글/토론토대법제자
[밍후이왕]
존경하는 사부님 안녕하십니까?
수련생 여러분 안녕하십니까?
지금부터 나는 매체에 참가해 진상을 알린 수련체험을 여러분과 교류하고자 한다. 2003년 밴쿠버수련생이 “대기원시보”를 창립한 후 나는 ‘매체는 진상을 알리는 강력한 법기’라고 생각했다. 역시 정법형세에 따라 생성되었다. 천상의 변화 아래 제자는 움직여야 한다. 내가 매체에 참가해 법을 실증하는 수련의 길은 대기원 기자를 하는 데서부터 시작했다.
1. 대기원 기자를 하며 좋은 인연을 맺고 진상을 널리 전하다
신문을 막 설립할 때 대부분은 모두 본부에서 제공한 내용을 번역하여 지면을 채웠고 현지의 뉴스는 아주 부족했다. 나의 임무는 바로 가능한 한 현지의 많은 사회단체, 지역사회의 뉴스를 제공해 더욱 많은 화인(華人)이 대기원을 보게 하는 것이었다.
‘종래로 속인의 뉴스를 관심하지 않는’ 수련인에서 기자가 되니 ‘바깥세상 일을 아랑곳하지 않는’ 습관을 철저히 바꾸고 정치, 경제, 문화, 교육 등 영문과 화교의 뉴스를 열심히 보기 시작했다. 기자로서 반드시 다방면의 사회 지식을 장악하고 또 일정한 영문수준도 있어야 했다. 이 도전은 실로 작은 일이 아니었다.
자주 많은 자료를 찾아보아야 하기에 기자의 일은 정말 많은 시간이 걸리고 까다로운 일이었다. 때로 밖에서 하루 종일 뛰어다니고 저녁에 또 밤을 새워야 비로소 몇 백자 되는 일반 뉴스를 한편 완성할 수 있었다. 그러기에 다른 항목에서 진상을 알리는 것보다 통쾌하지 않다고 느꼈다. 하지만 만약 매체 전부가 다 파룬궁 진상이라면 보는 사람이 없다. ‘빨간 꽃은 푸른 잎이 가지해 줘야 한다.’ 매체가 독자에게 즐겨 보고 듣게 해야 비로소 발전이 있다. 그러면 뉴스를 즐겨 보고 듣게 하려면 반드시 사람들의 생활에 접근해야 하고 일반인이 가장 관심을 갖는 기본 생활을 보도해야 했다. 나는 기꺼이 푸른 잎이 되어 ‘진상’, 이 꽃을 돋보이게 할 것이라고 생각했다.
기자를 하는 과정에서 나는 사회에서 각 방면의 인사와 친분을 맺었다. 3급 정부의원과 큰 사장도 있었고 자주 주류사회의 화교지역, 사회의 각 단체와 접촉했다. 기자라는 신분은 진상을 알리기에 더없이 좋은 이기(利器)라는 것을 발견했다. 기자는 ‘무관의 제왕’이어서 사회에서 특수한 지위가 있고 평소 수련생이 접촉하기 어려운 계층을 만날 수 있었고 , 주요 인사를 접촉하고 취재하여 연을 맺고 나아가 친구가 되어 그들에게 진상을 알릴 수 있었다. 이렇게 사회에서 영향력이 꽤 큰 사람이 진상을 받아들였고 또 그들의 울타리에서 진상을 널리 전했다.
내가 막 대만 공동체를 접촉할 때 대만단체들 중 진정으로 파룬궁을 이해하고 있는 사람은 적다는 것을 발견했다. 대부분은 우리가 정치적 목적이 있다고 생각한다. ‘9평공산당’을 발표한 후 나는 신문을 가지고 대만 단체 책임자를 찾았는데 그때 그들은 다만 형식적으로 나를 대했다. 나는 낙심하지 않고 계속 그들의 활동을 보도한 후 전자메일로 뉴스 링크를 발송했다. 다음에 취재할 기회가 있어도 그 기간에 신문을 보류했다가 그들에게 전했다. 천천히 그들은 대기원 사이트와 신문을 즐겨 보기 시작했다. 중공에 대한 인식은 갈수록 명백해졌다. 그들과 천천히 친구가 된 후 자신이 수련을 하여 몸과 마음이 좋아진 것을 알려주었다. 중공이 왜 파룬궁을 박해하는지 그들은 다 이해한다고 했다. 그 후부터 그런 단체 지도자는 주동적으로 우리를 요청하여 각종 그들의 활동에 참가하게 했고, 이런 장소는 또 진상을 알리는 좋은 기회가 되었다. 한시기 밴쿠버 수련생이 단체 법공부 장소가 없어 고민하고 있을 때, 한 단체의 지도자이며 교회 목사는 전례를 깨뜨려 교회의 정문열쇠를 하나 맞추어 나에게 주었다. “나는 당신들을 믿는다. 당신들은 언제든지 회의를 할 때 우리의 교회를 사용할 수 있다.”라고 말했다. 다른 단체 인사는 기독교장로이다. 한번은 일이 있어 그를 찾아 갔는데 그가 미사를 할 때, 중공이 파룬궁수련생을 어떻게 박해했는지를 듣고 모든 사람과 함께 파룬궁 수난자를 위해 기도했다.
