장난이 심해 관리하고 교육하려면 때로는 참지 못하고 화를 내게 되고 심지어 때리기까지 하게 된다. 한 시기 아이는 갈수록 말을 듣지 않아 나는 더는 참을 수 없는 정도에까지 이르렀다. (이것은 사실 내가 자신을 찾지 않았기에 모순이 갈수록 격화되어 점점 관리하기 힘들었는바 나에게 반드시 자신의 마음을 보라고 하는 것임). 나는 결국 참지 못하고 아이를 때리게 됐다. 그런데 아이는 맞지 않고 내 손이 벽 모퉁이에 부딪혀 손이 즉시 퍼렇게 부어올라 며칠간 아팠다. 나는 결국 깨닫게 됐다. 나는 자신이 선심으로 아이를 대하지 못했고 인내심이 부족했으며 자신은 이미 악의 일면을 이용해 그 아이를 대했다는 것을 인식하게 됐다. 내가 자신의 부족한 점을 찾고 나니 마음의 용량도 커져 선한 마음으로 그 아이를 대하기 시작했다. 이렇게 되자 아이도 말을 잘 들었다. 어른들로 하여금 화나게 하는 그런 일들은 사실 보잘것없는 작은 일들이었다.
다른 하나의 사례는 내가 한 속인에게 진상을 알리던 일이다. 당시는 무슨 원인인지 잘 모르겠는데 내가 그녀에게 진상을 알리다가 대치 상태에 처하게 됐다. 왜 대치됐는가? 그녀는 중국은 마땅히 일당제를 유지해야 하지 그렇지 않으면 중국이 혼란하게 된다는 것이고 나는 중국은 마땅히 민주, 다당제를 실시해야 한다고 주장했다. 두 사람이 의견이 맞지 않아 불쾌한 기분으로 헤어지다 보니 진상도 잘 알리지 못했다. 돌아가서 나는 도대체 어디에 문제가 생겼는지 생각해 보았다. 나는 자신의 집착을 찾았다. 속인의 정치 형식에 집착했는데 이것은 자신의 관념이었다. 사실 속인사회의 일당제, 황제제, 양당제, 50당제는 우리 수련인과 무슨 관계가 있단 말인가? 다만 자신의 관념이 민주화가 좋고 다당제가 좋다고 느끼는 것 때문에 진상을 알릴 때 자신을 실증하는 관념으로 변해 대법을 실증하지 못했던 것이다. 명백히 알게 된 후 다음 날 우리는 또 만나게 됐으나 더는 그 무슨 ‘정치 체제’를 쟁론하지 않고 다만 박해 진상을 그녀에게 알려주었더니 그녀도 우리를 매우 동정했다.
자신을 돌이켜 보면 매우 많은 상황에서 모순과 마난의 귀중함을 느끼지 못했다. 내 생각에는 우리 수련인들의 계단은 일보 일보 이런 모순이 펼쳐지면서 이루어진 것이라는 것으로 매 모순을 소중히 여기면서 자신의 일사일념을 틀어쥐고 제고해 올라와야만 되는 것이다.
두 번째는 밖을 향해 찾는 사유 방식을 개변해야 한다. 사부님께서는 ‘싱가포르 법회에서의 설법’에서 그 어떤 일에 부딪히면 밖을 향해 보는 “이것이 모든 생명의 가장 크고 치명적인 장애”라고 말씀하셨다. 속인사회에서의 표현은 사람의 일종 사유 방식이 된 것이다. 마치 한 갈래 궤도처럼 당신의 생각이 나타나기만 하면 곧 이 궤도를 따라가게 되는데 이 궤도는 직접 다른 사람을 향한다. 나는 자신을 돌이켜 보면 확실히 그러했다. 문제에 부딪히거나 모순이 올 때 그 모순을 소중히 여겨 제고하지 않았을 뿐만 아니라 반대로 다른 사람의 아님을 찾고 다른 수련생의 그릇됨을 찾았으며 심지어 마음을 대법형세에 쓰곤 했다.
