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해석하려는 마음과 안을 향해 찾음

글/ 오스트레일리아 쿤성 파룬궁수련생

[밍후이왕] 문제에 부딪치면 안으로 찾는 것은 사부님께서 우리 수련인에게 주신 하나의 법보이며 이는 문제와 모순에 대처하는 태도에 있어서 수련인과 속인이 가장 두드러지게 구별되는 점이다. 수련생은 모두 다 이 법리에 대해 알고 있고 또 명백하며 자신이 평상시 항상 안으로 찾을 수 있기를 바란다. 그러나 내가 발견하기로는 생활 중에서, 업무 중에서, 수련 중에서 자신은 흔히 진정으로 안을 향해 찾는 것을 해내지 못한다. 어떤 때는 내가 안으로 찾지만 찾지 못하며 심지어 무엇을 찾는지, 어떻게 찾는지도 모른다.

원인은 여러 가지이다. 그러나 개인 수련 과정에서 혹은 내가 처한 수련환경 중에서 ‘해석하려는 마음’은 우리 수련인이 안을 향해 찾고 안을 향해 수련하는 것을 엄중하게 가로막는 하나의 요소임을 나는 발견했다.

예를 들면 우리가 단체 법공부에 참가하고 단체로 교류하는 과정에서 때로 이런 현상을 보게 되는데 어떤 수련생이 다른 수련생에게 의견을 제기하고 권고하고 비평하거나 건의할 때 의견을 제기당한 사람은 잠시도 지체하지 않고 해석하려 한다. 뿐만 아니라 언제나 한 무더기 그럴듯한 이유를 찾아낼 수 있다. 예를 들면 쌍방 혹은 일방이 어투가 선하지 못하고 심지어 쟁론이 그치지 않는다.

이런 현상은 본인에게서 발생하기도 한다. 문제와 모순 혹은 불순한 마음과 여의치 않은 사건을 만났을 때 혹은 속인의 말을 듣거나 혹은 수련생의 부동한 의견이나 건의가 있을 때 나의 첫 반응은 안으로 찾는 것이 아니라 우선 머리를 굴려 이유를 찾아 자신을 변명한다. 이에 대하여 나는 이전에는 그렇다고 생각하지는 못하고 곤혹스러워했으며 더욱이 ‘나는 왜 항상 안으로 찾는 것을 해낼 수 없을까? 나는 왜 늘 심성을 지키지 못하는가?’하고 고뇌했었다.

얼마 전 1999년 사부님의 ‘오스트레일리아법회설법’을 다시 공부할 때 그중의 두 마디가 나를 깊이 감동시켰다. “자비로 모든 사람을 대해야 하며 어떤(任何) 문제에 부딪히면 모두 자신한테서 원인을 찾아야 한다.”라고 말씀하신 구절에서 이 “어떤(任何) 문제에 부딪히면 모두 자신한테서 원인을 찾아야 한다.” 중의 “어떤”이라는 두 글자는 문제를 만나면 안으로 찾지 않고 융통을 부릴 여지를 남겨주지 않고 나로 하여금 무엇이 무조건 안으로 찾는 것인지 알게 해주는 것 같았는데 안으로 찾는다는 것은 바로 문제에 부딪혔을 때 맨 처음에, 첫 번째 반응과 첫 번째 염두가 바로 오로지 자신을 보는 것이고, 오로지 자신을 보는 것이며, 오로지 자신을 보는 것이라는 것을 깨닫게 해주는 것 같았다. 즉, 안으로 찾는다는 것은 자신의 마음, 자신의 사상, 자신의 염두를 보는 것이며 또한 그것들을 법으로 가늠하는 것이라는 것을 알게 해주는 것 같았다.

이렇게 우리가 이유를 찾아 자신의 언행, 혹은 동기를 해석하고 변명하려는 생각이 없을 때 우리는 쉽게 조용해질 수 있고 쉽게 객관적이고 이지적으로 자신의 언행을 자세히 들여다 볼 수 있으며 또 법으로 우리의 언행을 가늠해 볼 수 있어서 이러한 언행이 있게끔 한 그 마음을 찾을 수 있게 된다.

