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파룬따파 수련을 통해 몸과 마음이 승화

글/ 오스트리아 대법제자 다좡(大壯)

[밍후이왕] 시간은 물과 같이 흘러갔다. 2012년 10월이 되면 나는 엉금엉금 기다시피 파룬따파(法輪大法)를 수련한 지 15년이 된다.

지난 15년의 수련 중에서 몸과 마음은 점차 법에 용해되었고 조용히 천지가 뒤집힐 정도의 큰 변화가 생겼다. 나는 이기적으로 명리를 위해 다시는 다투지 않게 됐고 애욕의 세계를 헤매지 않게 됐다. 이는 파룬따파 수련 중에서의 말로 표현할 수 없는 승화와 비약적인 제고를 통해 얻은 것이다.

고등학생 시절 나는 식탐이 많아 매우 뚱뚱했다. 당시 내 체중은 89kg에 달했다. 뚱뚱한 체격 때문에 늘 다른 사람의 비웃음의 대상이었지만 나는 아랑곳하지 않았을 뿐만 아니라 이런 상태를 좋다고 생각했고 바꿀 필요가 없다고 생각했다.

돌이켜보면 과거의 나는 먹는 것에 대해 강렬하게 집착했음을 보아낼 수 있었다. 특히 고기와 단 음식에 대한 집착과 애호는 최고였다. 이런 집착을 뻔히 보면서도 십몇 년 동안 소홀히 대했고 덮어 감추었다.

모든 일에는 원인이 있다. 나는 식탐 때문에 이후 수련 중에서 많은 고생을 해야 했다.

1997년 10월, 정식으로 수련을 시작한 후 뚱뚱했던 나는 반가부좌(單盤)만 해도 소업(消業) 반응 때문에 아파서 땀에 흠뻑 젖었다. 그러했기에 가부좌에 대한 두려움은 비할 바 없었고 급기야 좌선을 피하게 됐다. 그때 나는 식탐에 대한 집착심과 살을 빼야 한다는 생각을 하지 못했다.

2002년 오스트리아에 온 첫 해, 수련생과 함께 ‘파룬따파의 날(信息日)’ 행사를 위해 한 작은 마을에 갔다. 함께 발정념할 때 뚱뚱하고 다리가 특별히 굵었던 나는 몹시 힘들고 고통스럽게 결가부좌(雙盤)를 해야 했다. 그러나 결가부좌(雙盤)한 다리는 이내 미끄러져 내려왔다. 나는 오른손으로 입장(立掌)하고 발정념하는 한편 왼손으로 오른쪽 다리를 눌러 미끄러지지 않게 했다.

한 서양 수련생이 나의 자세를 바로 잡아 주며 “이 자세는 발정념의 정확한 자세가 아니다”라고 말했다. 수련생의 선의의 깨우침에도 나는 아주 난처해 했다. 수련생은 내가 깨닫도록 격려해 주었지만 오히려 나는 깨닫지 못했다.

당시 나의 몸무게는 대략 95kg 전후였다.

이후 발생한 한 가지 직접적인 일을 통해 나는 반드시 식탐하는 집착심을 제거하고 몸을 개변해야겠다는 생각을 하게 됐다.

어느 하루, 자전거를 타고 신문을 배부할 때 있었던 일이다. 중국 관원으로 보이는 한 무리의 사람들과 마주쳤다. 그들 중 키가 작고 뚱뚱한 중국 관원이 내게 “당신은 여기에서 뭘 하며 살죠?”라고 물었다. 나는 아르바이트를 한다고 대답했다. 그는 “그렇게 보이지 않네요.”라고 말했다. 나는 그가 뚱뚱한 내 모습을 비웃고 있다는 것을 알았다. 어디 아르바이트로 고생스럽게 돈 버는 노동자 같았겠는가? 그때 나는 심성을 잘 지키지 못했다. 듣기 싫은 소리에 “당신도 만만치 않다!”며 오히려 상대를 비난했다. 나중에 나는 현지에서 발행되는 중국잡지에 실린 사진을 통해 나와 대화했던 그 사람이 오스트리아 전 중공대사였다는 사실을 알게 됐다.

이 일을 계기로 나는 나의 체형을 개변해야겠다고 결심했다. 자기가 좋아하는 음식에 대한 탐욕스러운 마음을 제거하기로 결심한 것이다!

1. 법을 외우며 어려움을 돌파하다

2004년 두 달간 색욕에서 자신의 심성을 지키지 못해 크게 곤두박질했다. 그때 하늘은 온통 잿빛이었고 삶의 흥미를 잃은 나의 마음은 마치 죽은 사람과도 같았다.

나는 번민 속에서 오랜 기간 소침해졌다. 나는 스스로에게 ‘계속 수련할 수 있을까? 내가 파룬다파를 수련할 자격이 있을까?’ 자문했다. 당시 나는 식욕을 제어할 수 없었다. 특히 고기가 없으면 밥을 먹지 못할 정도로 육식에 대한 집착심이 강했다. 나는 고민 때문에 울적해졌을 때면 폭식으로 풀곤 했다. 그때 얼마나 뚱뚱했는지 잘 기억나지 않지만 가장 뚱뚱했을 때 대략 110kg이나 나갔다. 제 5장 공법의 결가부좌(雙盤)는커녕 반가부좌(單盤)만 해도 아주 힘들었고 고통스러웠다.