이렇게 나는 배우며 일하는 과정에서 점차 자신의 길을 걸어 지나왔고 좋은 인연을 많이 맺고 진상을 널리 전했다.
2. 씬탕런에 가입하고 3가지 매체를 겸해 법을 실증하는 길을 걷다
2004년 여름, 전 세계 각 지역의 대법제자는 잇따라 뉴욕과 맨해튼의 혹형 시연에 참가하러 갔다. 머물다보니 반년이 지났다. 밴쿠버로 돌아가 보니 꽤 오래전에 씬탕런 밴쿠버 기자팀이 구성되어 있었다. 협조인은 나를 요청하여 TV뉴스를 할 생각이었다. 그때 나는 3개 매체가 모두 기자가 부족한 상태였기에 3개 매체를 겸하는 것도 좋은 일이라고 생각했다.
하지만 말하기는 쉬워도 하는데 어려움이 많았다. TV뉴스는 신문과 다르고 촬영기사와 협조하고 원고를 쓸 때 영상, 소리 및 화면의 흐름을 고려해야 한다. 이 새로운 영역에 내가 배울 것이 아직 많은 것을 발견하였는데 그것은 더욱 많이 노력해야 하는 것을 의미했다. 업무량이 많아지고 매일 나는 영문을 모르는 수련생과 편집을 완성한 후 집에 돌아가야 했다. 밤을 새우는 일은 흔한 일이었다. 이튿날 아침 또 직장에 출근해야 했다. 한동안 나는 견지할 수 없다는 느낌이 있었다. 출근할 때 서서 잠이 들 정도였다. 매번 이때 나는 사부님의 법 “참기 어려운 것도 참을 수 있고 행하기 어려운 것도 행할 수 있다” (전법륜-제9강)을 생각했다. 직장을 다녀온 후 나머지 시간에 활동을 해야 했기에 뉴스를 할 때 일반 사람보다 더욱 많이 노력해야 비로소 뉴스를 잘 할 수 있었다.
3. 씬탕런 본부에 가입하고 어려움을 돌파하다
하지만 수련은 한 고비를 넘기지 못했는데 또 한 고비가 잇따라 온다. 2007년 연말 어느 하루, 뉴욕 씬탕런 인사부 지배인이 전화를 걸어 나를 찾았다. 나를 뉴욕에 요청하여 전문기자를 하라는 것이었다. 2008년 초부터 뉴욕 씬탕런이 유선TV에 정착했다. 매일 반드시 현지의 지역 뉴스를 보도해야 비로소 시청자를 끌어들일 수 있고 시장경영을 위해 문을 열수 있었다. 뉴욕에 가려면 나는 다니던 직장을 버리고 내가 익숙한 밴쿠버를 떠나 생소한 도시로 가서 전부 새로 시작해야 했다. 그리하여 나는 단번에 거절했다. 생각지도 않게 그 사장은 다시 나를 뉴욕으로 요청했다. 이번에 나는 생각했다. 어떤 일도 우연한 것이 없다. 그래서 나는 당연히 뉴욕에 가서 한동안 수련의 길을 걸어야 한다고 생각했다.
