글/ 대륙 대법제자
[밍후이왕] 내 주변에 있는 많은 대법제자는 10여 년간 단련되면서 더욱 견정하고 이성적이며 지혜롭고 비범한 의지력과 능력을 갖추고 있다. 각각 모두 능력 있는 엘리트로서 정말이지 너무 대단하다.
최근 두 수련생과 서로의 체득을 담론했는데, 세인에게 진상을 알릴 때 어려운 것에 관한 이야기였다. 그렇게 이야기하는 동안 힘을 얻어 이 글을 쓰기로 했는데, 진상을 좀 더 이야기하면서 세인과 소통한 체험을 말하고자 한다.
사람들과 교류할 때 어떻게 해야 하는지 지도하는 일반적인 방법은 아주 많다. 하지만 우리 수련자는 그들과 본질이 다르므로 속인의 그런 방법은 작은 재간에 불과하다는 것을 명확하게 알고 있다. 그러므로 우리 대법제자는 진상을 말할 때 수련자의 자비로운 상태를 나타내어 중생을 구도할 수 있도록 해야 할 뿐만 아니라 수련자 자체의 생명경지도 진일보 승화해야 한다.
사람과 접촉할 때는 우선 상대방을 존중해야 하는데 이러한 존중은 표면적인 예의가 아니라 내심에서 우러나오는 자비여야 한다. 생각해 보라. 우리가 자신에게 집착할 때 상대방이 어찌 존중받았다고 느낄 수 있겠는가? 우리가 명, 리, 정에 집착하면 잘난 체하는 사람 마음을 내려놓을 수 없는 바, 그런 상태에서 다른 사람들이 우리에게 어떻게 편안하게 압력을 느끼지 않을 수 있겠는가.
사부님께서는 “우리 수련하는 사람은 자비심이 있어야 하지 않는가? 우리가 자비심이 나올 때, 아마 중생이 모두 고생스러워 보이고, 누구를 보아도 모두 고생스러워 보이는, 이 문제가 나타날 것이다.” (전법륜) 라고 말씀하셨다.
나는 사람과 대화를 하면서 그들의 고달픔을 보아낼 수 있다. 예를 들어 학생은 싫어하는 공부를 해야 하고 시험도 치러야 하고, 젊은이는 직장을 구해야 하는 걱정, 중년은 자녀의 대학시험이나 취직, 또는 늙은 부모를 모셔야 하는 걱정, 관료들은 앞날을 걱정하고, 부자는 질병과 죽음을 두려워하고, 여자는 남자의 바람을, 부모는 자녀의 불효를 두려워하는 등등이다. 사람마다 제각기 남들에게 업신여김을 받을까 봐 행복한 모습을 보이는 것이지, 사실 사람이라면 누구나 다 고달픈 것이 있다.
그렇다고 당신이 먼저 그에게 “얼마나 고달프세요?”라고 하면 안 된다. 그러면 당신은 상대방을 존중하지 않는 것으로 상대에게 눈총을 받을 수 있다.
당신은 다만 다른 사람들처럼 일반적인 사회문제에 대해 이야기 하면 되는바, 이는 자비로써 세인의 체면을 지켜주기 위한 것이다.
만약 그들이 당신에게 사회문제이든 자신의 문제이든 어려움을 이야기하면 당신에게 우호적이며 신임한다는 표시이므로 ‘말이 통한다.’라는 게 진상을 말할 수 있는 기초이다.
내가 말하는 존중은 중생에게 마음에서 우러나오는 소중함에서도 체현된다. 사실 이 시기에 사람이 될 수 있다는 것은 사람마다 모두 간단하지 않은 것이다. 얼마나 많은 윤회를 거치고 얼마나 많은 고생을 겪고서야 이번 생에 사람이 될 수 있었겠는가. 그것 역시 위덕이 있어야 되는바 응당 구도 받아야 한다. 나는 어떤 수련생들이 자신이 대단하다고 여기는 것을 보았다. 이는 사람 마음으로 표현되어 나오는 것은 세인식의 교만함이지 수련생에게 응당 있어야 할 자비로운 상태가 아니었다. 당신이 수련하여 제거한 것은 세인이 보지 못하지만, 당신이 아직 수련하지 못한 부분은 세인에게 일목요연하다. 세인은 당신의 소양이 부족하다고 여겨 당신의 말을 중요시하지 않는데 설사 당신이 말한 것이 진리더라도 말이다.
