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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좋은 일’ ‘나쁜 일’ 모두 좋은 일

글/ 대륙대법제자

[밍후이왕] 며칠 전 외지의 수련생(몇 개월 만나지 않음)이 장거리 전화를 걸어와 한 시간 동안 말을 했다. 한 동안 자신이 가정과 직장, 사회에서 다른 사람과 왕래하는 중 각 방면에서 부딪친 여러 번거로운 일을 내게 말했다. 왜 이렇게 많은 번거로운 일이 나타날까?

하루는 한 수련생이 자신이 처한 환경을 말했다. 팔구십 세의 연로한 노인을 돌보아야 하고, 다른 사람도 그의 일로 자주 자신을 찾는다. 또 대법제자의 3가지 일도 해야 하고, 때로는 시간을 내어 법공부를 하려 하면 곧 전화가 와 아이를 좀 데려오라고 하고, 혹은 또 다른 것을 도와달라고 한다.(그녀는 퇴직하고 집에 있다.) 그녀는 반드시 가서 해야 한다. 왜냐하면 우리 수련은 언제나 다른 사람을 잘 대해야 하지 않는가? 하지만 법공부 시간을 점하므로 마음이 매우 조급하다.(이 수련생은 법공부를 중요시하는 것을 볼 수 있다.) 그녀는 물었다. “이것은 교란이 아닌가?” 나는 그녀에게 물었다. “이런 일을 만났을 때 귀찮은가?” 그녀는 말했다. “정말로 귀찮아.” 나는 “당신이 귀찮아 하는 마음을 제거하지 못하기 때문에 번거로운 일이 나타나는 것이다. 법공부는 우리를 지도하여 수련하는 것이다. 번거로운 일이 나타날 때는 바로 우리가 제고하는 가장 좋은 기회이다. 왜 귀찮아 하는가?”하고 말했다.

이 수련생의 상태를 보고 나는 한 가지 문제가 생각났다. 수련인은 어떻게 부딪치는 마난을 대할 것인가. 신체적 고통, 심성에서의 부딪침, 일하는 중에서의 교란 등을 포함한다. 이외에 나는 일부 수련생에게서 일종 현상을 보았는데, 신체상에 나타난 고통, 일하면서 나타난 일부 교란에 대하여 첫 일념은 먼저 ‘그것을 승인하지 않는다. 그것을 부정한다’는 것이다. 이는 진상을 알리고 사람 구하는 일을 많이 한 수련생들에서 많이 나타난다. 수련생의 이 일념에서 ‘구세력의 일체 배치를 부정한다’는 정법 수련의 의식이 매우 강하다고 볼 수 있다. 하지만 분명히 이런 일이 나타난 것을 나쁜 일로 간주하고 배척하고 있음을 느낄 수 있다.

여기서 자신의 이 문제에 대한 약간의 생각과 인식을 말해 보려 한다.

사부님은 우리에게 “대법제자는 수련한 그날부터 시작하여 당신의 일생은 이미 새롭게 배치되었다. 다시 말해서 당신의 이 일생은 이미 수련인의 일생이고 어떠한 일도 우연한 것이 아니며, 또 우연한 일이 나타나지 않는데, 인생길의 일체는 모두 당신의 제고와 수련에 직접적 관계가 있다.”(로스엔젤레스 시 법회 설법) 라고 알려 주셨다. 기왕 우리 수련의 길에 나타난 어떠한 일도 모두 우연한 것이 아니기에, 내 생각은 우리는 자신의 관념과 애호에 따라 무엇을 가지고 무엇을 가지지 않겠다고 할 수 없다.