자신의 앞에 직면한 어려움이 작지 않을 것이라는 걸 알면서도 수련인은 어려움 앞에서 물러설 수 없기에, 나는 다니던 직장을 사직하고 뉴욕으로 갔다. 첫날부터 나에게 호된 맛을 보게 했다. 씬탕런 뉴스 책임자는 사람마다 매일 독립적으로 제때에 2편의 뉴스를 내라고 했다. 편집을 해보지 않은 나는 첫날 저녁 기억을 더듬어 (이전에 늘 수련생이 편집하는 것을 보았기 때문이다) 조금씩 뉴스를 만들었다. 첫날 저녁 전체 방송인이 TV앞에 모여 씬탕런 첫날 방송한 뉴스프로그램을 흥미진진하게 보고 있었다. 우리 모두 뉴스팀의 전체 노력에 박수를 보내고 나도 역시 큰 격려를 받았다.
첫째 날은 이렇게 지나가고 이어서 매일 고비를 넘는 것 같았다. 조건이 쉽지 않은 단체에 대한 적응, 생소한 곳에 대한 부담, 단독으로 촬영, 취재하고, 매일 삼각대와 촬영기를 지고 지하철을 타고 걸어서 취재하는 곳으로 가는 등 신체적으로 불편을 견뎌야 했다. 공공관계를 담당하는 임무가 있어 매번 뉴스현장은 가장 늦은 매체가 되고, 돌아온 후 원고를 작성하고 더빙하고 편집했다. 그리고 제시간에 뉴스를 완성해야 했기에 매일 전쟁터에 있는 것 같았다.
뉴욕에 막 도착하여 현지의 사물에 빨리 적응해야 하며 매일 대량의 자료와 주류매체, 중문매체뉴스를 보아야 했다. 그러기에 뉴스를 만든 후 남아서 많은 공부를 해야 했다. 처음 3개월간 거의 매일 1시에 기숙사로 돌아갔다. 뉴욕에서 현(弦)의 뉴스를 올리는 박자에 밀려 멈출 수 없었다. 힘들 때 정말로 좀 쉬고 싶었다. 하지만 나는 알고 있었다. 비록 이 고비마다 매우 어려워 보이지만 대법이 필요로 하면 나는 이 위치에서 자신의 길을 꼭 걸어 나올 수 있다. 그리고 이런 상황일수록 더욱 법공부를 느슨히 하면 안 된다. 오직 법으로 어려움을 넘길 수 있다. 사부님의 《대법제자는 반드시 법공부를 해야 한다》에서 “그러므로 법공부가 가장 중요하고, 가장 중요한데, 그것은 당신이 하고자 하는 일체 일의 근본 보장이다. 만약 법 공부를 따라가지 못한다면, 그럼 무엇이든 다 끝장이다.”라고 말씀하셨다.
나는 매일 집에 돌아 간 후 법을 외웠다. 왜냐하면 하루 종일 머리에 뉴스의 일에 바빠서, 법을 베끼고 법을 외우면 자신의 사상을 쉽게 집중할 수 있었다. 그리고 다음날 아침이 되면 기숙사 수련생과 함께 연공을 하고 “전법륜” 1강을 배운다. 이렇게 4개월이 지나서야 끝내 돌파하여 스스로 뉴스를 보도할 수 있었다.
씬탕런이 정착된 지 이듬해, 우리 현지 유선TV는 처음에 1시간을 방송하다 매일 24시간 방송하게 되었고 그 다음해 대뉴욕지역은 씬탕런프로그램을 수신하는 유선TV 정기 구독자가 75만으로 증가했다. 이때 젊은 수련생이 뉴스팀에 가입하고 촬영기사를 겸했다. 처음에 나는 매우 기뻤다. 하나하나 그를 이끌었다. 의외로 그는 익숙해 진 후 나를 가르치려 했다. 협조함에 따라 갈수록 모순은 격화되었다.
한번은 기자회견에서 촬영기사는 나와 촬영에서 분쟁이 나타났다. 내가 전문적이지 않다며 촬영 장비를 버리고 갔다. 나는 그때 화가 치밀어 올랐다. 속으로 보통 촬영기사가 기자에게 협조하는데 이것은 정반대이다. 두 사람은 기세등등하여 돌아오고 인사과 사장도 우리 둘의 모순이 큰 것을 보고 우리에게 “당신들이 이렇게 만든 뉴스가 사람을 구할 수 있을까?”라고 말했다. 이 한마디가 나를 일깨웠다. 모순이 닥칠 때 나는 줄곧 속인의 이치에 빠져 속인의 매체에서 촬영기사가 기자에게 복종해야 한다는 규칙으로 다른 사람을 요구했다. 또 수련생이 억지를 쓴다고 원망했다. 뉴스를 만드는 것도 다른 기타 항목과 같다. 모두 수련이 그중에 포함되어 있다. 하지만 나는 안으로 찾는 것을 잊었다. 이 일도 자신이 다른 사람이 말하지 못하게 하는 마음을 아직 깨끗이 닦아버리지 못했다는 것을 비춰준다. 그리고 사부님은 일하며 협조해야 비로소 사람을 구할 수 있다고 말씀하셨다. 어느 각도에서 보아도 나는 잘 하지 못했다. 나는 스스로를 돌아보았다. 사실 자신이 새로운 수련생에게 불복하지 않고 다른 사람을 깔보는 질투심이 있었다. 질투심은 층층이 있어 한층 제거하면 또 한 층이 있다. 그러기에 끊임없이 제거해야 한다.
