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다른 사람의 집착 앞에서

— 모순 속에서 끊임없이 자신을 찾고 자신을 닦다

글/ 대륙 대법제자

[밍후이왕] 한 여 수련생이 사악의 박해로 직장에서 해고당해 십여 년 동안 모두 떠돌이식 막노동을 했으므로 고정적인 거처가 없었다. 어떤 때는 대법제자의 집에서 살았고, 최근에는 우리 집에서 살게 됐다. 처음에 우리는 세 가지 일을 함에 협력이 아주 잘 됐지만, 최근에는 오히려 끊임없이 일부 모순이 생기면서 때때로 다툼이 생겨 서로가 모두 불쾌해졌다.

모순이 생기게 된 원인을 보면 표면상에서는 우리가 문제를 교류할 때 나는 스스로 법리에 대해 분명하다고 생각하면서 아울러 그녀가 사부님 설법을 인용하는 게 정확하지 못하다고 지적하며 즉시 책에서 그 법에 관련된 단락을 찾아내 그녀에게 보여 주었다. 또 그녀가 법 공부 팀에서 법을 읽을 때 늘 틀리게 읽거나 빼놓는 글자가 있다고 지적했다. 어떤 땐 내가 그녀가 틀리게 읽은 글자를 바로잡아주면 그녀는 다른 일을 빌어 큰 소리로 나를 훈계한다. 내가 자신을 높이 세우고 그녀를 깔본다는 것이다. 이후에는 내가 주동적으로 세 가지 일을 하지 않고 늘 동태망에만 접속하면서 시간을 낭비한다고 끊임없이 질책했다. 걸핏하면 마땅히 무엇을 해야 하면 무엇을 해야 한다고 나를 지적했다. 내가 그녀를 조금만 틀린다고 말하면 그녀는 갖은 방법을 다해 그녀가 옳다는 걸 증명하며, 아울러 방법을 찾아 나의 옳지 않은 점을 찾아낸다.

처음에 나는 내가 그녀를 깔본다고 여겼으므로 그녀는 내 잘못을 찾아내 자신을 실증하고 자신의 자존심을 수호하려는 것으로 생각했다. 나도 그녀에게 해명하려 하지 않았으며 해명해도 소용없는 것이었다. ‘그녀의 자아를 수호하고 자신을 실증하려는 마음이 얼마나 강렬한가.’ 그렇게 밖으로 보며 오히려 자신을 비춰 보는 것을 잊었다.

모순이 나왔고 상대방의 사람 마음을 나는 보아냈다. 사실 바로 나에게도 이런 마음이 있기 때문에 비로소 나에게 보인 것이다. 나는 오직 내가 자신을 찾아보고 자신을 수련해야만 이 모순을 해결할 수 있음을 의식하게 됐다. 수련생 사이는 실제로 서로 상대방을 위하는 수련환경으로서 수련생의 표현은 바로 자신의 거울이다. “당신이 갈등 앞에서 자신의 원인을 찾을 수 있고 자신을 먼저 바르게 한다면 당신은 바로 넘긴 것이다.” (오스트레일리아 법회 설법) 나는 반드시 이 일을 통해 전면적으로 자신을 찾아봐야 한다. 그녀 표현에는 사부님께서 나에게 수련하고 제고하라고 하신 일부분이 있는 것이다. 내가 자신을 바르게 놓으면 상대방도 나아질 것이다.

자신을 찾는 데는 무조건이다. 무조건이란 바로 상대방의 결점, 잘못을 보지 않는 것이며 남의 결점 잘못을 찾는 것은 남을 수련하는 것이지 자신을 수련하는 것이 아님을 나는 깨달았다. 자신의 잘못을 찾지 않으려 하면서도 남의 잘못을 찾으려 한다. 그러나 자신을 실증하려는 그 마음은 언제나 자신의 장점, 우월한 점을 보고 언제나 남의 단점, 결점을 본다. 자신은 한 송이 꽃이고 남은 콩비지다. 이 역시 과시심, 질투심, 쟁투심, 환희심 등 마음의 총 근원이다. 자신은 법리에 대한 이해가 남보다 좋으며 문장도 남보다 잘 쓴다고 과시하는 등은 바로 다른 사람의 사람마음을 이끌어내 그로부터 모순이 유발되는 원인이 되게 한다.

