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진짜인가? 가짜인가?

글/ 대륙대법제자

[밍후이왕] 한 방울의 먹물을 깨끗한 호수에 떨어뜨렸다. 먹물이 물속으로 사라지기 전에는 어느 것이 먹물이고 어느 것이 물인지 분별할 수 있다. 그러나 먹물이 완전히 물속에 혼입되어 흩어지면 흔적이 없어지는데 당신은 어느 것이 물이고 어느 것이 먹인지 분간할 수 없게 된다.

사존께서는 우리더러 무사무아(無私無我)의 대각자로 수련 성취하라고 말씀하셨다. 새로운 우주는 또 무사(無私)의 기초위에 건립되어 있다. 그럼 나는 진수제자였던가? 정말로 신사신법(信師信法)했는가? 이 믿음이 가장 본질적인 무사(無私) 위에 건립된 것인가? 정말로 자신의 일체를 모두 사존의 배치에 맡겼는가?

사존께서 말씀하셨다. “대법제자는 줄곧 당신이 원만의 최후 한걸음에 이르기까지 걸어가서도 당신은 여전히 되는지 안 되는지를 고험 당하게 될 것이며,”(로스앤젤레스 시 법회 설법)

대법을 수련한지 이미 20년에 가깝다. 이렇게 다년간 나는 줄곧 자신한테 한번 또 한번 질문을 던졌다. 법에 대해 도대체 정말로 믿고 있는가? 그리고 그 믿음이 정말로 가장 내심으로부터, 가장 본질로부터 인지를.

나중에 한 차례 한 차례 생사고험을 겪으면서 자신은 합격됐다고 여겼고, 자신이 법을 위해 언제라도 생사를 내려놓을 수 있다고 여겼으며, 자신의 생명으로 법을 수호할 수 있다고 생각했고, 자신은 완전하고 진정한 믿음이 있으며 합격된 진수제자라고 생각했다.

그러나 최근 나는 갑자기 내가 진정으로 믿고 있는 것이 아님을 발견했다. 나의 이 믿음은 위사(爲私)의 기초 위에 건립되어 있었고, 믿음을 엄폐(掩蓋)한 위에 건립되어 있었으며, 가장 순진(純真)한 본질에서의 믿음이 아니었다.

그리하여 나는 최근에 법에서 깨달은 것과 진정한 믿음에 대한 인식을 글로 적어 나와 같은 문제가 존재하는 수련생들이 이 문제를 인식하고, 공동으로 정진하고 가장 순정(純淨)한 진수제자가 될 수 있게 참고하도록 제공하는 바이다.

그 전에 나는 속인 중에서 발생된 작은 이야기를 하련다.

이과를 배우는 사람들은 아마 갈릴레이 시계추법칙을 알고 있을 것이다.

이 법칙은 매우 간단한바 대략 이러하다. 가령 오직 중력의 작용 하에 시계추가 수직으로 정지했을 때 위치를 O점이라 설정하고, 만일 이 시계추를 O점에서 오른쪽의 한 위치 A점으로 10cm 당겨간 후 손을 놓으면 시계추는 왼쪽을 향해 O점으로 이동하며 O점에서 계속하여 왼쪽으로 움직이며 O점에서 왼쪽으로 10cm 떨어진 B점 위치까지 이동한다. 그곳에서 정지했다가 다시 오른쪽을 향해 움직이며 O점을 지나 다시 A점에서 멈추고 또 다시 O점을 거쳐 B점으로 이동한다. 시계추는 이렇게 끊임없이 반복한다. A점에서 O점까지의 거리는 B점에서 O점까지의 거리와 같다.

이 법칙은 물리학의 기본법칙이며 무수한 실험을 거쳐 증명된 바 있다. 또 전 세계의 모든 물리학자들의 공인을 받았다.

어느 물리학 교수가 수업 중에 이 시계추법칙을 설명하고 있었다. 그는 학생들에게 ‘시계추의 법칙은 정확하다’를 믿는지 물었다. 모든 학생들이 동시에 믿는다고 대답했다. 그는 또 학생들에게 그 믿음이 내심에서의 믿음인지를 확인했다.

학생들은 교수의 이 질문이 이상하다고 생각됐으며 교수가 자신들을 속이려고 하는 말로 생각하고 모두 큰소리로 분명히 믿는다고 대답했다. 아울러 절대적으로 믿으며 아무런 의문 없이 믿는다고 했으며 자신들의 내심의 깊은 곳에서 믿는다고 했다.

교수는 듣고 웃으면서 좋다고 말했다. 그리고 그는 도구를 꺼내 실험을 통하여 검증하려 했다. 교수는 가장 견정하게 대답한 학생을 선택하여 함께 이 실험을 진행했다.