사부님은 《무엇이 대법제자인가》에서 “내가 재삼 말하는데, 좋은 일면은 당신들이 보지 못하며 저쪽은 이미 아주 좋아졌고 표준에 도달하였다. 표준에 도달한 것은 어떤 모양인가? 신의 표준이다. 그가 잘 수련하지 못한 그 일면은 표면으로 갈수록 좋지 않음을 드러내고 있지만 그는 이미 아주 잘 수련했다.”라고 말씀하셨다. 법에 비교하여 가늠하면 수련생은 많은 좋은 점이 있다. 배우기 좋아하고 고생을 두려워하지 않는 등등이다. 사람은 우리더러 늘 다른 사람을 위해 생각하라고 했는데 나는 그가 어려서부터 부모를 잃어 성격이 좀 괴팍한 것을 이해하고 동정해 주지 못했다. 그 이후에 우리 둘은 관계가 완화되고 협조도 갈수록 좋아졌다.
뉴스를 하는 이 분야는 어려움을 견지해야한다. 왜냐하면 시간이 길고 매일 순서에 따라 일을 하다 보면 쉽게 일하는 형식에 치우치고 때때로 부정적인 생각이 나타난다. 그러나 나는 사부님은 언제나 나를 보호해 주시고 계신다고 느꼈는데, 2,3가지 예를 들어 보겠다. 미국 금융위기가 막 발생할 때 나는 스스로 월가의 길거리에서 취재를 했는데 정말로 어려웠다. 뉴욕 증권거래소에서 나오는 사람은 모두 기운이 없다. 취재를 받아들이는 사람이 얼마 되지 않았다. 많은 사람에게 물었지만 다 거절했다. 나도 좀 풀이 죽어 속으로 ‘오늘은 왜 이렇게 힘들지?’라고 생각했다. 이때 한 무리 화교인이 왔는데 척 보기에 여행객이었다. 그들은 마이크를 가리키며 “당신은 씬탕런입니까? 여기서도 씬탕런을 볼 수 있는가!”라며 물었다. 이것은 사람의 말을 빌려 사부님이 나를 격려해 주시며 견지하라는 것이다. 얼마 후 젊은 경제사(經濟師) 증권거래소에서 나의 취재를 받아들였다.
또 한 번은 1시간 반 지하철을 타고 버스로 갈아탄 뒤 식물원에 취재하러 갔다. 버스에서 내린 후 무거운 삼각대 촬영기를 지고 반시간을 걸었다. 속으로 협조인을 좀 원망했다. 내가 촬영기를 삼각대에 놓고 자신을 촬영할 때 화인여사가 다가오더니 “아, 당신은 정말로 잘합니다. 어느 방송국인가요?”고 말했다. 나는 씬탕런이라고 말했다. 그는 흥분되어 말하기를 매일 씬탕런을 보고 있다고 한다. 그리고 오늘 저녁 나의 뉴스를 보겠다고 했다. 이것은 사부님이 또 한 번 나를 격려해 주시는 것임을 알고 있었다. 나더러 고생을 두려워하지 말라는 것이다. 한번은 내가 밴쿠버에 가서 션윈을 보도 할 때 뉴욕 비행장은 안전을 검사하고 있었다. 근무하는 화교가 다가와 씬탕런 모모 기자가 아니냐며 물었다. 나는 당신이 어떻게 아는 지를 물었다. 그녀는 자주 우리의 TV를 본다고 했다.