자신이 부딪힌 문제를 안으로 찾지 못하게 하는 요소를 내가 법으로 대조하고 가늠하여 볼 때 나는 ‘해석(변명, 설명)하는 마음’이 작용을 하고 있음을 발견했다. 이 해석하려는 마음의 배후에는 또 많은 은폐된 두려운 마음이 있는데 이런 두려운 마음은 내가 이렇게 해석하고 저렇게 해석하도록 부추긴다. 그러면 나는 무엇을 두려워하여 반드시 변명하려 하는가? 더 찾아보니 자신이 책임지는 것을 두려워하고 다른 사람이 오해할까봐 두려워하며, 다른 사람이 자신의 집착심을 볼까봐 두려워하고, 다른 사람이 자신이 수련을 잘하지 못한 것을 볼까봐 두려워하며 자존심, 허영심, 과시심, 환희심이 상처받을까봐 두려워한다는 것을 발견하게 되었다. 원래 자신은 이런 사람 마음을 보호하고 이런 나쁜 마음을 보호하려고 기를 쓰고 이유를 찾아 변명한 것이었다. 사실 꿰뚫어 보고 까놓고 말한다면 이것은 사심(私心)이고 자신을 위한 마음이며 다른 사람에게 상처를 줄지언정 자신은 상처를 받지 않으려는 마음으로서 가장 깊이 은폐된 가장 나쁜 마음인 것이다. 이로써 나는 마침내 알게 되었는데 자신의 다년간의 수련과정에서 왜 늘 계속하여 각 방면의 교란과 형형색색의 마난이 있으며 왜 나의 심성은 내내 명백한 제고가 없는지를 알게 되었다. 그것은 사심이 줄곧 나의 내심 깊은 곳에 은폐되어 있을 뿐만 아니라 줄곧 다른 마음을 사주하고 선동하며 재촉하고 있었기 때문인데 예를 들면 과시심, 쟁투심, 환희심, 질투심 등등과 같은 것이다. 이런 깊이 숨겨진 사심이 ‘해석하려는 마음’을 부추겨 내가 안으로 찾고 안으로 수련하는 마음을 저애한 것이다.

요즘 내가 7.20 반박해 집회 중 영문으로 강연을 하였는데 서양인을 포함한 몇몇 수련생도 내가 잘한다고 칭찬했다. 내가 자아 감각이 좋을 때 한 수련생이 정중하게 나에게 지적했다. 당신이 강연하는 말투가 평온하지 않고 때로 너무 격동된다. 당신은 마땅히 속인에게 대법제자의 상화한 면을 보여줘야 한다. 그때 처음 반응은 바로 그에게 해석하려는 마음이었다. 그에게 내가 영문으로 지방의 서양인에게 강연하고 그들이 반박해를 지지하라는 것을 호소하려면 마땅히 속인의 선동하는 어투에 부합되어야 한다고 했다. 그 수련생은 심성이 높아 내가 해석할 때 그는 쟁론하지 않고 조용히 듣고 있었다. 갑자기 사부님의 법이 생각났는데 “어떤 문제에 부딪히면 모두 자신한테서 원인을 찾아야 한다.”(오스트레일리아법회설법)는 말씀이었다. 사부님의 말씀이 나를 생각해 보게 했는데 기왕 수련생이 이런 의견을 제출했으면 반드시 내가 주의해야 할 것이 있고 내가 개선할 것이 있는 것이다. 그렇지 않으면 수련생이 절대로 의견을 제기하는 일이 발생하지 않았을 것이다. 기왕 이런 문제가 나타났다면 꼭 내가 문제가 있는 것이다. 그러면 마땅히 문제를 찾아야 하지 그것을 밖으로 떠밀어내면 안 된다. 다만 진정으로 안을 향해 찾아야만 찾을 수 있다.

안으로 찾은 결과, 대법제자로서 만약 심성표준에 부합되는 상화한 말투로 자비심을 가지고 말을 하면 조용히 듣는 것 같아도 실제상 더욱 강대한 대법의 힘이 있으며 더욱 사람 마음을 감동시키고 사악을 제거하며 양지를 불러일으키고 세인을 구도하는 작용을 한다. 그리하여 오후 두 번째 강연할 때 나는 자연히 수련생이 제기한 의견에 따라 심태를 조종했다. 그런 후 마음은 그 수련생에 대한 감동으로 충만하게 되었다. 그가 남의 미움을 살지도 모르는데 각오하고 나에게 직언으로 알려준 것에 감동되었다. 그의 법에 대한 책임에 감동되었고 수련생에 대한 책임과 선한 마음에 감동되었다. 동시에 자신도 이 사건으로부터 해석하려는 마음을 돌파하게 되었다. 배후의 허영심, 쟁투심에 의해 가로막히지 않고 안으로 자신의 부족한 점을 찾게 되어 기쁨을 느꼈다.

이 심득체험을 쓰던 날 아침, 수련하지 않는, 평소 언제나 나의 ‘흠’을 찾아 질책하고 비평하며 나를 교란하는 아내가 문 앞에 나와서는 갑자기 내가 생각하지도 못했던 말을 했는데 “당신 오늘 비교적 상화해 보여요. 좀 실속 있게 수련하는 모양이 보여.”라고 했다. 나는 어리둥절했다. 그리고 의식했는데 요즘 그녀가 나에게 불만을 표시할 때 나는 더는 해석하지 않고 다만 안으로 찾고 오직 자신의 원인만을 찾았던 것이다.

이상은 개인의 체험이며 부당한 점이 있을 수 있는데 수련생이 시정해 주기 바란다.

문장발표: 2012년 7월 25일
문장분류: 수련마당
원문위치: http://www.minghui.org/mh/articles/2012/7/25/260707.html