简体 | 正體 | 대법서적

사부님의 진수제자가 되자

[밍후이왕] 나는 1996년에 법을 얻었으며 갖은 풍파를 거쳐 오늘까지 걸어왔다.

법을 얻은 시작부터 『전법륜』을 본 후, 생명의 의의를 알았으며 이 대법은 너무 좋다고 느꼈다. 그날로부터 시작하여 진수제자가 되겠다고 마음속으로 결심했다. 이 일념이 있기에 이후 무슨 일을 하든지 모두 법으로 가늠하여 엄격하게 자기를 요구했다. 그러자 사부님께서는 여러 차례 신체를 정화하여 주셨는데 여러 해의 질병이 저도 모르게 없어졌고 지금껏 약 한 알 먹지 않았다. 어느 날 저녁 가게에서 돌아왔는데 갑자기 머리가 매우 심하게 아프고 속이 메스꺼워 어찌할 바를 몰랐다. 나 이것은 어찌된 일이며 어찌 이럴 수 있는 가고 속으로 생각했다. 마땅히 법공부를 많이 해야 하고 집착심을 많이 제거해야하며 마땅히 법공부 소조에 가서 법공부하고 연공해야한다고 갑자기 깨달았다. 내가 이렇게 생각할 때 열기가 머리꼭대기로부터 전신에 흘렀는데 사부님이 말씀하신 “관정(灌頂)”처럼 머리 아픈 것이 즉시 소실되었으며 전신이 편안함을 느꼈다. 나는 재빨리 자고 있는 남편(보통사람)을 깨워 “머리가 아프지 않아요. 아프지 않아요. 나았어요.”하고 말했다. 나는 대법의 위력을 심심히 체험했다. 이튿날 아침 연공장에 나가서 수련생에게 이 일을 말했고 자신의 감수와 생각을 그들과 교류하였으며 마땅히 법 공부 소조를 결성해야 한다고 깨달았다. 이전에 우리는 연공만 하고 단체 법공부는 아주 적게(자신이 집에서 공부하다)했는데 합당한 곳을 선정하여 이렇게 법공부 소조를 결성했다.

사악한 세력이 날뛰는 중에서 대법을 실증하다

1999년 7.20 텔레비전에서 대법을 모함하고 사부님을 비방하는 거짓말을 방송하던 당시 나의 마음은 부스러져 정말 하늘이 무너지는 것 같았으며 가족들도 무서워했고 단체 법공부와 연공 환경이 없게 되었다. 나와 수련생은 교류 끝에 마땅히 떨치고 나가서 사부님과 법을 위해 도리에 맞게 되돌려놔야 한다고 생각했다. 그리하여 우리 여섯 사람은 2000년 3월 베이징에 가 상방(청원)하였는데 결국 천안문에 간 후 붙잡혔고 지역 파출소로 납치되었다. 매 사람마다 벌금 5천 위안을 강탈당했고 15일 박해 당했는데 박해수단은 잔인하였다. 사당악도들은 각종흉기(족쇄 채우기, 살가죽 벗기기, 밤 새워 꿇어앉히기)를 사용하여 우리를 학대했다. 집에 돌아왔지만 가족들은 이해하지 못했고 친척과 친우도 박해를 받을까봐 두려워 나로 하여금 대법을 포기하게 했으며 오빠(속인)는 화가 나서 나를 때리며 말하기를 “모친이 세상을 뜨실 때도 눈물을 흘리지 않았다. 너는 아직 젊고, 공산당은 이제까지 매번 운동 중에서 살인을 해도 눈도 깜짝하지 않았는데 너를 때려죽이면 시체도 찾지 못하지 않겠니?”라고 했다. 또 아들은 자학하며 나를 위협하고 핍박하여 수련을 포기하게 했다. 당시 마음속에 “괜찮다”라고 하는 한 가지 염두가 있었는데, 마음속으로 계속하여 ‘홍음2 -진성이 보이노라’를 외웠다.

“대법을 확고히 수련하며 마음 움직이지 않나니

층차를 제고함이 근본이로다

고험(考驗) 앞에서 진성이 보이나니

공성원만하면 불도신(佛道神)이로다”

그 이후 지역 파출소는 거의 날마다 와서 교란했다. 나는 다시 베이징에 가서 진상을 알렸기에 노동교양 1년을 당했고 이 일 년 시간에 사악은 더욱더 제멋대로 굴고 전혀 거리낌 없이 박해했으며 노동교양소에서 주먹으로 치고 발로 차는 것은 예사로운 일이 되었고 나는 핍박으로 감옥 토성을 에돌며 밤낮없이 기어야 했다. 기억하건대, 어느 한번은 우리가 소위 “전화轉化”를 거절하고 연공을 견지했다는 이유로 큰 눈이 내리는 날 몇 명의 악독한 경찰은 솜외투와 목이 긴 가죽구두를 신고 윤번으로 보초를 서면서 우리를 핍박해 천 미터 둘레의 토성을 기어 돌게 했다. 몇 시간 지나자 우리들의 손은 얼어붙었고 다리와 발은 마비되어 앞으로 한 발짝 기어갈 때마다 찰싹찰싹 소리가 났고 바지는 닳아 떨어지고 무릎까지 살가죽이 벗겨져 빙설에 피 흔적을 남겼다. 어느 한번 내가 사악의 거짓된 텔레비전을 보지 않는다고 그들 몇몇 악독한 경찰은 돌아가며 나를 때렸고 연속 두 시간 넘게 때렸다. 그들은 나를 때려죽일 수 없는 “단단한 기둥”이라고 하며 그 중 한 사람은 “전기 몽둥이를 가져오라”고 말했고 당시 나는 말할 힘도 없었지만 마음속으로 생각했다: “전기 몽둥이는 손전등에 불과하니 괜찮다”(그때는 무엇이 정념인지를 몰랐다), 이 일념이 나오자 법륜(法輪)이 머리위에서 계속 회전하는 감각이 있었고 회전하는 소리도 똑똑히 들렸다.