사부님께서는 모든 제자를 자비롭게 대하신다. 언제나 끊임없이 잘못을 바로잡을 기회를 주신다. 하루는 우연히 정견망(正見網)에서 한국의 예언서인 ‘격암유록(格庵遺錄)’의 중국어판을 보게 됐다. 파룬따파에 대한 예언을 봤을 때 나는 진감(震撼)이라 말할 수 있을 정도로 아주 큰 감동을 느꼈다. 나는 계속 소침하게 지낼 수는 없다고 생각하며 해결될 수 없을 것 같은 이 곤란한 국면이 돌파되기를 갈망했다.

나는 여러 차례 시험을 봤고 합격과 불합격 사이에서 배회하며 앞으로 나아가지 못하는 꿈을 꿨다. 나는 어떻게 하면 더욱 빨리 현재 상황을 타파할 수 있을지에 대해 절실히 사색했다. 이때 나는 명혜망에서 수련생이 발표한 법을 외우는 것에 대한 문장을 많이 봤다. 나에게는 아주 큰 감동이었다. 법을 외우는 것을 통해 자아를 타파할 수 있고, 법을 외우는 것은 더욱 정진할 수 있는 가장 좋은 방법이며 그때가 된 것이라 생각했다.

한번은 꿈에서 자신이 어느 시험장에서 시험 감독관이 된 것을 똑똑히 봤다. 지금 생각하면 이 모두는 사부님의 자비로우신 안배와 점화였다. 잘못을 뉘우친 후 용맹정진하려는 제자에게 잘못을 스스로 고칠 수 있는 귀중한 기회를 주신 것이다.

지금까지의 법 공부 방식은 통독이었다. 그러나 나는 자신이 통독할 때 늘 정신이 분산되는 것을 발견하면 반드시 멈춘 후 그 구절을 다시 읽었다. 2005년 11월부터 나는 법 공부 방식을 ‘전법륜’의 한 문장을 외우는 것으로 바꿨다.(문장의 길이에 따라 보통 약 2, 3개 문장을 외웠다.)

2009년 초, 나는 ‘전법륜’을 약 13번 외웠다. 2009년 4월부터 나는 ‘전법륜’을 한 단락씩 외우기 시작했다. 나는 스스로에게 만약 한글자라도 틀리게 외우거나 빠뜨린다면 그 구절을 반드시 다시 외우도록 요구했다. 이런 법 공부 방식은 수련인의 굳센 수련 의지에 대한 고험이자 마련(魔煉)이다.

나는 법을 외우는 것이 진정으로 너무 힘들어 무수하게 포기하려 했다. 몇 번이나 법을 외우는 것을 포기했었는지도 모른다. 그러나 매번 포기한 후에 마음이 편치 않았고 동시에 용맹정진하려는 갈망 또한 있었다. 그러므로 매번 포기한 후 얼마 되지 않아 또 외우기를 견지했다. 2010년 8월까지 1년 4개월 동안 나는 ‘전법륜’을 한 단락씩 모두 외웠다.

법을 외우는 것에 진척을 보게 되자 점차적으로 식탐하는 집착심을 철저히 제거하고 반드시 형체를 개변할 때가 됐다는 인식이 생겼다. 나의 뚱뚱한 체형이 내 수련의 장애물이자 나의 수련과 법 실증을 방해하고 있고, 다른 방법이 없다고 생각한 나는 반드시 그것을 실천하기로 했다!

법을 외우기를 정진하며 자주 연공하자 나의 체중은 천천히 감소했고 차츰 음식에 대한 탐욕과 방임하는 마음을 제어할 수 있었다. 물론 이 기간에 여러 번 살이 빠지고 늘고를 반복하며 실패도 경험했다. 필경 몇십 년이나 양성된 집착심이었기에 제거하기 쉽지 않았다.

그 당시 나는 매일 자료를 메고 관광지로 가서 한 시간 반 정도의 시간을 할애하여 신문을 배포했다. 그 과정에서 걷는 동안에는 법을 외웠다. 이렇게 걸어서 자료를 배부하는 방법은 나의 신체를 개변하는데 아주 좋은 출발점이 됐다.

1년 동안 법을 외울 때는 조건이 허락되면 결가부좌(雙盤)를 하고 법을 외웠다. 이렇게 하면 사상을 더욱 집중할 수 있었으며 법을 외우는 효과도 더욱 좋았다. 물론 다리가 아플 때는 법을 외우는 것에 영향주지 않기 위해 다리를 푼 후 괜찮아지면 다시 결가부좌(雙盤)를 했다.

지금 나의 법 공부 방식은 여전히 법을 외우는 것이다. 다만 한 문장 단위로 외우지 않고 사부님께서 말씀하신 문장의 길이, 자신의 기억량에 따라 외운다. 마침표, 쉼표 몇 개를 한 단위로 법을 외운다.