다른 사람에 대한 존중은 감상과 칭찬에서도 체현된다. 지금의 세인은 모두 고층공간에서 온 생명으로서 그들 모두 천국 세계의 특점을 가지고 있어서 감상할 가치가 있고 칭찬할 가치도 있다. 어떤 사람은 살림을 잘하고, 어떤 사람은 옷을 잘 입으며, 어떤 사람은 꽃을 잘 가꾸는 등등 말이다. 솜씨가 좋은 사람이 많은데 우리가 사람에게 한 칭찬은 세인이 정과 아첨에서 비롯된 칭찬과는 다르다. 우리는 더욱 높은 경지에서 보는 것으로 목적은 타인을 위한 것이다. 하지만 세인은 흔히 개인적으로 자신에게 호감을 느끼게 하고 인간관계를 잘하기 위해서 칭찬하고 아첨한다. 중생이 자신의 경지에서 만족해하는 것에 대해서는 우리가 이해해야 한다.
한번은 기연으로 어느 지식인에게 진상을 알렸더니 그가 아주 잘 받아들여 우리는 많은 이야기를 나누었다. 중국 사람은 존중받지 못한다는 이야기를 했을 때 그는 이에 대해서는 별 느낌이 없다고 했다. 그는 졸업한 뒤 순조롭게 풀려 집까지 샀다고 했다. 집값이 이렇듯 비싸니 확실히 자랑스러울 수 있다. 그래서 나는 그의 말을 받아서 그것은 당신의 복이라고 얘기했다. 그랬더니 그는 허허허 연이어 웃으면서 나와 거리를 좁혔다.
만약 그에게 당신에게는 비록 집이 있지만, 많은 중국인이 병원에 갈 수 없고, 집도 살 수도 없는 등, 어떠어떠하다고 논쟁을 하면 그의 흥을 깨뜨리는 게 아닌가. 그와 당신의 거리는 멀어질 것이다. 왜냐하면, 당신은 그의 만족감과 그의 인생의 자랑스러움을 함께 나눌 도량이 없기 때문이다. 사실 그의 인생체험이 그가 진상을 인식하는 데 전혀 방해되지 않으며, 그가 중공의 죄악을 인식하는 데도 전혀 방해되지 않을 것이다.
다른 사람에게 강제로 하거나 주입해서는 안 된다. 오로지 양심과 선량함이 스스로 일어나도록 해야 그를 구하는 것이지, 생명을 새롭게 만드는 것이 아니다. 어떤 수련자는, 나 역시 과거에 그렇게 했다. 내가 아는 것이면 알고 있는 대로 세인에게 주입하며 다른 사람의 반응은 고려하지 않았는데, 그처럼 간단한 방식으로 해서는 안 된다.
그들의 마음의 소리를 들어야만 그 마음의 매듭을 풀어 줄 수 있다. 그들에게 강요하면 사람들은 당신을 멀리하려 할 뿐만 아니라 수련자에 대해 부면적인 영향을 미칠 것이다. 왜 나에게 강요하는가. 뿌리를 따지고 보면 스스로 선량해지도록 하는 마음을 수련한 게 아직 부족하기 때문이다.
사람이 무엇을 요구하는지는 본인이 말해야 하는 것으로 이는 생명의 자유다. 그러므로 강제는 사람 마음을 개변할 수 없는바 이는 우주의 이치다. 우리는 수련할 때 곧 우주의 특성에 동화되어야만 비로소 승화되어 올라갈 수 있고 비로소 사람을 구도할 수 있다.
우리는 사람을 평등하게 대해야 한다. 우리는 사람들에게 ‘9평’ 등 진상자료를 줄 수 있으며, 상대방 또한 우리에게 그들이 보았을 때 신기하게 여기는 것을 줄 수 있다. 한번은 어느 친구가 나에게 책 한 권을 몰래 빌려주었는데 홍콩에서 가지고 온 것이라고 하였다. 그 자리에서 책장을 넘겨보니 당장 좋지 않은 것임을 알았지만, 나는 당장 뭐라고 이야기하지 않고 그냥 가지고 왔다. 그에게 돌려줄 때도 그 자리에서 비평하지 않았다. 한번은 자연스럽게 그 책에 관해 이야기하게 되었을 때 나는 평온하게 그 자료가 ××사이트에서 발췌한 것이라고 설명하면서, 그 사이트에 대해 알려 주었더니 그도 공감했다.