교수는 수 십 킬로그램 무게가 되는 쇳덩어리와 한 가닥의 굵은 끈을 꺼냈다. 그리고 쇳덩어리를 끈으로 묶어 천장의 고리에 걸었다. 교수는 실험에 동참한 그 학생더러 학생들을 마주하고 칠판에 붙어 서게 했다.

교수는 자로 길이를 재면서 학생들에게 설명했다. 달려있는 큰 쇳덩어리는 학생의 머리에서 50cm되는 곳이며 교수는 쇳덩어리를 학생과 반대되는 방향으로 40cm 당기고 시계추법칙에 따르면 교수가 손을 놓으면 쇳덩어리는 학생의 머리를 향해 갈 것이나 이 학생의 코에서 10cm되는 곳에 멈췄다가 다시 교수 쪽으로 돌아올 것이며 학생의 코와 부딪치지 않을 것이다. 교수는 그럴 것인지 학생들한테 물었다.

이때 학생들은 좀 놀랐다. 이는 사람의 목숨이 달린 일이다. 그들은 재삼 계산을 정확히 한 후 그럴 것이라 했으며 학생과 부딪치지 않을 것이라 했다. 교수는 웃으면서 좋다고 말했다. 그리고 교수는 모든 학생들한테 지금 손을 놓을 것이라 하고 학생들한테 정말로 문제가 없을 것인지를 물었다.

학생들은 모두 눈이 휘둥그레졌다. 어떤 학생은 놀라서 땀을 닦았고 여학생들은 눈을 감고 감히 보지 못했다. 그리고 실험에 동참한 그 학생은 놀라서 떨고 있었다. 그는 벽에 딱 붙어 섰고 뒤에는 전혀 퇴로가 없었다. 최후 교수가 손을 놓는 그 순간 그 학생은 더는 견지하지 못하고 겁나서 비켜섰고 이내 자기 자리에 가서 앉았다.

이때 교수는 또 여러 학생들한테 정말로 내심에서 ‘시계추법칙이 정확하다’를 믿는지를 물었다. 이때 누구도 감히 대답하지 못했다.

이 이야기는 비록 속인 중에서 발생됐으나 곰곰이 생각해볼 바가 있다. 우리 많은 사람은 아마 물어볼 것도 없이 자신은 생명으로 법을 실증할 수 있다고 여길 것이며, 이 한 점으로 자신이 법에 대해 견정히 믿고 있음을 증명하려 할 것이다. 그러나 문제는 생명으로 법을 실증할 수 있음이 확실히 법에 대한 믿음인가 하는 것이다. 그러나 자신이 느끼건대 생명으로 법을 실증할 수 있다는 점이 아마 엄폐(掩蓋)하고 있는 것일지도 모르며 믿을만한 것이 못된다. 마치 먹이 물에 용해된 후 어느 것이 진정한 자신이고 어느 것이 엄폐(掩蓋)된 것인지를 분별할 수 없듯이 말이다.

우리는 자신한테 정말로 무사(無私)를 해냈는지, 정말로 자신의 일체를 모두 완전히 사존의 배치에 맡겼는지를 솔직하게 물어봐야 한다.

만일 대답이 ‘그렇다’라고 하자. 그럼 다시 자신한테 이렇게 물어본다. “나는 사적인 비밀이 있는가? 나의 일체, 나의 모든 것을, 일거일동을 포함해 사상 중의 모든 염두를 백일하에 드러내 모든 사람이 보게 할 수 있는가? 만일 당신이 공개하고 싶지 않은 한 가지라도 있다면 아주 미세한 작은 염두나 하나의 비밀이 있다면 그럼 당신은 바로 사(私)가 있는 것이다.

진정한 무사(無私)는 완전히 백일하에 드러낼 수 있는 것이며 눈부시게 빛나고 완전히 대법에 용해되는 것으로 어떠한 한 가닥의 폭로할 수 없는 잡것이 존재하지 않는다. 그것은 모든 일체가 광명정대하고 하늘 아래에 드러낼 수 있는 것이다. 일체 폭로할 수 없는 것은 모두 사(私)이다.