뉴욕에서의 3년 반은 한마디로 고생스러운데 그 중에 뿌듯함도 있었다. 나는 9대 경기를 보도하는데 참여하여 전통문화 복구의 거대한 영향력을 견증했고 여러 번 미국과 캐나다 여러 도시의 션윈보도와 뉴욕 파라성(法拉盛)사건 등을 보도했다. 이런 기회는 비할 바 없이 소중하다. 정법시기 자신의 주 전쟁터이며 작은 힘을 실은 것이고 정말로 다행이었다.
4. 다언어 방송국이 착지하고 협조하는 것을 배우다
작년 여름의 한 때, 나는 토론토 씬탕런 뉴스팀에 갔다. 금년 3월 28일 씬탕런 다언어 채널이 캐나다 서부 4개 성에서 시작했다. 나는 내가 토론토에 온 것은 아마 일종 배치라는 것을 깨달았다. 다언어 채널은 씬탕런 전 세계 전략의 중요한 부분의 하나이며 더욱 많은 주류사회의 사람을 구할 수 있다. 사부님은 《씬탕런 방송국 토론회의에서 설법》에서 “만약 더욱 많은 언어방송이 있으면 그건 물론 좋다. 아울러 방송국이 정말로 능히 속인사회에 확고하게 자리 잡을 수 있고, 양성순환이 형성되어 날로 발전한다면, 그야말로 좋은 것이다. 비단 여러 어종으로 운영할 뿐만 아니라, 당신들이 어느 한 민족의 어종도 빠뜨리지 않는다면 그것이야말로 좋은 것인데, 왜냐하면 당신들이 직면하고 구도해야 하는 사람은 모든 세인들이기 때문이다.”라고 말씀하셨다.
하지만 토론토 뉴스팀은 나의 또 하나의 새로운 환경이고 뉴욕과 완전히 달랐다. 뉴욕의 본부는 사람마다 한 방면을 담당해야 한다. 하지만 토론토는 대체로 내가 이 정체와 협조할 수 있는가를 고험했다. 토론토 뉴스팀 수련생은 이런 특징이 있다. 비록 개인 기술이 전문적인 것은 아니지만 함께 한줄기 힘으로 응결되어 마음을 합쳐 한 가지 일을 완성한다. 여기에서 나는 정체 협조의 힘을 느꼈다.
하지만 편집장과 협조인으로 되는 것은 여전히 한 고비이다. 왜냐하면 줄곧 기자를 해왔다. 매일 자신이 완성하려는 그 부분 한 두 개 뉴스를 하면 된다. 하지만 편집장을 담당하면 20,30개 뉴스를 책임져야 한다. 또 후기 제작의 인력과 시간을 고려해야 하고 시야를 넓혀 전체 국면을 보는 것이 필요하다. 나로서 이것은 새롭게 배워야 하는 분야이다. 매일 저녁 자료를 찾아야 하고 주류뉴스를 많이 보고 또 뉴스단서를 찾아야 한다. 게다가 다언어 뉴스를 만든 후 협조하는 일이 많아졌고 본사와 교류하고 밴쿠버 등 각 지역 기자와 교류해야 한다. 회의도 많아져 매일 시간이 부족한 느낌이었다. 나는 혼자서 법공부를 할 때 집중이 안 되고 쉽게 다른 일을 떠올리게 된다. 그래서 팀의 노 수련생이 주도하는 단체 법공부에 매일 참여하게 되었고 깊이 법공부를 할 수 있는 환경이 만들어져 매우 감사하다.
뉴스팀 수련생은 함께 법공부하고 발정념을 한다. 나는 우리들의 응집력이 증가하고 거리감이 사라지는 것을 느꼈고 협조는 갈수록 잘 되고 있었다. 바로 이런 협조로 인해 인력이 극히 제한된 뉴스팀은 3개월 후 자연스럽게 영국, 프랑스, 중국어, 광동어 4개 어종의 뉴스를 방송하는 기적을 창조했다.
중국어 뉴스는 주요인사가 불평 없이 방송부의 책임을 담당했다. 자연스럽게 24시간 동안 프로그램을 방송하기 위해 매일 적게 잠을 자고 기타 다른 프로그램의 촬영과 편집, 자동차와 자료실을 정리하는 등의 일을 담당했다. 또 한분의 주요인사는 영문뉴스의 편집을 담당했다. 아침 6시에 방송국에 오면 연공과 법공부를 하고 종종 새벽1시가 되어서야 집에 돌아갔다. 기타 다언어 뉴스의 동료 두 명은 인력이 부족한 상황에서 매일 두 세트의 중국어뉴스와 한세트의 광동어 뉴스를 제작하는 것을 담당해야 했고 다른 팀에 중요한 뉴스가 있으면 낮에 또 나가 취재해야 했다. 70여세 수련생은 자발적으로 저녁에 3개 어종의 녹음을 방송하는 업무를 담당했고, 광동어 더빙팀 수련생은 퇴근 후 즉시 더빙하고 곧바로 희망지성 프로그램을 제작해야 했는데, 많은 사람은 과중한 업무량를 담당하지만 원망도 후회도 없었다.