사부님은 “수련 중에서 당신들이 부딪힌 좋은 일이든 좋지 않은 일이든, 모두 좋은 일이다. 왜냐하면 그것은 당신들이 수련하기 때문에 비로소 나타난 것이기 때문이다. 수련자는 사람의 마음을 갖고, 업의 빚을 갖고, 집착을 갖고서는 원만할 수 없다.”(시카코 법회) 라고 말씀하셨다. “수련하는 사람은 문제를 거꾸로 보는 것으로, 이런 마난(魔難)과 고통을 모두 제고할 좋은 기회, 좋은 일로 보면서 그것으로 하여금 많이 오고 빨리 오게 해서 자신을 빨리 제고하게 한다. 일부 수련생들은 곧바로 밖으로 밀어버린다. 너는 오지 마라. 왔다면 자신에 대하여 딴생각이 있다고 여기며 어쨌든 다른 사람이 말을 못하게 한다. 당신이 좀 잘 지낸다면 그것이 수련인가? 그럼 수련할 수 있는가? 오늘에 이르러 아직도 그런 관념을 돌려놓지 못하면, 사부 된 나마저도 당신이 어떻게 원만으로 나아갈 수 있는지 다 모르겠다.”(2005년 샌프란시스코 법회 설법)

그럼 우리는 자신에게 물어 보아야 하는데, 이 기본적인 법리에 있어서 우리는 정말로 근본적으로 관념을 개변했는가? 우리에게 제공한 이런 수련의 기회를 우리는 왜 밖으로 떠밀고 있는가? ‘자꾸 밖으로만 본다’ 이 누락은 구세력의 교란을 초래할 수 있고, 수련생이 장기간 마난에 처해 있게 되는 것이 아닌가.

나는 ‘93년에 법을 얻은 제자이다. 수련의 길에 들어선 후 법공부를 통하여, 나는 확실히 한 점은 꼭 기억하고 있다. 사부님께서 이미 나의 일생을 다시 배치했고 부딪치는 일은 모두 우연한 것이 없으며 다 자신의 제고, 수련, 대법을 실증하는 것과 연관있다고 생각한다.

그러기에 나는 정말로 심성에서 받은 충격이든, 신체상에서 감당한 고통이든 모두 다 좋은 일로 생각한다. 때로는 눈물을 머금고 참아도 마음속으로 기쁘다. 그것은 나의 마음의 용량을 확대하는 것이라는 것을 알고 있다. 때로 ‘그는 왜 그럴까’ 하는 일념이 뛰쳐나올 때도 있다. 하지만 나는 즉시 자신에게 ‘이것은 자신을 수련하는 것이 아니다’라고 말한다. 그때 수련생과 교류할 때 자주 하는 한마디 말, 수련에 대한 자신의 이해는 바로 ‘어떠한 일이든, 속인이 보기에 비정상일수록, 우리 수련생에 대하여 말하면 정상이다’라는 것이다.

수련의 초기에 병업형식으로 소업할 때 자주 위가 아파 신체가 떨리고 있어도 속으로 나는 기뻤다. 법리에서 나는 내가 이쪽에서 감당을 많이 하면 사부님은 저쪽에서 나에게 제거해주는 것이 더욱 많고 나를 위해 더욱 많이 감당하고 있는 것을 알고 있다. 그러기에 나아지면 나는 합장하여 사부님께 감사드린다.

그때 만약 며칠간 아무런 일이 없으면 (심성에서 신체상에서) 나는 자신에게 ‘어느 한 층차에서 머무는 시간이 너무 길지 않는가. 마땅히 돌파가 있어야 한다’ 라고 말한다.

정법수련의 길에 들어선 후 매번 신체적으로 불편할 때, 나는 아직 그것을 좋은 일로 본다. 나의 이해는 지금은 ‘병업형식으로 소업’하는 때가 아니라고 생각한다. 불편한 현상이 나타나면 먼저 자신은 안으로 찾고 집착심을 제거한다. 신체상의 일부 반응에 대하여 나는 그것을 수련 중에서 신체를 정화하는 표현이라고 생각하고, 동시에 교란에 참여하는 사악의 요소를 제거하는 기회라고 생각한다. 그러기에 우리는 ‘정념으로 관을 넘기’는 현상이 나타난다. 필경 우리의 의지력, 인내력, 감당하는 능력, 고생을 참을 수 있는 능력은 우리가 수련해 내야 한다.