사존께서는 ‘창춘(長春)보도원법회설법’에서 이렇게 말씀하셨다. “내가 늘 불교 중의 사람들은 수련을 어떻게 하는지도 모른다고 했던 게, 바로 이런 뜻이다. 그는 전혀 의식하지도 못하는바 그의 그 염두는 아주 깊이 은폐되어 있다. 현재의 사람은 매우 교활하게 변했다. 현재의 사람은 이 마음을, 그는 엄폐(掩蓋)할 뿐만 아니라, 그는 엄폐함으로써 그 마음을 엄폐할 것이다. 내가 보기에 이런 사람은 정말로 제도하기 어렵다. 당신이 그에게 점화해 주어도, 그는 심지어 자신이 감싸서 포장(包藏)한 그것을 의식하지도 못한다. 게다가 당신이 그의 실질적인 곳을 짚어주었을 때, 나의 법신이 그의 실질적인 그곳을 점화해 주었을 때, 그는 마치 속인을 대하는 것처럼 나의 법신을 속이고 있는바 그는 거짓된 모습을 한다. 아, 내가 잘못 했구나, 한 다음 그는 또 다른 엄폐로써 그의 엄폐 자체를 엄폐하고 있는바 또 다른 엄폐를 사용하는 것이다. 사람이 모두 이런 정도에 이르렀는데 어떻게 제도를 말하겠는가! 지금은 그런대로 사부가 여기에서 가르치고, 제자를 이끌고 있다. 당신이 말하는 그 절에는 책임지는 사람이 없는데 그가 어떻게 수련하겠는가? 당신들이 말해 보라. 사람이 이 지경에 이르렀는데 어떻게 해야겠는가!”

마음을 조용히 하고 일체 잡념과 근심을 내려놓고 자신을 깊이 분석하여 내심의 가장 깊은 곳을 향하여 찾아보자. 나는 줄곧 자신의 믿음을 위해 엄폐(掩蓋)할 것을 찾지 않았는지를? 자신은 이미 생사의 염두를 내려놓았다고 여기는 사람도 역시 믿음을 위해 엄폐(掩蓋)할 것을 찾은 것이 아니었을까?

왜 하느님은 아담과 이브를 에덴동산에 만들 때 그들을 나체로 살게 하고 옷을 입게 하지 않았으며 부끄러움을 모르게, 근심걱정이 없게 했을까? 그러나 그들이 뱀의 유혹으로 그 ‘지혜의 사과’를 훔쳐 먹은 뒤로 부끄러움을 알게 됐고 그때부터 옷을 입었으며 자신의 몸을 은밀하게 감추기 시작했다.

지금 나는 알게 됐다. 애초에 아담과 이브가 옷을 입지 않고 부끄러움을 몰랐던 것은 그들이 염치가 없어서가 아니라 그들이 전혀 남녀색욕지심이 없었기 때문이다. 그들의 마음속에는 전혀 성별의 개념이 없었으며 그들은 그때 가장 순정했고 삿된 것이 없었기에 전혀 옷을 입지 않았던 것이다. 나중에 그들이 ‘지혜의 사과’를 훔쳐 먹은 후 타락하기 시작했고 색욕지심이 생겼다. 때문에 그들은 상응되게 ‘수치’라는 속세의 지혜와 개념이 생겼다. 하여 옷을 만들어 가렸고 자신의 ‘은밀한 곳’을 가렸으며 그때부터 그들은 점차 이기(自私)적으로 되었다. 때문에 하느님은 그들을 에덴동산에서 쫓아냈다. 왜냐하면 그들은 더는 그 층차에 부합되지 않아 머무를 수 없었기 때문이다.

사(私)가 있으면 모두 엄폐(掩蓋)하는 것이 있고 엄폐(掩蓋)하는 것이 있으면 곧 대법과 탈리하는 물질을 보존하게 된다. 완전히 우주 대법에 동화되지 못하면 곧 자신의 바르지 못한 것을 발견하지 못하며 자신을 바르게 닦을 수 없게 된다. 마치 먹이 완전히 물에 용해되어 어느 것이 먹이고 물인지를 분별할 수 없는 것과 같다. 이렇게 점차 한 점 한 점 기나긴 세월 속에서 한걸음씩 불순하게 변했고 잡것이 용해되어 자신도 모르게 성주괴멸로 나아가게 됐다.

그러나 무사(無私)는 완전히 우주 대법에 동화된 것으로 자신의 일체를 대법에 맡겼으며 그러므로 원용불파(圓容不破)한 것이다.

이때 나는 사존의 경문 ‘뿌리를 캐다’에 또 더욱 깊은 인식을 갖게 됐다. 사존께 감사드린다. 제자는 현재 진정한 믿음과 아직 일정한 거리가 있음을 알고 있다. 그러나 제자는 꼭 힘을 다해 잘 할 것이며 반드시 당신의 가장 합격된 제자로, 가장 순정하고 무사무아한 대각자로 될 것이다.

마지막으로 우리 다시 한 번 자신에게 물어보자. 나는 정말로 사부님에 대해 대법에 대해 진정한 믿음을 해냈는가? 정말로 자신의 일체를 사존의 배치에 맡겼는가?

문장발표: 2012년 3월 18일
문장분류: 수련마당>정법수련>이성인식
원문위치: http://www.minghui.org/mh/articles/2012/3/18/254302.html