사람들과 협조하는 과정에서 나도 자신의 부족한 점을 발견했다. 왜냐하면 다언어 뉴스를 4개월 정도 운영했을 때 사람들로부터 여러 가지 언짢은 이야기가 나왔다. 또 일부 과정과 세부적인 부딪침, 마음에 들지 않는 부분 등이 생겨 서로 마음을 닦을 필요가 있었다. 하지만 이 시기는 사람들이 공동으로 극복해서 뉴스를 완성해야 하는데 가끔씩 사람들이 휴가를 내거나 아예 나오지 않는다. 이때 나는 마음이 평온하지 못하고 근심, 의심, 원망심이 다 나왔다. 휴가를 낸 수련생의 수련상태가 별로 좋지 않다고 의심하고 그들이 다른 수련생을 고려하지 않아 압력이 더 커진다고 원망하면서 장기간 이렇게 갈 때 사람들이 얼마나 견지할 수 있을지 걱정이 되었다. 하지만 매번 휴가 혹은 법회기간이면 팀은 모두 자발적으로 보충하고 예비인력이 방송하고 뉴스를 몇 개 더 완성한 뒤 스스로 남은 업무를 분담했다. 모두 한마디 원망도 없다. 나는 이를 보고 정말로 부끄러움을 느꼈다. 협조인은 마땅히 넓은 포용력이 있어야 하고 수련생을 배려해야 하며 휴가를 내는 이유에 관심을 가져야 한다. 그들의 구체적인 어려움을 이해하고 매 사람의 상황과 능력에 근거하여 업무를 분배해야 한다.
그 이후로, 다른 사람이 휴가를 내면 나는 먼저 자신에게 심태를 조정하라고 주의를 주며 마음이 움직이지 말라고 한다. 평온하게 상대방이 어떻게 말하는가를 듣고 수련생에게 끊임없이 정념으로 대하고 지지한다. 점차 이전의 느낌이 사라지고 수련생이 전력으로 협조한다는 것을 느꼈다.
사부님은 상유심생으로 “대법제자의 마음이 평온하지 못하면 당신 주위의 환경 역시 변화가 발생할 것이다. 당신이 두려워할 때, 당신은 중생들이 모두 불편함을 발견할 것이다. 당신이 심정적으로 맑을 때, 마음이 넓고 낙관적일 때, 당신은 주위환경 역시 같지 않은 것을 발견할 것이다. 진상을 알리는 중에서, 법을 실증하는 중에서 당신들이 하는 일에 어려움이 발생했을 때, 자신을 좀 조정하고 정념으로 문제를 사고한다면 상당히 효과가 있을 것이다.”(2009년 워싱턴 DC국제 법회설법)라고 말씀했다.
뉴스팀이 매일 그리고 주말마다 단체 법공부하고 교류하는 것을 매우 귀중하게 여기고 흉금을 털어놓고 교류하는 것은 자신을 정화하고 또 견고하여 파괴할 수 없는 정체를 이룰 수 있는 관건이다.
마지막으로 사부님의 한 단락의 법으로 함께 노력해 나가자. “희망이 없을 때일수록 희망은 바로 눈앞에 있을 것이다. 무료하게 느껴질수록 바로 당신의 위덕을 세우는 중일 것이다. 희망하건대 여러분이 정말로 협력을 잘하고 정념이 족하며 문제에 부딪히면 안으로 찾고 마치 막 수련에 들어왔을 때의 그런 열정이 있기를 바란다. 속인처럼 몇 분 동안의 냄비식 열정으로 그만두지 말아야 한다.”(무엇이 대법제자인가?)
사부님 감사합니다. 여러분 감사합니다.
(2012년 캐나다법회 발언고)
문장발표: 2012년 9월 4일
문장분류: 수련마당
원문위치: http://www.minghui.org/mh/articles/2012/9/4/262377.html