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중생에게 감동을 주는 것이지 세인의 연민을 사려는 게 아니다

글/ 대륙 대법제자

[밍후이왕] 사람에게 혼이 있듯이 글에도 혼이 있어야 한다. 글에 만약 사상이 담겨있지 않다면 독자의 영혼 깊은 곳을 움직이기 어렵다. 수련생들이 박해를 폭로하는 진상 글을 쓸 때 반드시 글에 영혼을 담는 일을 잊지 말아야 한다. 즉 대법제자는 중생을 도탄 속에서 구해내는 고덕의사(高德義士)이지 곤궁에 빠져 세상 사람의 연민을 구걸하는 거지가 아니다. 우리는 늘 이런 진상 글을 보게 된다. “모년 모월 모 지역의 대법제자 누구누구가 사악에게 박해(붙잡히거나 가택수색당하는 등) 당했고, 박해당한 후 이 대법제자 가족의 생활은 어떻게 어려웠고 혹은 고령에 처한 부모를 누가 돌볼 사람이 없으며 혹은 어린 자녀들을 돌볼 사람이 없다.

악인은 대법제자에 대해 경제적으로, 육체적으로, 정신적으로 박해함에 있어서 모든 것을 극한으로 사용했다. 대법제자는 그야말로 하늘로 오를 길도 땅 밑으로 들어갈 길도 없게 됐다. 세상 사람들의 동정을 바라며 구원의 손길을 주기 바란다.” 속인이 이런 글을 보면 어떻게 생각할 것인가? 만일 속인이 글에서의 인물에 대해 동정심이 일어났다고 하자. 그럼 무엇으로 인해 속인의 동정심이 일어났겠는가? 그리고 글은 속인에게 어떤 영향을 줄 것인가? 아마 속인은 이렇게 생각할 것이다. ‘대법제자는 너무나 가련하다.

그러나 파룬궁 수련은 너무 두렵다. 나는 절대 파룬궁을 수련하지 말아야겠다. 파룬궁을 연마하기만 하면 자신의 인생길을 접는 것과 같다. 만일 도우려 해도 가장 좋기는 몰래 하는 것이며 절대 다른 사람에게 나와 파룬궁이 어떤 연관이 있다고 알게 해서는 안 된다. 악한 경찰은 너무나 사악하다.

그러나 우리는 그들을 건드리지 않는 게 가장 좋다.’ 만일 속인이 이런 생각을 갖고 있다면 우리가 그에게 삼퇴를 이야기할 때 그의 마음속에는 일찍부터 하나의 장애가 있게 되는 게 아니겠는가? 만약 우리가 글을 쓸 때 글에 영혼을 불어넣고 우리를 도덕의 높은 지대에 올려놓는다면 중생은 곧 글을 읽고 나서 감동의 마음이 일게 된다. ‘와! 세상 기풍일 날마다 떨어지고 도덕이 미끄럼질치고 있고 나는 이미 생사존망의 변두리에 있구나. 비록 대법제자가 박해를 당해도 그들은 도덕이 미끄럼질치는 것을 가로막기 위해 나와 같이 도탄 속에 빠진 중생을 구도하기 위해 비로소 이런 박해를 당하고 있구나.

그들의 박해는 ‘나’와 관련이 있다. 그들은 도덕의 높은 지대에 서서 이렇듯 중생이 흠모하게 하는데 그들의 박해는 이처럼 사람의 동정을 불러일으키는구나. 그들의 이야기는 사람을 감동시킨다.’ 이렇게 되면 수련생을 도와 사악과 멀리하게 하는 것은 그 자신을 돕는 것이며 그는 수련생들에게 도움을 준 것을 영광으로 느낄 것이다. 만일 스스로 이렇게 영광을 지닌 생명이라고 느낀다면 위험이 있어도 두렵지 않을 것이다. 만일 속인이 이런 글을 보고, 이런 생각이 들었다면 우리가 그에게 진상을 알려 삼퇴를 권할 때 그들은 어떻게 하겠는가. 기다렸다는 듯 당신들을 찾을 길이 없었다고 할 것이다.

그러므로 우리가 글을 쓸 때 박해부분에서 목적은 사악한 사람의 사악을 두드러지게 함이지 박해를 말해 세상 사람들의 연민을 사려는 게 아니다. 거지처럼 구석에 쭈그리고 앉아 오가는 행인들에게 손을 내밀어 “먹을 것 좀 주세요. 내가 얼마나 불쌍합니까!” 이렇게 해서는 안 된다. 우리는 조사정법하고 있으며 중생을 구도하기 위해 왔다. 비록 우리가 박해를 당해도 우리는 동시에 다른 사람의 존경을 받는 것이다. 개인의 깨달음이니 부당한 곳은 자비롭게 지적하시기 바란다. 허스.

문장발표: 2012년 6월 21일
문장분류: 수련마당>정법수련>이성인식
원문위치: http://www.minghui.org/mh/articles/2012/6/21/259170.html