남의 책망을 들을 때면 먼저 참음을 해내야 한다. 세인에 대해서도 모두 “때려도 맞받아치지 않고, 욕해도 대꾸하지 않는다.” (전법륜)를 말하는데 하물며 자신이 수련생임에랴. 몇 번은 한 수련생이 뭇사람들 앞에서 나를 욕했는데 나는 한마디 대꾸도 하지 않았고 기본상 태연하게 대했다. 나는 나의 참음이 기본상 고비를 넘었다고 여겼다. 하지만 이번에는 그녀의 질책에 대해 어떤 때는 정말 대꾸를 하지 않을 수 있었다. 하지만 어떤 때는 위사위아, 자아를 실증하는 그 마음이 또 뒤집어 나오는지라 그러면 대번에 반박하는 말이 입에서 튀어나온다. 어떤 때는 심지어 화가 좀 치민다. 화가 내고는 나는 또 후회한다. 나는 평소에 늘 자신에게 경고한다. 어쨌든 간에 돌발적인 모순에 봉착하면 반드시 심성을 지켜야 한다. 하지만 구체적인 현실에 봉착하게 될 때면 나는 매번 모두 이 마음을 지킨 것은 아니다. 그러므로 끊임없이 법 공부를 하면서 끊임없이 자신을 바르게 하고 자신을 수련해야 한다. 모순이 있는 것은 나쁜 일이 아니며 모순에 봉착했을 때 자신의 사람마음을 보아내기가 가장 쉬우므로 마침 그것을 틀어잡고 닦아버릴 수 있다.

사부님께서는 말씀하셨다. “만약 당신이 법을 실증한다면, 다른 사람이 뭐라고 해도 당신은 마음을 움직이지 않을 것이다. 만약 다른 사람이 당신의 의견에 충격(衝擊)을 주고 당신의 목소리를 눌러 당신이 기분 나쁘다고 느끼거나, 만약 다른 사람이 당신의 어떤 문제를 견주어 당신에게 반대 의견을 제출하거나, 혹은 당신의 의견에 동의하지 않아 당신이 불편을 느낄 때면, 당신은 일어나서 반대하고 변명한다. 그리하여 주제에서 벗어나는 것마저도 꺼리지 않는데, 가장 선의적인 변명이라 할지라도 당신은 모두 자신을 실증하는 것이다. (박수) 왜냐하면, 당신이 대법을 제1위에 놓지 않았기 때문이다. 이때 당신이 제일 내려놓지 못하는 것은 자신이다.” (2004년 뉴욕국제법회설법)

내가 자신을 위해 변명한 후 냉정하게 자신을 찾아보았을 때 나는 사부님의 이 단락 법을 생각하게 됐다. 이 단락 법은 나에 대해 너무도 구미가 맞았고 나를 향해 말씀하신 것 같았다. 가령 내가 정말로 법 실증을 위해서이고 자신을 실증하기 위해서가 아니라면 남이야 어떻게 말하든 모두 태연하게 움직이지 않을 것이다. 당신이 나를 좋다고 해도 마음을 움직이지 않고 당신이 나를 나쁘다고 해도 나 역시 마음을 움직이지 않음을 해내야 한다. 사실 나도 깨달았다. 변명은 소용없는 것으로서 변명할수록 자신을 덮어 감추는 것과 같다. 나에게 정말로 이런 일이 있었다면 고치면 되고 없다면 더 말할 필요가 없다.

그녀가 반복적으로 내가 틀렸다며 나의 결점, 잘못을 세고 있을 때 처음에는 그래도 참을 수 있었다. 하지만 가끔은 괴로움을 느꼈는데 그녀가 나를 창피하게 하고 자존심을 잃게 한다고 여기고는 반박을 했고, 되돌아서서 그녀가 틀렸다고 지적했다. 그런 후 무조건 남의 의견을 듣고 자신을 찾아야 함을 해내지 못해 또 후회하곤 했다. 지금, 몇 가지 점으로부터 이 문제를 인식하게 됐다.

1. 다른 사람이 자신의 결점, 잘못을 말했을 때 불쾌해하는 이것은 남의 입을 막으려는 것과 같은 것이며 이는 종이로 불을 싸려는 것과 같다. 남이 앞에서 말하지 않는다 해서 뒤에서도 말하지 않을 것 같은가? 그녀가 말하지 않는다 해서 기타 사람들도 말하지 않을 것 같은가? 결점, 잘못은 좋지 않은 물건인데 그녀가 제출했으니 마침 나를 도와 그것을 버리는 것이 아닌가? 나에게 체면을 세워주고 자존심을 증강해 주는 게 아닌가?