일 년 후 집으로 돌아왔는데 가족과 친척친우는 모두 이해할 수 없어 하며 수련생들과 만나지 못하게 했다. 나는 각종 멸시를 참으며 마음속으로 묵묵히 진선인(眞善忍) 세 글자로 자신을 엄격히 요구하며 진심으로 가족을 감화 시키고, 열정과 수련인의 넓은 흉금으로 친척과 친우를 감화시켜 가정환경이 좀 홀가분해지자 두려워서 수련하지 않는 이전의 수련생에게 접근하여 그들에게 진상을 알리고 사악을 폭로하며 대법의 아름다움을 알렸다. 그들로 하여금 진상을 알게 하고 대법을 인정하게 했으며 다시 수련으로 되돌아오게 했다.

고부사이의 연원

며느리가 임신하자 여러 차례 전화로 나더러 베이징에 와서 그들에게 밥을 해달라고 했다. 며느리의 임신 반응이 너무 심하고 또 남방 사람이니 먹는 것이 북방인과 입맛이 달라 나는 되도록 그의 입맛에 맞게 밥과 채를 했으며 하루 4~5끼니를 했고 어떤 때 아들에게 두 시간에 한 끼니씩 하자고 알렸다. 우리가 온지 이틀도 되기 전 그녀는 온종일 어두운 표정이었다. 어느 날 그녀가 손칼국수를 먹고자 해서 요리했으나 두 입만 먹고는 먹지 않았고 맛이 없다고 했다. 나는 그래도 웃음 띤 얼굴로 그녀가 즐겨먹는 것을 다시 요리하자고 했다. 이런 일은 늘 발생해 계속 충직하던 남편이 이 정경을 보고 참을 수 없어 하며 내게 말했다: “이것이 어디 며느리를 시중드는 것인가, 그야말로 거꾸로 된 효도지.”라고.

어느덧 석 달이 지나갔다. 나의 아들은 효자인데 며느리가 여러 가지로 트집을 잡고 온종일 음침한 얼굴을 하고는 나와 말 한 마디도 하지 않는 것을 보고 난처해했다. 30여세가 되어서야 임신한 탓으로 타일러도 듣지 않자 아들(속인)이 내게 말하기를 “어머니 그녀와 똑같이 상대하지 말아요, 그녀의 어머니가 올 때 어머니 보세요, 내가 어떻게 그녀를 괴롭히는가를.”라고 했다. 나는 아들의 말을 듣고 말했다: “그렇게 하면 안 된다, 너의 어머니는 수련자인데 우리가 어찌 되받아칠 수 있겠느냐.”라고. 아들을 설듣한 후 나는 혼자 거기에 앉아 어찌하여 하루 대여섯 번의 식사도 만족하지 않는가? 내가 어디에 아직도 잘하지 못한 점이 있는가? 마음이 복잡하여 어떤 때는 마음도 평형을 이루지 못해 괴로워했다. 점심 휴식시간 때 사부님께서 나의 기억을 펼쳐 보이시며 나와 며느리와의 전세의 인연을 보게 하셨는데 그녀는 전생에 나의 보모였다. 이 한 장면을 보고 나는 꿈에서 놀라 깨어나 무엇이든 모두 알게 되었다. 마음속으로 사부님의 고심한 안배에 감사드렸다.

나는 수련인의 표준대로 자신이 마땅히 해야 할 것을 잘하여 자비로 그녀를 감화하고 박대한 마음으로 그녀를 용해하며 원망도 없고 후회도 없이 수련자의 선한 마음으로 그녀를 일깨워 주었다.

수련의 길에 어떠한 저애와 장애도 물론하고 나는 모두 사존님의 말씀을 기억하고 법을 스승으로 삼아 사부님이 안배한 길을 걸으며 견결히 끝까지 수련을 견지하여 사부님의 진수제자가 되겠다.

여기까지 쓰고 나니 말이 좀 길어졌다. 처음 원고를 쓰는 것이니 타당하지 못한 점이 있으면 수련생 여러 분의 자비로운 지적이 있기를 바랍니다. 사부님 감사합니다. 수련생 여러분의 고무격려에 감사드립니다. 끝으로 ‘홍음 – 인과因果’를 수련생 여러분과 함께 나누고자 합니다.

수련의 길에 고생 있음이 아니라

생생세세 업력이 가로막고 있는 것이로다

소업하고 心性(씬씽)을 수련하고자 결심하나니

영원히 사람의 몸을 얻음이 부처이노라.

문장발표: 2012년 7월 21일
문장분류: 수련마당
문장위치: http://www.minghui.org/mh/articles/2012/7/21/260496.html