그렇다면 어떻게 해결해야 하는가? 곧 자신의 사유 방식을 개변해야 한다. 무슨 문제에 부딪혀도 조금도 다른 사람에게서 찾지 말아야 하며 다른 사람이 무슨 문제가 있는가를 생각마저 하지 말아야 하는데 의념을 전혀 움직이지 말아야 한다. 그 생각을 움직이기만 하면 ‘밖을 향하여 찾는’ 사유 방식을 시동하게 된다. 사부님께서는 말씀하셨다. “수련인이여 스스로 자신의 과오를 찾으라 갖가지 사람마음 많이 제거하고 큰 고비 작은 고비 빠뜨릴 생각 말라 옳은 것은 그이고 잘못된 건 나이니 다툴 게 뭐 있느냐” (홍음3-누가 옳고 누가 그른가) 흔히 보게 되는 현상은 속인의 이치, 대법의 이치를 이용해 다른 사람을 찾으면서 자신이 속인의 이치상에서, 수련의 이치상에서 바로 서 있다고 생각하고 자신이 옳다고 생각하는데 사실 이는 모두 밖을 향해 찾는 표현이다. 당신이 다만 다른 사람의 문제를 찾는다면 당신이 아무리 ‘도리가 있다’ 하더라도 옳지 않은 것이고 수련인의 요구에 부합하지 않는 것이다. 다른 사람에게서 찾는 마음을 조금이라도 움직여서는 안 되며 다만 매우 착실하게, 매우 완전히, 무조건 자신을 찾아야 한다.
자신이 안을 향해 찾는 과정 중 또 일부 문제에 부딪혔었다. 그것은 가족들 간의 모순이다. 자신이 때로는 가정 모순을 소홀히 여기면서 가정 모순을 ‘속인 모순’으로 여겨 가정으로 하여금 수련 중의 맹점이 되게 했다. 사실 가족이 수련인이든 속인이든지 간에 가족들과 모순이 발생했을 때는 마찬가지로 무조건 자신을 찾아야 하며 역시 밖을 향해 찾는 사유를 움직이지 말아야 한다. 그(그녀)가 가족이기 때문에 모순이 발생해도 자신을 찾지 않을 수 있고 ‘가정의 도리’로 타인을 찾을 수 있으며 밖을 향해 찾는 사유방식을 보류할 수 있는 것이 절대 아니다. 마찬가지로 수련생 사이에도 예외가 아니다.
셋째로는 법에 대조하면서 자신을 찾아야 한다. 대법제자는 수련 와중에 문제에 부딪힐 수도 있고 사람 마음도 제거해야 하는데 이에 대해 사부님께서는 이미 완전하게 우리에게 알려주셨다. 자신을 찾을 때 표준이 있어야 하는데 바로 대법을 표준으로 자신을 규정해야 한다. 이는 오직 법 공부를 많이 해야만 비로소 할 수 있고 법 공부를 많이 해야만 대법의 요구를 명백히 할 수 있으며 비로소 자신을 찾는 과정 중 대법에 동화될 수 있다. 초기에 나는 자신이 무엇을 버려야 할지 잘 몰라서 사부님의 설법 중에서 제기하셨던 마음, 관념, 좋지 않는 사상 등을 하나하나 열거해 놓았다. 이후에 법 공부를 많이 하자 사부님의 요구를 명확히 할 수 있었고 문제가 나타나면 자연히 자신의 무슨 마음이 작용을 일으키는지 알 수 있었다.
이것은 자신의 수련 과정 중의 약간한 체험인데 써 내어 수련생들과 함께 공유하려 하니 부족한 점에 대해 수련생들의 자비로운 시정이 있기를 희망한다.
문장완성: 2012년 10월 8일
문장분류: 수련마당
원문위치: http://www.minghui.org/mh/articles/2012/10/8/263772.html