2. 물론 어떤 때 그녀가 하는 말이 사실에 부합되지 않거나 견해가 옳지 않아 자신을 억울하게 만들었다고 불복하며 심지어 화를 내기도 한다. 물론 사실에 부합되지 않는 데 대해 선의적으로 해석해도 된다. 그러나 실로 해석할 수 없다 해도 다투지 말아야 한다. 정말 억울함을 당했다 해도 빚을 갚은 셈으로 칠 수 있다. 남의 의견을 일종의 엄격히 요구하는 지도편달로 여기면 이후 더 잘 할 수 있다. 어떤 땐 그녀가 나에게 일하지 않는다고 말할 때면 나는 내가 한 일을 하나하나씩 세어가며 그녀에게 들려준다. 이후에 나는 생각해 보았다. 내가 일을 하는 것은 자신의 사전 대원에 미안하지 않고 자신의 양심에 부끄럽지 않기 위해서 한 것이 아닌가? 그래 누구에게 보여 주기 위해서였단 말인가? 왜 남이 알아야 하는가?

3. 물론 가끔 어떤 사람의 말은 좀 선하지 못하고 심지어 인신공격하기도 한다. 이때면 더욱 참음을 해내야 한다. 만약 악을 악으로 다스리려 한다면 서로가 모두 피해를 볼 것이며 구세력만 기뻐할 것이다. 왜냐하면, 악은 남의 악을 불러오고 선은 남의 선을 끌어낼 수 있기 때문이다. 그러므로 선은 악을 화해할 수 있다.

예를 든다면, 어떤 때 사람들 앞에서 큰 소리로 책망을 듣게 되는데 나는 아무 소리도 하지 않는다. 마치 자신이 나약한 것 같고 치욕을 당한 것 같으며 남에게 업신여김을 당하는 것 같다. 하지만 실제, 최대의 선의적인 참음을 유지하는 것은 일종 강대한 에너지로서 모든 사람을 감동을 줄 것인즉, 남에게 업신여김을 당하지 않을 뿐만 아니라 반대로 모두에게 탄복을 받게 될 것이다. 나는 법 공부 팀에서 몇 번이나 큰 책망을 들은 적이 있는데 나는 조금도 마음을 움직이지 않았고 말도 하지 않았다. 괴로워하는 표정마저도 없었다. 상대방은 말을 마치자 즉시 실언한 줄 깨닫고 얼굴에 미안한 빛을 나타냈다. 아울러 기타 형식으로 나에게 간접적으로 사과를 표시했다.

우리 사이의 모순은 정의 교란에서 온 것이다. 함께 살면서 처음에는 그래도 서로 손님처럼 존경하고 양보했다. 그러나 시간이 길어지자 한 집 식구 같았고 혈육의 정이 생긴 것 같았다. 익숙해지자 말씨도 더는 그렇게 엄숙하지 않았고 함부로 했으며 수구도 좀 하지 않게 되어 조금만 주의하지 않으면 상대방을 다치게 하고 상대방에 미움을 사게 됐다. 정이란 이기적인 것으로서 얻으려고만 하고 잃으려 하지 않으며 얻고도 또 더 얻으려 한다. 정에 대한 집착은 각종 마음이 생기게 하고, 모순이 생기게 한다. 그러므로 세인도 모두 “친구를 사귐에 물처럼 담담히 하라.”고 했다. 수련인으로서 이 정을 더욱 담담히 보아야 하고 이 정에서 뛰쳐나와야 한다.

이런 것을 깨달은 후 그녀의 비평에 대해 나는 될수록 말하지 않았고 먼저 일을 내려놓은 다음에 다시 말했다. 이렇게 하니 그녀가 나를 비평할 때엔 더는 크게 떠들지 않고 어투도 조용해졌으며, 세 가지 일도 합작할 수 있었다. 나도 다만 법 공부를 많이 하고 자신을 많이 찾아볼 것을 건의할 뿐이었고. 쌍방이 모두 법에 있고 아주 성실할 때를 기다려 다시 말하곤 했다. 이 일은 아직 마무리 지지 못했고 나는 아직도 진일보로 되는 깨달음 중에 있다. 하지만 나 자신이 아마 아직도 완전히 닦아 버리지 못해서인지 모순은 여전히 지속하고 있으며, 내가 좀 닦아버렸기에 모순의 정도에도 변화가 있다.

사부님은 말씀하셨다. “만약 이 정을 끊어버리지 못하면 당신은 수련하지 못한다. 사람이 이 정에서 뛰쳐나왔다면 누구도 당신을 움직이지 못하며, 세인의 마음은 당신을 움직이지 못하는데, 그것을 대체하는 것은 자비이며, 더욱 고상한 것이다.” (전법륜)

천만번 지당한 말씀이다. 자신도 다 자연히 하니까 비로소 수련해 나갈 수 있었던 것이며 외적인 환경도 따라서 상응한 변화가 발생했다.

문장발표: 2012년 3월 8일
문장분류: 수련마당
원문위치: http://www.minghui.org/mh/articles/2012/3/8/253909.html