정념이 강해야 비로소 사람을 구도할 수 있다. 한번은 관원인 친구가 우리 집에 왔는데 당시 나의 정념은 아주 강했다. 그래서 그에게 왕리쥔 사건부터 시작해서 아주 자연스럽게 진상을 얘기해 주었고, 말이 나온 김에 자연스럽게 둥타이왕을 열어서 그에게 보여주었다. 당시 나의 염두는 아주 바르고 완전히 구세력의 박해를 염두에 두지 않았는데, 남편은 그런 나를 저지하는 것조차 잊어버리고 말았다. 친구는 우리 집을 떠나면서 “오늘은 왜 이렇게 기쁜지 모르겠어요.”라고 말하였다. 그렇다. 평소 사람들 특히 공직자 사회에서 만난 사람들은 모두 서로 헐뜯고 싸우기에 진심으로 기쁜 일이 생기기 어렵다. 그의 생명의 다른 일면은 누군가 그를 구하러 왔음을 알기에 당연히 기뻐할 수밖에 없다.
또한, 우리는 사람에게 결론을 내리면 안 된다. 일부 사람들이 진상을 이해하지 못했을 때라도 우리는 그가 잠시 진상을 이해하지 못했다고 말하면 된다. 아니나 다를까 후에 많은 사람 모두 진상을 이해하였다. 장애를 타파한 후 중공에 대한 세인의 인식과 진상에 대한 인식은 아주 빨라 심지어 많은 면에서 우리보다 더욱 깊었다.
어떤 사람에게 탈당한 사람이 1천만이 되었을 때 탈당을 권했고, 3천만이 되었을 때도 말했으며, 8천만이 되었을 때도 말했지만, 그는 아무 말도 하지 않았다. 한번은 그에게 둥타이왕에 접속하는 방법을 알려 주면서 탈당 화면을 열게 되었다. 평온한 마음으로 그에게 이름을 지어 탈퇴하라고 하자 그는 조금도 망설임이 없이 동의하였다. 내가 내용을 쓰라고 하자 그는 중공의 거짓말을 싫어한다면서 동시에 중공에 바보처럼 속는 게 싫다고 설명하였다. 또 한 사람은 진상을 알렸을 때 구실을 만들어 나를 만나지 않았지만, 후에 갑자기 진상을 받아들이는 데 조금도 장애가 없이 그전과 완전히 다른 사람 같았다.
진상을 이야기할 때는 책에 쓰인 대로 읽으면 안 되고 다른 사람이 이해할 수 있는 말을 해야 한다. 한번은 진상을 알게 된 세인이 나에게 중공은 파쇼보다 더 잔학한데 마취제를 사용하지 않고 장기를 떼어내고 있는 것을 아느냐고 물었다. 그 이후에 나는 생체적출에 대해 말할 때는 특별히 ‘마취제를 놓지 않고’와 ‘고가로 외국인에게 판매’한다는 설명을 추가했다.
사람은 진실해야 하는데, 우리는 누구에게나 진상을 이야기할 때는 진실하고 신임을 얻어야 한다. 나에게 진상을 들은 적이 있는 사람은 그 뒤부터 모두 나에게 아주 우호적이었고 친절했다. 그들의 마음 깊숙한 곳에서는 우리가 얼마나 귀중한 생명이고, 우리가 그들 마음속의 희망임을 알고 있는 것이다.
지금의 중국인들은 모두 진상을 알게 되기를 갈망하고 있다. 당신이 정념만 있다면 일반인들 모두 CD를 접수하고, 심지어 당신이 가서 자신들을 구도해 주기를 기다리고 있다.
사부님께서는 “참음(忍)은 나약한 것이 아니지만, 온갖 수모를 다 참고 견뎌내는 것은 더욱 아니다. 대법제자의 참음은 고상한 것이다. 이는 생명이 위대하고 견고하여 꺾을 수 없는 금강부동(金剛不動)의 표현이고, 이는 진리를 견지하기 위한 관용(寬容)이며, 이는 아직도 인성(人性)이 있고 아직도 정념(正念)이 있는 생명에 대한 자비와 구원이다.”라고 말씀하셨다. (정진요지2 – 더는 참을 수 없다)
한마디로 진상을 얘기할 때 우리는 쩐, 싼, 런 대로해야 하는데 사부님께서는 예전에 쩐, 싼, 런 매 글자에 모두 쩐, 싼, 런이 포함되어 있다고 말씀하신 기억이 난다.
문장발표: 2011년 6월 16일
문장분류: 수련마당
원문위치: http://www.minghui.org/mh/articles/2012/6/16/258972.html