그 외에 사부님께서는 법에서, 우리가 수련해낸 공이 신체에서 움직이면 “당신은 신체가 가렵고, 아프며, 견디기 어려운 등등을 느낄 수 있는데, 말초신경 감각도 매우 예민해 각종 상태가 다 나타날 것이다.”(전법륜) 때문에 나타난 이런 불편한 것은 수련인에 대해 모두 좋은 일이다.

나는 또 깨달았는데, 우리가 수련 중 경지가 승화함에 따라, 바로 고층차로 돌파하는 것이며, 우리의 신체도 상응의 변화가 있고, 민감한 사람은 느낄 수 있으며, 표현 형식은 이 신체상에서 이런 저런 반응이 나타난다. 왜냐하면 수련의 과정은 우리로 말하면 모두 미지이고, 완전히 앞에 무슨 반응이 있는지 모르며, 무슨 현상이 나타날지 모르기 때문이다. 이렇게 되면 ‘기뻐해도 떨어지고, 두려워해도 떨어진다’는 유사한 일이 나타날 수 없게 된다.

정법 수련 중에서 나는 어떠한 일에 부딪치더라도 모두 좋은 일이라고 본다. 구세력이 배치한 고험, 우리에게 배치한 마난이 좋은 일이라는 것이 아니고, 우리가 정면으로 대하고 구세력의 배치를 부정하며 사악을 제거하고 심성이 제고되어 올라오면, 이것은 우리에게 제고하는 ‘계단’을 준 것이 아닌가?

박해 발생 후 일부 수련생들은 나에게 “당신의 직장은 당신을 귀찮게 했는가” 라고 물었다. 나는 “나는 종래로 그것을 번거로운 일이라고 보지 않고 평소 그들과 말할 기회도 없는데, 이것이 바로 그들이 진상을 알 수 있는 기회가 아닌가?” 라고 말했다. 확실히 그렇다. 자주 상사에게서 전화가 오면 나는 재빨리 계단을 올라가 사무실에 들어간다. 나는 숨을 몰아쉬면서 그들이 오해할까봐 설명하는데 “막 계단을 올라오는 것이 급했습니다.”라고 한마디 한다. 그 후 나는 자신에게 묻는다. 왜 그렇게 급히 올라가는가. 숨조차 쉬기 힘들게. 그때 급히 그들을 만날 생각만 하고 있었다. 그들에게 대법의 정념정행을 보게 하고 대법에 대한 오해를 없애버리려 했다.

나는 그들을 종래로 나쁜 사람으로 보지 않았기에 매번 담화를 나눈 결과는 좋았다. 그들은 자주 “우리도 처세하는 방법을 당신과 같게 하려 합니다.” “우리는 당신을 경시하지 않았습니다.” 라고 말했다. 나도 종래로 자신을 경시당하고, 교란당하고, 박해당하는 위치에 놓은 적이 없다.

‘천안문분신자살’ 조작사건이 발생한 그날, 한 동료가 나를 보더니 관심을 갖고 “당신은 어떻습니까?”하고 물었다. 나는 “매우 좋습니다.”라고 말했다. 그때 그는 합장하며 얼굴에 존경스럽다는 의미를 표시했다. 그렇다. 그 주변의 대법제자를 본다면 ‘거짓 분신자살극’을 믿을 것인가?