2. 법을 외워 연공을 촉진하고 자신의 형체를 개변했다

수련 이후, 뚱뚱한 원인, 소업하는 요인은 나로 하여금 제 5장 공법의 결가부좌(雙盤)를 줄곧 오래도록 견지할 수 없게 했다.

연공장에서 정공(靜功)을 연마할 때, 서양 수련생이 안정된 자세로 결가부좌(雙盤) 하고 있는 것을 본 후, 나는 언제 저렇게 할 수 있을지를 생각했다. 나는 뚱뚱한 나의 다리가 미끄러져 내려오지 않게 하기 위해 가방 끈으로 다리를 묶었다. 처음에는 길고도 고통스러운 시간이었다.

제 5장의 공법을 연마하면 아주 신기한 일이 많았다. 설령 아주 추운 겨울에도 나는 몸에 열이 났고, 영하 7도에서도 손바닥과 이마에서 더운 김이 날 정도로 열이 났다. 물론 아주 많게는 고통으로 흘리는 땀이었다. 고통은 정말이지 뼈에 사무치듯 아팠다. 마치 죽었다 살아나는 것 같았다. 이렇게 1년 동안 아팠지만 나는 1년을 견지했다. 체형이 정상으로 회복됨에 따라 더는 가방끈으로 묶지 않아도 됐다. 지금 나는 2시간 정도의 오랜 시간 동안 결가부좌(雙盤)를 견지할 수 있게 됐다.

법 외우기와 연공에서 제고됨에 따라 나의 몸도 변화하기 시작했다. 이제 나는 기본적으로 음식에 대한 집착심을 제어할 수 있다. 친구와 가끔 외식하는 외에 근 몇 달간 자신이 밥을 짓고 전부 채식을 했다. 과거 나는 고기를 좋아해 고기가 없으면 기쁘지 않았지만, 이제는 채식을 완전히 받아들일 수 있게 됐다. 음식에 대한 욕망은 아주 작고도 작아졌고 더는 많은 열량을 필요로 하지 않게 됐다. 자연스럽게 음식을 통제하고 제어하는 가운데 알맞은 열량을 섭취할 수 있게 됐다.

과거 몸무게 110kg에서 이제는 69kg까지 대략 41kg의 체중을 감량했다!

살이 빠지자 가부좌도 더욱 수월해졌고 결가부좌(雙盤) 또한 더욱 쉽게 됐다. 지금은 끝날 무렵의 마지막 10분간 약간 불편할 뿐, 결가부좌(雙盤) 할 때의 고통이 명확히 없어진 것을 발견한다. 끝에 마비된 다리도 다 풀리게 되었는데, 그런 류의 통하는 감각은 정말로 아주 미묘했다!

매주 공원에서 단체 연공을 할 때, 나는 제 5장 공법 연마를 끝냈다고 해서 결가부좌(雙盤)를 풀지 않는다. 계속해서 15분 발정념을 끝낸 후에야 다리를 내려놓는다.

비록 지금 나는 가부좌할 때 마치 달걀 껍질 안에 앉아 있는 것과 같은 미묘(美妙)한 상태에 아직 도달하지는 못했지만, 끊임없이 법에서 정진하고 심성에서 제고한다면 결국 꼭 실현할 수 있으리라 생각한다.

3. 진상 신문을 배부하다

전에 나는 주로 인터넷을 이용해 대륙 민중에게 진상자료를 보냈다. 서로 진상을 주고받으며 삼퇴를 촉진했다.

수련생 샤오화(小花)는 금년 4월부터 독일 수련생에게 두 차례 중문 진상신문을 주문했다. 첫 번째는 1,600부를 주문했다. 두 달 사이, 나는 서양 수련생, 중국 수련생과 함께 비엔나에 가서 대륙 관광객에게 신문을 나누어 주며 삼퇴를 말해주었다.

두 번째 진상신문 1,500부는 7월에 도착했다. 이는 우리 연공장의 삼퇴를 위한 주요 진상자료가 됐다. 우리가 연공할 때 어떤 관광객은 스스로 진상자료를 꺼내어 열심히 봤으며, 어떤 중국 관광객은 자발적으로 자료를 요청하는가 하면 대법제자에게 진상을 들었고 어떤 사람은 흔쾌히 삼퇴했다.

15년째 맞이하는 나의 파룬따파 수련은 몸과 마음, 언행을 법 중에서 끊임없이 바로 잡고 원용하게 했다. 나 스스로도 이후의 수련 중에서 진정으로 시시각각, 일사일념, 일언일행이 모두 법 중에서 용해됐다.

미래의 길이 아무리 길다 해도 나는 정의를 위해 뒤돌아보지 않고 용감히 나아가며 안을 향해 찾고 심성을 제고해 정진실수(精進實修)할 것이다. 이로써 사존의 자비로우신 구도에 보답하겠다!

문장발표: 2012년 8월 25일
문장분류: 수련마당
원문위치: http://www.minghui.org/mh/articles/2012/8/25/261995.html