우리는 ‘어떠한 일이든 모두 우연한 것이 아니다.’라는 것을 알고 있기 때문이다. 그러기에 어떠한 일이 다가와도 귀찮아하지 않는다.(처음에는 할 수 없었는데, 내가 ‘귀찮은 마음’을 제거한 후, 이후에 할 수 있었다.) 오는 사람은 나와 인연이 있고, 마땅히 인연을 맺을 사람은 맺고, 인연을 풀어야 하는 사람은 풀고, 마땅히 선해할 사람은 선해하고, 마땅히 빚을 갚을 사람은 빚을 갚고, 마땅히 감당해야 할 때 감당하는 그런 느낌이다. 정념으로 대하면 된다. 이렇게 문제를 생각하니, 무슨 교란이 있다는 것을 느끼지 못한다. 때로 생각해보면 자신도 상상할 수 없다. “왜 전혀 귀찮은 일이 없을까?” 사부님은 “기억하라, 사람의 이치는 거꾸로 된 것이다. 그러므로 수련 중에서 부딪힌 번거로운 일, 그것을 모두 자신의 올바른 일에 대한 교란이자 자신의 올바른 일에 대한 충격, 즉 모순이 온 것으로 보지 말고, 나의 이 일이 주요하고 그 일이 주요하다고 여기지 마라. 사실 많은 일은 반드시 당신이 본 그러한 것이 아니다. 당신들의 진정한 제고 이는 영원히 모두 제1위이며, 당신들 자신의 수련원만 이것은 영원히 모두 제1위이다.”(각지역 설법7 – 2006년 캐나다법회설법)라고 말씀하셨다.

여기서 자신이 어떻게 수련을 잘 한다는 것은 아니다. 하지만 이것은 확실히 수련에 대한 나 자신의 이해이다. 어떠한 일이든 모두 좋은 일로 본다. 왜냐하면 그런 일이 없으면 우리는 제고할 수 없다. 그러기에 매번 번거로운 일이 지난 후, 뒤돌아 소업하고 집착을 제거하는 과정을 보면 정말로 진심으로 감사한다. 나에게 제고하는 ‘계단’을 준 사람에게 감사하고 더욱이 사부님의 가호에 감사한다.

한 가지 번거로운 일이 나타나는 것은 우리가 수련에서 제고하려는 관인가 아니면 구세력의 교란인가. 나는 이렇게 생각한다. 우리가 문제를 보는 기점을 어디에 놓는가 하는 것에 관계된다. 사상이 법에 있으면 그것은 사부님이 그것을 이용하여 우리를 제고하는 ‘계단’이고, 사상이 법에 있지 않으면, 바로 구세력이 배치한 길을 걷는 것이다. 그것은 구세력이 우리에게 떨어지게 배치한 ‘관’과 ‘난’이다.

사부님은 우리에게 말씀하셨다. “구세력은 모든 대법제자에 대하여 그것들의 것을 한 세트 배치하였는데, 만약 대법제자가 사부의 요구에 따라 하지 않는다면, 바로 틀림없이 구세력의 배치에 따라 하고 있는 것이다.”(청성) 우리가 수련의 길에 들어서면서부터 사부님은 우리에게 다시 이후의 인생길을 배치하셨다. 비록 구세력이 우리에게 한 세트의 물건을 배치했지만, 우주에는 이치가 있다. “한 생명의 선택은 그 자신에 의해 결정되며, 역사상에서 그가 어떤 소원을 빌었든 결정적인 순간에는 여전히 그 자신에 의해서 결정된다. 여기에는 정반(正反) 두 개 방면을 포함하며 모두 이러하다.” (각지역 설법2 – 2002년 미국 필라델피아 법회 설법) 그러기에 우리가 정념만 있으면 사부님의 배치한 길을 걷는다. 바로 법에서 실속있게 수련하고 누락이 있으면 법에서 바로 잡는다. 구세력이 무엇을 배치하든지 작용을 일으키지 못한다. 왜냐하면 사부님이 승인하지 않고, 우리가 갖지 않는다.

여러분은 모두 법을 배우고, 도를 깨닫고, 마음을 수련하고, 사람을 구한다. 이상은 개인의 깨달음이다. 인식에서 부적한 점은 수련생들이 자비로 시정해 주기 바란다. 허스!

문장발표: 2012년 5월 6일
문장분류: 수련마당
원문위치: http://www.minghui.org/mh/articles/2012/5/6/256745.html